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피닉스(Phoenix)
[밍후이왕]
위대하신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1996년 초에 부모님의 소개로 대법을 수련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몸이 허약해서 바람을 조금만 쐬어도 아팠습니다. 늘 이가 아프고 열이 났으며 햇볕을 쬐기만 하면 어지러워 쓰러졌고 늘 무기력했습니다. 수련 후 아픈 증상들이 전부 사라졌습니다. 그리하여 직장에서 동년배 중 드물게 병이 없고 몸이 가벼운 사람으로 되었습니다. 주변 친구들은 모두 제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다는 것을 알고는 파룬궁(法輪功)을 직접 접해보지는 않았지만 갈수록 나의 신체가 좋아지는 것을 보고 이 공법이 좋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습니다.
1999년 7.20 후에 저도 신고, 불법 심사, 감청, 감시, 직위해제 등을 당했습니다. 비틀거리며 여기까지 걸어오는 과정에 법을 얻은 기쁨, 제고한 즐거움, 관을 넘는 고통, 압력 하에서의 사색, 사람을 구하는 긴박함 등이 있었습니다. 정법 형세가 앞으로 추진됨에 따라 걸음마다 살얼음판이었는데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보호해주시어 오늘까지 걸어오게 되었습니다. 2018년 우리 가족은 미국으로 와서 지역 항목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2년 남짓한 기간에 체험했던 일부를 사부님께 보고하고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합니다.
막 뉴욕에 왔을 때 새로운 항목에 들어갔는데 오랫동안 내버려 둔 집에서 쓰레기와 낡은 물건을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 과거에는 사무실에 앉아서 입만 놀리던 나에게 육체노동은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모두 큰 고함이었습니다. 더럽고, 힘들고. 지치고. 춥고 더운 등 방면에서 아주 많은 관을 돌파했고 심성이 적지 않게 제고되었습니다. 거의 반년 동안은 온몸이 아팠는데 등이 아플 때면 잘 때 돌아눕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견지했습니다. 업력이 제거되자 몸이 가벼워졌고 힘도 생겨 어떠한 일을 해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야 하는 일을 즐거워했고 수련 중에서 제고한 후의 기쁨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1. 욕심을 부리지 않다
한동안 저는 공구 관리를 책임졌습니다. 저는 낡고 오래된 창고를 정리하고 잡화 더미와 쓰레기 더미에서 못과 쓸 수 있는 부품 등을 찾았습니다. 당시 우리 집은 새로 이사를 했는데 텅 빈 벽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물건을 걸려고 해도 녹이 슨 못도 없었습니다. 미국에는 못이 비싼 데다가 낱개로 팔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관리하는 창고에는 바닥, 코너, 쓰레기 더미, 어디에서나 못을 찾을 수 있습니다. 어떤 때는 만약 내가 하나하나씩 찾아 줍지 않는다면 그 못들은 아마 땅속에 파묻히거나 쓰레기와 함께 버려졌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옛사람들은 길에서 물건을 함부로 줍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대법제자로서 뛰어난 정법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일사일념은 모두 우주 중에 기록되고 우리의 행위는 후세에 남겨지게 되므로 조그마한 욕심이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 것이 아니라면 욕심을 부려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 방면에서 저는 엄격히 자신에게 요구하여 심성을 지켰습니다.
2. 과시심을 제거
제가 중국에서의 사회적 지위, 비교적 좋은 경제조건, 편안한 일자리를 모두 내려놓고 왔을 때 저는 명예와 이익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과 물질은 여전히 남아있었고 가끔 나타났습니다.
이 항목에 참가했을 당시는 모두 더럽고 힘든 일이었습니다. 옷이 더럽혀지고 지친 상태로 혼자 일하고 있을 때면 ‘어찌 내가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없단 말인가?’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한테 보여주려는 이런 집착심은 그래도 쉽게 알아차릴 수 있어 정념으로 제거하면 비교적 간단했습니다. 그 외에 숨어 있던 과시심도 나타났습니다.
