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허베이성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는 것으로, 버릴 수 있음은 수련의 승화이다.”[1] “수련은 곧 이 마난(魔難) 중에서 수련해야 하며, 당신이 칠정육욕을 끊어버릴 수 있는가 없는가, 담담히 여길 수 있는가 없는가를 본다.”[2] 실질적으로 수련하는 마난 속에서 나는 체험했다. 즉 시종일관 참기만 하고 버리지 않으면 그 마음을 뿌리째 제거할 수 없었다. 진정으로 버리는 것을 해내야 그 마음이 발붙일 곳이 없다. 동시에 사(私)를 제거하고 나(我)를 제거하는 것이 그 속에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제고이고 비로소 승화할 수 있다.
전에 나는 원망심이 나오기만 하면 반복해서 외웠다. “선자(善者)는 늘 자비심이 있어, 원망도 증오도 없이, 고생을 낙으로 삼는다.”[3] 아울러 힘껏 발정념 해서 그것을 승인하지 않았다. ‘이는 내가 아니다.’ 이렇게 한동안 지낸 후 참으면 지나갔고 매번 모두 이렇게 했으며, 역시 괜찮다고 여겼고 심지어 이 마음이 거의 없어졌다고 느껴졌다. 그러나 심성이 관(關)을 크게 넘을 때, 갑자기 마음 깊은 곳이 자극받으면, 이 마음은 단번에 뛰쳐나왔고 지키기가 너무 어려웠다. 위아래로 부글거렸다. 말하자니 쟁투이고 자신을 찾지 않는 것인데, 말하지 않자니 이 원망을 누를 수 없고 사람마음이 모두 나왔는데, 왜 그런지 생각해내지 못했다. 왜 그럴까? 그러나 필경 이렇게 수년간 수련했기에 곧바로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수련인이다. 사부님의 말씀을 듣는다! 일체는 사부님의 배치를 따른다! 자신을 찾고 조건 없이 자신을 찾자!”
말하기는 쉬워도 닦기란 쉽지 않다! 작년 여름, 남편은 방에서는 에어컨을 켜면서 화장실에서는 손을 씻건 세수하건 뭘 해도 온수만 썼다. 그가 온수를 틀면 보일러에서 스팀 소리가 났다. 나는 말했다. “당신은 도대체 추운 거예요 더운 거예요? 방에서는 에어컨 틀고 러닝셔츠만 입고 있으면서 씻을 때는 온수를 트는데, 너무 낭비잖아요!” 그러면 남편은 화를 내며 말했다. “왜 허구한 날 참견하지? 당신하고 무슨 상관이야! 나는 뜨거운 물이 좋아!” 나는 화가 나서 괴로웠지만, 말하지 않았다. 더 말하면 얼굴을 붉히게 될 것 같다. 참자. 그러나 마음에 원망이 있으니 남편을 보기만 하면 화가 났고 참지 못하면 또 말했다. “당신이 손 씻을 때 온수를 틀면 보일러에서 ‘후후’ 소리가 나요. 그런데 온수가 나오기도 전에 손은 이미 다 씻었어요. 뜨거운 물은 쓰지도 않잖아요! 온종일 손을 얼마나 많이 씻어요! 매일 이런 식이면 가스비가 많이 나온다고요! 낭비잖아요!” 그는 재빨리 말했다. “말했지. 상관 말라고! 내가 이렇게 낭비한들 몇 년을 더 하겠어.” 나는 말문이 막혔다.
이런 작은 일이 끊이지 않았고 그때마다 나는 한사코 참았다. 그러나 이 원망은 나도 모르게 누적됐고 시간이 길어지자 문득 잘못됐다는 것을 마음에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수련하는 것인가? 비록 참았지만, 이 원망심은 오히려 더욱 무거워졌다. 내가 원망할수록 그는 더욱 신이 난다. 나는 경각심이 일어나 마음을 조용히 하고 자신을 찾았다. 나는 수련인이고 그는 속인이다! 그가 저러는 것은 나에게 보여주는 것이고, 그가 말한 것은 나의 마음을 향해 온 것이다. 그런데 나는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끊임없이 원망하고 그를 고까워하는데 이는 속인과 같은 것이 아닌가! 이 원망심은 왜 이렇게 제거하기 어렵나. 이렇게 오랜 세월 수련하고 끊임없이 발정념하여 제거하고 한 번 또 한 번 찾고 자신을 찾아도 좀 지나면 또 나온단 말인가. 다시 자신을 찾아서 제거하면 느낌상 없어진 것 같은데 모순과 마주치면 또 나온다. 마치 내가 ‘그것을’ 잊어버릴까 봐 두려워하는 것만 같다. 이렇게 여러 번 반복해도 왜 제거하지 못할까!
뿌리가 어디에 있을까? 이리저리 생각해보면 대법은 못 하는 것이 없다! 나는 대법 속에서 반드시 이 좋지 못한 사람마음을 제거할 수 있다고 단호히 믿었다! 자신이 법 공부가 깊지 못하고 그 층차까지 수련하지 못하여 이 한 층의 법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각해봤다. 수련은 나 자신을 수련하는 것이고 그가 어찌하든 그것은 그의 일인데 아예 말하지 말자! 그가 어떻게 하면 어떠한 것이고 그의 옳고 그름에 대해 나는 따지지도 않고 생각하지도 않고 그를 보지 말고 그를 원망하지 말고 나 자신을 보며 자신을 찾고 자신을 수련하자. 내심에서 그에 대한 일체 원망을 포기하고 큰 일이건 작은 일이건 내가 받아들일 수 있건 없건 모두 따지지 않고 이 마음을 움직이지 않겠다!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을 포함해 나한(羅漢)을 따라 배워 늘 허허 웃어버릴 것인데, 이 원망심을 제거할 수 있는지를 보겠다!
