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북미 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제가 수련에 들어선 지 이미 20년이 되었는데,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따라 함께 법공부하고 연공했습니다. 졸업 후 운 좋게 매체에서 일했는데 아래는 저의 1년 남짓의 수련 심득입니다.
1. 사상을 바꿔 구세력의 배치를 부정
작년 3월부터 중공바이러스가 미국을 습격하면서 미국 지방정부도 ‘절반봉쇄’ 정책을 사용하기 시작해 뉴욕은 갑자기 죽음의 도시와 같아서 우리 매체 직원들이 여전히 출근하는 외에 길에서는 사람 모습을 거의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배치된 첫 고험이 다가왔습니다.
‘절반봉쇄’로 회사에서는 직원이 반드시 방송국에 출근하라는 규정을 세우지 않아 재택근무도 가능했지만 저는 집에 있으면 자제력이 매우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어쨌든 회사에 나가 일할 것으로 결정했습니다. 길에 다니는 사람이 드물어지면서 집 없는 실업자들이 더 돌출돼 보였습니다. 평소에 그들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여겼으나 그 한동안은 마치 어디에 가면 그들의 자취가 다 있는 것 같았고 일부는 심지어 행위가 괴이해 저도 모르게 두려웠습니다.
어느 날 아침 출근하는 중에 괴상한 사람이 가는 길을 막아서며 지나가지 못하게 했고 심지어 손에 든 물건을 제게 던졌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버스를 기다릴 때 괴상한 짓을 하는 괴상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하루에 2번이나 이런 일이 발생하니 두려워하는 마음이 최고에 도달해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방송국에도 반드시 출근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는데 집에서 재택근무할까?’ 두려운 심정으로 끊임없는 안으로 찾기를 거친 후 갑자기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아니야! 스스로 집에서 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잖아. 이는 구세력이 나더러 갈수록 느슨해지게 배치한 게 아니겠는가? 방송국에서 여러 사람과 함께 일하고 법공부하며 연공할 수 있는데, 사부님께서 내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느슨해지는 것을 바라시겠는가? 이는 절대로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이 아니다! 구세력이다!’ 전에는 ‘구세력의 배치’에 대해 혼란스러워 어떻게 부정해야 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이번에는 구세력의 배치가 얼마나 세밀하고, 일거일동, 일사일념에까지 미세한지를 갑자기 깨달을 수 있었으며 바르지 않으면 곧 그것들의 배치를 인정하는 것으로 심지어는 그것들의 배치에 따라 가게 됩니다.
또 때마침 사부님의 이런 법을 읽었습니다. “당신들이 어려움을 크게 볼수록, 일은 더욱 어려워지는 것으로, 상유심생(相由心生)이라, 그 일은 더욱 번거롭게 될 것이다. 상유심생은 또 이런 한 층의 뜻이 있는데, 당신이 그것을 높게 놓고, 자신을 작게 놓았기 때문이다.”[1] 사부님께서 또 말씀하셨습니다. “사악의 교란을 받지 말고 그것에 이끌리지 말라. 그런 좋지 못한 요소가 자신에게서 생기지 않으면 사악은 보잘것없어지고, 당신들 자신은 높고 크며, 정념이 족해질 것이다. 정말로 모두 이러하다.”[1] “반신(半神)문화는 내포가 있는 것이며, 상유심생(相由心生) 역시 이 한층 뜻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사회 환경 중에서 자신의 범위가 있으며, 자신의 정서는 자신의 일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1]
이 단락의 법을 읽었을 때 몹시 놀랐습니다. 계속 내려놓지 못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인해 주변의 공간장에 변화가 발생했고 모두 자신의 마음이 바르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의 정서와 주위 환경이 따라서 이끌려갔습니다. 그때부터 자신의 정념을 강화했습니다. 길을 걸을 때도 팝송을 듣지 않고 오직 션윈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만 들었고 차를 탈 때도 다그쳐 법공부를 더 했습니다.
