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수련이 반항 소녀를 개변시키다
글/ 호주 청년 파룬궁 수련생
[밍후이왕] 나는 10살 때 어머니와 함께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한때 공부도 못하고 반항적이며 사람들이 가까이 지내길 꺼리던 아이였던 나는, 마음이 밝고 성적이 우수한 학생으로 됐다. 또한, 대법 덕분에 우리 가족은 화목함과 따뜻함을 진정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1999년 7월 20일에 시작된 중공(중국 공산당)의 대법에 대한 박해로 인해 무너졌다. 11세였던 나는, 박해 초기 수련생들의 반박해 활동의 감동적인 과정에 직접 참여했고 목격했다.
어머니가 불법 노동 교양을 받게 된 후 나는 잠시 대법을 떠났다. 그러나 삶의 의미에 대한 내적인 의심이 나를 기적적으로 대법으로 돌아오게 했다. 2년 전 나는 기연으로 해외에 왔고, 다양한 방법으로 중국인과 해외 여러 민족 사람들에게 파룬궁의 진실을 전했다. 반박해 22주년이 다가오는데, 당시의 경험을 떠올리면 마치 어제 일처럼 느껴진다.
어릴 적 대법을 수련한 후의 신기한 변화
나는 외롭고 반항적이며 열등감이 많은 아이였다. 두 살 때 부모님이 가정 폭력으로 이혼하셨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국에서는 부모의 이혼이 매우 드물었고, 나는 곧 동네의 화젯거리가 됐다. 어느 골목에 가도 나이 드신 분이 나를 가리키며 모모의 자식이고 부모가 이혼했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매번 나는 급하게 도망쳤고, 마음의 상처를 크게 입었다. 나는 열등감이 심해졌으며, 심지어 꿈에서까지 몇 번이나 이런 난처한 광경을 만나곤 했다.
중국에서 아이가 있는 미혼모는 복지 혜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여론의 압력에 시달리기도 한다. 아버지는 술을 지나치게 마셔 생활비도 대주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집도 월세를 내야 했고 생활이 매우 가난했다.
당시 어머니와 나는 모두 건강이 좋지 않았다. 어머니는 심각한 관상동맥 심장 질환과 대동맥염이 있으며 몸에 힘이 없었다. 나는 감기에 자주 걸리고 몸이 아파 어린 나이에 폐렴, 위염, 간염을 모두 앓은 적이 있다. 또 이상한 병이 있었는데, 목이 붓고 아프며 침을 삼켜도 몹시 아팠는데 병원에 가봐도 어떤 원인인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5살 때 계부를 찾아주셨다. 계부에 대한 내면의 저항으로 인해 어머니와의 관계는 팽팽해졌다. 당시 계부와 어머니의 말다툼은 대부분 나의 교육 문제였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부모의 훈계를 듣지 않았고 고집이 날로 세졌다. 매를 맞아도 양보하지 않았는데, 밥을 굶는 것으로 어머니에게 타협을 강요하는 일이 많았다. 학교 선생님도 내가 늘 끝에서 2등 하는 것을 보고 나를 무시했다. 또한 장난꾸러기여서 항상 옷이 더러웠고, 반 친구들은 나와 놀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른들은, 어렸을 때 부모님 말씀을 안 들으면 커서 감옥에 간다고 하는 말을 종종 하므로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이렇듯 관심받지 못한 채, 칭찬이나 격려해주는 사람도 없는 매우 부정적인 환경에서 자랐다.
1998년 봄, 어머니가 파룬궁(法輪功)을 배우기 시작하는 걸 보고 나도 따라 배우려 했다. 파룬궁을 배우기로 한 대부분 사람과는 달리, 당시 나에게는 파룬궁을 배우라고 권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나는 목적 없이 파룬궁을 배웠다. 그저 아이의 천진난만한 천성으로 이것이 좋은 공법이라고 직감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눈으로 볼 때, 파룬궁 수련생들은 얼굴이 선해 보였고 자주 미소를 지었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각자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는 그런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어머니를 따라 광장에 가서 다른 수련생들과 함께 새벽 연공을 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에는 다 같이 ‘전법륜(轉法輪)’을 읽고 30분 동안 5장 공법을 연공했다. 단순하고 평범한 일을 하는 것 같았지만, 이로 인해 내 삶은 크게 달라졌다.
