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나는 몇 년 전 사악의 검은 소굴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한 노인 복지주택에서 관리 업무를 맡을 기회를 얻었다. 처음에는 완전히 갈팡질팡했지만, 이직할 때는 아주 능숙해졌다. 그 과정에서 사존의 자비로운 가지를 깊이 체득하게 되었다. 나는 속인의 업무를 잘 하는 것도 법 실증과 수련의 일부분임을 깨달았다.
갈팡질팡하다가 방향을 찾다
내가 노인 복지주택에 막 도착했을 때는 사회 경험이 거의 없었고, 사악의 검은 소굴에서 수년간 박해를 받은 데다, 사회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몰랐다. 나는 원래 기술자 유형의 사람이었으므로 사람들과 접촉하는 업무를 맡게 되니 단번에 머리가 멍해졌다.
노인 복지주택을 관리하려면 사장, 돌보미, 노인, 가족 등 여러 사람과 협조해야 했다. 나아가 노인 복지주택의 일상 업무는 대부분 집안의 일상적인 자질구레한 일이어서, 나는 마치 몇십 명의 대가족을 데리고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가정을 꾸린 적이 없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너무나 생소했다.
당시 내 생각은 이랬다. 사장이 나를 신임하고, 사장의 대가족이 모두 내가 대법 제자인 것을 알고 있으니 무슨 일이든 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랐다. 노인 복지주택 관리 업무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먼저 관찰해보자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사장을 제외하고는 내가 관리를 맡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모두 나를 복지주택 입주민으로 알았다. 나는 매일 계단을 올라가 각 방을 돌며 상황을 관찰했다. 며칠 후, 나는 눈에 띄는 몇 가지 문제를 발견했다. 우선, 너무 비위생적이었다. 복도에 들어서기만 하면 화장실 냄새가 났다. 이는 어떤 돌보미의 노인을 대하는 태도가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또 돌보미 중에 성격이 나쁜 노인은 잘 대우해 주지만, 반대로 성격이 좋은 노인에게는 그리 잘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때는 내가 관리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계속 늘고 있었다. 나는 날마다 작은 노트를 들고 내가 본 문제를 기록했다. 어느 탁자를 칠해야 하는지, 정황상 가족과 연락해야 하는 노인이 누구인지, 돌보미와 의논해야 할 문제가 무엇인지, 어떤 청소도구를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등등이었다. 크게는 월말에 돌보미의 임금을 어떻게 주는지, 작게는 누구에게 걸레가 모자라는지 등등……. 각종 사소한 일을 기록했다가 잇달아 실행에 옮겼다. 항상 한밤중에 갑자기 한 문제가 생각나면 수첩을 꺼내 기록했다. 처음 얼마간은 복지주택에서 24시간을 보냈고, 빨리 업무를 익히고 싶어 걱정이 많았다.
환경과 분위기를 쇄신하다
나는 위생 상황을 개선하기로 하고, 돌보미들에게 매일 위생 임무를 정해주었다. 당시 주간 조에는 돌보미 세 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노인이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몇 개의 방(아래층)을 책임졌고, 나머지 두 명은 노인이 스스로 생활하지 못하는 위층 방 몇 개를 맡고 있었다. 아래층의 위생은 늘 괜찮았는데, 위층의 돌보미 두 명 중 한 명은 사장의 친척인 B 여사(노인에게 불친절한 사람)였고, 사장이 그녀를 아주 좋아했다. B 여사는 나의 말을 따르지 않았고, 위생을 개선하지 않았다. 다른 돌보미인 A 여사는 노인을 각별히 대했다. 그래서 매일 바빠서 여유가 없었고, 위생상태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내가 속수무책인 상황에 부닥쳐 있을 때, C 여사가 새로 들어왔다. C 여사는 이전에 호텔에서 청소했다. 그때부터 좋아졌다. C 여사에게 방 몇 개를 할당하자 C 여사는 맡은 방을 대단히 깨끗하게 정리했고, 화장실을 매일 솔로 닦았다. C 여사가 모범을 보이자 다른 몇몇 돌보미의 위생상태도 따라왔다. 어느 날, 사장이 나에게 농담을 했다. “C 여사는 대법 사부님께서 자네한테 보내주신 천사야. 자네는 위생을 개선할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잖아? 이렇게 해결됐네.” 나는 깊이 공감했다. 틀림없이 사부님께서 내가 이 일을 잘 하려고 생각한 것을 보시고 배치해 주신 것이었다.
