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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축 5.13] 인자(仁者)의 용기-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

글/ 해외 대법제자

[밍후이왕]

아버지 안녕하세요! 오랫동안 편지를 쓰지 못했네요. 비록 우리 부녀가 함께 생활한 기간이 길지 않아 서로를 완전히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저는 아버지가 정직하고 광명정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요. 사실 이 점은 제가 물려받았어요. 아버지는 경제적 여유가 있지만 검소하고 자율적인 전통 생활 방식을 따르고 계시지요. 도덕이 추락하고 난상(亂象)이 뚜렷이 드러나는 현 사회에서도 권세를 따르지 않는 것은 매우 고상한 일입니다.

아버지는 평생 이익을 위해 남과 다투지 않으셨는데 이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셔야 해요. 저와 밍밍(외손자)도 이 점을 이어받아 물질이익에 대한 욕심이 적고 의리를 저버리지 않아요. 저를 품행이 단정하고 시비를 가릴 줄 알며 착실하게 살아갈 수 있게 키워주셔서 감사드려요.

아버지 저는 오늘 마음속 말을 하려 해요. 우리는 서로 소통이 적었어요. 저의 선택에 대해 아버지는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시지요. 아버지에게 제가 겪었던 걸 말씀드리지 않고 아버지의 의견을 진심으로 듣지 않은 것에 사과드려요. 제가 아버지를 존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부모님 앞에서 말하는 것이 부담스러워서였어요. 저는 올해 52살이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늘 잘못을 잘 저지르는 초등학생 같아요. 저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부족해 부모님과의 대화를 피했어요.

저는 어릴 적에 허약하고 병이 많아서 어머니는 여동생보다 저를 훨씬 많이 걱정하셨지요. 특히 요실금 때문에 어머니와 저는 모두 괴로웠어요. 어머니는 제가 또 이불과 요를 모두 적신 것을 발견하고는 서둘러 치우면서 화를 내셨어요. 저는 그 밤들을 기억하고 있어요. 고요한 밤이 되면 제가 집안에 누를 끼친다고 생각했지요. 삶의 의미를 알지 못해 늘 생을 마감할 생각을 했지만 용기가 없었어요.

제가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학우들은 제 단점으로 별명을 지어 놀렸어요. 이 때문에 저는 다른 사람보다 못하다고 생각했고 자존감이 낮았으며 보복심이 강했어요. 진취적이지 않았고 목표가 없었죠. 나중에 어떻게 대학에 입학하고 결혼까지 했는지 모르겠어요. 처음 배정받은 학교에서 15년 동안 교단에 섰는데 ‘그럭저럭 먹고 살았다’라는 표현이 적합해요. 체계가 제대로 잡힌 학교가 아니었기에 모두 그럭저럭 살아간다는 마음뿐이었고 저도 그렇게 지냈어요.

아이를 낳을 때 큰 병에 걸려 여름에도 두꺼운 옷을 입어야 했고 몸은 추웠다가 더웠다 했어요. 불면증으로 늘 흐리멍덩하게 지냈어요. 힘들어서 무급휴직을 하고 집에서 쉴 수밖에 없었어요. 이 병원 저 병원 다녀 봐도 나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한약을 너무 먹어서 메스꺼웠으나 낫지 않았어요. 주술사까지 찾아다녔지만 소용없었어요.

한번은 허(何) 씨에게서 한약을 짓고 돌아가는 길에 구강병원 입구에서 멈춰 섰어요. 차라리 건물을 짓는 비계에 맞아 죽기를 바랐는데 당시에 저는 겨우 숨만 쉬고 있었어요.

한 친구가 저에게 ‘전법륜(轉法輪)’을 빌려주면서 도움이 될 거라고 했어요. 당시 저는 책 한 권을 읽고 제 병이 낫는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어요. 그러나 책을 본 후, 짧은 시간에 아주 큰 변화가 생겼어요. 저는 병원에 가지 않았고 한약을 짓지도 않았어요.