어느덧 3학년이 됐고, 나는 성적이 꼴찌에서 좋은 학생으로 변했다. 학우들과도 사이좋게 지냈다. 이제는 나 자신을 예전처럼 중심에 두지 않았다. ‘전법륜’을 공부하면서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알게 돼 나는 계부를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어머니와 나는 모두 건강해져 더는 약을 먹지 않았다. 때때로 계부도 우리와 함께 ‘전법륜’을 읽었다. 나는 가정의 따뜻함을 느꼈으며 온 가족이 매우 행복하고 화목했다. 각계각층의 파룬궁 수련생들은 모두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으며 각계각층의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탄복을 받았다. 이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내가 목격한 99년 7·20
1999년 수련생 만 명이 베이징에서 청원을 제기한 ‘4·25’ 사건 이후, 대법을 모독하는 기사가 신문에 수시로 게재됐다. 수련생들은 파룬궁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정부와 청원 부서에 가서 자신들이 대법을 수련한 후 겪은 진실한 변화를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1999년 7월 19일, 어머니와 나, 그리고 이모는 파룬궁 수련을 통해 얻은 진실한 변화에 대해 지도자들에게 알리기 위해 성도로 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거의 황혼 무렵이었다. 지도자들이 이미 퇴근했기에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오기로 했다. 성(省) 지도자 청사 앞에는 다른 곳에서 온 파룬궁 수련생들이 점점 더 많이 모여들었다.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은 파룬궁을 수련한 후 일어난 실제 변화에 대해 지도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했다.
해가 질 무렵, 우리는 광장으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누군가 “하늘에 파룬(法輪)이 있다!”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위를 올려다보니 큰 파룬 하나가 우리 머리 위에서 돌고 있는 게 보였다. 모두가 손뼉을 쳤고, 몇 분 후에 파룬은 사라지고 하늘이 붉은 구름으로 꽉 찼다. 우리 모든 수련생은 그것이 자비로우신 사부님께서 보여주신 기적이며, 제자들에 대한 축복과 격려로 알았다.
여비가 넉넉지 않았기에, 다른 곳에서 온 많은 파룬궁 수련생은 값이 제일 싼 빵을 먹었다. 어머니와 나는 다른 곳에서 온 많은 수련생과 함께 길거리에서 노숙했다. 나는 빨리 날이 밝기를 바랐고, 지도자에게 진상 알리기를 고대했다.
새벽에 광장에서 파룬따파의 연공 음악이 울려 퍼지자 모두가 기뻐하며 달려가서 연공을 했다. 10분도 채 되지 않아 버스 여러 대가 우리를 둘러쌌다. 총으로 무장한 진압경찰 40여 명이 차에서 내려 우리를 포위하며 “머리 잡고 쪼그리고 앉아! 움직이지 마!”라고 소리쳤다.
평화롭게 새벽 연공을 하는 우리에게 경찰이 총구를 겨누고 있는 것을 보고,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무지 알 수 없었고 당황스러웠다. ‘경찰이 왜 우리를 쏘려 할까?’고 생각했다. 그런 다음 몇 대의 버스가 더 와서 우리를 차에 태우고 작은 학교로 갔다. 학교는 여름 방학이었기에 파룬궁 수련생들은 모두 이곳으로 끌려왔다. 먼저 큰 강당에 있었는데, 공안국장 같은 사람이 연단에 앉아 종이를 들고 대법과 사부님을 비방하는 온갖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이때 누군가 일어서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라고 외쳤다. 나는 키도 작고 뒷줄에 앉았기에 누가 외쳤는지 찾아내기도 전에, 앞의 수련생들이 하나둘씩 일어서서 엄숙하고 단호하게 “때리면 안 돼!”라고 말하는 걸 보았다.