위생이 개선되자 가족의 만족도가 대폭 증가했고, 사장도 아주 만족했다. 당시는 10월에서 11월 사이였다.
매월 15일에는 임금을 지급했다. 10월 14일, 사장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급여 표를 만들라고 했다. 나는 이전에 한 적이 없어 이전에 사장의 딸이 만든 것을 보며 대충 모방해 만들었다. 그런데 하나의 문제가 보였다. 이전 급여 표의 성과 수당에는 돌보는 노인의 수만 반영되어 있었고, 서비스 품질은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다음 달부터 노인에 대한 서비스 태도 항목을 만들어 명세서에 넣고 싶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현지의 노인 아파트에서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 모두 돌보미의 안색을 살피며 처신을 한다는 것이었고, 그것은 전통 도덕과 어긋나는 것이다. 나는 기풍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사장에게 내 생각을 말하자 사장은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임금을 지급할 때, 나는 다음 달의 성과 수당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하고, 그 항목을 성과 수당에 반영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돌보미들에게 오늘부터 시작해 매일의 위생상태와 노인에 대한 태도를 포함한 업무 태도를 관찰하겠다고 말했다.
11월부터 서비스 태도가 좋으면 장려금을 지급했다. 그렇게 하자 오래지 않아 기풍이 일신되었다. 노인들이 기쁨을 표하는 가운데 A 여사가 가장 많은 돈을 받았고, B 여사도 노인들에게 많이 조심하게 되었다. 나는 바른 기풍을 가지면 당연히 일을 많이 하게 되며, 노인에게 잘 하는 사람이 돈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B 여사의 이익을 건드렸지만, 그녀는 나에게 원망을 품지 않았다. 사장은 B 여사가 자신에게 한 말을 들려주었다. “사장님이 저런 사람(나)을 찾아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니 정말 대단히 좋네요.”
한번은 내가 다른 수련생에게 이 일을 이야기했다. 나는 내가 만난 사람이 모두 좋았다며, 나의 존재가 B 여사의 이익에 영향을 주었지만, 그녀는 나에게 원한을 품지 않았다고 말했다. 수련생이 말했다. “당신의 마음이 바르고, 이기적인 것이 없으므로 그렇게 될 수 있었을 거예요.”
한번은 아침밥을 푸는데 A 여사가 요리사에게 말했다. “죽을 좀 더 줄 수 있어요?” 요리사는 언짢은 기색으로 거절했다. 나는 아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A 여사는 성실한 사람에 속했지만, 노인에게만 잘 대했고,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사람과는 잘 지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요리사는 A 여사를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또 요리사가 배식할 때, 자신과 관계가 좋은 돌보미에게 좋은 요리를 많이 주는 것을 발견했다. 사실 이는 곧 노인의 식량을 이용해 자기 지위를 보호하는 행위였다.
이렇게 바르지 못한 것은 이후 나의 감독하에 바로잡혔다. 또 이전에는 돌보미들이 노인의 샴푸를 썼고, 나중에는 모두 없어졌다. 나는 가족들이 가끔 나에게 뭔가를 주면 모두 사절했고, 회의 시간에 돌보미들에게도 가족의 선물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한 돌보미가 노인 여러 명을 맡는데, 만약 그중 한 노인의 가족에게서 선물을 받는다면 서비스를 제공할 때 그 노인에게 서비스가 편향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선물을 주지 않은 노인에게 불공평한 일이었다.
형세를 바로잡자, 다시 새로운 문제에 부딪히다
첫 달 급여를 지급할 때, 나는 3주를 채운 상태였다. 사장과의 이전 합의에 따라 업무가 궤도에 오르기 전에는 임금을 받지 않았다. 나는 복지주택에서 무료로 거주하면서 돈을 내지 않았고, 그녀도 나에게 임금을 주지 않다가 내가 정말로 한몫을 하게 될 때 임금을 주기로 했다. 당시 나는 먼저 내가 속인 사회에 녹아 들어가고, 속인 사회와 동떨어진 비정상적인 생활 상태에서 벗어나고, 정상적으로 일하면, 기본적인 업무 생존력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 임금은 얼마가 되든 개의치 않았다. 결국, 급여를 지급할 때, 사장은 나에게 완전한 월급을 주었을 뿐 아니라 전화비 100위안까지 주었다. 전화비 100위안은 사장이 앞서 전혀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었고, 내가 전심전력으로 일하는 것을 본 사장이 표창한 것이었다.
