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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념이 확고하니 기적이 나타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20여 년 수련하면서 나는 좋은 조건을 여러 번 사양하며 살아왔다. 오직 중생만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여러 가지 중생 구도 환경을 만들었다. 수련을 시작해서부터 나의 일생을 모두 사부님께 맡겼는데 얼마나 큰 행운인가! 내게는 위대하신 사부님이 계신다.

1. 어려서부터 고생하며 마난을 겪다

나는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났다. 고생 속에서도 줄곧 인생의 참뜻을 찾았다. 다섯 남매 중 나는 둘째이며 첫째는 언니다. 조상들은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를 경시했는데 언니는 첫째 애라 그래도 가족들이 기뻐했다. 부모님은 둘째가 사내이기를 몹시 바랐으나 딸인 나를 낳게 되자 아이를 싫어했고 나는 천덕꾸러기가 됐다. 아홉 식구 중 부모 두 분만 생산대(25~30호로 조직된 말단 소유단위)에서 노동할 수 있었기에 많은 식구를 부양하기란 쉽지 않았다. 차별 속에서 나는 ‘천덕꾸러기’로 불렸고 집에 맛있는 것이 있으면 당연히 남동생 몫이었다. 어른들은 남동생이 세 살 때, 다섯 살인 나에게 바닥에 엎드려 소걸음 흉내를 내며 남동생을 웃기게 했다.

차별받지 않은 날이 없었으며 부모의 온정이 무엇인지 몰랐다. 할아버지가 나를 때리고 욕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어머니께서 5자오(1자오는 1위안의 1/10)의 등록비를 주시면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는데 학교 가서 네 이름을 알고, 남녀 화장실을 구분할 수 있으면 된다고 하셨다. 내 학교 성적은 중상위 정도였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얼른 가방을 내려놓고 돼지와 소 풀을 베어 집안일을 도왔고 저녁엔 남포등을 켜고 숙제를 했다. 다음 날이면 날이 밝자마자 일어나라고 소리쳤는데 닭똥을 줍고 어른을 도와 일했다. 열 살쯤 되었을 때 대가족의 옷을 손빨래하고 밥을 했으며 사흘이 멀다고 할아버지에게 매를 맞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는 아버지가 계속 때렸다. 내가 아무리 부지런해도 때리려고 했는데 차갑게 대하고 화내며 “넌 전생의 원수다!”라고 말하며 입만 열면 나가 죽으라고 했다. 여러 번 얻어맞았는데 몇 번은 무서워 밤새 집에 돌아가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 나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1977년 언니는 중학교를 나는 초등학교를 마치고 우리는 학업을 중단했다. 언니는 생산대에서 어른 절반의 궁펀(工分: 노동점수 – 80년대 초까지 농촌 집단경제조직의 노동량과 임금 계산단위)을 벌었다. 나는 집에서 빨래하고 밥하고 생산대에 소 풀을 베다 주고 노동점수를 받았다. 당시 소 풀 40kg을 벴는데 어른 하루 노동량과 비슷했다. 어떨 땐 80kg을 벨 수 있었고 125kg을 베기도 했지만, 집에 오면 얻어맞아야 했다. 어느 날 오전에는 풀을 베기가 무척 힘들어 집에 와 침대에 눕자 열이 났다. 아버지가 밖에서 돌아와 내가 침대에 있는 것을 보시고는 “대낮에 일은 안 하고 침대에 누웠냐?”라고 하시며 느닷없이 주먹으로 나를 때렸다. 때리고 욕하며 나가 죽으라고 했다. 나는 울면서 ‘어린 내가 평소 아버지보다 더 많은 노동점수를 받고, 빨래하고, 밥하고 하는데 아버지는 나에게 어디 아프냐고 묻지도 않고 모질게 때리다니?’라고 생각했다. ‘왜일까?’ 하고 깊이 생각해 봤다. 비구니가 되면 출가해 세속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어른들의 말을 자주 들었고 무당산에 가면 수행할 수 있다고도 했다. 하지만 어떻게 가야 하는지도 몰랐고 갈 돈도 없었다. 당시 살 수가 없어 출가를 궁리했다. 그러나 마음속에 ‘덕(德)’자가 떠올라 갈 수가 없었다. 소녀가 가출하면 정결하지 못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눈 딱 감고 덕을 지키자, 맞으면 맞는 거지 뭐’하고 생각했다.

1985년 내가 22세 때 아버지는 독단으로 나의 혼인을 주선했는데 상대는 내가 아주 멸시하는 대상이었다. 86년 말 결혼했으나 시어머니는 온갖 수단을 써서 일부러 나를 괴롭혔고 게다가 고모 셋과 시아버지까지 다섯 명이 서로 응원해가며 나를 괴롭혔다.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으나 몇 년을 이렇게 살았다. 시어머니 마을 사람들은 시어머니를 비난하며 “깨끗하고 단정하고 총명하고 부지런한 이렇게 좋은 처자가 당신 며느리가 됐는데 당신은 도대체 왜 그래요?”라고 하며 못마땅해했다. 견디기 힘들어 출가하고 싶었다. 또 ‘덕(德)’자를 생각하니 갈 수 없었고 어린 딸을 버릴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할까? 모욕을 참고 견디며 맘에 들지 않는 남편과 함께 살기로 했다.

1987년 딸이 태어나자 농사일과 집안일을 하며 아이를 키웠다. 남편은 종일 하는 일 없이 놀았다. 남자가 해야는 일도 내가 해야 했다. 밀짚을 묶고 풀을 묶는 일은 다 남자가 하지만 우리 집은 여자가 남자 일을 했다. 추수가 끝나면 면화 줄기를 묶어 초가집 모양으로 높게 쌓아두고 일 년 동안 조리용 땔감으로 쓴다. 본래 남자가 하는 일이지만 모두 내가 했다. 마을 사람들은 나를 칭찬했다. 아이가 좀 더 자라자 나는 현성(縣城)에 가서 돈을 벌어 가족을 부양했다.