반년 후, 저는 복직했어요. 예전에는 45분 동안 수업하는데 10분만 지나면 의자에 앉아야 했어요. 학생들이 떠들어도 그들을 제지할 힘이 없었기에 놔둘 수밖에 없었죠.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수업 시간에 서서 강의하는 것이 힘들지 않았고 상황에 따라 분위기를 조절할 수도 있었어요. 아이들은 생기가 넘쳤어요. 학생이 60, 70명인 반으로 말하자면 머리도 써야 하고 체력도 따라줘야 하지만 저는 전보다 더 쉽게 가르칠 수 있었어요.

현재까지 파룬따파를 수련한 지 22년이 됐어요. 그동안 약을 먹지 않았고 병원에도 가지 않았지만 병이 없고 몸이 가벼워요. ‘남에게서 은혜를 입으면 갑절로 갚아야 한다’라고 하는데 저도 마땅히 은혜에 감사해야 하지 않겠어요? 더 중요한 것은 ‘파룬궁’이 제 인생의 답을 줬다는 거예요.

저는 줄곧 운명이 불공평해서 병이 많고 고통이 많으며 머리가 둔해 차별받는다고 생각했어요. 대학교 3학년 때 제 눈에 문제가 생긴 후 고민이 더 많아졌어요. 사회에 복수하려는 비뚤어진 마음으로 물건을 훔치기 시작했어요. 대학교 상가에서 물건을 사는 척하면서 점원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진열대 위 상품을 자신의 가방에 몰래 넣었어요. 심지어 저에게 필요 없는 물건도 훔친 다음 버리면서 심리적 평형을 조금 찾았던 것 같아요.

일을 시작하고는 장을 볼 때 다른 사람의 달걀을 몰래 가져왔어요. 그런 행위는 1993년까지 계속됐어요. 화생원(華生園)에서 남의 케이크를 몰래 갖고 나왔을 때, 저는 문득 머리 위에 한 쌍의 눈이 있는 것을 느꼈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어요. 깊은 하늘에 그 한 쌍의 눈이 저를 주시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몰랐어요. 그때가 마지막으로 물건을 훔친 거예요. 화생원 입구의 그 눈은 저를 두렵게 했고 영원히 잊을 수 없었어요.

비록 그런 불량한 행위를 더는 하지 않았지만 늘 이것저것 원망하고 마음이 바르지 못했어요. 다른 여자들은 아이를 낳아도 큰 병을 앓는 사람은 몇 안 되는데 정말 제가 원망스러웠어요. ‘전법륜’을 읽은 후, 저는 사람이 되는 이치를 알게 됐고 왜 저에게 병이 많고 남에게 업신여김을 당하는지 알게 됐어요. 그때부터 저는 어떤 불공평한 경우든 항상 좋은 사람의 표준으로 자신에게 요구했어요.

저는 제가 파룬따파가 널리 전해질 때를 만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요. 만약 파룬따파 수련에 들어서지 않았다면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해도 어려운 세상에서 흐름에 따라 떨어졌을 것이고, 각종 불공평 앞에서 자신의 양심을 잃었을 거예요.

공자는 40세면 불혹이고 50세는 지천명이라고 했어요. 저는 불혹의 나이에 반본귀진(返本歸真)의 길을 걷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찾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요.

아버지, 저도 예전에는 성격이 난폭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폭발했잖아요. 중학교 때 반 친구들이 저를 불공평하게 대했다고 책상에 올라서서 빗자루로 때렸어요. 부모님 앞에서도 억울하면 히스테리를 부렸고 나중에 학생들과 지내면서도 싸움이 끊이지 않았어요. 한번은 중학교 2학년 남학생과 갈등이 생겼는데 양보하지 않아 그 학생이 교편을 빼앗아서 저를 때렸어요. 또 한 번은 제가 한 여학생을 욕했는데 그 학생이 교육부에 신고해 비판 통보를 내달라고 교장 선생님께 일렀어요. 아, 지금 생각하면 정말 부끄럽네요.

그러나 파룬따파가 저를 변하게 했어요. 나중에 들어간 학교는 현지의 중점 중학교였어요. 다른 교사들은 직위와 상여금을 위해 인간관계가 복잡했어요. 그러나 저는 오히려 동료들로부터 칭찬을 듣곤 했어요. 그들은 저를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대가만 치르고 돌려받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어요. 농담하면서 저를 ‘멸종 위기에 처한 희귀종’이라고 했어요.