나중에 사장은 나에게 입주율 문제를 말하기 시작했다. 내가 취직했을 때는 노인 32명이 입주해 있었다. 나는 사장에게 말했다. “사람을 어떻게 모집해야 하는지 모르는데요.” 사장이 말했다. “병원에 가서 모집하면 되고, 광고를 붙이면 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사장이 말했다. “앞으로 돌보미를 모집하고, 입주 노인에게 입주비를 정해주고, 돌보미에게 얼마를 줄지는 모두 자네가 책임져.” 나는 그 말을 듣고 다시 멍해졌다. 노인 복지주택 돌보미 모집은 특별히 어려웠다. 업무의 성질, 업무 시간과 임금 수준에 제약이 있었으므로 일반적으로 농촌 사람만 이런 일을 희망했다. 그런데 나는 농촌 인맥도 없었다. 노인 모집은 더 힘들었다.
급식을 개선하다
10월 말에 북방 지역 기온이 내려가고, 온기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나는 배식 동선이 너무 길다는 것을 발견했다. 두 층인 데다 모두 길고 긴 복도가 있어, 뜨거웠던 국과 반찬이 뒤에 있는 노인의 그릇에 들어갈 때는 이미 식어 있었다. 노인들은 온종일 아무 일도 없으니 밥을 먹는 것이 곧 큰일이었다. 만약 추운 날 따뜻한 음식을 먹지 못한다면 그 하루의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즉시 커다란 보온 통을 본 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사장에게 내 생각을 말하자 사장은 즉시 보온 통을 사주겠다며, 인터넷에서 사라고 했다. 나는 세 곳의 단가를 비교해 가성비가 가장 좋은 스테인리스 보온 통 몇 개를 샀다.
이후 노인들은 뜨거운 국과 반찬을 먹게 되었다. 노인과 가족들이 모두 몹시 기뻐했고, 사장도 효과에 대해 아주 만족해하면서 자신의 가족에게 내가 노인들을 위해 많은 마음을 쓴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사장에게 보온 통을 사자고 하기에 앞서 이것이 사장의 돈을 쓰는 일인데, 그녀가 돈을 쓸 것인지 의문을 가졌다. 이후 나는 만족을 표하는 가족들에게도 말했다. “이건 사장님이 어르신들께 기꺼이 돈을 쓰신 겁니다.”
위생과 서비스 태도 문제를 해결한 후, 급식에 문제가 나타났다. 이전의 요리사는 복지주택 터줏대감이었고, 사장과 함께 십여 년 동안 일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만드는 음식의 양은 아주 적었고, 식단도 단조로웠다. 내가 사장에게 급식 개선을 이야기하자 이것도 사장의 돈을 쓰는 일이었는데, 뜻밖에 한마디로 승낙했다. 나중에 나는 사장의 여동생(역시 대법 제자)이 사장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것을 들었다. “언니가 이왕 복지주택 관리를 그 사람한테 맡겼으면 시원하게 말을 들어줘. 그렇지 않고 뭐든 언니 말을 듣게 한다면 여전히 약탕기만 바꾸고 약을 바꾸지 않는 셈인데, 그러면 복지주택이 개선되지 않을 거야.” 나는 이것이 사부님의 배치임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단지 내가 하려는 일이 바른 것이었고, 공적인 마음을 낸 것이며, 노인에게 유리하고 사장에게 유리했으므로 사부님께서 나를 도우시어 장애를 제거해 주신 것이었다.
먼저 식단을 짠 다음 요리사와 의논하려 했지만, 요리사는 아주 불만스러워서 했다. 왜냐하면, 식단을 바꾸는 것이 자신의 업무상 어려움을 증가시키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곧바로 사장과 함께 식단을 정했지만, 요리사는 여전히 협조하지 않았다. 우리는 아침 식사에 매주 두 차례 콩소가 든 찐빵을 추가하고 싶었는데, 그러려면 콩을 삶아야 했다. 요리사는 해주지 않았고, 내가 사장과 함께 둘이서 해야 했다. 다른 일부 반찬도 요리사에게 제지를 당했고, 여러 차례 의견이 맞지 않았다.