한번은 담당자가 요구한 데이터를 아주 빠르게 작성해서 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담당자는 자리에 없었습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일에 대한 책임감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저의 능력을 과시하려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점심시간에 담당자를 만나 이야기했더니 담당자는 “다했어요? 너무 좋아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진작에 다 완성했어요.’라고 말하려다가 과시심이라는 걸 의식하고 참았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수련생과 이야기를 나눌 때 “우리가 처음 왔을 때 겪었던 그 고생을 당신이 모를 겁니다.”라고 말했는데 그 말속에는 ‘당신들이 지금 겪는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뜻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오기 전에 있던 수련생들이야말로 진짜로 고생했고 제가 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남편(수련생)에게 “항목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어렵고 힘든 데다가 수입도 없고 일하는 사람도 몇 안 됐는데 점차 환경이 좋아지고 수입도 생기자 사람들도 많이 들어왔네요.”라고 말했다. 그는 “당신의 그 말은 마치 공평하지 못하다는 뜻이네요. 사람마다 모두 부동한 시기의 사명이 있고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인데 왜 그런 생각을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맞아! 예전의 노력은 모두 항목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더 많은 사람이 항목에 들어오고 수입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 우리는 바로 법을 실증하기 위해서야!’라고 생각했습니다. 말할 때면 다른 마음이 없는 것 같았지만 배후에는 바르지 못한 관념이 있었습니다. 과시심, 질투심의 작용이었습니다.
얼마 전, 한 젊은 수련생은 “우리가 전에 춤출 때 어떤 이는 동작을 잘 하지 못해 누구보다 열심히 했지만, 표준에 도달하지 못했어요. 어떤 사람은 마음을 고요히 하고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어떻게 해야 정확한지를 곰곰이 생각한 다음 다시 연습했는데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표준에 도달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의 말은 저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했습니다. 우리는 항목에서 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하는 일을 합니다. 일사일념, 일언일행(一言一行)이 법에 있지 않으면 또 어떻게 법을 실증할 수 있겠습니까? 사상이 순정하지 못한데 어떻게 사람을 구하는 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항목의 일을 하면서 수시로 자신의 문제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자신을 잘 수련해야만 비로소 사람을 구하는 사명을 더 잘 완성할 수 있습니다.
3. 사유방식을 바꾸고 후천적 관념을 제거
항목 일을 하면서 저는 수련생들과 마음을 열고 거리낌이 없이 교류하면서 수련해왔습니다.
중국에서 막 왔을 때는 사람들 사이에 방비, 짐작, 은폐 등을 생각하는 습관이 다소 있었습니다. 수련생은 저에게 “서방사회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는 아주 우호적이고 중국처럼 극단적이지 않으며 그들은 그렇게 큰 감당 능력도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주변의 수련생들이 잘못하는 것을 보고도 말하지 않았고 어떤 때는 법에 부합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고 마냥 좋은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사실은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는 것과 ‘선(善), 인(忍)’을 닦는 것을 가리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수련생이 저에게 인정이 너무 많다고 했을 때 저도 확실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당신은 대법제자라, 누가 문제가 있는 것을 당신이 보고도 말하지 않는다면, 그에 대해서도 좋지 않다.”[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어떻게 돌파해야 할지 몰랐고 제가 말하기만 하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것 같아 다른 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해 자신이 난감해질 것만 같았습니다.
한번은 한 수련생이 다른 수련생의 부적절한 점을 지적했는데 아주 평온하고 이치에 맞게 하여 상대방을 난감하게 하지 않았습니다. 상대방도 아주 기뻐하면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수련생은 그렇게 순정하게 말할 수 있는데 저는 왜 안 되는지 생각해보았습니다. 저는 늘 수련생의 문제를 보았을 때 처음에는 우연이라고 생각했고 다시 발견하면 관념이 생겼습니다. ‘오, 원래 그는 이런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했으며 다시 보게 되면 그렇다고 단정 지었습니다. 그가 잘못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보면 감정적으로 ‘그가 어떻게 이럴 수 있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지적해주려고 하면 배후에 이미 많은 것들이 생겼고 게다가 자신의 선입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 때문에 말의 뜻이 바뀌어 설득력이 없어집니다.
사부님께서는 “속인사회의 사람들은 흔히 남에게 좋은 일을 말할 때에도 자기의 관념을 갖고 말하며, 심지어 손해를 볼까 두려워, 자기의 그 심리를 보호한다. 많고 많은 방면의 것이 안에 섞여 들어있기 때문에 그가 한 말은 듣기에 말의 뜻이 변했고 깨끗하지 못하며 흔히 감정까지 섞여 들어간다. 만약 당신이 정말로 선한 마음에서 출발하여 어떠한 개인의 관념도 섞지 않았다면 당신이 한 말은 정말로 사람을 감동케 할 것이다.”[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순정하지 못한 것이 어떻게 형성되어 존재하는지 알게 되었고 그것을 끊임없이 제거했습니다. 사람이나 일에 대하여 어떠한 관념을 갖지 않고 말하자 갈수록 간단해졌습니다.
어떤 문제를 말해야 하고 어떤 문제를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 수련 과정에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한 수련생은 늘 저에게 무례하게 지시했습니다. 특히 다른 사람 앞에서 그럴 때면 저는 웃으면서 최대한 협조했지만, 마음은 불편했습니다.