1995년 불행하게도 나는 차 사고를 당했다. 왼쪽 넓적다리뼈가 골절되고 머릿속에 달걀만 한 핏덩이가 생겼다. 목숨이 위태로워 입원했으나 보살펴 줄 가족이 없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남편이 딴살림을 차렸다고 알려줬다. 고통은 더 심해져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밤에 꿈을 꿨는데 내가 여래불(如來佛)을 뵙고 여쭙기를 “제 조건이면 즐기면서 원하는 대로 생활할 수 있습니다. 저는 덕을 지키기 위해 큰 불공평을 감당했고 억울하게 꽃다운 제 청춘을 희생했습니다. 덕을 지키려고 저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는데 왜 제가 차 사고를 당해야 합니까?”라고 했다. 여래불은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고 내 목에 금목걸이 하나를 던져주시고는 사라졌다. 지금 생각하니 사부님께서는 처음부터 나를 책임지고 계셨다.

2. 운 좋게 대법을 얻다

1997년 5월, 이혼 후 나는 나의 발전을 위해 성도로 갔다. 자신의 꿈을 이뤄 나를 멸시한 아버지와 괴롭혔던 시어머니, 나를 업신여기고 버렸던 남편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고생해서 모은 돈 1만 위안(당시 성도에서 방 한 칸에 거실이 있는 집을 살 수 있었음)을 가지고 성도에 가서 전문기술을 배웠는데 이·미용과 전문대 수준의 재무회계를 배웠다. 이 돈과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열심히 배웠다. 이·미용 과정을 마칠 무렵 반 전체에서 두 명만이 영예 증서를 받았는데 그중 한 명이 나였다.

기술반을 졸업하기 전 학교 뒷산을 걷다가 중턱쯤 갔을 때 고결한 모습의 흰 수염을 가진 노인 한 분이 나에게 ‘전법륜(轉法輪)’ 한 권을 주었다. 보니 불가(佛家)의 책이라 기뻤다. 손으로 ‘전법륜’ 세 글자를 어루만지며 ‘좋은 책인데 돈이 없으니 남에게 거저 달라고 할 수도 없고’라고 생각했다. 돈도 없는 데 좋아하게 될까 봐 두려워서 책에 손을 떼지 못하고 감히 펼쳐보지 못했다. 흰 수염 노인께 돌려드리며 “좋은 책입니다. 어르신께서 간직하시고 수신양성(修身養性)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분은 아무 말 없이 떠나셨다. 책과 노인께 미련이 남아 3m쯤 가다 뒤돌아보니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아주 이상한 생각이 들어 나무 아래 쪼그리고 앉아 찾아봤으나 그분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이틀이 지난 뒤 학교 점심시간에 룸메이트가 상자에서 ‘전법륜’ 한 권을 꺼내 나에게 주었다. 어디서 났냐고 묻자 그녀는 산에서 놀 때 어떤 노인이 줬다고 했다. 몇 쪽을 보고 나서 친구에게 “나 오늘 오후에 수업 빠질 테니 네가 필기를 잘해서 나에게 가르쳐 주라”고 부탁했다. 나는 이 책이 보면 볼수록 보고 싶었다. 어려서부터 수불(修佛)하고 싶었는데 이것은 진짜로 수불하는 책이었다. 책에 대고 나는 “저는 이 공을 연마하고 싶지만 연공장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며칠이 지나고 사부님의 법신께서 나를 연공장으로 안내해주셨다. 시멘트 전봇대에 ‘파룬궁 무료 연공장’이라고 쓰여 있었다. 다음 날 날이 밝자 연공장에 가서 파룬궁 소개서를 봤다. 마음속으로 ‘이 공은 편차가 생기지 않고 공이 사람을 연마시키며 ‘진선인(真·善·忍)’의 준칙에 따라 심성을 요구하는데, 정말 좋구나’라고 생각했다. 파룬 도형을 자세히 보니 와, 정말 대단했다. 당시 ‘농촌 마을 촌민 가옥 담장에 태극도 하나만 있어도 요괴를 떨어뜨리고 마를 제거하기에 충분했는데 이 파룬 도형에는 태극 도가 네 개나 있으니 훨씬 대단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전에 나는 여래 불상 가슴에 만자 부호(卍) 하나만 있는 것을 봤는데 이 파룬 도형에는 다섯 개가 있었다. 당시 나는 ‘이생에 파룬궁을 끝까지 수련하겠다’라고 생각하며 곧장 수련생에게 연공을 가르쳐 달라 했고 그 당시 파룬을 얻었다.

어려서부터 수불하고 싶었는데 오늘 이렇게 사부님께서 수불하는 진법(真法)을 주셨으니 나는 꼭 용맹정진하겠다. 매일 수련생들과 함께 연공하고, 법 공부하고, 교류했으며 자신이 뒤떨어질까 봐 걱정할 뿐이었다. 당시 부근 몇몇 연공장에 가서 나에게 책을 주신 노인을 찾고 싶었으나 찾지 못했다. 1997년 임금은 겨우 300위안(한화 약 5만 2000원)이었고 매달 나가는 방세는 180위안이나 됐지만 나는 먼저 한동안 수련에 정진하고 싶어 일자리 구하는 걸 서두르지 않았다. 이후 회사에서 밥을 하거나 가정부 일을 선택했는데 마음을 조용히 하고 수련할 수 있는 환경을 확보했다. 좋은 조건의 남편을 찾고 싶은 마음도 버리고 마음속으로 ‘석가모니께서는 왕위도 버리고 속인 중에서 동냥하지 않았는가!’라고 생각했다.