돌보미들은 모두 주시했고, 어떤 사람은 나에게 눈빛으로 암시를 주었다. 요리사를 대신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급식을 개선하려는 나의 동기가 법에 부합하지 않는 곳이 있는지를 다시 돌아봤다. 급식을 개선하면 노인들에게 틀림없이 좋은 점이 있었다. 나는 복지주택에서 일을 잘하려면 노인을 진심으로 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아가 이렇게 하면 역으로 복지주택도 이익을 얻으므로 사장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나의 동기가 법에 부합했으므로 나는 요리사의 협조 여부에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고, 절대 사장 앞에서 요리사를 평가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장과 함께 많은 문제에 맞서야 했고, 그녀도 속으로 타산이 있기 때문이었다.
얼마 뒤 어느 날 내가 막 퇴근해 집에 도착했는데 사장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 요리사를 찾아봐 달라고 했다. 그녀는 방금 요리사와 말다툼을 했다고 말했다. 나는 사부님의 배치에 다시 감사를 드렸다. 제자에게 분쟁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을 해치려는 마음이 없으니 나로 하여금 이런 모순을 상대하지 않게 하신 것이었다. 곧이어 나는 다시 머리가 아팠다. 어디에서 사람을 찾을 것인가? 내가 아는 사람도 몇 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아버지께서 다니는 직장의 요리사가 마침 쉬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재빨리 전화를 걸었다. 사장은 새 요리사를 보고 만족스러워했다. 그렇게 요리사도 우리 업무에 협조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새 요리사와의 관계에서도 내가 수련할 것이 없지 않았다. 연말이 되자 새 요리사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고기를 사주겠다며 집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집으로 보내주겠다고 하길래 내가 말했다. “아니에요. 주방장님이 이 업무에 적응하실 수 있다면 충분하고, 사장과 노인들이 만족하면 저는 충분합니다. 다른 건 정말 필요 없어요.” 그녀는 거듭 보내려 했고, 나는 거듭 사양했다. 이 일은 나중에 흐지부지됐다.
당시 나는 생각했다. 비록 현재 이 사회에서 일을 소개하면 모두 중개비를 받지만, 나는 중개인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만약 그녀의 것을 받는다면 그녀와의 관계가 더 가까워질 텐데, 그러면 이후에 또 어떻게 공정하고 원칙에 따라 관리할 수 있겠는가?
결국, 오래지 않아 그 요리사는 독단적으로 메뉴를 줄였다. 처음 발견 후, 나는 그녀에게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만약 다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요리가 줄어든 만큼 임금을 깎겠다고 알려주었다. 요리사가 몹시 불만스러워서 하는 것이 보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늘 자기가 나와 관계가 가까우니까 내가 자기편을 들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때 이후로 나에게 음식을 줄 때는 이전처럼 많이 주지 않았다. (사실 나는 앞서 이 문제를 발견했고, 그녀에게 차별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고집을 꺾지 않았고, 나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 나는 오히려 아주 좋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항상 내가 권력으로 사리를 꾀한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때 이후로 요리사는 그릇된 요구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 뒤에는 요리사도 파룬따파(法輪大法)를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요리사에게 노인들의 식사는 반드시 넉넉하게 제공하라고 당부했다. 내가 사장에게 이 일을 알려줄 때, 대법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안을 수련하여 밖을 안정시키다.”[1]의 법리를 말해주었다. 또한, 만약 우리가 성심성의껏 노인을 대한다면 복지주택이 틀림없이 날로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아가 돌보미가 기본적으로 365일 복지주택을 지키며, 특히 많은 농촌 사람이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되는데, 그 가정식이 사실 값싼 것이니 그녀들에게 충분히 제공하면 집에 온 듯한 느낌이 들 것이며, 일할 때 기분이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장은 사실 아주 선량한 사람이었는데, 단지 이전에 관리를 소홀히 해 이런 상황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았던 것이었다.