학년 주임은 엄숙한 노부인이었는데 저에게 “학교에서 네가 마음이 가장 좋아. 나는 너에게서 배워야 해”라고 말했어요. 제 대학교 동창은 부교장이었어요. 한번은 그가 우리 학년 사무실의 한 교사에게 저에 대해 물었는데 그 노부인은 허허 웃으시면서 “선생님마다 모두 그녀 같았으면 관리하기 정말 쉽지요”라고 대답했어요. 교감 선생님은 다른 사람들에게 “샤(夏) 선생님을 보세요, 한 번도 일을 가리는 적이 없고 학생들은 그녀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줬어요”라고 말했어요. 아버지, 만약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저는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을 거예요.

예전에 사무실의 청소는 모두 학생들이 했는데 저도 나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수련한 후, 저는 매일 사무실에 도착해서 묵묵히 바닥 청소를 하고 책상을 닦았어요. 하루는 제가 바닥 청소를 하고 있을 때 한 노교사가 찻잔을 들고 웃으면서 “보아하니 파룬궁은 대단하네요. 우리 게으른 여교사를 부지런하게 가르쳤네요”라고 말했어요. 제가 학교를 떠날 때 학년 모임에서 어떤 남자 선생님이 저에게 “샤 선생님은 정말 올바르십니다. 정말 탄복합니다. 저는 평소에 건들건들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지만 선생님 앞에서는 함부로 못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어요.

학생들은 늘 제가 다른 선생님들과 다르다고 말해요. 그들은 저에게 “학년에서 선생님과 ○선생님(서당 교육을 받은 재임용 할머니) 둘만이 별명이 없어요. 그것은 우리가 선생님을 존중하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했어요. 동료의 아이가 제 학생이었는데 동료는 “제 딸은 선생님 말만 들어요. 가장으로서 아이를 선생님에게 맡기니 마음이 놓여요”라고 말했어요. 제 학생이 준 노트의 속표지에는 ‘인생이 막막할 때 고귀한 영혼이 찾아와 방향을 안내해주신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선생님,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라고 적혀있었어요.

제가 ‘톈안먼 분신자살’은 중공(중국공산당)이 꾸며낸 것이고 파룬궁은 TV에서 말한 것처럼 그렇지 않다고 알려줬을 때 한 남학생은 눈을 크게 뜨면서 몹시 놀라워했어요. 그 후에 그 남학생은 장엄하게 말했어요.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저는 믿습니다.” 아버지, 이런 말들은 제 교사 인생에서 얻은 가장 큰 보답이에요. 이것은 제가 1999년에 파룬따파를 수련한 후 얻은 보답들이에요.

동료들은 저를 칭찬하고 학생들은 저를 존중해요. 저는 사부님 은혜에 감사드리고 대법에 감사드려요! ‘진선인(真·善·忍)’의 힘이 없었다면 저도 큰 염색항아리 속에서 그저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고 순결을 유지할 수 없었을 거예요.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죠.

수련 전에는 저도 이익을 정말 중시했어요. 학교 강연회를 다녀와서 출장비를 청구할 때 동료들은 최대한 더 많이 적어 내고 저도 그렇게 했어요. 수련한 후, 저는 더는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2000년 초, 직장에 주택분배 지표가 한 장 내려왔는데 듣기로는 마지막이고 저에게 줄 거라고 했어요. 이후에 한 동료가 교장과의 친분을 이용해 그 집을 분배받았어요. 동료들은 모두 저를 대신해 불만을 토로하면서 이후에 기회가 없으니 나약하게 보이지 말고 교장 선생님에게 가서 따지라고 했어요. 저는 가지 않았어요. 교장 선생님은 자신이 공평하게 처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저를 보면 자연스럽지 못했어요.

반년 후에 새집을 분배하는 지표가 또 나왔는데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때가 진짜 마지막이었어요. 교장 선생님은 두말하지 않고 저에게 신청서를 작성하게 했고 동료들은 모두 감탄했어요! 그 집의 면적이 가장 컸고 위치도 가장 좋았기 때문이에요.

