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홍콩 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홍콩 대법제자이고 1997년에 법을 얻었습니다. 1999년 중공이 파룬궁(法輪功)을 미친 듯이 박해하기 시작한 후 저는 2000년 여름 저는 대법에 대해 공정한 처사를 요구하기 위해 두 살 된 쌍둥이를 데리고 폭염속에 베이징 천안문 광장으로 갔습니다. 천안문 광장에서 저는 아이들을 안고 대법 현수막을 펼쳤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21년이 지났습니다. 하지만 천안문 광장에서 법을 수호한 여정이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천안문 광장, 저에게 알려주세요(天安門廣場,請你告訴我)’라는 노래를 들을 때마다 저는 울음을 참을 수 없습니다. 마음속으로 묵묵히 생각했습니다. 그때 천안문 광장에 갔던 수련생들, 지금 다들 잘 안녕하신지요?
홍콩 진상 거점 수련생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빌려, 영광스럽게 21년 전 천안문 광장에서 대법에 대한 공정한 처리를 요구했던 경험을 교류합니다. 수련생 여러분과 서로 격려하고 법연(法緣)을 소중히 여기며 정진하여 착실하게 수련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대법을 수련해 새 생명을 얻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병을 너무 많이 앓았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병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가족도 온갖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온 가족이 자주 돌아가며 병원에 갔습니다. 우리 집안은 병원비 때문에 빚이 산더미같이 쌓여서 온 가족이 늘 근심 걱정에 덮여 살았습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저는 학업을 그만두고 타지에 가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피로와 영양실조로 원래 약하던 몸이 더 허약해졌습니다. 저는 온몸이 병이었고 후유증까지 앓았는데, 결혼하고는 의사가 말하길 제 몸 상태로는 임신이 불가하다고 했습니다. 저는 병 때문에 식사도 못 하고 잠도 자지 못했는데 전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부모님은 부처님을 믿었는데 본래 성품이 아주 선량하셨습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오랫동안 옆집에 사는 숙부에게 괴롭힘을 당했는데, 우리 남매들에게도 욕하고 때리는 것이 일상사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 집 재산도 함부로 가져가고는 우리에게 누명을 씌우곤 했습니다. 제가 법을 얻기 전, 우리 가족은 이미 더 참을 수 없어 숙부 일가와 한바탕 크게 싸울 지경까지 갔습니다.
1997년 7월의 어느 날, 저는 공원에서 가부좌하고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을 보게 됐는데, 아주 평화롭고 평온해 보였습니다. 저도 그 여사님들과 함께 연공 하고 싶은 마음이 나와서 바로 제일 나이가 많아 보이는 노부인에게 물어봤습니다. “이 공법을 연마하려면 얼마 정도 드나요?” 노부인은 “돈을 받지 않아요. 오직 진심으로 와서 연공 하면 어떤 병이 든 나아질 것이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다음 날 공원에 가서 연공 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연공 했을 때 아주 미묘하고 성스러운 느낌을 받았는데, 온 세상에 저 혼자만 있는 것 같았습니다.
연속 이틀, 삼일 공원에 가서 연공 하자 제 몸에서는 곧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밥이 넘어가지 않고 잠도 들 수 없는’ 사람이 잘 먹고 잘 자고 찬 음식도 즐겨 먹을 수 있는 사람으로 변한 것입니다.
어머니도 저와 같은 날 법을 얻으셨는데, 수련하면서 어머니 몸에 있던 질병이 모르는 사이에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수련을 시작한 후로 몸이 제비처럼 가벼워졌을 뿐 아니라 기분도 유쾌해졌습니다.
파룬궁은 저와 어머니의 인생관과 가치관을 바꾸어주었고, 우리는 ‘진선인(真·善·忍)’의 법리로 일언일행을 가늠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삼촌 일가에 대한 원망을 내려놓았고 양가 사이의 위기를 없애버렸습니다.
더 신기한 것은 파룬궁을 수련한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았을 때 제가 뜻밖에도 임신해서 1998년에 예쁜 쌍둥이를 낳았다는 것입니다. 쌍둥이는 아주 희고 말쑥하게 생겼는데 보는 사람마다 예뻐했습니다. 몇 개월 후에 곧 ‘엄마’를 불렀고 연공 음악을 듣더니 곧 우리를 따라 연공 동작을 배웠습니다.