3. 견정하게 법을 수호하다

1999년 사당이 파룬궁 박해를 시작하자 나는 수련생들과 함께 문제해결을 위해 사당 성 위원회에 청원하러 갔다. 그 후엔 혼자 시 위원회에 가서 청원하며 진상을 말했다. 진상 자료를 건네며 시 위원회 간부에게 중앙에 국민의 뜻을 전해달라고 부탁한 후 무사히 귀가했다. 당시는 적색공포가 사부님과 대법에 대해 요언을 날조해 먹칠하던 때라 천지가 모두 사부님과 대법을 비방하는 사악한 선전이었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1999년 10월 베이징에 갔는데 신방국(청원실)이 공안국으로 변했고, 파룬궁을 연마하면 붙잡혀 간다는 소문이 들렸다. 나는 베이징 난위안(南苑) 파출소로 붙잡혀 갔다. 경찰이 어디 사람이냐고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자 나를 ‘큰 대(大)’자 모양으로 바닥에 쓰러뜨리고 밟았다. 경찰 두 명이 각각 내 좌우 팔을 밟고, 또 두 명은 내 발을 하나씩 밟고, 다섯 번째 경찰은 내 머리를 눌렀으며, 여섯 번째 경찰이 세숫대야 크기의 전기고문 기구를 들고 내 몸 여기저기를 문질렀다. 날카롭게 울리는 소리가 매우 무서웠는데 일반인은 형을 감당하지 못하고 놀라 죽을 수도 있었다. 당시 나는 ‘생명으로 법을 지키겠다. 나는 대법제자다’라고 생각했다. 사부님은 “나의 뿌리는 모두 우주에 박혀 있으므로 누가 당신을 움직일 수 있다면 곧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곧 이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1] 라고 말씀하셨다. 반복적으로 이 구절을 외우자 고문 기구가 고장 났다. 수리한 다음 그들은 다시 고문 기구를 나에게 묶었다. 내가 계속해서 이 구절의 법을 외우자 전기 통하는 느낌이 없어졌고 사람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나는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 이 구절을 외웠다. 결국, 고문 기구는 완전히 부서졌다. 경찰이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나는 매우 평온했지만, 그들은 온 얼굴이 땀범벅이었다. 또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으나 나는 역시 대답하지 않았다. 한 경찰이 침으로 내 겨드랑이를 찌르려고 하자 다른 경찰이 제지하며 그녀는 아직 젊은 아가씨인데 그만두라고 했다. 사실 당시 나는 35세였으며 딸이 12세였다. 경찰이 나를 화장실로 데려가서 씻게 한 다음 나를 현관으로 데려갔다. 내가 돌아보니 한 사람도 없었고 현관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이것이 가라고 하는 암시임을 몰랐는데 애석하게도 당시 이 점을 깨닫지 못했다. 이후 이곳저곳 전전하다 집에 돌아와 붙잡혔고 1개월간 불법 구류를 당했다.

2000년 10월 12일 나는 혼자 또 베이징에 갔다. 사복 경찰이 가는 길을 차단하고 있었기에 머리를 깨끗이 감고, 립스틱을 바르고, 기차를 타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베이징에 당도했다. 톈안먼 광장에 가서 보니 가부좌하고, 빠오룬(抱輪) 동작을 하는 건 쉬워 보였고, 천을 사서 현수막을 쓰면 될 것 같았다. 바꿔 생각해 보니 한 사람이 현수막을 펼치면 기세가 좀 덜할 것 같았다. 어떻게 할까? 사부님께서 또 지혜를 열어주셨는데 내가 이리저리 둘러보고 파룬궁 수련생 같아 보이는 사람이 있는지 탐색해 보았다. 한 무리 착해 보이는 사람에게 가서 “여기 앉아도 되겠습니까?”하고 물으니 상대방은 그러라고 했고 내가 “어디서 오셨지요?”하고 묻자 그는 선양(瀋陽)이라고 했다. “어느 대학에 다녔습니까?”하고 물으니 그는 ○○ 대학에 다녔다고 했다. 내가 “우리 사부님의 아름다운 시구를 읊고 싶은데 아실지 모르겠습니다”라고 하며 들어보라고 하고는 “비장한 역사는 유수처럼 흘러가고, 호기 충혼만 세상에 남겼구나”[2] 하고 외우자 상대방이 “천고의 옛 묘 마음 쓰린 곳, 오로지 단심(丹心)만이 후세 사람 비추네”[2] 하고 나머지 두 구절 외웠다. 우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사부님이 지혜를 열어주셔서 나는 여러 수련생과 연계될 수 있었고 함께 교류했다. 그들은 모두 다른 성에서 온 수련생으로 처음 베이징에 왔기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내가 앞장서서 이끌며 모두 대법의 억울함을 호소하기로 했다. 우리는 협의한 끝에 상점에 가서 천과 붓 그리고 노란색 물감을 산 다음 베이징 신화(新華)서점에 가서 사전을 찾아보고 현수막에 중문과 영문으로 썼다. 여관에서 은밀히 현수막 5∼6개에 위쪽은 영문으로 아래쪽은 중문으로 썼다. 당시 내 마음은 잡념이 없었고 지혜로웠다. 나는 그들에게 현수막을 끝까지 말아서는 안 된다고 가르쳐주며 그렇지 않으면 제때 현수막을 펼치기도 전에 경찰에게 빼앗길 것이고 헛고생이 된다고 했다. 나는 현수막을 몇 번 장방형으로 접고 양쪽 끝의 접히지 않은 천 자락을 잡고 제때 현수막을 신속하게 당기는 시범을 보였다. 또 현수막을 가방에 넣지 말고 검색에 대비해 상의나 재킷 속에 넣으라고 제안했다. 여관에서 그들에게 시범을 보였다. 오른손으로 가슴 앞에서 현수막 천 끝부분을 잡고 꺼낸 다음 왼손으로 신속하게 다른 한쪽을 잡아 세게 확 3초간 당겼다. 모두 반복해서 연습했고 열의가 가득했다.

사부님께서 지혜를 주셔서 정념이 좀 강한 사람과 담이 작은 사람이 짝을 이루게 해, 두 사람을 한 팀으로 현수막 6개에 12명을 배치했으며 기타는 빠오룬 동작을 하기 위한 수련생이었다. 아울러 그들에게 “톈안먼(天安門) 가는 버스에선 말을 하지 말고(사복 경찰이 있을 수 있기 때문) 차에서 내리면 한 사람이 앞장서고 뒷사람은 앞사람을 따라가십시오. 하지만 전후좌우 2m 넘게 거리를 유지해 모르는 사이처럼 보이도록 합니다. 흩어져 있어도 정체로서 질서가 있어야 하며 각자의 목표를 향해 갑니다. 톈안먼 광장에 도착했을 땐 누가 말을 걸어도 대꾸하지 마시고 자신이 갈 곳으로만 가야 합니다”라고 당부했다.

