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속인사회에서 사람의 나이는 노년 단계에 들어가면 ‘늙었다[老]’와 떨어지지 못한다. 중국에서는 사회, 회사, 이웃, 친척, 친구 등이 호칭에 일반적으로 ‘라오(老)’를 붙혀 구별, 제시, 존중의 뜻을 나타낸다. 심지어 가족 간 호칭도 변한다. 부부는 서로 라오반(老伴: 영감, 할멈)이라고 하고, 자녀는 라오바(老爸: 늙은 아버지), 라오마(老媽: 늙은 어머니), 라오예쯔(老爺子: 늙은 할아버지), 라오타이타이(老太太: 늙은 할머니)라고 부른다. 일상생활에서 행동 등 방면에서 상대적으로 비교적 많은 특별한 보살핌이 있다.
수련생 사이에 일부 수련생은 자주 ‘노년 수련생’(老年同修)이나, ‘노수련생’(老同修, 물론 노수련생은 수련 시간이 길다는 의미도 있음)으로 불러 존중을 표시하고 나이에서 차별화한다. 수련생들도 모두 수련인은 나이를 구분하지 않고 나이를 중히 여기지 않으며 ‘늙었다’의 개념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행위와 일할 때 자신도 모르게 습관적인 전통 사유와 사람의 관념이 연령상 구별에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특별한 관심과 포용, 이해, 책임, 양보, 양해, 겸손 등 각종 요소가 그 안에 있다.
그러면 노년 수련생은 어떠한가? 객관적인 외부의 ‘늙었다’란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주관적인 소원으로 자연스럽게 속인에서 온 것을 받아들이고, 수련생이 준 호칭을 인정한다. 이것을 아주 정상이라고 생각하고 마땅히 이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속인의 관념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이 관념은 우리 노년 수련생을 속인 속으로 끌고 가고 각종 번거로움과 위험을 가져다준다. 노년 수련생은 ‘늙었다’에 제한, 속박, 제약되면 안 되고 마땅히 마음속으로 그것에서 벗어나야 하고 그것을 인정하면 안 되며 그것을 배척해야 하고 그것을 없애며 갖지 말아야 한다. 사상 속에서 완전히 이런 개념과 의식, 사람의 ‘늙었다’와 나 대법제자와는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해야 한다.
법에서 우리는 우주는 성주괴멸(成住壞滅)이 있고 사람은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음을 알고 있다. 생로병사는 바로 사람의 상태고 천백 년 이래 사람은 이렇게 살고 있고 누구도 벗어나지 못하고 해탈할 수 없다. 수련인은 초범적이기에 초범적인 상태가 있고 사람 이 층차의 법리에 제약, 제한받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수련인에게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대법제자의 인생의 길은 사부님께서 이미 개변해주셨는데 그 ‘늙었다’의 요소가 우리에게 아직도 작용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하물며 우리가 수련하는 파룬따파는 진정한 성명쌍수(性命雙修) 공법이다. 우리가 수련한 공은 모두 신체의 매 세포에 저장되고 끊임없이 저장되며 끊임없이 젊은 방향으로 전환된다. 무릇 노년 수련생이라 불리는 대다수 사람은 99년 이전에 법을 얻었다. 수련을 오랫동안 했는데 그 ‘늙었다’가 당신과 가까이 할 수 있는가?(여기에서는 진수하는 사람을 가리킴)
당신이 그것을 승인하면 당신이 그것을 가진 것이고 추구한 것이며 받은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온다. 따라서 ‘늙은’ 표면 현상이 나타난다. 귀가 어둡고 눈이 잘 보이지 않으며 반응이 느리고 기억력이 감퇴하며 깜박깜박하고 손발이 빠르지 않으며 행동이 느리고 정확하지 않은 등 각종 번거로움이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상태로 다시 발전해가면 ‘늙었다’ 뒤에는 ‘병’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위험하지 않은가?! 이것은 절대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이 아니다. 구세력은 자연스럽게 그들이 해야 할 것을 한다. 빌미를 잡은 것이다. 만약 이 관념을 바꾸지 않고 부정하지 않으며 배척하지 않고 이 일념을 없애지 않으면 사부님과 정신(正神)께서는 조급해하시지만 방법이 없다. 당신이 바란 것이기에 누구도 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주의 이치다. 그러므로 노년 수련생은 ‘늙었다’란 관념을 없애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왜 이 글을 쓰는가? 왜냐하면 나도 70여 세기 때문이다. 대법에서 26년을 수련했다. 나는 이런 상태에서 걸어와 체득이 깊다. 왜냐하면 내 생명은 사존께서 연장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사상에서 ‘늙었다’를 인정하면 몸이 즉시 불편한 느낌이 든다. 그것을 부정하고 ‘나는 대법제자이고 너는 속인에게만 작용하고 나에게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몸이 또 정상으로 회복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사실 내가 여러분에게 알려주는데, 물질과 정신은 일성(一性)이다.”[1] 나의 이해로는 기왕 ‘물질과 정신이 일성’이면 우리 마음속(머릿속)에서 내보내는 염두는 모두 좋은 것이고 바른 것이며 법에 부합된다. 몸이 나쁜 물질 정보를 받아들이면 이런 나쁜 물질 정보의 작용하에 바르지 않는 상태가 나타난다. 색욕은 사납지 않은가? 색욕관은 넘기기가 아주 어렵다. 수련생은 모두 깊은 체득이 있다. 하지만 꿈에서든 아니면 가부좌에서 나타나든 그 한순간 우리가 ‘나는 대법제자’임이 생각나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이 관을 넘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법의 힘이다!
