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국 텍사스주 대법제자 점명(漸明)
[밍후이왕] 미국에 온 몇 년 동안 줄곧 중국 음식점에서 음식을 배달하면서 수입은 주로 고객의 팁에 의존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고객은 음식값의 10%~20%를 팁으로 줍니다. 그러나 고객이 준 팁이 매우 적거나 심지어 한 푼도 주지 않는 경우를 만납니다. 이때면 불평하면서 자신이 매우 먼 곳에서 차로 배달해주는데 기름값과 시간에 힘도 들고 때로는 비바람에 눈까지 오는데 너무 손해 보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마음이 매우 괴로웠고 이런 고객을 몹시 얄밉다고 생각했습니다.
매번 이런 집착심이 나타날 때, 저도 안으로 찾는 것을 알았지만 늘 이번에 없애면 다음에 또 나와서 언제나 깨끗이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떠한 일이든 모두 수련인의 절실한 이익과 관련되고, 어떠한 일이든 모두 당신 이 사람, 당신의 사상적 정서, 당신의 心性(씬씽), 당신의 사상 중 집착을 건드리게 된다.”[1]
저는 1998년에 대법 수련에 걸어 들어왔습니다. 매일 업무와 생활에서 자주 온갖 사소한 일에 사람의 집착에 이끌려 움직이고 사람의 마음이 일어나며 뒤엉켜 교란받았습니다. 자신을 수련할 줄 몰랐기에 수련한 지 20여 년이 되도록 집착심은 여전히 가득 하였습니다. 수련이 잘 된 일면을 갈라놓거나 닦아 없어진 집착도 많다는 것을 알았지만 늘 닦아 없애지 못하고 다 닦아내지 못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끊임없이 ‘도대체 집착심은 어디에서 오는가?’ 하고 자문해왔습니다.
집착심은 후천적으로 사회에서 장기적으로 형성된 관념이 가져온 것이라고 늘 생각했습니다. 저는 60대가 가까운데, 형성된 각종 관념은 이미 뿌리 깊이 박혀 있을 것입니다. 마음속으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많은 집착은 천천히 없애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련생인 아내와 서로 교류하다가 무의식중에 ‘나(我)’라는 글자를 말했습니다. 이 글자는 ‘손(手)’이 고대 병기 ‘창(戈)’을 들고 있는 구성입니다. 한자는 신전(神傳)문화이며 이 글자를 만들 때, 신께서 이미 사람들에게 ‘나’는 이기적인 것이며 시시각각 자신의 이익을 위해 ‘손’에 ‘창’을 잡고 다른 사람들과 다투고 싸운다는 것을 알려주셨습니다.
그제야 문득 크게 깨달았습니다. 알고 보니 모든 사(私)는 다 ‘나’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나’로 인해 생겨나고 ‘나’로 인해 자랐습니다. ‘나’는 수많은 위사위아(爲私爲我)의 관념을 생겨나게 할 수 있고 층층이 자신을 보호하며 자신이 상처받지 않고 손해 보지 않게 하며 자신을 안일하고 편안하게 지내도록 합니다. 다양한 애착을 형성한 것이 이 이기심을 형성했습니다. 그러므로 일체 집착은 모두 사(私)에서 온 것이며 ‘나’에서 온 것입니다.
이 ‘나’는 마치 그것을 가지고 태어난 천성처럼 그것은 무수한 층의 허울을 쓰고 있었으며 ‘사(私)’를 꽁꽁 싸매고 있어 벗길 수 없었고 다 떼어낼 수 없었습니다. 이 ‘나’는 변화무쌍해서 예측 불가였습니다. 때때로 그것은 남김없이 폭로됐고 자신이 손해를 입지 않고 상처받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 자진해서 출격하고 쟁탈했습니다. 어떤 때에 그것은 오히려 매우 깊이 숨어서 약간의 안일함과 편안함을 위해 가만히 깊은 곳에서 마음을 건드리고 뒤엉키게 만듭니다……
‘나’는 때때로 다양한 마(魔)의 역을 맡아 유혹하고 오도하며 명(名), 리(利), 정(情)에 빠져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하게 합니다. ‘나’는 또 끊임없이 새로운 집착을 낳고 끊임없이 보완하면서 낡은 집착을 대체해 나갈 것입니다.