온 가족이 대법의 신기함에 감탄했습니다. 친족들은 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난 변화를 보고 잇따라 제게 와서 파룬궁을 배웠습니다. 남동생은 또 림프종에 걸린 친구를 데려와서 파룬궁을 배우게 했는데 그는 수련한 지 몇 개월 후에 신기하게 건강을 회복한 뒤 아내도 수련에 들어섰고 1년 후에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제 언니는 몇 년 동안 병원에 다녀도 낫지 않았던 비인두암이 파룬궁을 수련하고 1년 후에 기적같이 나았습니다!
그때 저와 가족은 매일 법 속에서 정진하고 대법의 혜택을 입었습니다.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때였습니다.
법을 수호하는 간절한 마음에 베이징으로 가다
1999년 7월 중공이 미치듯이 파룬궁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 도무지 알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공법을 모독할 수 있습니까? 저는 곧 가족들에게 아이를 데리고 베이징에 가서 대법에 대한 바른말을 한마디라도 해야겠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가족 모두는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남동생은 심지어 한동안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저를 지켜보았습니다.
당시 저는 천안문에 가서 파룬궁에 대한 공정한 처사를 요구하고 싶어 아주 급한 마음이었습니다. 계속 온갖 방법으로 가족을 설득하려 했습니다. 그때는 마음속에 항상 이런 일념이 있었습니다. ‘비록 생명을 바치더라도 베이징에 가서 법을 수호할 것이다!’
2000년 6월, 쌍둥이들이 두 살이 되었습니다. 저는 가족을 설득해서 6월 22일, 언니와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온갖 어려움을 지나 베이징에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우선 베이징 근교로 갔는데, 현지 수련생이 타지에서 법을 수호하러 베이징에 온 수련생들을 위해 임시 거처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미 많은 수련생이 거기 계셨습니다. 그곳은 아주 간고한 환경이었는데, 다들 오직 밥과 배추, 오이만 먹으며 수돗물을 마셨고 선풍기도 샤워할 곳도 없었고 잠도 그냥 바닥에서 잤습니다. 그러나 괴롭다거나 힘들다는 소리를 하는 수련생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다음 날 저는 곧 언니와 또 다른 남자 수련생과 함께 아이를 데리고 천안문 광장으로 갔습니다.
현수막을 펼쳐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서다
오후 1시에 섭씨 40도가 넘는 고온을 무릅쓰고 천안문 광장에 도착했습니다. 원래 천안문 성루에 올라가 현수막을 펼치고 싶었지만, 당시 중공 악당이 사존님의 법상을 바닥에 두어 성루에 오르려면 사존님의 법상을 밟을 수밖에 없도록 해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장 금수교로 갔습니다. 그때 금수교 파라솔 밑에 경찰 한 명이 서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이 경찰이 자리를 비켜주면 좋겠다. 그럼 현수막을 좀 더 오래 펼칠 수 있을 텐데.’ 이 생각이 나오니 그 경찰이 갑자기 자리를 떴습니다.
저와 언니는 금수교 위에 서서 한쪽 팔에 아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 현수막을 펼쳤습니다. 현수막에는 ‘불법은 끝이 없다(佛法無邊)’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함께 간 남자 수련생은 제 뒤에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쓴 현수막을 펼쳤습니다.
현수막을 펼친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았습니다. 저는 생사가 이미 제 발밑으로 밟힌 것을 느꼈는데, 처음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땅 위에 우뚝 서다’는 말이 어떤 것인지 느꼈습니다.
얼마 뒤 경찰 몇십 명과 사복 경찰이 곧 사면팔방에서 오는 파리 떼처럼 우리에게 몰려오더니 아주 빠르게 우리를 둘러싸고 현수막을 빼앗으려 했습니다. 저는 큰소리로 “이것은 제 물건입니다. 빼앗으려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경찰은 현수막에 쓴 글자만 보고 돌려주겠다면서 아이를 다치게 하지 말자고 했습니다. 저는 그들을 상관하지 않고 현수막을 꼭 쥐고 놓지 않았습니다. 남자 몇 명이 저를 둘러싸고 한 명이 제 손가락 하나씩을 쥐어 잡고는 현수막을 빼앗아갔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또 우리를 성루 옆에 있는 작은 건물에 데려가 구타했습니다. 그들이 끝없이 언니의 뺨을 갈기는데 저는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마음속으로 사존께 말했습니다. ‘사존님 죄송합니다. 박해가 시작된 지 2년째인 지금에야 제가 겨우 왔습니다. 한 번 서기만 하면 되는데 왜 진작 오지 않았을까요.’ 한 경찰이 제가 우는 걸 보더니 와서 저를 발로 한 대찼습니다. 독한 발길에 가슴팍이 너무 아팠지만, 끝까지 제 현수막을 돌려달라고 했더니 경찰은 정말로 돌려줬습니다.