2000년 10월 18일, 사부님의 보호 아래 우리는 사전에 약속한 대로 순조롭게 톈안먼 광장에 도착해 여섯 폭의 중문과 영문으로 된 현수막을 20m가 넘게 펼쳤다. 이때 톈안먼 우측에서 많은 해외 여행단이 몰려와 순찰차의 통로를 막았다. 전국 각지의 많은 대법제자가 모두 우리 현수막 앞에 와서 빠오룬 동작을 했다. 여섯 폭의 중문 영문 현수막이 ‘일(一)자’형으로 펼쳐지자 기세가 아주 대단했다. 서양 파룬궁 수련생들이 현수막을 보고 ‘파룬따파하오’를 외쳤고 수련생들과 함께 빠오룬 동작을 하며 앞뒤로 사진 촬영을 했다. 그 뒤 또 한 쌍의 서양 수련생 부부가 와서 ‘파룬따파하오’를 외쳤고 우리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서양 수련생들이 간 후에도 우리는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당시 장면은 넓은 범위를 차지했고 시간도 길었는데 적어도 30분은 넘었을 것이다. 게다가 30명이 넘는 중국과 서양 수련생이 함께 법을 실증했는데 아주 장관이었다. 그 뒤 무장경찰이 우측에서부터 현수막을 빼앗았는데 나 있는 곳까지 와서 빼앗자 나는 현수막을 몸에 감아 두르고 경찰이 나 한 사람만 붙잡게 했다. 나를 보호하려고 달려온 세 명의 수련생도 붙잡혔으나 현장에 있던 수련생 대부분은 안전하게 자리를 떠날 수 있었다.

4. 구치소 소장이 내게 사과하다

청원 후 나는 베이징 사무소에 붙잡혔고 다시 우리 지역 구치소로 이송됐다. 현지 국보 대장이 나와 눈을 마주치자 “끝났다! 끝났어! 공산당은 끝났다!”라고 했다. 며칠 지나자 법심과(法審科)에서 나를 불법 심문하며 “베이징에 가서 뭘 했습니까?”하고 묻자 나는 말하기를 “그럼 내가 한마디 하겠으니 당신이 그대로 적으세요. 내가 베이징에 간 것은 사부님과 법을 지키기 위해서이고 우리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달라는 것입니다. 파룬따파 하오!(法轮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파룬따파는 정법입니다! 우리 사부님에 대한 악의적 비난을 취소하세요!”라고 했다.

구치소에서 감옥 규칙을 외우지 않았고 법을 외우고 연공만 했다. 하루는 성이 장(章) 씨인 소장이 당직하며 내가 연공하는 것을 보고 지적했다. 연공을 허락하지 않으며 정세를 알아야 똑똑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내가 “소장님도 파룬궁(法輪功)을 파룬포파(法輪佛法)라고 하며 부처 수련하는 것임을 알고 계시지요? 불법에 죄를 짓는다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사람이 부귀를 누리려면 마음씨가 좋아야 합니다. 지금 이렇게 소장이 되신 것도 전생에 복을 지은 것입니다. 복을 쌓을 수 있어도 거짓말을 따라서 복을 깎아 먹어서는 안 되지요”라고 말했다. 소장은 진상을 알아듣고 오늘 당직하기를 잘했다고 말했다. 내가 “한 눈은 감고 한 눈만 뜨세요”하고 말하자 그는 “그럼 사시가 돼야겠네요”하고 말했다. 나는 “그래요. 내가 연공하는 것을 보면 못 본 체하세요”하고 말했다. 그날 이후 그는 나에게 더 말하지 않았고 내가 밖에서 신발 말리는 것을 도와주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 나는 연공하다 최고 책임자 소장의 눈에 띄게 됐다. 그는 3장, 4장 공법이 끝날 때까지 나를 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 여자 교도관이 노기등등해서 나를 사무실로 불러 질책하며 “오늘 이후로 다시 연공하면 (징벌로) 머리카락을 잘라 버리겠다!”라고 말했다. 나는 조용히 웃으며 말하기를 “그래요. 자르세요! 교도관님은 파룬궁을 파룬포파(法輪佛法)라고도 하며 확고하게 수련하는 모든 수련자가 보살이나 여래불로 수련 성취함을 알고 계시죠? 그들이 수련 성취한 후 돌아가서 ‘그때 내가 파룬궁을 연마하며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부처수련을 하는데 공산당이 나를 붙잡아 가뒀지? 게다가 교도관은 내 머리카락까지 잘랐다. 보세요. 당신 봐 보세요.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봐요’”라고 할 것이라고 했다. 교도관은 화를 풀며 웃으면서 “정말 꼭 제 언니 같군요”라고 했다. 교도관은 “아주머니도 아시죠? 소장이 저를 질책하기에 그만 화가 나서 한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우리는 불법(佛法)을 수련하며 교도관께서 수련인을 위해 조금만 감당해도 장래에 몇 배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교도관은 진상을 알고 기뻐했으며 차를 권하고 땅콩과 해바라기 씨를 먹으라고 하면서 “이후론 연공을 낮부터 밤까지 종일 하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내가 우리 사존께서도 종일 연공하라고 하시지 않았다고 하자 교도관은 “사존이라고 칭합니까?”라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교도관은 “아주머닌 정말 당신 사부님이 만족해하실 제자로군요”라고 또박또박 말했다.

하루는 성질이 급한 예(葉) 소장이 내가 연공하는 것을 보고 “아니! 당신은 감옥에서도 연공하다니!”하며 벼락같이 화를 냈다. 그는 듣기 거북한 욕을 하며 “꿇으세요!”라고 했다. 마음속으로 ‘나는 파룬따파를 수련하는 사람이며 장차 위대한 신이 될 것인데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무릎을 꿇을 수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했다. 그가 노발대발하며 ‘파룬궁’하며 두 번 소리쳤어도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그가 세 번째로 소리칠 때 ‘으악’하며 쓰러졌다. 감방 안의 죄인들은 놀랐고 “예 소장은 응보 받은 것이다. 생명 위험은 없는지 모르겠네”라고 말했다. 대략 40분이 지나자 예 소장은 동정을 살피며 작고 부드러운 말로 “당신들 차 한잔하겠어요?”라고 했다. 감방 안 사람들은 또 놀랐고 즉시 “그러지요. 마시지요”하고 대답했다.