그 일이 있고 난 뒤, 동료들은 저를 더 존중했어요. 저는 따지지 않았는데 오히려 더 좋은 결과를 얻었어요. 그 일로 동료들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됐어요. 파룬따파를 수련하지 않았더라면 저도 마찬가지로 이익을 위해 싸우고 다투면서 이렇게 소탈하지 못했을 거예요.

아버지, 사람마다 추구하는 인생이 다르고 가치관도 달라 각자의 뜻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정의와 양심을 위해 오늘까지 온 것이 자랑스러워요. 남편은 대학교에서 공산당 조직에 가입했고 감지덕지할 정도로 공산당을 믿었어요. 저의 신앙 때문에 남편은 몇 년간 몸부림쳤고(이혼을 생각한 것을 포함) 우리 가정은 그로 인해 싸웠고 심지어 냉전이 있었어요. 남편은 아들이 진화론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자 엉덩이를 찼고 화가 나서 우리를 두고 집을 나갔어요. 그해 밍밍은 9살이었어요.

2008년, 제가 파출소로 연행됐을 때 남편은 경찰의 전화를 받았어요. 집에서부터 파출소까지 10분 거리였어요. 남편의 무릎에 피가 나서 어디서 넘어졌냐고 물었는데 그는 피가 난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경찰 앞에서 애써 침착하고 공손하게 하려는 모습을 보면서 마음은 아프고도 슬펐어요. 외국기업의 부사장인 그는 평소에 냉정하고 침착하다는 인상을 주었어요. 그러나 중공의 위세에 밀린 남편 눈에 비친 두려움을 보니 차라리 이혼하고 저 혼자 그 모든 것을 대하고 싶었어요.

결국 남편은 이혼을 선택하지 않았어요. 저는 왜 이혼하지 않았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남편은 저처럼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고 했어요. 현재 남편은 각성하고 이미 탈당했어요. 남편은 제가 바른 일을 한다는 것을 알고 묵묵히 경제적, 정신적으로 지지해주고 있어요. 남편도 저를 지지하기 때문에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될 거예요.

우리는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 세 식구가 만나지 못하지만 서로 믿고 양보하고 존경해요. 밍밍은 우리의 영향으로 몸이 건강하고 효도하며 무던해요. 선배들도 모두 그를 좋아하고 인정해줘요. 하지만 이것은 어머니인 저의 공로가 아니라 파룬따파 불광이 널리 비쳤기 때문이에요. 파룬따파를 수련하지 않았다면 저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했을 것이고 자녀 교육도 논하지 못했을 거예요.

아버지, 믿어주세요. 앞으로 아버지에게 부끄럽게 하지 않을 거예요. 대대로 전해 온 이런 마음 씀씀이가 아마도 가풍이겠지요? 삶의 추억에 자랑스러움만 남겨드릴게요.

현재 저와 수련생들의 일을 많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를 우둔하다고 보고 있어요. 밥 먹고 할 일이 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심지어는 가족에게까지 악담을 퍼부어요. 동포들이 착하지 않아서가 아니고 몇십 년을 중공의 강압에 머리 숙이는데 익숙한 삶을 살아왔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잠시나마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외할아버지, 할머니를 시작으로 가족들이 겪은 일을 제가 겪어보니 편안한 삶을 원하는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요. 어머니도 제가 중국을 떠나기를 바랐어요. 부모님이 너무 많은 것을 겪으셨다는 것을 저는 잘 이해해요.

제가 길에서 두 중학생에게 파룬따파에 대해 말하다가 구치소로 연행됐다는 것을 아버지는 모르실 거예요. 아버지가 화내실까 봐 가족들은 말하지 못했어요. 이것이 부모님이 제가 중국을 떠나기를 바랐던 원인이에요. 그러나 구치소에서의 경험은 제 인생의 수치가 아니라는 것을 아버지는 알고 계시나요? 제가 거기에서 얻은 것은 말 없는 동정과 찬사였어요.

