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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과 수구(修口)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요즘 들어 수구(修口)의 중요성을 아주 깊이 느꼈다. 입을 열기만 하면 시비와 옳고 그름이 생기고 영향이 나타나며 심지어는 부정적인 영향이 수련생들 사이에서 전해졌다.

왜냐하면 항상 한가지 염두가 있어야만 말하게 되는데 이 염두는 어느 수련생이 한 방면에 대해 형성된 자신의 인식과 관념이지, 그 수련생의 진실하고 완전한 체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자신의 사고방식에서 부족함을 폭로하기 위해 나에게 펼쳐 보인 것일 수도 있는데, 본인이 이런 ‘좋지 않은’ 부분을 어떻게 대하고 어떤 일념을 움직이는지 보는 것이다.

밀레르빠 부처님의 수련 과정에서 그의 스승은 산 아래로부터 돌을 메고 산 정상으로 올라가 집을 짓게 하고는 금방 허물게 하고, 또다시 산 아래로 돌을 나르게 시켰다. 이것을 여러 번 반복했는데 이 견디기 힘든 시련을 겪으면서도 밀레르빠는 자신의 죄업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며 스승이 너무 이치에 맞지 않는다거나 조령석개(朝令夕改: 아침에 명령을 내리고 저녁에 바꿈)하다고 밖으로 찾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의 현재 가정 시련을 포함한 모든 난은 자신의 부족함과 업력 때문으로, 상대방은 그토록 괴로워하고 거칠며 고통스러워하고 불쌍함 등으로 엄폐해 나에게 표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진정으로 높은 표준으로 자신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항상 사람의 표면적인 시비와 높고 낮음의 시선으로만 바라봐서 좀처럼 제고되지 않았다. 사실은 나에게 빚을 갚고 단련하며 인간의 관념과 사고방식을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오랫동안 잘못을 고집하며 깨닫지 못했다!

나는 왜 다른 수련생이 표현하는 부족한 점을 영원히 자비롭고 관대하며 즐겁게 대할 수 없었을까? 또한 다른 수련생과 중생의 소중한 불성(佛性)의 일면을 나는 왜 소중히 여기지 못했을까?

이 몇 년간 간격이 아주 많이 벌어진 그런 (친척) 수련생들이 나에 대해 오해하고 있을 때 왜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못했을까? 서로 간에 오해와 간격 장애를 조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왜 나는 겸손하고 인내심을 갖고 선의(善意)로 허심탄회하게 소통해 간격을 즉시 없애 구세력이 틈을 타지 못하도록 하지 못했을까? 타인이 부족해도 그것 또한 잘 수련되지 않은 사람의 상태일 뿐인데 왜 수련생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을까? 왜 그 부족한 점을 붙잡고 놓지 않으며 그들을 무시했을까?

나는 대법제자이며 정법시기 대법제자다.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배치하신 위덕은 역사상 세간에 내려와 사람을 구한 그런 각자(覺者)의 위덕보다 큰 것이다. 자신에 대한 요구 표준은 마땅히 무엇이어야 할까?

제자가 어리석어 사부님께 항상 노심초사하시게 했다. 제자는 앞으로 반드시 엄격하게 자신을 요구해 더 잘 할 수 있도록 사존께서 자비롭게 가지(加持)해 주시기 부탁드리며 사부님의 은혜에 감사드린다!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관점만을 대표할 뿐, 옳고 그름은 글쓴이 개인의 책임이므로 독자 스스로 헤아리기를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4월 6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1/4/6/422975.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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