곧이어 감방 안에서 너도나도 한마디씩 했다. “평소엔 누가 감기에 걸려도 끓인 물 한 모금 얻어 마실 수 없었다! 게다가 꾸중을 들어야 했다. 하지만 오늘 우리 누구도 차를 달라고 하지 않았는데 경찰 스스로 우리에게 차를 마시라고 하니 참 이상하다”라고 했다. 횡령범 회계사가 “예 소장은 방금 무릎을 꿇으라고 화내며 소리치더니 이젠 부드러운 소리로 차를 권하는데 그는 두려워졌고 목숨을 지키려고 다급해졌다”라고 말했다. 한 마약사범은 “방금 갑자기 꼬꾸라졌기에 두려워졌으며 파룬궁이 신의 위력이 있음을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잠시 후 차가 나왔다. 싸움하다 들어온 오리 농가 사람이 “예 소장은 오성이 좋다. ‘보살님께 죄를 지으면 향을 한 대 피워 올리고, 부모님께 죄를 지으면 차 한 잔 올린다고 하지 않는가!’ 그는 차 한 잔으로 파룬궁 제자에게 사죄하고 속죄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사건으로 범인, 경찰 모두 눈으로 직접 신기함을 보게 됐고 매우 놀랐다. 많은 사람이 파룬궁이 신기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5. 대장은 정직되고 반성문 쓰고, 마약범에게는 자신의 반성문을 파룬궁 수련생 앞에서 낭독하게 하다

이번에 나는 70일 넘게 구치소에 갇혔다. 국보대 대장이 “당신은 한번 또 한 번 베이징에 가는데, 보증서 쓰고 집에 가도록 하시오”라고 했다. 나는 쓰지 않았고 그들은 나를 노동수용소(이하 노교소)로 보내 1년을 가뒀다. 신체검사에서 불합격했지만, 당시 정념으로 수감을 부정하지 못했고, 경찰은 다른 수단을 써서 노교소 측이 나의 수감을 받아들이도록 했다.

노교소에 들어가니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장은 험하게 욕하며 노교소 기율위원회 서기에게 나를 포함해 따르지 않는 몇몇 파룬궁 수련생을 한쪽에 모아 구령에 따라 군사훈련을 시키도록 했다. 그래도 우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지막에 내가 한번 호응하며 기율위 서기에게 머리를 낮추고 다소곳했다. 이때 서기가 “내가 못생겼을지라도 당신들은 머리를 들고 나를 한번 보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웃으며 “예쁘십니다! 우리 마음이 너무 괴롭기 때문입니다. 대법은 세상에서 박해당하고, 사부님의 명예도 모함으로 짓밟히는데 우린 너무 괴롭습니다. 여기서 군사훈련을 받을 심정이 아닙니다. 우리가 불법을 신앙하며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함을 이해해 주십시오. 당신이 당의 서기라고 해서 당에 감사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이 지도자 간부가 된 것은 전생의 덕이 복으로 변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렇게 관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나라 때에도 송나라 청나라 때에도 당은 없었지만, 마찬가지로 관리가 있었고 돈 가진 사람이 있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다양한 의견을 들어봐야 시비를 가릴 수 있습니다. 당신이 좋은 사람을 위해 말할 수 있다면 당신은 덕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기율 서기가 우리를 보며 선량하게 “이후 당신들에게 무슨 의견이 있으면 나에게 편지를 써도 됩니다”라고 했다. 우린 모두 웃었다.

노교소에서 나는 경찰이 하라고 하는 일은 모두 하지 않았고 그들이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은 다 했는데 예를 들면 경문을 외우고 연공하는 것이다. 하루는 우리가 단체로 사부님의 경문을 외우자 마약사범이 걸레와 냄새나는 양말로 우리 입을 틀어막았지만 막지 못했고 우리는 끝까지 다 외웠다. 모두가 화장실에 가고, 나와 성이 웨이(魏)인 경찰 정보원(밀고자)만이 침실에 있게 됐다. 웨이가 “당신들은 밤에는 연공하고 낮에는 경문을 외우는데 간부는 내가 당신들을 제지하길 바랍니다. 밤낮없이 소란 피워 잠을 잘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선의로 “지금 자세요”라고 말했다. 웨이가 욕하기 시작하더니 다가와서 발로 나를 몇 차례 걷어차 바닥에 넘어뜨렸다. 다른 밀고자가 나를 일으켜 세웠으나 나는 일어나지 않았고 수련생이 나를 일으켜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이 반 박해할 기회를 붙잡아야 할 때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노교소 바닥에서 자는 것은 정상적이지는 않다. 경찰이 와서 걱정스러운 듯 나를 가리키며 “당신은 그녀들까지 오염시키지 말아요(반박해를 가리킴)”라고 말했다. 밤이 되자 수련생들이 상의한 끝에 단체로 단식하며 밀고자의 폭력에 항의하기로 했다. 일이 커지자 부대를 놀라게 했다. 여성 기율 서기가 와서 나를 조사했고 나는 지혜롭게 사실대로 말했다. “당시 경문을 다 외우고 웨이에게 관심을 보이며 자라고 했으며 잘못도 아닌데 그녀는 자기가 성격이 나빠 사람을 때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교소에서는 수련생을 괴롭혀서는 안 되고 괴롭힘을 당해서도 안 됩니다. 노교소에도 기율이 있지 않습니까?” 기율 위원은 받아 적었다. 사람을 때리는 것은 노교소 기율 문제와 관련되고 또 10여 명의 단식은 인명 문제와 책임자 소장의 책임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다. 기율위 서기는 나에게서 진상을 듣고 명백해진 후 나를 보호해줬는데, 마약사범 웨이에게 나와 분대 전체 파룬궁 수련생에게 반성문을 낭독하도록 했고 책임자 소장은 정직시키고 반성문을 쓰도록 처리했다. 전 대대에 파룬궁 수련생을 가둬 감시하는 실(방)은 밀고자 마약사범 혼자 남아 청소하며 다른 사람은 전부 철수하도록 했고 아울러 파룬궁 수련생 중에서 반장을 선출했다.