4월이 되어서 두려움이 조금 옅어졌으나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했습니다. 길을 가면서 여전히 많은 수련생이 전혀 만나지 않은 괴상한 사람과 부딪혔습니다. 어떤 사람은 나를 향하여 포효했고 심지어는 돈을 달라면서 나와 부딪히기도 했습니다. 반복되면서 그들에 대한 혐오감이 쌓여갔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두려웠으나 나중에는 두렵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정부에서 보조해주는 것을 믿고 잘 먹고 게을러서 일하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가 되나 길에서 타인을 마구 놀라게 하는 등등의 행동으로 그들에 대한 부정적인 정서가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자신에게 부정적인 것이 갈수록 많아지면서 더욱 쉽게 다른 사람이 전혀 봉착하지 않은 일에 부딪혔습니다.
어느 날 밤 이튿날이면 또 출근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회사로 가는 길에 또 그 괴상한 사람이 특별히 많은 길을 지나갈 때, 공포가 다시 저의 손발이 허둥댈 정도로 엄습해왔습니다. 또 그때 즉시 법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고 두려워하는 정서가 자신을 묶어두게 할 수 없었습니다. ‘홍음’의 ‘원만공성(圓滿功成)’을 펼쳐 “명리정(名利情) 닦아버리고 원만하여 창궁에 오르네 자비로 세계를 보나니 그제야 미혹 속에서 깨어나네”[2]를 읽었습니다. 세 번째 구절을 읽으면서 마음에 의혹이 생겼습니다. “자비로 세계를 보나니” 어떻게 이런 일에 봉착하고 자비로 세계를 볼 수 있단 말인가? 하여 저는 다시 반복해 읽었습니다. “명리정 닦아버리고”를 읽는 그 찰나에, 아! 바로 명리정을 닦아야 하는 것이구나! 라는 깨달음이 확 트였습니다. 저는 안으로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 일에서 ‘명리정’에 대한 집착을 건드렸나? 저의 관념속에서 그들은 나태한 폐인이었고 자신은 매일 근면하게 일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업신여겼고 자신은 자신의 인생에 많이 책임지는 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는 ‘명(名)’으로 동시에 또한 ‘과시심’이었습니다. 그들이 먹기를 좋아하나 게으르다고 여겼고, 다른 사람들은 일터에서 고생하며 돈을 벌어 저들까지 보조해줘야 하므로 저들은 근본에서 사회자원을 까먹는 것이라 여겼는데, 이는 ‘이(利)’며 또한 ‘질투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서술한 각종 두려움, 원망, 괴로움, 실망은 또 전부 ‘정(情)’에 해당합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몸이 감당했던 무게가 갑자기 절반으로 가벼워졌습니다. 아직 완전히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어떻게 자신의 생각을 바꿀지에 대해 명백해진 것 같았습니다. 이튿날 회사로 가는 길에 끊임없이 사부님의 법을 외웠습니다. “대법제자, 당신들은 혼탁한 세상(濁世)의 금빛이며, 세인의 희망이며, 사부를 돕는 법도(法徒)이며, 미래의 법왕(法王)이다.”[3] 외울 때 정념이 갈수록 강화됐습니다. 그랬습니다! 두려울 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법제자, 당신들은 혼탁한 세상(濁世)의 금빛이며”를 외울 때 한 가지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3월 초 제가 몇몇 수련생과 함께 밖에서 거닐고 있을 때 한 서양 여성이 길 건너편에서 저희를 보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길을 건너 그녀의 옆을 지나갈 때 저희를 불러 세웠습니다. “당신들은 어디서 오셨나요? 제가 당신들의 몸에서 매우 강한 에너지를 보았습니다.” 이 일이 떠오르자 마음이 격동됐습니다. 사부님께서 그때 잘 배치해놓으셨으며 일찍 저에게 알려주셨고 또 격려해주셨습니다. 대법제자에게는 모두 에너지가 있고 혼탁한 세상의 금빛으로 모든 것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가 오직 세 가지 일을 잘하면 사부님 법신께서 늘 지켜주십니다.
2. 질투심을 닦아 버리다
실업자와 괴상한 사람을 두려워한 이 일이 잠시 일단락 되고 5월이 시작되면서 잇따라 다른 한 심성 고비가 나타났습니다. 전염병 관련해서 세인이 저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방송국에서는 엘리베이터를 탈 때 마스크를 쓸 것을 요구했고 또 퇴근 후 별다른 일이 없으면 일찍 집에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저는 매번 많은 수련생이 거리낌 없이 행동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보면서, 심지어 다른 사람이 일깨워주면 ‘당신은 너무 시시한 말을 하는군요’라는 표정을 지을 때 마음속에서 그들에 대한 분노가 점차 끓어올랐습니다. 대법제자에게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으나 어째서 잘 협조하지 않을까요?
