[밍후이왕][밍후이 기자 룽파(容法) 벨기에 취재 보도] 현재 벨기에로 이주한 우한(武汉) 파룬궁 수련생 추이샤(翠霞)는 1999년 7월 20일 중국공산당(중공)의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한 탄압 시작 단계를 몸소 경험했다. 그는 베이징에 가서 파룬궁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고 톈안먼(天安門)광장에서 현수막을 펼쳐 사부님의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이유로 우한 경찰에 체포되고, 가택 수색을 당했다. 그녀는 베이징 경찰에 의해 감금되어 폭행을 당하여 온몸에 상처를 입었어도 타협하지 않았고, 오히려 수련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했다.
파룬궁을 수련해 몸과 마음이 즐겁다
1993년 3월, 추이샤는 친구의 소개로 남편, 딸과 함께 우한에서 파룬궁 수련을 시작했다. 수련 후, 그녀는 사람은 어디에서 왔고, 생명의 의의는 반본귀진(返本歸真)으로서 반본귀진하려면 더욱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때부터 그녀는 모든 일마다 대법에 따라 자신에게 요구했다. 법공부와 연공을 통해 짧은 시간에 20여 년간 앓던 심한 위경련과 습관성 120차례 심계항진(心動過速) 및 경추 골질증식 등 질병들이 어느새 다 사라졌다. 당시 주변 수련생들에게도 이런 변화가 많이 일어났으며, 항상 몸에 병이 없어졌을 때의 기쁜 심정을 서로 나누었다고 추이샤는 말했다.
추이샤는 수련 초기, 날마다 마음으로 단체 법공부와 연공에 참가하는 일만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99년 초, 우한 지역에서는 법공부 붐이 일었다. 그때 그들은 주 7일에 법공부장마다 1~20명씩 모여 법공부를 했고, 모두 오면 돌아가며 법을 낭독했다. “우리 집 거실이 커서 자연스럽게 우리 동네 또 하나의 법공부장이 되었어요. 우리는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보고 ‘전법륜’을 읽었는데, 다들 출근 시간이 달라 매일 3개 시간대에 우리 집으로 법공부하러 참석했어요.”
후베이(湖北)성에 정부의 상황을 반영하여 붙잡히고 가택 수색을 당하다
99년 7월 20일 후, 중공은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중공은 전국의 텔레비전, 방송국, 여러 매체를 이용해 파룬궁과 대법 사부님을 모독, 비방하고 죄를 뒤집어씌웠다. 전국의 각급 조직, 기업과 학교 등 공공사업체에서는 사람마다 태도를 표시하게 하며 파룬궁 수련생들을 적대시하는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중공은 파룬궁 수련생들에 대해 ‘명예 실추, 경제적 절단, 육체 소멸’의 정책을 펴는데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다. 그들은 1억여 명 인민이 파룬궁을 배운 후 몸과 마음이 건강해지고 더욱 좋은 사람이 되려 한 사실을 무시했다.
99년 7월 19일, 예전과 같이 추이샤와 남편은 아침 5시 반에 우한 중산공원 연공장으로 나갔다. 그들은 지역 보도원이 새벽에 경찰에 의해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련생들 일부는 베이징에 가고 일부는 성 정부에 가서 상황을 반영하자고 토론했다. 사실 중공이 이때부터 공개적으로 파룬궁을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오전 10시경, 우리는 후베이성에 도착하여 정부의 상황을 반영하러 갔습니다. 주위에 크고 작은 인도에는 성 전체 각지에서 온 파룬궁 수련생들로 가득 차 있었어요. 우리를 맞이하러 나오는 관리가 없었는데 모두 조용히 제자리에서 기다렸어요. 오후 5시, 수련생들은 중무장한 경찰에 의해 버스에 실려 여러 곳으로 압송되었어요.”라고 추이샤는 회상하며 말했다.
추이샤는 그녀와 천여 명 파룬궁 수련생들이 성 방송통신대학 대강당으로 압송되어갔다고 말했다. 경찰은 매 사람의 이름, 주소, 정치적 면모, 직장, 파룬궁 수련을 시작한 시기, 정부에 왜 와서 기다렸는지 등의 내용을 포함하여 기록했고, 7월 20일 새벽에서야 보내주었다고 말했다.