‘덕이 있으면 자연히 따르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위생, 서비스 태도, 급식, 기풍이 완전히 새로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나는 많은 노인의 가족과 빈번하게 연락하면서 늘 노인의 근황을 알렸다. 당시는 또 위챗을 사용했는데, 우리는 가족들과 위챗 그룹을 만들고, 노인과 복지주택의 근황을 수시로 알렸다. 그런 일에는 많은 시간이 들었지만, 효과가 아주 분명해 복지주택이 정말 하나의 대가족 같은 느낌이 들었고, 많은 가족이 복지주택에 대해 일정한 귀속감도 가지게 되었다.
스스로 생활할 수 있는 노인들은 대부분 성격이 좋지 않았고, 가족들과도 화목하지 않았다. (돌보미의 말을 빌리자면 이렇게 많은 돈을 쓰면서 이곳에 온 사람들이 도리어 모두 가족을 못살게 굴었다) 이런 노인들과 가족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모두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내가 복지주택에 막 왔을 때, 사람들 앞에서 며느리를 크게 욕하는 노인을 만났다. 게다가 그런 노인은 그들 사이에서도 항상 여러 모순을 만들었고, 돌보미를 성가시게 했으므로 돌보미들도 그녀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는 모두 사랑을 받지 못해 성격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인과 가족의 관계를 개선해 주고 싶었고, 그러려면 우리가 노인에게 관심과 사랑을 많이 쏟아야 했다. 나는 돌보미 회의 시간에 가끔 전통문화 속의 작은 이야기를 하면서 그녀들에게 말했다. “노인에게 잘하는 사람이라야 말년에 복을 받아요. 우리 업무는 사실 덕을 쌓기가 아주 쉬운 거예요. 돈을 벌면서 덕도 쌓으니 소중히 여겨야 할 좋은 기회죠!”
사장의 동의를 구한 후, 우리는 각 노인의 생일에 생일축하곡을 방송하고 달걀 국수를 대접했다. (적지 않은 가족이 노인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노인들은 크게 감동했다. 이후 돌보미들은 노인들을 갈수록 잘 대했다. 성격이 좋지 않았던 노인도 나중에는 우리가 자신을 잘 대하는 것을 느꼈고, 가족을 대하는 태도도 좋아졌다. 가족들도 대단히 기뻐했고, 그녀를 만나러 오고 싶어 했다.
복지주택에 함께 사는 노부부가 있었는데, 영감님이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 퇴원 후에 자녀들이 집으로 모셔 가려 하자 영감님이 말했다. “나는 못 가겠다. 너희들이 돌보미들처럼 해주면서 이렇게 인내심을 갖고 대할 수 있겠니!”
또 뇌졸중에 걸린 여자아이 있었는데, 스스로는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나는 아이에게 대법 사부님의 ‘9일 강의’ 동영상을 보여주고, 대법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사람의 도리를 말해주었다. 나중에 그 아이는 스스로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아이 아버지가 큰 감동을 받았다.
노부부 한 쌍은 복지주택에 오기 전에 모두 스스로 생활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들은 함께 복지주택에 입주한 후, 돌보미의 정성 어린 보살핌(생활 시중 외에도 안마, 적합한 운동 장려)으로 정신적 활력을 얻은 덕분에 오래지 않아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됐다. 거의 생활이 불가능했던 다른 노인도 건강 상태가 크게 개선되었고, 정신과 신체가 모두 좋아졌다.
노부부 한 쌍은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되자 비용 문제 때문에 집으로 돌아갔다. 나중에 다시 왔을 때, 한 사람은 생활이 전혀 불가능했고, 한 사람은 반쯤 가능했다. 많은 노인과 가족은 그런 사례를 보면서 우리의 복지주택이 크게 다르다는 것을 정말로 알게 되었다.
짧은 3~4개월 동안 모르는 사이에 복지주택의 입주민 수가 32명에서 58명으로 늘어났고, 비어 있던 방과 침대가 모두 가득 찼다. 나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안을 수련하여 밖을 안정시키다”[1]의 법리를 깊이 체득하게 되었다.
나는 나가서 사람을 모집할 수도 없었고, 사람을 모집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금도 남김없이 오직 노인을 생각하면서 최선을 다해 각 방면의 느낌에 신경을 쓰고, 각 방면의 관계를 바로잡으니 내부 분위기가 화목해지고, 노인과 가족이 만족했으며, 자연히 외부의 인정을 받은 것이었다. 중국 전통문화 속에 전해오는 말이 생각났다. “복숭아나무와 오얏 나무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아래에는 저절로 길이 생긴다(桃李不言,下自成蹊)” 덕이 있는 사람은 자연히 사람들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또 복지주택에 표준 요금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전에는 새로운 입주민이 들어올 때마다 사장이 비용을 정했다. 내가 이어받은 후에는 내가 비용을 정했는데, 줄곧 확실히 정해지지 않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사장의 동의를 얻어 상세한 비용 표준과 입주 노인이 지킬 규칙을 만들어 모든 노인에게 공평한 상태를 확보했다.