기타 방면도 마찬가지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한 수련인(修煉人)으로서, 속인의 환경 중에서 자신을 수련하고 자신을 연마(魔煉)하여 집착심과 각종 욕망을 점차적으로 버려야 한다.”[1]
한번은 내가 10㎏의 쌀을 사고 또 일부 야채와 과일을 사며 기타 식품을 사서 두 어깨에 나눠 메고 한 어깨에는 큰 가방을 멨다. 몇 킬로미터를 걷고(집 근처 마트는 안면인식과 건강 바코드를 찍어야 해서 할 수 없이 변두리 지역 매점에서 물건을 사는데 그곳에서는 마스크를 쓰고 체온만 재면 됨) 패딩을 입고 마스크를 쓰며 3~4급 바람을 맞으며 집에 막 도착하려 할 때 더 이상 걸을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좀 쉴까?’ 또 생각했다. ‘안 돼! 다그쳐 가서 12시 발정념을 해야 한다. 나는 대법제자다. 이것은 보잘것없다.’ 즉시 온몸에 힘이 생기고 힘든 느낌이 없었다. 단번에 5층까지 올라갔고 시계를 보니 10분 먼저 도착했다. 물론 법공부를 많이 하고 법을 많이 외워야 한다. 자신의 일사일념, 일언일행을 모두 법에서 바로 잡아야 하고 법에서 제고해야 한다. 또 연공을 잘해야 하고 나태하면 안 된다. 전자는 층차를 제고하고 후자는 본체(本體)를 개변한다. 세 가지 일은 모두 잘해야 하고 어느 것도 빠뜨리면 안 된다.
내 몸은 늘 가볍고 걸을 때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느낌이며 무게감이 없다. 나는 빨리 가는 것 같지 않은데 옆의 행인은 나와 멀리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늘 기세등등하고 급하고 대법제자의 침착한 소질이 없다. 이것은 바꿔야 한다. 한번은 내가 물, 가스의 계량기 숫자를 자녀에게 알린 후 우스갯소리로 아들에게 물었다. “번거롭지 않아?”(점검인은 점검하고 현금을 받지 않고 위챗으로 입금하라고 하는데 나는 밍후이왕 통지 이후 위챗을 더는 사용하지 않고 자식에게 부탁했음) 아들은 말했다. “번거롭지 않아요. 손만 움직이면 돼요.” 그렇다. 나는 독거하고 거의 모든 일은 스스로 처리하며 자식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다. 때로는 자녀가 이런저런 것을 사준다고 하면 나는 완곡하게 거절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만족한다. 이번에 사당(邪黨)의 ‘제로화 행동’에서 자녀들도 몇 차례 소란을 받았지만 한마디 원망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말했다. “머리가 떨어져도 나는 서명하지 않는다. 내가 서명하지 않으면 너희들도 서명하면 안 된다.” 그들은 시원하게 약속했다. “네, 서명하지 않겠습니다.“
노년 대법제자의 좋은 몸 상태가 바로 진상이다! 이것도 우리 대법 수련에서 준 복이다. 속인은 무엇을 보는가? 그(그녀)는 첫눈에 이것을 보지 않는가?
개인 층차의 인식이므로 법에 있지 않은 곳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허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편집자 주: 본문은 글쓴이 개인의 관점만을 대표할 뿐, 옳고 그름은 글쓴이 개인의 책임이므로 독자 스스로 헤아리기 바란다.]
원문발표: 2021년 3월 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1/3/9/42174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