이런 일에 화가 난 동시에 또 매우 괴로웠습니다. 왜 참지 못하는가? 도대체 안으로 무엇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다른 수련생과 이 일에 대해 교류할 때 한 수련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악한 것을 적같이 미워한다는(嫉惡如仇) 말에서 ‘질(嫉)’자를 사용했는데 악한 것과 좋지 않은 행위에 대해 눈에 거슬려 하는 것으로, 눈에 거슬려 한다는 건 일종 질투심입니다.” 그랬습니다! 질투심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어째서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서 자신은 반드시 순종해 협조하고 있는지에 대해 질투했습니다. 동시에 또 법공부할 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질투심이 있는 사람은 남을 얕보고”[4] 라는 구절을 읽었습니다. 또 진일보로 거듭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질투심 외에 자신에게 타인을 얕보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타인을 얕보는 마음은 사실 자신이 타인에 비해 낫다는 것으로 또 과시심입니다! 이 두 가지 마음이 빙빙 돌고 돌면서 가장 크게 저를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6월에 미국에 폭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저는 메이크업채널에서 일하고 있어서 이 운동이 저희와 관계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미국의 젊은이들이 일찍 이런 극좌 사상에 말이 아니게 해를 입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왕훙(網紅, 인터넷 스타), 메이크업 브랜드가 SNS 채널에서 홍보할 때 자신은 이 운동을 지지한다고 말했고, 만약 태도표시를 하지 않으면 한 무리 사람들이 미친 듯이 끝없이 공격하고 비판했습니다. 물론 우리 채널에서는 이런 태도표시를 하지 않았기에 우리는 공격받는 대상이 됐습니다. 특히 저는 SNS 채널의 편집자이기에 맨 먼저 가장 직접적으로 이런 부정적인 정보의 공격을 당했습니다. 저의 정서는 다시 무너져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때 정말로 자신이 미국판 문화대혁명을 겪고 있는 듯 했습니다.
동시에 저는 사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인(忍)’은 도대체 무엇인가? 어째서 일에 봉착하면 참지 못하고 원망하고 억울함을 느끼는가? 또 그때 사부님의 이런 법을 공부했습니다. “사실 당신은 일반적인 참음조차도 해내지 못했다. 당신 자신이 거기에 앉아서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며 그것은 공상이다.”[5]
“사실 당신은 일반적인 참음조차도 해내지 못했다.”[5]라는 사부님의 법은 무겁게 저의 뇌리에서 울렸습니다. 스스로 ‘참음(忍)’을 해냈다고 여긴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며 참음을 전혀 해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한신의 이야기를 되돌려 생각했습니다. 그제야 한신이 무뢰한의 도발에서 첫 반응이 “내가 당신의 머리를 베어서는 뭘 하겠는가?” 였음을 발견했습니다. 한 사람이 정말로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야 마음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일이 그의 마음에서 전혀 문제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원래 ‘인(忍)’은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가지 일이 발생한 후 매우 화가 나고 괴로워했으나 참아내도록 자신을 압박했으며 충동적으로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참음이라 여겼습니다. 사실 진정한 참음은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또 이러했기에 저는 사고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순에 봉착했을 때 어떻게 하면 매우 탄연하게 일체에 마주하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문제가 마음에서 돌아다니며 해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 일도 저의 마음에 잠시 두었습니다.
3. 색욕심을 닦아버리다
7월 각종 일이 발생하면서 미국 이 지역의 업력이 갈수록 크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사람의 분노도 갈수록 치솟았습니다. 동시에 무차별적인 공격 사건도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3~4월에 ‘괴상한 사람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 고비를 아직 잘 넘지 못해 이번에 거듭 이 집착심을 버려야 했습니다. 처음에 역시 길에서 무슨 일을 만날까 봐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끊임없이 발정념을 강화해 자신의 사상업을 깨끗이 제거했습니다. 이런 사람에 대해 원망하는 염두도 갈수록 감소됐으며 또 좋은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었고 심지어는 그들의 우수한 점을 보려 했습니다.