이후 노교소는 견정하게 수련하는 파룬궁 수련생을 엄격하게 관리하기 시작했다. 엄격 관리 기간에 악경은 파룬궁 수련생들이 간부를 좋게 부르도록 강압했으나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경찰은 대법제자 한 사람을 끌고 가 신발을 벗기고 전기 곤봉으로 발바닥을 고문했다. 나는 반에서 모두에게 “당신들 간부가 좋으면 자연히 좋게 말할 것인데 어찌 우리에게 강제로 좋게 부르라고 합니까?”라고 말했다. 마약범이 나를 일러바쳐 경찰은 내가 앞장서서 반원 전체에게 경찰 규칙이 먹히지 않도록 했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나를 한쪽으로 불러내 이야기하자고 하면서 박해를 가했다. 나는 “당신 간부가 수련생 눈에 좋게 보이면 사람들은 자연히 당신에게 좋게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경찰형구를 들고 우리를 때리면서 당신을 좋게 부르라고 하는데 이치에 맞습니까? 당신이 경찰이라 해도 절대 권력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나는 불법적으로 노교소에 붙들려 온 파룬궁 수련생입니다. 내겐 고소할 권리도 있고 신고할 권리도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후 이 일은 흐지부지됐고 경찰은 더는 파룬궁 수련생을 강박해 간부를 좋게 부르라고 하지 않았다.

노교소에서 나는 전화하지 않았고 박해에 저항했으며 10개월 가중된 형을 마친 후 정정당당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파출소 소장이 나에게 “듣자니 당신은 노교소 바닥에 죽치고 앉아 전화하지 않았다고 하던데 노교소 바닥이 뚫어지지 않았나요!”라고 말했다. 나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지니고 노교소에 들어갔고 다시 ‘파룬따파하오’를 지니고 노교소를 나왔지요. 말씀해 보세요. 뚫어지겠습니까?”라고 하자 소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탄복했다.

6. ‘610’주임이 진상을 알고 나를 간부로 배치하다

2004년 나는 성도에 가서 일했는데, 갑자기 시 국보대대 경찰에게 진상을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써서 가지고 간 진상 자료를 한 경찰에게 주자 그는 진지하게 두 번을 봤다. “당신들 모두 보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더니 그는 “우리 모두 공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경찰은 나에게 차를 권하며 파룬궁에 탄복한다고 하며 압력을 견디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지도원만이 내 말을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당신이 공안국에서 일하며 봉급 받는 것은 당신 이익이고, 내가 구해준 것은 당신 생명의 이익으로 천만년의 근원적 이익입니다. 당신이 현 직위에서 파룬궁을 돕는 것은 말하기에 달렸는데 일이란 사람 하기 나름 아닙니까! 당신에게도 좋은 일이지요. 나는 생명이 위협받는 박해를 당했으나 당신을 미워하지 않으며 당신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야말로 당신에게 좋은 일이지요”라고 말했다.

그는 알아듣고 “당신 시 위원회 쪽에 가서 말하지 않겠어요. 그들의 권력이 우리보다 셉니다”라고 말했다. 내가 가겠다고 하자 그들은 ‘610’ 주임(정법위원회 모 서기)에게 전화해 ○○(나를 지칭)이 갈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610’ 주임 사무실에 갔고 첫마디로 “인민 대중과 국가 간부가 소통하고 교류하는 일은 좋은 일이지요. 장벽을 허물 수 있고요”하고 말했다. 그는 웃으며 차를 권했다. 나는 “파룬궁은 천년에도 만년에도 만나기 어려운 불법(佛法) 수련이며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생명은 좋은 일을 하든 나쁜 일을 하든 장래에 보응이 있을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을 위해 책임져야겠지요”라고 하자 그는 일방적인 말은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내가 중국은 신전문화의 국가라고 말하자 그는 사무실 내 다른 사람 눈치를 살피며 자신은 신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저는 신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존중합니다. 하지만 당신이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뉴스연합 보도에서 봤는데 덩샤오핑(鄧小平)이 사망했을 때 그의 딸이 그에게 종이를 태우는 것을 보았습니다”하고 말하자 주임은 웃으며 그것은 애도를 표하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애도를 표하는 것은 검은 완장과 조화로 표시하는 것이지 종이를 태우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바로 신과 귀신을 믿는다는 것이며 바로 종이돈을 태워 망자 영혼이 저쪽에서 쓸 돈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하고 말하자 ‘610’ 주임은 활짝 웃었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중국에서 누가 권력이 가장 셉니까? 정부가 공인한 헌법이 제일 세지요? 국가 주석도 준수해야 하지 않습니까? 헌법 제36조는 공민은 신앙의 자유와 신앙하지 않을 자유를 가진다고 했는데 누구도 차별받지 않아야겠지요? 그뿐만 아니라 인민은 어떠한 국가기관 종사자의 행정과 행사에 대해 감독할 권리가 있지요. 만약 누가 헌법을 위반하면 어떻게 합니까? 나에게 상해를 입히고 노동수용소에 가게 했는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헌법 제41조는 어떤 국가기관 종사자라도 인민에게 상해를 조성하면 반드시 배상해야 한다고 했는데 맞습니까?”

‘610’ 주임이 내 말을 듣더니 놀라며 전화기를 들고 부하 직원에게 ○ 기관에다 나에게 일자리 하나를 배치해주라고 하며 ○○(나를 지칭)가 내 사무실에 있다고 말했다. 진(鎭)의 서기가 간부 직제는 다 차서 자리가 없다고 하자 주임은 다 찼어도 배치해야 한다고 하며 “이 일을 당신에게 맡기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주임은 전화기를 내려놓고 나에게 “저는 그들의 상급자이니 당신은 우선 돌아가서 출근할 준비를 하세요. 우리는 당신에게 배상하려는 것입니다”하고 말했다.

