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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제자는 예언에 흥미가 있어선 안 된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이번 박해가 발생한 이래 최후에 관한 각종 예언이 계속 쏟아져나오고 있다. 천목으로 본 것, 누구누구가 말한 것, 역사상의 것, 현재의 것, 더하자면 셀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중공(중국공산당)이 언제 해체되고 박해가 어느 해에 끝난다고 하는 최후의 크나큰 일에 관해서는 어떤 예언도 맞게 예측할 수가 없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이전에 많은 예언이 최후의 시기에 이르면 모두 정확하지 않으며 중간의 과정은 모두 아주 정확하고, 최후에 이르면 정확하지 않게 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원인은 비록 우리의 우주체계가 비할 바 없이 거대하지만, 내가 말한 수많은 천체의 개념과 무량중생은 모두 이 체계 속에 있으며, 구(舊) 생명이 형성한 세력이 배치한 소위 대법제자를 고험한다는 이 한 차례의 박해와 구체적인 구세력의 생성 원인, 정법의 자체와 구도하려는 중생 등이 모두 이 범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이 거대한 우주는 비록 그가 얼마나 크던지 간에 그는 우주 중에 고립된 채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또 우주 밖의 요소들이 있다. 이러한 요소는 모두 우주가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 하는 근본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요소는 더욱 미시적이다. 일체의 변화는 정법 중에서 이런 거대한 요소들과 관계되었기 때문에 조성된 것이다.”[1]

우리가 진상을 말할 때, 중공이 어느 때 무너지리라고 추측하거나 머지않아 멸망해 없어지리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다만 사람들에게 경고하는 것일 뿐이며 진상을 알려 사람 구하는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그런 예언은 수련 중의 대법제자로 말하면 사실 의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수련 중의 우리에게 꼭 필요한 미혹이며 수련이란 미혹을 깨뜨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부님은 그 해 ‘매화시(梅花詩)’ 후삼단(后三段)을 풀이해주셨는데 소련의 해체, 6·4 학살, 대법홍전(大法洪傳) 등의 정확한 예언은 우리의 신심을 강화해줬다. 이후 20여 년간 미래에 대한 더 많은 잘못된 예언이 나왔는데 이런 것들은 수련인의 사람 마음에 대한 일종의 시험이었다.

사실 우리의 경험은 충분히 교훈을 얻었다. 어느 날 또 하나의 예언을 본다면 당신은 그래도 흥미를 느끼겠는가? 그것에게 이끌릴 것인가? 내 생각에 대법제자는 당연히 예언에 전혀 흥미를 갖지 않아야 맞다고 본다.

당초 수련생들이 중공의 그 총리에게 집착하고, 사당의 회의에 집착하고, 2008년 올림픽에 집착한 나머지 적잖은 손실을 불러왔다. 그때 많은 수련생이 사당 올림픽이 열리지 못한다고 말하며 ‘새 둥지(베이징 올림픽 스타디움)’가 무너지기를 바랐는데 역시 천목으로 본 일부 광경을 믿은 것과 관련 있으며 결과는 2008년 현지의 박해를 가장 심각하게 만들었다. 만약 오늘에 이르러서도 일부 수련생이 이런 것에 집착한다면 구세력이 보고 교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부님께서 2001년 말씀하셨다. “우리 원만을 이루게 되는 사람의 수는, 내가 보건대 너무나 부족하다. 원래, 나의 타산은 최저한도로 5천만이었다. 나는 여태껏 당신들에게 말한 적이 없다. (박수) 지금은 수량이 부족하지만 이미 상당히 많아졌다. 어쨌든,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우리들이 무엇을 듣더라도, 당신들은 모두 환희심이 일지 말아야 하며, 어쩌면 내가 이야기한 이 말 자체가 바로 당신들에게 고험일 수 있다.”[2]

사부님은 2015년에 또 말씀하셨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걸어 나올 수 있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진정으로 대법제자 원만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는가? 사부는 어떤 때에 정말로 매우 낙관적이지 못하다. 정법은 반드시 성공하는데, 이는 틀림없다. 대법제자의 수련원만 이 역시 틀림없다. 그러나 얼마만큼의 사람인가? 나는 지금, 정말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3]

신의 길을 최후까지 가야만 진금(眞金)인 것이다. 대법제자가 원만하는 숫자를 2001년에는 “최저한도로 5천만이었다.”[2]라고 하셨는데 2015년에는 “정말 그다지 낙관적이지 않다.”[3]라고 하셨다. 사부님은 신노수련생 모두 공성원만하기를 바라시지만 대법제자가 자신의 일에 열중하지 않고 이것저것에 집착한다면 결국 원만에 도달하지 못할 것인데 정말 슬픈 일이다.

법의 관점에서 보면 사부님께서는 대근기지인(大根器之人)은 고생 중의 고생을 겪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 중공 사당의 우리에 대한 박해는 일종의 고생 중의 고생이 아닌가? 박해를 질질 끄는 것도 시험이 아닌가? 이러한 세월의 시련은 우리를 원만하게 하는 조건을 제공하는 것이 아닌가? 마땅히 극복하고 일어서야 하지 않는가? 예언을 보면 심성을 제고할 수 있어야 하고 또 사람을 구할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사부님께서 2015년에 말씀하셨다. “과거에 면벽(面壁) 9년, 면벽 한평생을 말했는데, 적막 중에서 고생을 참고 견뎠다. 사원 안에서, 산림 속에서, 속인 사회를 접촉하지 않고 고생을 참고 견뎠는데, 적막하겠는가, 적막하지 않겠는가? 당신들은 그렇지 않지만, 어떤 사람은 도리어 시간이 길다고 싫어한다. 여태껏 역사상 수련에서 아직 그처럼 짧은 것이 없었는데, 스스로를 정진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3]

오늘날 인류는 세세생생 윤회를 거쳐왔기에 살생하지 않은 사람을 찾을 수 없으며 어떤 대법제자는 역사상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만약 일반적인 법문에서라면 목숨을 빚진 것은 목숨으로 갚아야만 수련할 수 있으며 얼마나 되는 생을 전전해야만 수련성취할 수 있는지 모른다. 편문소도에서 수련한다면 더욱 가망이 없다. 하지만 과거에 수련하던 사람들은 이렇게 걸어온 것으로 우주대법을 얻지 못했는데 고생스럽지 않았겠는가? 어렵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대법제자가 금생에 하는 수련은 조금도 길지 않으며 이렇게 짧은 수련은 없다.

그리고 진정으로 수련에 소질이 있는 수련자는 무엇을 예언하거나 다른 사람의 어떤 예언에 집착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신이 예언에 흥미를 느낀다면 사람 마음이 아주 중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몇 년 전 나는 정치적 변화에 집착했는데 조금 좋은 소식을 보면 아주 흥분하며 결말에 집착하는 일부 구체적인 표현을 써내어 모두를 일깨워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알고 있었는데 입으로는 시간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속으론 완전히 내려놓지 못했었다. 지금 나는 완전하게 내려놨다고 느끼는데 각종 미래에 대한 예언을 일반적으로 보지 않는다. 흥미도 집착도 없고 조금도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들은 자신의 제고와 본래 아무런 관계도 없으며 진상을 말하고 삼퇴를 권하는 것이야말로 정도(正道)이고 진정으로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6 – 2004년 부활절 뉴욕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도항 – 워싱턴DC 국제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경문: ‘2015년 미국서부법회 설법’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현재 인식을 대표하므로 수련생들이 서로 교류하여 ‘비학비수(比學比修)’하시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6월 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1/6/2/4264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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