‘나’는 마치 자신을 묶어두고 승화해 올라가지 못하게 하는 밧줄처럼 자신을 있는 힘껏 아래로 잡아 끌어당깁니다. ‘나’는 한 고급 생명을 고층 공간에서부터 저층 공간으로 잡아 끌어당길 수 있습니다. ‘나’는 지상의 수련인을 필사적으로 꼼짝 못 하게 잡아당겨 그를 고층 공간으로 승화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모든 집착의 뿌리는 바로 이 이기적인 ‘나’에서 나왔습니다. ‘나’는 정말 그야말로 지독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닦아 없애야 할까요?
1. ‘안으로 찾는 것’은 법보(法寶)이다
“진정한 수련은 곧 마음을 닦아야 하고, 안으로 닦아야 하며, 안에서 찾아야 하는데, 밖에서 찾는 것이 없다.”[2], “언짢은 일에 부딪히고, 당신을 화나게 하는 일에 부딪히며, 개인이익과 자아가 자극받았을 때, 당신이 안에서 찾아보고, 자신을 수련하며, 자신의 누락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갈등 속에서 당신이 정말 무고(無辜)하다 해도 ‘오, 알겠다. 내가 틀림없이 무언가 잘못했구나. 설사 정말로 잘못이 없다 해도, 아마 이전에 빚진 업을 갚는 것일 수도 있는데, 나는 그것을 잘해서 갚아야 할 것을 갚겠다.’라고 하면 된다. 끊임없이 이러한 문제에 부딪히고, 끊임없이 이러한 일에 부딪히며, 끊임없이 당신 자신을 수련한다. 만약 수련인이 문제를 이렇게 보고, 바른 이치(正理)로 자신을 수련한다면, 당신들이 속인 중에서 부딪힌 언짢은 일은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3]
이러한 사부님의 설법에서 저는 한 수련인은 언제나 어떤 일에 부딪혀도 마음을 움직이기만 하면 반드시 ‘나’라는 이 사심이 못되게 구는 것이며 사심이 무거울수록 마음이 더 심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깨우쳤습니다. 이때, 즉시 안으로 찾아보고 자신의 사심을 찾아내며 자신의 집착을 찾아내야 합니다. 특히, 다른 사람과 갈등을 빚었을 때, 반드시 “옳은 것은 그이고 잘못된 건 나이니”[4]라고 하신 원칙을 준수하여 자신을 찾고 자신의 심성에서 원인을 찾아서 집착을 없애야 합니다.