그때 또 한 경찰이 할아버지 수련생에게 “당신은 오래된 당원입니다. 모범 역할을 하며 파룬궁과 결별해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할아버지는 “그럼 나는 공산당을 탈퇴하겠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정오가 되자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다. 경찰은 우리에게 줄을 서서 운동장에서 벌을 받으라고 했다. 11세인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땀이 내 얼굴에 흘러내렸다. 경찰관이 한 수련생에게 가서 잠시 비아냥거리고, 또 다른 수련생에게 가서 비아냥거렸다. 그는 어떤 마른 남자 수련생에게 “너는 가난해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할 형편에 파룬궁을 수련하냐?”라고 말했다. 체벌이 끝나자 많은 수련생이 이 남자 수련생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다. 나도 값싼 빵을 하나 건네주었다. 그때 남자 수련생이 날 바라보던 눈빛, 그런 바른 신념을 가진 자의 두려움 없고 마음에 원망도 없는, 감사와 자비가 충만하던 그 의로운 눈빛이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밤이 되니 많은 교실에서 경찰들이 우리에게 단독으로 심문 기록을 했다. 중년 여경 한 명이 내게 많은 질문을 했고, 나는 모두 사실대로 대답했다. 마침내 그녀는 우리 사이의 대화를 한번 읽고 서명을 요구했다. 지문을 누르고 서명을 하자 여경은 나를 난처한 듯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다, 너는 너무 어리니 이 기록은 없는 거로 해야겠다.” 나는 왜 나의 진실한 말들을 없는 거로 하려는 걸까 이상하게 생각했고 그 이유가 궁금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기록에 서명한 수련생들은 모두 중공의 주요 박해 대상으로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중년 여경이 그 순간 착한 마음을 낸 덕분에 나는 블랙리스트에 올라가지 않았다.
그날 밤 지역 파출소는 여러 곳에서 모인 수련생들을 각자의 지역으로 밤새 이송했다. 당시 어머니는 7일 동안 구금됐다.
삶의 의미를 찾다
중공이 파룬궁 수련생들을 박해해 온 지난 22년 동안, 모든 수련생과 가족들은 슬픈 사연을 하나씩 갖고 있다.
내가 중학생일 때, 어머니는 2년 동안 여자노동수용소에 수감됐다. 집에 있던 모든 대법 책은 경찰에게 빼앗겼다. 나는 아주 외딴 시골에 살고 있었는데, 주변에 파룬궁 수련생이 없었고 파룬따파에 대한 어떤 진상 자료도 볼 수 없었다. 우리 가족과 선생님들은 계속 나에게 세뇌를 시켰다. 학교에서는 무신론과 진화론을 가르쳤고, 정치 수업 시간에는 투쟁 철학을 가르쳤다. 중학교 2학년 때, 풀리지 않는 문제가 많아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고 믿음 없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런데 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세상에 진리가 없고, 모든 일에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기준이 없음을 차츰 깨닫게 됐다. 제도와 법률이 꼭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규제하는 것도 아니다.