어느 날 룸메이트와 함께 출근하는 길에 공산사령이 어떻게 미국을 침식했는지 이야기를 나눌 때 저는 자신의 분노와 원한이 다시 끓어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의 사상이 부정적으로 변했기에 주변의 마당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앞에 저희를 기다리는 한 괴상한 사람이 나타나 그가 저희에게 돈을 요구했습니다. 룸메이트는 죄송하다는 말로 뿌리치고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몇 걸음 걸었을 때 그가 갑자기 큰 힘으로 룸메이트를 밀었습니다. 저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앞으로 걸어갔습니다. 이때 그가 또 룸메이트를 거세게 발로 찼습니다. 저의 공포가 다시 최고점으로 치달아 회사에 도착했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또 룸메이트에게 매우 미안했습니다. 만약 자신의 사상이 나쁘게 변하지 않았다면 아마 전혀 이런 일을 만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일이 발생한 후 얼마 안 돼 회사 부근에서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인 사건이 발생해 단번에 스스로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고 매우 두려웠습니다. 매일 출퇴근 때 늘 공포에 시달렸습니다. 사실 저의 두려움은 상해를 입거나 사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발생하기 전 각종 불확정감에 두려웠습니다. 이 불확정적 과정이 저에게 가장 두려웠습니다. 저는 어째서 이런 상태인지 안으로 찾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수련생의 이런 교류를 들었습니다. 한 수련생에게 중공바이러스 증상이 나타나 입원했는데, 교류하는 수련생이 원인을 알기 위해 가봤더니 입원한 수련생 마음에 “모두 (바이러스에) 걸리겠죠.”라는 생각을 다소 갖고 있었기에 이런 증상이 나타났다고 말했습니다. 이 순간 저는 갑자기 자신도 이러하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비록 대법제자는 사부님께서 보호하고 계시기에 기본적으로 무슨 일에 봉착하지 않을 것이나 마음속에 늘 ‘비록 이렇게 아무렇게나 죽지 않을 것이지만 구타당하고 번거로움을 당하는 건 있을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으며 잠재의식에서 추구하고 있었기에 이런 일이 찾아온 것입니다.
같은 날 다른 한 수련생이 그녀가 중국에 있을 때 색욕심을 버리지 못해 구세력이 틈을 타 붙잡혀 노동교양소에 가게 된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자신은 어째서 색욕심이 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조금의 집착이라도 구세력이 틈을 타고 우리를 끌어내리려 하며 박해까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돌이켜 생각해봤습니다. 전에 ‘결과가 두려운 게 아니라 과정을 두려워 한’ 이 집착심을 발견했고 매우 강한 의지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결과가 좋든 나쁘든 누군가가 저를 도와 이 장애물을 해결해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면 자신이 안심할 것 같았고 속으로 두근거리는 나날을 보내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괴상한 사람을 두려워 한’ 이 일에서 처음에 누군가 저와 함께 그 길을 걸어주기를 바라다가, 나중에는 남자와 함께 걸으면 비교적 안심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심지어는 그것이 이미 나의 마음속에서 명확한 형상으로 구성됐습니다. 말하자면 웅장한 체구의 남자가 저를 보호해주기를 바랐으며 이런 형상은 사실 그 한동안 드라마에 빠져 보았던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었습니다.