며칠 지나서, 단호하게 전화(轉化)를 거부했던 파룬궁 수련생인 나는 민정 국산화 어느 기관의 부직이 됐다. 기존의 부직과 정직은 24명의 서기 중에서 선출된 지도자였다. 부서 전체에 정직과 부직은 한 명뿐인데 부직은 바로 나였다. 현지 사람들은 내가 네 단계를 뛰어넘은 것을 보고 불가사의하게 여겼는데 이전에 내가 간부를 맡은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젊은 사람이 유망하고 학벌이 있어도 나 같은 이런 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게다가 나는 학벌도 없고 40세가 넘은 사람인데 마법처럼 정법위 서기가 전용차로 나를 데리고 출근했다. 직장에 가서 보니 지도자급 직원은 모두 배경 있는 사람이었는데 주임의 부인 아니면 서기의 질녀 등이었다. 간부가 되었기에 나는 상급 간부와 함께 식사할 기회가 있게 됐다. 어느 진의 상무위원이 나에게 누님, 제가 한 잔 올리지요, 하며 이 자리에 오시도록 자기도 한 표 던졌다고 했다. 나는 감사하다고 말하고 나는 파룬궁 제자이니 차로 술을 대신하겠다고 하며 ‘파룬따파하오’를 기억하시고 복 받으시라고 했다. 이후 동석한 시 위원회 지도자가 나에게 다음 달 말이면 선거를 하는데 제일 책임자는 나 말고는 없다고 말했다.

일하는 동안 업무량이 많지 않아 나는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을 다니며 진상을 알렸다. 사당 서기 책임자에게도 진상을 말하자 그는 지주, 부농, 신앙을 다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나 자신이 또한 진상이었는데 많은 사람이 파룬궁 제자인 내가 드러내 놓고 베이징에 가서 청원한 것을 아는 데다, 장쩌민의 말을 따르지 않고 ‘출국해 유학’(불법적으로 노동수용소에 갇힌 것을 가리킴) 갔다 돌아와 간부가 됐으며, 그것도 네 계단이나 뛰어넘은 간부가 된 것이 미담으로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 뒤 수련 중 환희심이 생기고 누락이 있게 돼 중공 사당의 개회 기간에 진상을 모르는 경찰에게 출근 도중 자전거를 타고 잡혔고 시 세뇌반에 끌려가 박해당했다. 시와 성 세뇌반에서도 나는 전화하지 않았고 반대로 전화한 두 명의 수련생이 집에 돌아가면 수련하겠다고 했다.

집에 돌아온 다음 날 자전거를 찾으러 파출소에 갔는데 막 들어서자 소장이 나를 보고 왔다. 나는 기세 있게 “류(劉) 소장님, 대법제자가 돌아왔습니다. 자전거를 찾으러 왔습니다”하고 말했다. 소장은 창고에 가서 가져가라고 했다. 창고에 가서 보니 자전거 안장이 고장 나 있었고, 마침 나를 붙잡아 세뇌반에 보낸 퉁(童) 씨 성의 경찰과 마주쳤다. 퉁 씨에게 경찰이 국민의 물건을 파괴하면 이치대로라면 배상해야겠지요, 하며 진상을 말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가 “당신은 파룬궁 제자인데 배상을 요구하려 합니까?”라고 말하면서 내 자전거를 들어서 벽에 던져 망가뜨렸다. 나는 “당신을 신고하겠습니다. 일부러 국민의 물건을 망가뜨려 경찰의 형상을 깎고 경찰의 기율을 어겼습니다”라고 하며 바로 시 공안국 기율위원회에 전화로 신고했다. 시 공안 기율위는 내게 회신을 보내왔는데 당신이 파출소 책임자에게 배상을 요구하되 새 자전거로 배상을 원해도 되고 수리 배상도 된다고 하며 만약 소장이 배상하지 않으면 우리 공안 기율위가 파출소에 배상명령을 할 것이라고 했다.

나는 대법제자인데 새것으로 배상을 요구할 필요는 없고 수리해서 탈 수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목적은 파룬궁도 박해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경찰이 알도록 하여 대법제자의 정정당당한 바른 형상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파출소는 새로 온 경찰로 바뀌어서 진상을 말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다음 날 파출소에 가서 부소장을 만났다. 그는 자전거를 먼저 수리한 다음 영수증을 가져오면 보상해주겠다고 했다. 내가 만약 그의 요구대로 한다면 법을 실증하려는 목표는 물거품이 돼 버리기에 나는 동의하지 않았다. 나는 “나는 최고 표준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려는 것이며, 제가 하는 수련은 천만년에도 만나기 어려운 파룬포파(法輪佛法)입니다. 누가 진선인을 수련하는 불제자를 박해하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지금 사람들은 도덕이 비뚤어지고 부패해 마치 광주리에 든 썩은 사과와 같습니다. 누가 진상을 알고 ‘파룬따파하오’를 믿으면 그는 좋은 사과로 변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람을 구하고 있습니다. 좋은 사과가 하나 더 많아지는 것이지요. 만약 광주리 안의 사과가 다 썩고 하나만이 좋은 것이라면 나는 그 하나를 소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광주리에 남은 썩은 사과를 어디에 버려야겠습니까? 당신과 나는 인연이 있습니다. 당신이 진상을 알면 복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 상부의 기율위가 규정대로 파출소에 배상명령을 내렸는데 더 중요한 것은 파룬궁 제자에 대한 박해는 유죄이고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부소장은 진상을 알았고 며칠 지나 자전거를 찾아가라고 했다. 현지 사람들도 경찰 퉁 씨가 파룬궁과 사이가 좋지 않기에 상부로부터 비평을 들으며 잘못을 지적당하고 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부님의 보호와 가지로 이 일은 아주 긍정적인 큰 영향을 불러왔다. 내 조카가 “이모, 파룬궁은 정말 신통합니다. 지금 경찰은 국민의 물건을 파괴해도 배상하지 않습니다. 제 경우를 말하면 2003년 사스(SARS: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로 난리가 났을 때 제가 정당하게 경영하는 피시방 컴퓨터를 경찰이 몇십 대나 몰수해 가고는 한 대도 돌려주지 않았습니다. 파룬궁이 탄압받는 상황인데도 자잘한 자전거 한 대 고장 났는데 파출소가 태도를 바꿔 체면을 버리고 수리해 보상하네요. 파룬궁은 장엄하고 위대합니다! 대법제자가 장쩌민의 파룬궁 박해를 반대한 것으로 기적처럼 간부가 되다니!”라고 했다.