연말이 되자 돌보미 수는 내가 왔을 때의 6명에서 9명으로 늘어났다. 나는 사장에게 말했다. “우리 복지주택이 지금 갈수록 좋아지고 있어요. 제가 온 후로 돌보미에게 높은 수준을 요구해서 지난 몇 달 동안 많은 고생을 했는데, 사람들에게 연말 선물을 줄 수 있을까요?” 사장은 흔쾌히 동의했고, 각자에게 담요 하나씩을 사주었다.
사실 돌보미들이 비록 고생했지만, 입주민 수가 증가함에 따라 임금도 적지 않게 올랐으므로 그녀들은 아주 기뻐했다.
복지주택에서 7개월을 보낸 후, 나의 업무가 이미 완전한 궤도에 올랐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업무 성격상 내가 세 가지 일을 하기 위해 많은 시간을 내기가 몹시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 사장에게 이직하고 싶다고 말했다. 사장은 처음에 동의하지 않다가 나의 단호한 태도를 보더니 이직을 하려면 먼저 나와 같은 사람을 찾아서 대체하라고 했다. 나는 가족을 동원해 각 방면의 조건이 이 업무의 성질에 비교적 적합한 사람을 찾아냈고, 보름 동안 업무를 인계한 후, 이직했다.
마지막으로 나는 보름 동안의 임금을 사장에게 돌려주었다. (나중에 입주민 수가 증가함에 따라 임금은 취직 시의 약 두 배로 올랐다) 내가 말했다. “저는 마지막 보름 동안 안 나올 때도 있었고, 그녀의 사람 관리를 도와주기만 했어요. 새로 온 사람이 많은 일을 했으니까 저한테 임금을 주지 마세요.” 사장은 나를 꺾을 수 없자 더는 나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새로운 직장에 취직한 지 한 달이 넘었을 때, 사장이 딸과 사위를 데리고 우리 집으로 차를 몰고 와서는 과일 3상자와 돈 봉투 하나를 주면서 내가 새로운 직장에 취직한 것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봉투를 열어보니 내가 퇴직할 때 돌려준 보름치 임금이었다.
돈과 재물을 바르게 쓰다
나는 돈과 물건을 아주 신중하게 사용했다. 그 보온 통을 사면서 마지막으로 계산할 때, 사장의 딸이 컴퓨터 앞에 와서 지켜봤다. 내가 판매상 몇 군데와 동시에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보온 통의 가격이 몇 위안밖에 차이가 없었다. 내가 조금 싼 곳의 링크를 그녀에게 전달하자 그녀가 말했다. “언니, 이렇게 할 필요 없어요. 얼마 차이가 없어요.”
그때 이후, 사장은 나에게 1천 위안을 주면서 쌀과 달걀을 배달하는 사람에게 지급하고, 평소의 작은 지출을 계산하게 했다. 나는 모든 지출을 장부에 기록했고, 장부는 사무용 책상 위에 두고 누구든 볼 수 있게 했다. 장부상 1천 위안이 소진되면 다시 사장에게 달라고 했다. 나는 기록이 누락되면 내 돈을 그만큼 내어 복지주택 운영에 썼다.
당시 많은 시간이 나는 경우가 몹시 드물었으므로 법공부에 전념하기가 어려웠다. 나는 곧 법을 베껴쓰기 시작했다. 나는 법을 베낄 때 쓰는 연필은 항상 내 돈으로 샀고, 복지주택의 사무용 연필을 사용하지 않았다.
나는 물건을 쓸 때 아주 신경을 썼다. 복지주택에서 산 대나무 섬유 행주는 하나에 4~5위안이었다. 나는 돌보미에게만 쓰게 하면서 아주 알뜰하게 관리했다. 언제 누구에게 주었는지, 언제 다시 주어야 하는지, 항상 마음속으로 계산을 했다. 옷을 세탁할 때는 인터넷을 뒤져 찾아낸 가성비가 가장 좋은 벌크형 가루 세제를 썼다.