드라마에 빠지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번 일로 드라마에 빠져 형성된 색욕심이 자신을 너무 깊이 영향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상생활에까지 깊이 영향주었습니다. 만약 수련생의 교류가 없었더라면 저는 이 일이 색욕심과 관계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했기에 4월에 ‘홍음’ ‘원만공성(圓滿功成)’을 읽으면서 명리정을 닦아버려야 한다고 깨달았을 때 그 당시 ‘정’은 이 일에 대한 두려움, 원망과 괴로움 등 부정적인 정서의 ‘정’이라고 여겼으나 늘 마음 한켠으로 제대로 찾지 못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이 ‘정’은 바로 ‘색욕심’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 드라마를 끊었고 이 일의 심각성을 인식한 후 ‘정’은 진흙과 같아 매우 끈적끈적한 물질이 나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끈적함으로 온 몸이 편하지 않았는데, 속으로 그렇다면 이 ‘정’을 어떻게 닦아 버릴 수 있을지 생각했습니다. 이때 사부님의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의 한 단락의 법을 공부했습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이런 영문이라고 알려줄 적에 당신들은 법 공부를 많이 하도록 하라. 정념이 갈수록 강해질 때, 당신이 정말로 중생에게 자비(慈悲)할 때, 더는 정이 당신을 곤혹스럽게 하지 않을 것이다.”[6]
그래서 저는 대량으로 법공부를 했습니다. 저의 팀내 법공부와 차를 탈 때 법공부하는 외에 퇴근 후 한 강의 법공부를 했고 휴가 때 몇 번은 하루에 ‘전법륜(轉法輪)’을 4~5강의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대량으로 법공부한 후 자신의 공간장이 달라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정’으로 인한 끈적끈적한 느낌도 사라졌고 사상이 더욱 넓고 크게 변했으며 공기도 선명해졌습니다. 마음속으로 법공부의 위력이 정말로 매우 강대하다는 것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4. 안일한 마음을 닦아 버린 것과 ‘인(忍)’에 대한 인식
10월, 11월이 되어 다시 점차 느슨해졌습니다. 비록 평소에 고정적으로 법공부하고 연공하고 있지만 양적으로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공부할 때도 그렇게 몰두하지 않았습니다. 이전과 같이 법공부하려는 생각이 들 때면 스스로에게 “어이구, 다음 주부터 다시 정신 차리고 하자! 새로운 한 주면 새로운 시작이잖은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계속 뒤로 미루었고 정진(精進)할 수 없었으며 또 팝송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올해 2월이 되어서야 갑자기 일념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내려가서는 안 되겠다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정진하지 않은 이 수개월은 인생이 매우 순조로워 무슨 난이 없었으며 또 안으로 찾아 집착을 버리는 기회가 없었습니다. 저는 긴장감을 느꼈고 사부님께서 책임지지 않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드시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에, 단지 이런 잡다한 물질을 갖지 않겠다는 가벼운 일념만으로도 매우 큰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정진하려는 염두가 나온 후 저는 그날부터 실행하기로 결정했고 더는 미루지 않았습니다. 방법을 강구해 법공부, 연공하는 시간을 향상시켰고 발정념하는 시간을 더 추가해 자신의 사상업을 깨끗이 제거했습니다.
이렇게 정진하는 과정에 병업관이 나타났습니다. 신체적으로 상반신과 허리가 몹시 아팠고 잘 앉지도 서지도 못했고 누워도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은 즐거웠습니다. “아! 사부님께서 나를 책임지기 시작하셨구나! 사부님 감사드립니다!” 전반 과정이 고통스러움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앉으나 서나 누워도 그리고 모든 자세에서 시달림을 받았으나, 심지어는 제4장공법을 연마하면서 ‘기를 따라 아래로 내려갈’ 때 얼굴 표정이 찡그려질 정도로 아프고 전혀 내려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는 수개월동안 제대로 법공부하고 연공하지 않아 너무 많은 업력이 누적돼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을 알고, 지금은 반드시 그것을 감당해야 했지만 마음은 여전히 즐거웠습니다. 이 고비를 꼭 넘을 수 있다는 신심이 있었고 사부님에 대해서도 무한한 감격을 느꼈습니다.
신체적으로 감당하는 고통이 일주일이 됐고 바로 이때 급여를 받는 날짜가 곧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급여를 지급하는 날이 설날이라 대만의 은행은 5~6일 휴일이므로 만약 설날 전에 급여를 받지 못하면 다음 주에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급여가 그 전에 지급되기를 바랐습니다. 이 집착이 너무 중하여 급여가 일찍 지급되지 않았고 반드시 한 주를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일부 지급해야 할 돈이 필요했으나 당시 통장에 돈이 거의 없어서 급여가 지급되지 않아 일주일 더 기다려야 한다는 소식을 들은 후 게다가 신체적인 소업을 겪고 있는 터라, 각종 순조롭지 못한 일로 정서가 단번에 폭발됐으며 불평을 토해냈습니다. 심지어는 화가 치밀어 주변의 물건을 부수고 싶었고 부정적인 사상이 대량으로 흘러들어왔습니다. ‘내가 높은 급여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며, 매체에 취직한 지 얼마 안 돼 급여가 높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 없다. 우리는 사람을 구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며, 오직 받는 급여로 내가 생활을 유지해나가고 가족에게 돈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을 정도면 된다. 그러나 어찌하여 이렇게 적은 급여지급을 미루지 말라는 이런 요구마저 하지 못하는가? 내가 살아만 갈 수 있으면 되는 것도 안 된단 말인가? 내가 정상적인 생활을 하겠다고 하는 것도 안 된단 말인가?’