나는 너무 우울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람들은 왜 사는가? 사람이 생명을 소중히 여겨야 함을 알지만, 인생의 올바른 목표는 무엇인가? 사람들은 명성을 위해 사는가? 혹은 이익을 위해서? 세상의 영광과 재물은 수십 년 지나 죽을 때가 되면 가져갈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사람은 왜 태어날까? 이 세상에 영원불변의 진리가 과연 없을까? 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매일 생각했지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심각한 비염, 코 막힘에 걸렸다. 매일 밤 입으로 숨 쉬어야 했다. 폐가 좋지 않아 자주 기침했고, 목구멍이 아프고 귀가 가려웠다. 머리와 목뼈가 아팠으며, 위가 아파 찬 것을 먹지 못했다. 치질, 무좀이 있었고 눈도 자주 염증이 나서 붓고 충혈됐다. 하지만 병의 고통이나 약을 먹고 바르는 고통은 내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사람이 왜 살고 있는지 모른다는 거였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전법륜’을 읽고 싶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흘러 나는 책의 내용을 완전히 잊어버렸다. 이 생각은 당시 상황에서는 그저 헛된 망상이었으므로, 나는 ‘전법륜’을 읽고 싶다는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대법 책이 바로 나에게 왔다. 3~4년이 지나 ‘전법륜’을 다시 읽으니, 마치 길 잃은 아이가 마침내 집을 찾은 것만 같았다. 법을 읽는 과정에서 사부님께서 나의 모든 의문과 마음의 매듭을 풀어주셨다. 삶의 근원과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에 대한 해답을 모두 ‘전법륜’에서 찾았다. 나의 마음은 한없이 설레었다. 나는 더욱 열심히 생활하고 공부했다.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것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진선인(真·善·忍)이라는 걸 알았다. ‘전법륜’을 공부하면서 나는 또 ‘공산당에 대한 9가지 평론(九評共產黨)’을 읽었다. 나는 중국 공산당의 본질과 파룬궁 박해에 대한 진실을 알았다. 마음속 의문이 하나둘 풀리는 순간, 진선인에 따라 나 자신이 변화됐고, 내 몸은 1~2주도 안 돼서 다시 병이 없고 가벼운 상태로 돌아왔다.
나는 파룬따파와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을 굳게 믿으며 마음은 한없이 평화롭고 고요하다. 나는 가장 좋은 마음 상태로 일과 삶의 비상사태를 처리하고, 높은 수준으로 작업을 완수하며 감독 없이 스스로 일을 잘 마무리한다. 내가 수련인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승화시키자, 가족과 친구들도 선(善)의 힘을 굳게 믿으며, 말과 행동을 자제하고 세상의 흐름대로 멋대로 흘러가지 않게 됐다.
나는 자라서 고향에서 유명한 수학 선생님이 됐다. 사립학교든 공립학교든, 선생님들은 모두 나를 특히 알아봐 주셨다. 반의 학생들에게 추천해주셨고, 자신의 자녀도 내게 보내서 배우게 했다. 많은 학부모는, 아이들이 나에게 수학을 배운 후 성적이 급상승했을 뿐만 아니라 아이가 겸손하고 예의 발라졌다면서, 정말 어떤 선생이 있으면 어떤 제자가 있다고 말했다. 내가 모두에게 존경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건 바로 내가 대법 수련생이기 때문이다.
해외에 와서, 중국 민중에게 전화 거는 등의 방법을 통해서 중공의 거짓말에 중독된 소중한 중국인들을 돕는 것 외에, 나는 또 주말을 이용해 차이나타운에서 진상을 전했다. 젊은 사람으로서 거기에 서려면 커다란 심리적 장벽을 극복해야 했다. 젊은 사람은 항상 체면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행인이 자료를 받지 않거나 나쁜 말을 하면 창피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거짓에 눈이 먼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맺는말
22년 동안의 비바람 속에서, 내가 아는 수련생 중에는 여러 번 구금돼 고문당한 사람도 있고, 감옥에서 노예 노동으로 괴롭힘당한 사람도 있으며, 박해받아 사망한 사람도 있다. 나 역시 집안이 망하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대법 수련자로서, 우리는 마음에 원한이 없다. 왜냐하면 바른 신념을 박해하는 것은 틀림없이 악(惡)이기 때문이다. 파룬궁 수련생들은 가장 평화로운 방법으로 박해에 대한 진실을 알린다. 그 이유는, 소중한 중국인들에게 진실을 알게 하고, 그들이 악한 정권을 멀리하고 스스로 더 나은 미래를 선택하게 하기 위함이다. 파룬궁 수련생은 정치적 요구가 없다. 악이 거짓 선전으로 대법 수련생과 대법 사부님을 모독할 때, 파룬궁 수련생들은 거짓에 속아 넘어간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려서 일깨울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빨리 진상을 찾고 악당에 속지 않기를 바란다. 사악의 박해는 결국 실패할 것이고, 진실이 밝혀질 때 선량한 사람들이 모두 평안하기를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7월 1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1/7/16/42805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