한 경찰은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 조용히 저에게 “절 미워하나요?”라고 물었고 저는 미워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는 한숨을 쉬면서 “돌아가면 수련할 거죠?”라고 물었고 저는 수련할 것이라고 했어요. 그는 머리를 숙이고 낮은 소리로 “이후에는 조심하세요!”라고 말했어요. 떠날 때 그는 한참 저를 바라보면서 “몸조심하세요”라고 친구와 작별 인사를 하듯이 말했어요. 그 순간 저는 자신의 처지를 잊고 그의 선량함에 마음이 기뻤어요.

구치소에서 철근을 훔쳐서 들어온 할머니는 “이 안의 사람들은 모두 나쁜 일을 해서 들어왔지. 선생님은 억울하게 들어온 것이라 우리와 달라”라고 큰 소리로 말했어요. 마약을 한 젊은 여성은 저에게 많은 문제를 꼬치꼬치 묻고는 “아주머니가 제 어머니면 좋겠어요. 그러면 저는 이렇게 되지 않았을 거예요”라고 말했고 나가면 꼭 대법 책을 보겠다고 했어요.

아버지, 제가 전에 중공에 의해 감금된 것을 창피해하지 마세요. 반대로 아버지의 딸은 강력한 정권에 머리 숙이지 않았고 비굴하지 않았으며 굳건함 속에서 자비와 선량함을 수립해 경찰들도 탄복했어요. 훗날 우리 가족들이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라고 믿어요.

인자(仁者)의 용기는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강압에도 허리를 곧게 펼 수 있는 거예요. 폭력에도 평화와 이성을 유지하고 공포를 극복하면서 태연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이렇게 해야만 ‘진선인(真·善·忍)’에 동화돼 마음과 덕행이 세인들을 감화시킬 수 있어요. 우리는 바로 이 점을 실천하고 있어요.

어떤 사람은 중국 역사에는 순종하는 사람과 폭동을 일으키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라고 말하지요. 그러나 파룬궁 수련생들은 권력 앞에 머리를 숙이지 않고 폭력을 견디면서 악을 악으로 다스리지 않는데 이것은 중국 역사상 특별한 사례예요.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위대한 대법(大法)이 있기 때문이에요.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도 정직한 분이세요. ‘먹구름은 하늘을 가릴 수 없고 언젠가는 봄이 온다’라는 것을 믿으세요. “당신도 어둠을 밝혀주는 한 줄기 빛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러나 선택을 해야 하잖아요. 눈을 뜨고 광명을 맞이하는 선택이 필요해요.” 이 말은 정말 좋네요! 아버지도 눈을 뜨세요.

아버지, 저는 고향이 그리워서 꿈에서도 조용히 흐르는 자링(嘉陵)강과 고향의 이웃들을 그리워해요. 저를 키워준 고향과 부모님의 은혜에 감사드려요. 저는 제가 중국인이라는 것에 긍지를 느껴요. 제 피에도 진실하고 선량한, 은혜에 보답할 줄 아는 이념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죠. 머지않아 파란만장한 우리 민족이 다시 휘황찬란하게 되고 진상이 크게 나타나 사람들이 바른길을 걸을 때면 아버지의 딸도 그날을 위해 노력한 억만 명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거예요.

심지어 영광으로 생각하실 거예요. 우리는 수많은 양심적인 중국인들이 하지 못한 일을 했기 때문이에요. 폭력과 폭언이 없고 평화와 선량함만 있을 뿐인데 오히려 역사를 바꾸고 있어요. 확고한 신념과 하늘의 보호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에요. 우리는 영웅호걸이 되려고 하지 않았지만 ‘진선인’의 힘은 우리를 자비롭고 두려움이 없게 했으며 광명정대하게 해줬어요.

미래 신세기의 서광은 반드시 선량하고 좋은 사람에게 속할 거예요!

정직하고 가식 없이 평생 정의를 지지하신 마음으로 저를 응원해주세요!
하늘이 복을 주실 거예요! 어머니와 함께 건강하세요!

딸 올림.
2021년 3월

 

원문발표: 2021년 5월 2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5/23/42586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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