수련생과 교류할 때 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 지난해부터 전염병으로 그리고 잇따라 흑인의 목숨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운동, 그리고 미국 대선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종래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소업에 또 이런 일에 부딪혔는데 제가 너무 오랫동안 버텨온 것 같습니다.” 수련생이 저에게 질문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반응이 그렇게 큰가요?” 당시 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는 알았습니다. 사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원망할 때 자신이 끊임없이 한마디 말을 중복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단지 정상적인 생활을 하려 하는데 그것도 안 된단 말인가요?” 자세히 생각해본 후에야 비로소 배후에 매우 강대한 안일함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큰 부귀를 추구하는 것은 아니나 평범한 생활을 요구하는 것도 하나의 매우 중한 안일함을 추구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이 뒷근심이 없고, 당신이 어떤 번거로움도 없다면 당신은 또 무엇을 수련하겠는가? 편안하고 편안하게 거기서 연공(煉功)을 한다고? 어디 그런 일이 있는가? 그것은 당신이 속인의 각도에서 생각한 것이다.”[7]
저는 바로 이런 상태가 아니겠습니까? 편안하고 편안하게 수련하고 싶어 했습니다! 이때 또 수개월 전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한 수련생이 제가 게으른 사람인 것을 알고 저와 교류할 때 ‘정진요지’의 ‘불성과 마성(佛性與魔性)’을 읽었습니다. “사람의 마성은 곧 악(惡)으로서, 살생하고, 훔치고 빼앗고, 이기적이고, 사념(邪念)적이며, 시비를 걸고, 선동하며 요언을 날조하고, 질투하고, 악독하며, 발광하고, 게으르고, 인륜을 어지럽히는 등등으로 표현된다.”[8] 그는 저에게 “보세요, 마성이 이렇게 많은 매우 엄중한 일을 대표하며 게으름이 속에 숨어 있다면 게으름도 그것과 마찬가지로 엄중하다는 것을 뜻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듣는 순간 사실 매우 놀랐고 스스로 이 문장을 여러 번 읽고 외울 수도 있으나 종래로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렇다고 해도 여전히 마성과 게으름의 미세한 관련에 대해서 완전히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급여지급의 일이 발생하고 지난해부터 계속 억눌려왔던 정서가 폭발하고 나서야 안일한 마음이 사람을 게으르게 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마성의 폭발이 여실하게 저의 눈앞에 펼쳐져서야 어째서 게으름을 마성이라고 하는지 철저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잇따라 저는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지난해부터 매번 고비를 넘길 때 당시에 아마 두려움, 조급함, 즐겁지 않은 등 정서였으나 전반적으로는 정말로 매우 즐거웠고 곧 빨리 업을 갚고 집착심도 빨리 버릴 수 있었으며, 매번 고비를 넘길 때 정말로 마음속으로 사부님의 배치에 대해 감사드렸는데 어찌하여 최종적으로 여전히 폭발했을까? 이때에야 발견했는데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어떤 일에 부딪힐 때 스스로에게 이렇게 끊임없이 알려줬습니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버텨나가면 곧 좋아질 거야. 버티면 좋아져.”
사실 이 ‘버틴다’는 것은 매우 속인적인 방식의 인내에 불과하며 모두 헛되게 억지로 버티는 것이지 수련인의 ‘참음’이 전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해의 의혹에 대해 돌이켜 생각해봤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참음’은 도대체 또 어떻게 해내야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인가? 이때 ‘2014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을 읽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련인이라, 늘 그런 한마디 말을 하는데, 바로 당신에게 그런 마음이 있으므로 당신의 마음이 비로소 움직이며, 당신에게 그런 마음이 없으면 마치 바람이 불고 지나가듯 당신은 전혀 감각이 없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당신이 살인방화를 하려 한다고 말한다면 당신은 듣고 아주 재미있다고 할 것인데(사부님 웃으심), 이 말이 가당키나 한가? 웃고 지나가 버린다.”[9] 사실 답안은 이렇게 간단한데 집착심이 있기에 그러했으며, 그것을 찾아냈으면 그것을 버려야했고 그래야만 점차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상태를 해낼 수 있습니다. 저는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을 들여서야 비로소 답안을 발견했습니다.