정문 지국에서 마음의 소리를 호소하다
경찰은 나중에 우리를 베이징시 정문 공안 지국으로 납치했습니다. 공안 지국은 거의 방마다 경찰이 천안문에서 불법으로 잡아 온 대법제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그들은 우리도 어느 방으로 데려가더니 벽에 붙어 쪼그리고 앉으라고 했습니다. 저는 쪼그리고 앉지 않고 오히려 의자에 앉았습니다. 방 안에는 이미 어른 세 명과 아이 세 명이 모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는데 저는 그들에게 일어나시라고 했습니다.
당시 바닥에는 젊은 남자 수련생이 한 명 있었는데 경찰들이 온몸을 현수막으로 꽁꽁 묶어놨습니다. 손과 발이 몸 뒤로 젖힌 채로 묶였는데 자색으로 변해있었습니다. 몸과 얼굴에는 온통 경찰이 짓밟은 발자국이 있었고, 밟혀서 위액마저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이 남자 수련생을 묶은 현수막을 풀려고 시도했습니다. 우리를 감시하는 경찰이 제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저를 곤란하게 하지 마세요.” 저는 한편으로는 그에게 진상을 알리고 한편으로는 남자 수련생에게 음식을 조금씩 먹였습니다. 저는 경찰에게 말했습니다. “그(이 남자 수련생)가 화장실에 가야 해서요. 꼭 풀어줘야 해요.” 이때 남자 수련생이 제게 말했습니다. “아주머니, 우리는 정정당당해야 합니다.” 저는 곧 알아들었습니다.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당당하고 엄숙하게 경찰에게 이 남자 수련생을 풀어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경찰은 결정하지 못하고 중간관리자 두 명을 데려왔습니다. 이 두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남자 수련생이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면서 발로 찼습니다. 저는 그들을 막아서서 남자 수련생을 풀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저의 당당하고 엄숙한 모습을 보고는 총책임자를 데려왔습니다. 그는 비대한 중년 남자였는데 그의 뒤로 또 많은 경찰이 따라서 방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저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렇게 귀여운 아이들이 있는데 집에서 행복하게 살면 되지 이 더운 날 여기까지 와서 뭘 하는 거요?”
저는 경찰들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그저 바른말을 하러 왔습니다. 저는 파룬궁을 수련하고 몸이 건강해진 덕분에 이 예쁜 두 아이를 갖게 된 것입니다. 파룬궁이 제 몸을 건강하게 만들고 좋은 사람이 되게 해주었는데, 당신들은 어째서 우리 사부님을 모험하고 대법을 모함할 수 있습니까? 저는 우리 사부님을 위해 공정한 말을 하고 장쩌민(江澤民)에게 공정한 처리를 요구하러 왔습니다! ‘진선인(真·善·忍)’마저 사악하다고 한다면 무엇이 바른 것입니까?”
쌍둥이는 울지도 않고 투정도 부리지 않았고, 앳된 목소리로 거기 있던 경찰들을 ‘아저씨’, ‘할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당시 전혀 두렵지 않았고 정정당당하게 경찰들에게 진상을 말했습니다. 말하는 과정에서 저는 그들의 명백한 일면이 열심히 듣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 경찰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베이징에 오시면 어떡합니까! 베이징은 정부의 얼굴이지 않습니까. 파룬궁이 좋다면 집에서 연마하면 되죠. 우리는 당신들이 좋은 사람인 것을 압니다. 우리도 밥그릇 때문에 어쩔 수 없습니다. 이는 위에서 내려온 지시입니다.”
저는 말했습니다. “당신들이 어쩔 수 없더라도 정의와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당신들은 파룬궁을 연마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 좋은 사람을 이 모양으로 묶은 것입니까!”