이렇게 해서 마음은 이 표준에 따라 천천히 매 하루의 생활 속에 실천했는데, 점차 많이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남편이 뜨거운 물을 트는 것을 보아도 느낌이 없고 보일러가 울려도 정상적인 느낌이었다. 우리 사이의 교류에도 변화가 생겼는데, 남편의 말투가 사람을 거스르게 하지 않았다. 집안일에 대해 나는 남편에게 도와달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남편은 내 얼굴이 웃는 모습인 것을 보고 화가 적어지고 많이 편안해졌고 게다가 앞장서서 가사를 더 분담했다. 이때 나는 신기한 것을 발견했다. 그의 어떤 점을 원망할 것인지 생각나지 않은 것이다. 완고했던 원망심이 진짜로 느껴지지 않았고 단지 마음이 홀가분하고 많이 편안해진 것을 느낄 뿐이었다.
그날 나는 ‘정진요지-무루(無漏)’ 이 한 편의 경문을 펼쳤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음(忍) 속에 버림(捨)이 있는 것으로, 버릴 수 있음은 수련의 승화이다.” 이 한마디를 보았을 때 이 ‘버림(捨)’이라는 글자가 그토록 크게 부각되고 그토록 눈에 띄었다. 마음속으로 단번에 알게 되었다. 사부님께서 오늘 내게 짚어주심으로써 이 ‘버림(捨)’의 내포를 깨닫게 해주신 것이구나! 이 한마디를 늘 외웠는데도 전에는 이 ‘참음(忍)’만 중시하고 오히려 ‘버림(捨)’ 이 한마디의 무게를 홀시했으니 수련은 더욱 논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오늘 사부님께서 나에게 이 ‘버림(捨)’을 부각해 주시어, 나의 이 한 단락 실질적인 수련과 결합하여 깨닫게 하신 것이었다. 버리는 것이 전제조건이고 근본이었다. 오로지 버릴 수 있어야 그 참음이라는 것이 비로소 수련자의 참음인 것이고, 그래야 진정으로 승화하고 제고한 것이다. 오! 이는 마침 내가 최근 원망심을 닦아버리는 과정에서 고달프게 생각하고 어쩔 줄 몰라 하던 시기에 내가 위사위아의 염두를 포기하도록 핍박했고, 자신을 수련하고 자신을 찾게 하고, 모두 자신을 보도록 해서 지나온 길이 아닌가. 이것이 실제로 버린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하자 갑자기 눈앞이 반짝하고 밝아졌다. 마치 사부님께서 창문 하나를 열어주신 것 같았다. 아! 원래는 현묘함이 여기에 있었구나! 단번에 나의 이 20여 년간 한 번 또 한 번 마난 속에서의 의혹을 열어주셨고, 그렇게 많이 ‘왜 그럴까’ 했던 것에 대한 대답이다. 이때 나의 마음은 진짜로 슬프면서 또 기뻤다. 슬픈 것은 자신이 진지하게 법 공부를 하지 않고 법을 잘 이해하지 못해 제 위치에 도달되게 수련하지 못해서 법을 보지 못한 것이고, 기쁜 것은 사부님께서 내가 이 마음을 제거하려는 신심(信心)이 있는 것을 보시고 나에게 이런 수련의 길을 배치해주시어, 결국 이 한 층의 법리를 보게 해주신 것이다.
이때 비로소 명백해졌다. 이번에 진정으로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눈을 자신에게 돌려서 진정으로 버릴 수 있었고, 그런 위사위아한 원망심을 버릴 수 있었는데, 내심에서 진정하게 자신을 닦았기에 사부님께서 더 높은 법을 나에게 짚어주신 것이다. 동시에 자신의 용량도 더 커졌고 수련에서의 고달픔과 즐거움, 미묘함과 수승함을 깨닫게 해주셨다. 나는 대법제자의 수련에서 매 한걸음의 제고와 승화에 모두 얼마나 많은 사부님의 심혈과 보호, 무량한 자비가 들어있는지 더더욱 깊이 체험했다. 자신이 잘 수련하지 못해 마음속으로 부끄러웠다.
26년을 수련했고 이 수확은 비록 늦어졌지만, 여전히 수련의 길에서 또 새로운 돌파가 있게 되어 무척 다행스럽다. 사부님께서 걸음마다 보호하시고 자비롭게 짚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울러 남편을 포함해 나에게 마난(魔難)을 만들어준 모든 분께 감사드립니다. 그 속에는 남편도 포함된다.
여기까지 쓰자 사부님의 ‘홍음’에 있는 시사가 문뜩 떠올랐다. “속인은 오로지 신선이 되고자 하나 현묘한 뒷면에 서글픔 있네 마음 닦고 욕구 끊어 집착을 버려야 하건만 난 속에 미혹되어 푸른 하늘만 탓하누나”[4] 오늘 이 시를 다시 읽으면서 아주 깊은 감촉이 있었고 새롭게 인식한 바도 있었다.
내가 최근에 원망심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일부 체험한 것이다. 적절치 못한 곳은 수련생들께서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기 바란다. 허스(合十)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무루(無漏)’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경지’
[4]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누가 과감히 속인마음을 버릴 수 있으랴’
원문발표: 2021년 5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5/8/4241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