한번은 사장이 내 방에 왔는데, 내가 집에서 가져온 헌 속옷을 잘라 만든 걸레로 탁자를 닦고 있었다. 그녀가 나에게 물었다. “대나무 섬유 걸레는 왜 안 써?” 내가 말했다. “아까워서요.” 사무실에서 파기하는 인쇄지는 한 면이나 반 면에 아직 글을 쓸 수 있었다. 나는 모두 버리지 않고 잘라서 메모지로 썼다. 사장이 보고 말했다. “큰 회사는 모두 이렇게 물건을 알뜰하게 쓰지.”
사존의 가지에 감사드리다
지난 7개월을 회상하면 곤란한 일을 겪을 때마다 늘 사존께서 해결할 수 있게 도와주셨다. 나에게 가장 어려웠던 일은 노인과 돌보미와 요리사를 모집하는 일이었고, 모두 사부님의 배치하에 가볍게 해결됐다. 한번은 야간 근무자가 급히 필요해 임의로 현지의 정보 플랫폼에 모집 광고를 냈고, 결국 적합한 사람을 채용하게 되었다. 당시 많은 응모 전화를 받았는데, 사장의 딸이 말했다. “이 플랫폼에서 사람을 모집하는 게 이렇게 쉬웠네요!” 그러나 내가 이직한 후, 사장의 딸이 다시 그 플랫폼에 모집 정보를 올렸는데, 응답하는 사람이 아주 적었다. 나는 그제야 당시에 사부님께서 나를 도와주셨다는 것을 알았다.
안을 향해 찾다
그 과정에서도 자신을 실증하는 것처럼 일부 잘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다. 내가 줄곧 가족에게 말했듯이 모든 개선의 공은 마땅히 사장과 돌보미에게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어떤 노인은 돌보미들이 마음을 쓴 덕분에 내가 자신들을 이해하게 됐다고 생각했고, 나는 마음속으로 은근히 불편함을 느꼈다. 당시에는 이 마음을 붙잡거나, 이것이 어떤 마음인지를 자세히 살피거나, 수련해 버리지도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버리지 않은 이 마음 때문에 모순이 하나 발생했는데, 당시에는 또 내가 억울하다고 생각했다. 여러 해 후에야 모순의 원인과 결과를 아주 똑똑히 알게 되었는데, 바로 자신을 실증하려는 마음이 건드려져 일어난 것이었다. 이전에는 줄곧 법을 실증하는 항목을 할 때만 자신을 실증하는 마음이 생긴다고 여겼는데, 사실은 일상생활과 업무 중에 모두 이 문제가 있었다.
복지주택에 막 왔을 때, 사장은 나에게 진상을 알리지 말라고 했다. 내가 말했다. “이건 저한테 보증서를 쓰라는 뜻인가요? 이건 안 되죠.” 그런데 나는 적당한 시기와 주변 사람의 반응을 살펴야 했고, 주변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아주 딱딱하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하려니 걱정이 되었고, 처음에는 내가 금방 와서 세상사를 잘 모르니 당연히 노인과 가족에게 좋게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한동안 진상을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업무 상황이 점점 좋아진 후에도 여전히 법 공부가 적고, 정념의 장이 강하지 않아 일부 가족과 노인에게만 진상을 알렸다. 제때에 진상을 알리지 못한 일부 노인과 가족에게는 이후에도 기회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몹시 유감스러우며, 그들이 진상을 들을 기회가 있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
이런 경험을 써내어 교류하고자 하는 것은 사악의 이번 박해 속에서 학업을 중단하고, 직장을 잃고, 박해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환경에서 장기간 밖으로 떨어진 수련생들에게 전하는 것으로, 우리의 희망이 대법에 부합하기만 하면 애초에 일을 할 때 기꺼이 감당하고, 심성을 닦고, 득실을 따지지 않으며, 억울한 일과 고생을 받아들일 수 있고, 일하면서 갈수록 너그러워진다는 것이다.
급히 적은 글이니 바르지 않은 곳이 있다면 수련생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안을 수련하여 밖을 안정시키다’
원문발표: 2021년 4월 3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big5.minghui.org/mh/articles/2021/4/30/42266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