한 수련생이 저에게 “그녀는 너무해!”라고 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저를 겨냥하여 온 것이라는 것을 알았고 반드시 안으로 찾아 자신을 수련해야 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수련생의 말투에 그리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니 수련생이 자신을 수련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과 교류하니 남편은 “그녀가 그렇게 말해서 정체 항목에 영향을 줬나요?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줬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그럼 당신을 수련하라는 것이지요!”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거기에 신경을 쓰지 않자 그 수련생이 근본으로 고의적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저에게 원하지 않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아 하는 요소가 있었기에 저만 귀에 거슬렸던 것입니다. 모두 저의 심성을 제고시키기 위해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래야만 다른 사람의 정서나 말투에 이끌리지 않고 고요한 마음으로 가장 실질적인 내용을 들을 수 있어 더 큰 지혜를 가지고 본질을 보아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수련생들과 마음을 열고 교류하니 수확이 컸습니다. 제가 정의를 내리듯이 말하는 방식을 다른 수련생이 지적해줌으로써 저에게는 근본적으로 변하고 제고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수련생의 말투가 비교적 딱딱한 것을 보았을 때 “말투를 좀 부드럽게 하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말해야 하는데 그녀가 선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당신은 선하지 않고 말투가 너무 딱딱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또 당 문화의 표현을 보면 “당신은 당 문화가 아주 엄중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전에는 말하는 방식의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야 사유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수련생이 현재 상태에서 더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나쁜가를 알려주었는데 바로 선량하지 못한 요소가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러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는 착한 마음씨를 말하고 선심(善心)으로 남을 대한다.”[2]라는 요구에 도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런 사고방식으로 어찌 선량함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한 가지는 바로 자신의 경험으로 판단하고 추리하면서 결론을 정해놓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해 보자. 당신이 만약 일정한 에너지를 갖고 있다면 당신이 하는 말은 작용을 일으킬 것이다. 그런 일이 아닌데도 남에게 그런 일이라고 말해 준다면 당신은 나쁜 일을 하는 것일 수 있다.”[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이런 후천적으로 형성된 의식과 관념은 쉽게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파고들어 찾아내면 그것을 겨냥하여 수련할 수 있습니다. 오로지 후천적으로 형성된 사유의 틀과 방식을 제거해야만 반본귀진(返本歸真)할 수 있고 진실한 나를 드러낼 수 있어야 선한 언어, 선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습니다.
작년 10월에 저는 다른 항목의 창고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판매를 담당한 수련생이 시장조사를 한다며 10여 개 물품을 빌려 갔습니다. 한동안 지나도 가져오지 않자 여기 수련생은 재촉하지 않으면 그녀가 잊어버리게 되는데 빌려 간 물품은 반드시 가져와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쪽 수련생은 자꾸 재촉하면 일하기 힘들어져 절차대로 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수련의 각도에서 가늠하자고 생각했습니다. 재촉하면 창고관리에 대해서는 책임지지만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 것이 되었습니다. 재촉하지 않으면 창고관리에 대해 그다지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절차대로 한다고 해서 만사형통은 아닙니다. 게다가 상대방은 확실히 바쁘다고 쉽게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일에 책임도 지고 상대방도 배려하려면 시간이 좀 지난 후에 그 수련생에게 일깨워주어 수련생이 스스로 파악하게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보기에는 작은 일이고 간단해 보였지만 저한테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까를 생각하는 외에 ‘진선인(真·善·忍)’의 표준으로 자신의 언행을 가늠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했습니다. 그것은 한 차례 깨닫는 과정이었습니다.
어느덧 미국에 온 지 3년이 다 되어갑니다. 일심전력으로 항목의 일을 하면서 저는 우리의 항목이 더욱 발전하고 더 많은 중생을 구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지역사회에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고 주변의 주민들과 친해져 그들에게 진상을 알려 법을 실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전통문화를 널리 전파해서 더 많은 사람이 구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구역에서는 곳곳에 수련생들의 대가와 노력이 남아있습니다. 대법제자들은 황폐했던 이곳을 생기가 넘치게 변화시켰고 법정인간 시기에 진입하면 이 구역이 더 큰 작용을 발휘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저는 대법제자의 한 입자로서 중대한 책임을 느끼는 동시에 뿌듯함과 자부심을 느낍니다.
이상 교류에서 법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은 수련생들이 자비로 바로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세계 法輪大法의 날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서: ‘싱가포르 법회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서: ‘전법륜’
(2021년 뉴욕 오렌지카운티 파룬따파 수련심득교류회 발언고)
원문발표: 2021년 6월 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6/1/425952.html
영문위치: http://en.minghui.org/html/articles/2021/6/3/1935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