경찰들은 제 말에 말문이 막혀 모두 나갔습니다. 그 후에 저는 수련생 몇 명과 처음의 그 경찰과 함께 남자 수련생을 묶은 현수막을 풀었습니다. 아주 오래 걸렸습니다. 남자 수련생은 손발에 감각이 없었고 움직이지도 못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벽에 기대라고 하고서 물과 음식을 조금씩 먹였습니다.
이때 중간관리자 두 명이 방에 들어와서 말했습니다. “아이들을 봐서 당신들은 가세요.” 저는 그들이 수많은 대법제자가 끊임없이 사부님과 대법을 수호한 장거를 보며 감동하였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무사히 돌아와 수련생들이 감탄하다
우리는 정문 공안 지국에서 나온 뒤 우여곡절 끝에 임시 거처로 돌아갔습니다. 거처에 있던 타지 수련생들은 우리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전 과정을 말해주었는데 수련생들은 매우 감동했고 또 아주 고무적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자기도 다음 날 천안문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수련생 한 명은 저를 데리고 다른 방에 갔습니다. 방문을 여니 눈에 들어오는 것은 방안에 가득 찬 각양각색의 여행 가방이었습니다. 수련생은 말했습니다. “이 짐의 주인들은 모두 천안문에 갔지만 돌아온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짐들을 보니 마음속에 온갖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21년을 지나오면서, 당시 온 방 안에 가득했던 짐들이 생각날 때면 마음속으로 생각합니다. ‘옛적의 수련생들이여, 안녕하신지요?’
집에 돌아오는 길에 중생을 구하다
우리는 순조롭게 기차표를 사고 곧 집으로 돌아가는 열차에 탔습니다. 기차에 있던 승객들이 다들 우리 쌍둥이를 예뻐했습니다. 온 객실의 승객들이 번갈아 가며 쌍둥이에게 먹을 것을 갖다 줬는데 저는 곧 이야기를 나누면서 진상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차 안의 승객들에게 말했습니다. “저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들이 예쁜 것만 보지 마세요. 원래 저는 온몸이 병이었는데 파룬궁을 수련한 덕분에 이 두 아이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저는 직접 혜택을 본 사람입니다. 우리가 연공 하는 것은 몸을 건강히 하고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인데 어떻게 중공이 우리를 X교라고 비방할 수 있나요? 저는 이번에 아이들을 데리고 장쩌민을 찾아가 진상을 알리려 했습니다. 대법 사부님을 위해 공정한 처리를 요구하고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승객은 저에게 물었습니다. “무섭지 않았어요? 천안문에 경찰들이 아주 많던데요.” 저는 말했습니다. “우리를 잡아갔는데, 경찰들에게 진상을 알렸더니 아이들을 봐서 풀어주겠다고 하더군요. 우리는 곧바로 정정당당하게 나왔답니다.”
돌아오는 길에 객실 안에 있던 사람들도 열심히 제게서 대법 진상을 들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뒤 저와 가족들은 중공에 의해 ‘9족을 연루시킨’ 듯한 박해를 겪었습니다. 하지만 사악이 아무리 박해해도 저는 끝까지 신사신법(信師信法)하고 정념정행(正念正行)하여 사존의 자비하신 보호 속에 걸어왔습니다.
4년간의 박해 끝에 저는 드디어 2003년 정정당당하게 홍콩에 건너와, 홍콩 진상 거점에서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도하게 되었습니다. 매일 진상 거점에서 대법 현수막을 펼칠 때면 그날 베이징 천안문에서 현수막을 펼쳤던 때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홍콩에 있는 나날도 그때 베이징에서 집으로 돌아가던 기차에서 승객들에게 진상을 알리던 때와 같았습니다: 저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중생을 구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짧은 시 하나로 수련생 여러분과 서로 격려하고자 합니다.
천안문 광장에서 법을 수호한 여정을 회상하며
대법을 수련하여 새 생명 얻고
법을 수호하는 마음 간절해 경성(京城)에 갔다네
현수막 펼쳐 하늘 떠받치고 땅에 우뚝 서
정문 지국에 마음의 소리를 호소하네
평안히 돌아오니 동수(同修)들 감탄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중생을 구하네
사존님 감사합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2021년 홍콩 연공장 교류문장 원고)
원문발표: 2021년 3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21/3/19/42215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