그날 경찰은 추이샤의 집을 덮쳐 대법 서적과 방석 등 물건들을 몰수해 갔다. 우한 공안 1처의 경찰과 지역 파출소 경찰 뤄융(羅勇)이 두 차례 추이샤를 잡아가 심문했고, 그녀에게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지만, 그녀는 거부했다. 매번 경찰이 그녀를 데려갈 때마다 다음날 새벽에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 후 그녀가 장을 보러 나서기만 하면 이웃 ○○가 뒤따르며 감시했다. 아래층에 사는 노인이 파출소에서 그녀가 외출하는 시간, 갖고 다니는 물품 등 보고를 요구했다고 했다. 노인은 경찰에게 알려주지 않겠다고 하며 추이샤 스스로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톈안먼광장에서 현수막을 펼쳐 잡혀가 구타를 당하다
이 같은 불공평한 상황에서 2000년 12월 30일, 추이샤는 다른 파룬궁 수련생들과 함께 톈안먼에 가서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을 실증하는 것은 제자로서 사부님을 위해 바른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경찰의 단속을 피하려고 그들 다섯 명은 장거리 버스를 탔고, 샤오간(孝感) 기차역에서 톈진 열차를 갈아탄 후 다시 택시를 타고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이튿날 새벽이었다.
“톈안먼광장 주변에는 크고 작은 경찰차들이 세워져 있었고, 경찰차 몇 대가 광장을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광장에는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이 많았고, 경찰과 사복경찰들이 거닐고 있었어요. 이렇게 큰 광장에서 시시각각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함성이 들렸고, 이에 경찰과 붉은 완장을 찬 사람들과 사복경찰이 벌떼처럼 모여들어 대법제자를 땅에 때려눕히는 소동이 여기저기서 일어났어요. 당시 우리는 조금도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었고, 대법제자들이 법을 실증하는 행렬에 용해됐습니다. 우리 세 사람은 각자 소매 속에 감추었던 ‘파룬따파하오 현수막을 펼쳐 들고 ‘파룬따파하오’를 외치면서 많은 사람이 우리의 소리를 듣기를 희망했습니다. 일순간에, 경찰과 경찰차들이 우리를 에워쌌어요.”라고 추이샤는 말했다.
뒤이어 경찰차는 그들을 톈안먼 파출소로 압송해갔다. 마당에는 이미 각 지역 대법제자 2백여 명이 감금되어 있었다. 그들은 함께 사부님의 ‘논어’와 경문을 외웠다. 그곳에는 물도 음식도 전혀 없었다. 오후 5시, 그들은 또 빈틈없이 가려진 경찰차에 실려 여러 곳으로 이송되었다. 40여 명이 베이징 둥청(東城)구 간수소로 압송되어서 갔고, 그곳에는 많은 수련생이 수감되어 있었다. 추이샤 그들이 도착한 후의 첫 관문은 어느 방에 들어가 자신의 이름, 주소를 회답하는 것이었는데, 경찰이 이름 주소를 대지 않는 수련생을 마구 구타하는 것을 보았다. 추이샤는 당시 한 수련생이 구타로 얼굴이 심하게 부어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고 나서 그들은 각기 다른 구치소에 갇혔고 그들은 함께 법을 외웠다. “대법제자들이 함께 법을 외우는 소리가 건물 전체를 진감 하는 것을 느꼈고, 극악무도한 경찰은 매 감방에서 그들이 앞장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하나씩 끌어냈어요. 경찰은 저의 머리채를 잡고 감방 통로로 끌어냈고, 저는 허리를 굽힐 수밖에 없어 머리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통로를 지나 층에서 큰 홀로 끌려갔는데, 다른 감방에서는 볼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제 머리채를 잡았던 사악한 경찰이 제 머리를 힘껏 아래로 내던지는 동시에 경찰 몇 명이 달려들어 몽둥이를 휘둘러 마구 구타했습니다. 저는 당시 머릿속에서 오로지 사부님의 경문 ‘진성을 보다’를 반복해서 외웠습니다. ‘대법을 굳게 수련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나니 층차를 제고함이 근본이로다. 고험 앞에서 진성을 보나니 공성원만하여 불도신이 되는도다’(정진요지2). 몸과 마음을 다해 법을 외우다 보니 고통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경찰은 저처럼 구타를 당한 여자수련생 여덟 명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독방에 가두었어요. 당시 저는 자신의 머리 형상을 보지 못했는데, 수련생이 저에게 그녀의 머리를 만져보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녀의 두피가 스펀지처럼 말랑말랑하게 만져졌어요. 밤에 우리 여덟 명은 발을 맞대고 둥그렇게 누웠고, 한 수련생이 겉옷을 벗어 여러 사람의 발을 덮어 주었어요.”