배달시킨 고객이 팁을 주지 않은 일을 놓고 말하면 마찬가지로 안으로 찾아야 합니다. 아마 자신이 돈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보아서 고객이 팁을 주지 않는 것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 지심을 제거하는 것일 수 있고, 아마 전생에 상대방에게 나쁘게 대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 거꾸로 자신에게 이렇게 대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2. 일함에 먼저 다른 사람을 고려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연공인(煉功人)에게는 모순이 갑자기 생길 수 있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이 평소 늘 자비로운 마음과 상화(祥和)한 심태를 유지한다면, 문제와 마주쳐도 잘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충적인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늘 자비롭고 선(善)으로 남을 대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여 매번 문제와 마주칠 때마다 이 일을 다른 사람이 감당해 낼 수 있는가 없는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가 안 되는가를 우선 생각한다면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연공(煉功)함에 높은 표준, 더욱 높은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해야 한다.”[2]
저는 수련인에게 자주 집착심이 튀어나온다면 바로 이 이기적인 ‘나’가 못되게 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따라서 집착을 없애는 것은 먼저 이 이기적인 ‘나’를 닦아 없애야 합니다. 그리고 ‘나’를 닦아 없애려면 사부님께서 “무슨 일을 하든지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여”[2]라고 말씀하신 바에 따라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먼저 다른 사람을 고려하며 선타후아(先他後我)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자아가 옅어져 집착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더 높은 경지는 무사무아(無私無我)입니다. “불가에서는 공(空)을 말하고 도가에서는 무(無)를 말한다”[2] 저는 ‘공’과 ‘무’는 바로 이 위사위아한 ‘나’를 철저히 닦아 없애고, “마음에 두지 않으니 세상과 다툴 것 없도다 보아도 보지 못한 듯이 하니 미혹되지 않는도다 들어도 듣지 못한 듯이 하니 그 마음 혼란하지 않도다 먹어도 음미하지 않으니 입의 집착 없도다 하여도 구하지 않으니 늘 도(道) 중에 있도다 고요하되 생각지 않으니 현묘함을 알 수 있도다”[5]를 해낸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자신의 관념 속에 ‘나’가 전혀 없고 자신의 마음이 마치 빈 것처럼 무슨 일이라도 모두 마음에 두지 않으며 무슨 일이든 다 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고 무슨 일에 부딪혀도 모두 싱글벙글하면서 ‘무사무아’의 상태에 도달하게 합니다.
사실 후천적인 ‘나’는 결코 진정한 자신이 아닙니다. 수련인으로서는 완전히 대법에 동화하고 위타(爲他: 타인을 위함) 하는 생명입니다. 우리가 정법(正法)에서 사부님에 의해 정법시기 대법제자로 확립됐을 때, 사부님께서는 우리의 근본 생명을 다시 만드셨습니다. 우리의 진아(眞我)는 완전히 신우주의 ‘진선인(真·善·忍)’으로 구성되고 남을 위하는,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원용하고 대법을 원용하는 생명입니다. 이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모두 낡은(舊) 요소이고 가짜 나이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닦아 없애야 합니다.
자아에 집착하면 미래로 진입할 수 없습니다. 사실 우리의 일체는 모두 완전히 새롭지만 때때로 여전히 자신에게 존재하는 닦아 없애지 못한 낡은 요소와 후천적인 가짜 나에 의해 좌우지 됩니다. 오직 정법시기 대법제자의 진아가 모두 완전히 새로운 생명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낡은 거짓 자아에 집착하는 이런 사유를 비로소 점차 닦아 없앨 수 있습니다.
3. 마음을 기울여 법공부를 하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반드시 법 공부를 잘해야 하며, 그것은 당신들이 귀위(歸位)하는 근본적인 보장이다. (뭇 제자 박수) 그것은 사부가 마음 내키는 대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다. 사부가 당신들에게 말해 주는 것은 우주의 법이다. 방금 한 말은 바로 여러분에게 알려주고자 함인데, 절대 수련을 느슨히 하지 말고, 절대 법 공부를 느슨히 하지 말며, 반드시 참답고 참답게 해야 한다. 이전에 잘 배우지 못했다면, 오늘 사부가 또 한 번 당신에게 말해 주었으니, 당신이 돌아간 후 반드시 참답고 참답게 책을 보고 수련해야 하며, 사상이 다른 데 가 있어서는 안 된다. (뭇 제자 박수)”[3]
저는 수련인이 매일 모두 반드시 법공부 해야 하고 참답게 법공부를 하면 이 위사위아하는 ‘나’를 양파껍질 까듯 한 층씩 벗겨버릴 수 있고, 집착의 뿌리를 곧 따라서 차츰차츰 뽑아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깨달음으로 적절하지 않은 곳은 수련생 여러분들께서 비평하여 주시고 바로 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2004년 뉴욕국제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지설법11-대법제자는 반드시 법 공부를 해야 한다’
[4]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3-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誰是誰非)’
[5]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도 중에서(道中)’
원문발표: 2021년 7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7/22/4285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