얼마 후 ‘정진요지’ ‘무루(無漏)’에서 다음의 법을 읽었습니다.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는 것으로, 버릴 수 있음은 수련의 승화이다.”[10] 단번에 ‘참음’에 대한 이해에서 또다시 제고했습니다. 전에 집착을 버려야 한다는 인식에서 비교해 보면 그것은 나쁜 것을 버리는 것이었다면, ‘버림’이라는 이 글자가 내포한 층면은 또 더욱 넓었습니다. 나쁜 것을 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좋은 일에서도 ‘버림’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금전에 대해 너무 강렬한 욕망이 없고 급여가 적어도 괜찮으나 그렇다면 자신의 통장에 정말로 한 푼도 없을 때 정말로 태연하게 움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실 돌이켜보면 급여지급이 늦어져 다음 주에 지급되더라도 저에게 있어서 평소 생활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슨 물질에 대한 욕망이 없기에 돈이 있든 없든 사실 관계없습니다. 저의 안일한 마음으로 인한 방종을 짚어주고 ‘참음’에 대한 인식을 승화시키기 위해 사부님의 배치는 정말로 말할 수 없는 감격이었습니다.
또 동일한 시간에 이런 법을 배웠습니다. “어떤 것을 나쁜 사람이라 하는지 당신들은 아는가? 나쁜 사람, 그는 왜 나쁠 수 있는가? 바로 그가 두뇌 속에 나쁜 것을 너무 많이 부어 넣고, 나쁜 것을 너무 많이 배워, 그의 두뇌는 온통 모두 나쁜 것이라, 표현하든, 표현하지 않든 그는 나쁜 사람이다. 그럼 이러한 나쁜 것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곧 들어서 넣은 것이 아닌가?”[11]
이 법을 읽고 나서 깜짝 놀라 헉하고 숨을 들이켰습니다. 나쁜 사람이란 모든 악한 짓을 하고 살인, 강도, 절도 등을 저질렀을 때 나쁜 사람이라 말한다고 여겼는데, 사실 머릿속에 나쁜 것을 부어넣으면 곧 나쁜 사람인 것입니다! 저희가 평소에 드라마를 추구하고 팝송을 들으며 머릿속에 이런 것을 부어넣을 때 저희가 갈수록 ‘나쁜 사람’으로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겠습니까? 얼마 후 또 ‘유럽법회설법’에서 다음의 법을 읽었습니다. “무엇이 나쁜 사람인가? 사회의 선전기구, 각종 신문, 잡지에 실린 그런 폭력, 색정을 당신 머릿속에 부어 넣는데 여러 사람은 그래도 보기를 좋아한다. 부어 넣은 것이 더욱 많으면 당신은 그와 같게 된 셈이다.”[12] 그래서 저는 팝송을 듣는 것을 끊기로 결정하고 다시는 보지도 듣지도 않았습니다. 시간이 나면 법공부를 더 하고 연공을 했습니다. 또다시 주변의 공간장이 청명하게 변하고 공기가 청신해진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5. 맺음말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넘긴 모든 고비에서 마음속으로 사부님의 자비와 위대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오직 참답게 법공부를 하면 매번 고비를 넘길 때 사부님께서 법에서 답안을 제시하여 저에게 보여주셨고 매번 매우 큰 제고를 했고 법에 대한 인식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또 지난 1년 남짓의 시간에 정말로 “고생을 낙으로 삼노라”[13]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매번 제고할 때마다 마음으로 매우 깊은 변화를 느낄 수 있었으며 몸을 묶고 있던 그런 집착심의 무게도 매번의 깨달음으로 갈수록 가벼워졌습니다. 사부님께서 어떤 정황에서도 저를 버리지 않으신 것에 정말로 매우 감사드립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각지설법10-따지웬(大紀元)회의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홍음-원만공성 (圓滿功成)’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 3-축사’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파룬궁-제3장 心性(씬씽) 수련’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창춘(長春)보도원법회설법’
[6]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설법’
[7]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8]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불성과 마성(佛性與魔性)’
[9]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2014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10]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무루(無漏)’
[11]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북미 제1기 법회설법’
[1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유럽법회설법’
[13]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홍음-마음 고생’
(2021년 따지웬 씬탕런 매체 법회 발언고)
원문발표: 2021년 6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해외법회교류글>뉴욕국제법회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6/8/426745.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21/6/11/19364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