8일 후, 추이샤는 베이징의 다른 파출소로 이송되었다. 파출소 사무실에서 경찰은 또 그녀에게 이름과 주소를 물었고, 추이샤는 여전히 대법제자라고 대답했는데, 당시 수련생들은 모두 이렇게 대답했다. 추이샤는 말했다. “사무실에 경찰 서너 명이 있었습니다. 한 20여 세의 경찰이 제가 이름을 대지 않자 제가 전혀 준비되지 않는 상황에서 갑자기 어떤 단단한 물건으로 저의 눈을 연거푸 때렸고, 당시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그런 후에 다른 경찰이 다가오는 것을 들었고, 그가 제 팔을 몸 뒤로 치켜들어 벽에 붙였는데 이때 저의 머리는 다리 사이까지 드리워졌습니다. 경찰은 몽둥이를 제등부위를 찍으며 어느 부위를 때리면 불구가 되게 할 수 있다고 위협하며 말했습니다. 이때 갑자기 제 눈앞이 환해지면서 다시 볼 수 있었습니다.”
“구타하고 나서 저는 땅바닥에 내려져 앉았고, 한 경찰이 물을 가져와 끼얹으라고 했어요. 당시 1월의 베이징은 몹시 추워 저는 솜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들은 제 옷깃 속에 찬물을 부었고, 그들은 물 대는 것이 귀찮아서 물병 두 개를 제 옷깃에 꽂아 물이 제 옷을 전부 적셨는데도 여전히 바닥에 흐르고 있었어요. 그들은 또 비웃으며 너희 대법제자는 아무 데서나 소변을 본다고 저를 모욕했습니다. 후에 한 경찰이 거짓 친절로 저를 다른 방으로 안내했고, 동정의 말을 하며, 열차표를 사서 집에 돌려보내 주겠다고 저를 속이려 했어요. 제가 우한에서 왔다고 하자 그는 곧 가버렸어요.” 이렇게 해서 그날 저녁 베이징 주재 우한사무실에서 사람이 찾아와 추이샤를 베이징사무실로 데려갔다. 베이징에서 젖은 옷을 갈아입을 때, 그녀는 자신의 온몸이 성한 곳 없이 검붉게 멍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고향에 송환되어 세뇌반에서 박해를 받고 핍박으로 고향을 떠나다
베이징 주재 사무실에서 추이샤는 남편도 마찬가지로 잡힌 것을 보았다. 2001년 1월 10일, 부부는 수갑을 찬 채로 우한으로 압송되었다. 그녀는 우한 여자 제일간 수소에 감금되었다. 한 달 후 전향하지 않자 파출소에서 직접 차를 보내 그녀를 세뇌반에 감금시켰다. 세뇌반 에서의 두 달 동안 파룬궁을 모함하는 거짓 동영상을 억지로 보게 했고,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4월쯤 중공의 양회(两会—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정치협상 회의)가 끝난 뒤에야 그녀는 세뇌반에서 석방되었다. 이렇게 그녀는 우한의 구치소와 세뇌반에 3개월 넘게 감금되어 있었다. 동네 파출소에서 계속 감시하고 소란을 피울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추이샤 부부는 이리저리 숨어다니다가 우여곡절 끝에 2007년 딸의 일가족을 따라 벨기에로 왔다. 이때부터 해외에서 자유롭게 수련하고 반박해 활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우리는 중공의 강압적인 박해에 굴복하지 않고 대법제자의 바른 믿음을 견지하며, 파룬따파 수련의 길에서 안정적으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 역사를 회상하며 추이샤는 깊이 감명을 받았다.
벨기에에서 추이샤는 다른 파룬궁 수련생들과 함께 여러 도시에서 활동을 개최하고, 중공의 파룬궁 박해 범죄 행위를 폭로하여 사람들이 파룬궁이 무엇인지, 파룬궁이 왜 국민에게 백 가지 이로운 점은 있어도 한 가지 해로운 점은 없다고 하는지, 중공이 왜 파룬궁을 박해하는지, 어떻게 중공의 박해를 저지시킬 것인지 알기를 바랐다. 이러한 바램은 그해 그녀와 무수한 파룬궁 수련생들이 성 정부와 톈안먼에 가서 현수막을 펼칠 때처럼 22년간 변함이 없다.
22년이 흘렀지만, 그해 파룬궁 수련생들이 톈안먼에서 외치던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소리는 지금도 여전히 머릿속에 메아리치며, 사람들이 ‘세계가 진선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추이샤의 염원을 완성하도록 격려해주고 있다.
원문발표: 2021년 7월 20일
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7/20/4283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