간부가 된 몇 달 동안 현지 진(鎭)장, 당위 서기, 일반인 등 많은 중생이 진상을 알게 됐다. 나는 여기 사명은 거의 완성했다고 느끼고 성도에 가서 계속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하기로 했다.

7. 성 청장이 소장 간부들에게 “파룬궁은 때려도 되는가?”라고 질책하다

2005년 나는 정식으로 삼퇴를 권하며 사람을 구하기 시작했다. 시멘트 공장, 톱질하는 공장, 철거회사 등 어디 가서 일하든지 삼퇴를 권했다. 인력시장에서 기사 한 사람을 만나 진상을 알렸는데 그는 많은 사람이 말해줘서 파룬궁이 좋다는 것을 안다고 했다. 그는 이전에 소선대에 가입했으나 감히 탈퇴하지 못했으며 공산당은 총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한마디 물어보겠다며 그에게 공산당의 총대가 대단한지 아니면 하늘에서 온 전염병이 더 대단한지 말해보라고 했다. 그는 반응을 보이며 탈퇴하겠다고 했다. 이 기사는 공산당의 총대가 아무리 무서워도 전염병이 와 응보가 있을 땐 군대도 끝장이라고 했다.

2006년 내 딸도 성도에 와서 법을 얻었고 다른 수련생과 함께 살며 아주 정진했다. 나는 내내 집이 없었고 고정된 수입이 없었으며 사람 구하는 것을 첫 자리에 놓았다. 노동일을 해 돈을 조금 모으면 일을 그만두고 전문적으로 가서 사람을 구했다. 요 몇 년간 한동안의 간격으로 매번 이런 상태가 계속됐다. 사부님께서 지혜를 주시어 밀집된 군중 속에서 말하기 시작했다. 이후 왼쪽에서 말하면 왼쪽이 명백해졌고 오른쪽에서 말하면 오른쪽이 구도 됐는데 반대하는 말은 거의 없었다. 대도를 걸으니 박해가 없는 곳에 들어온 것 같았다. 두세 명이 진상을 알고 구원 받은 경우가 있고, 한 무리씩 삼퇴를 권한 때도 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글썽이며 합장하고, 어떤 사람은 군대식 경례를 하며, ‘파룬따파하오’하고 외치는 사람도 있었다. 2010년까지 내가 삼퇴를 권한 인원은 이미 만 명이 넘었는데 모두 사부님의 가지로 해낸 것이다.

2009년 내가 일하는 성도의 사악이 남녀 수련생 각 한 명을 납치해갔다. 여성 수련생의 질녀가 공안 분국 국보에 사람을 내놓으라고 찾아갔다가 경찰에게 발로 몇 번 차여 다리 여기저기에 검푸른 멍이 생겼다. 나는 경찰이 법률을 중시하지 않는데 내게는 감독권이 있으니 상급 공안 기율위가 법률을 중시하는지 (고발을 통해) 감독하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고발장을 썼고 직접 수련생의 질녀를 대동하고 시 공안국 기율위를 찾아갔다. 근무자에게 온 뜻을 설명하자 그가 기율위로 전화를 연결해 줬다. 내가 사실을 반영한 이후 공안국 기율위 사람이 1층으로 내려와 내가 쓴 고발장을 보았는데 안에는 파룬궁 진상도 있었다. 그중 한 대목에는 ○○ 경찰이 고문과 자백 강요를 금지하고, 체벌 및 유사한 체벌을 금지하고 있는 경찰법을 엄중하게 위반했으며 사람을 때렸으니 반드시 추궁해야 한다고 적었다. 내가 수련생 질녀의 다리를 걷어 올리게 해 다리에 멍든 것을 기율위원이 보게 했다. 그는 진상을 알고 선의로 말하기를 “해외에서 파룬궁은 자유지만 여러분은 안전에 조금 주의하세요”라고 했다. 말이 끝나고 그는 전화기를 들고 산하 공안 분국 기율위에 ○○ 경찰이 규정을 어겼고 고발인이 여기에 있으며 다리에 상흔이 있음을 내가 봤다고 말했다.

시 공안국은 우리에게 공안 분국에 와서 문제를 해결하라고 했다. 정사의 대결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2주간 우리는 곤란과 회피에 부딪혔는데 공산 사령과 구세력이 우리에게 고소를 포기하게 하려고 함을 눈치챌 수 있었다. 우린 아주 침착했는데 그들은 즉시 처리하지 않았고 규정에 따라 30일 내 처리하면 됐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다. 최종 처리결과는 기율위의 직접적인 명령하에 때린 경찰이 수련생의 질녀에게 정중히 사죄하는 것이었다. 그는 “저는 전체 경찰을 대표해 당신께 용서를 빌며 사죄드립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돕겠으니 전화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이번 고소는 사악을 매우 놀라게 했다. 그 이후로 경찰이 수련생 집에 가서 소란 피우는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말했다. “현재 경찰이 얼마나 많은 무고한 국민을 상해했지만 사과한 일이 없는데 파룬궁 사람들에게 사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신기하다, 정말 신기하다!”

이번에 체포된 남자 수련생은 시 국가안보국이 체포하려던 이른바 중점 인물이었고 구타로 치아가 부러졌다. 또 고발(진정)하자니 시 공안국과 시 국보(국가 안전보위)는 동급이라 조사가 어려울 것인데 어떻게 할까? 게다가 이 일은 한 달 남짓 걸릴 것이다. 나는 집도 없고 고정된 수입도 없는 데다 어떤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재삼 고려한 끝에 나는 자신의 이익을 내려놓고 조사정법(助師正法)하며 동료 수련생 구출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어떻게 시작해 길을 열어갈 것인지 수련생과 상의했다. 모두 매우 어렵고 위험하기도 하다며 나에게 협력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혼자서라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고발을 궁리하며 성 공안청에 갔다. 먼저 공중전화로 114에 문의해 성 공안청 주소와 당직 전화를 적고, 당직실을 통해 공안청 기율위 전화를 알아낸 다음 집에 돌아와 고발장을 쓰기 시작했다. 고발장을 등기우편으로 발송하고 1주일 후 우체국에 알아보니 공안청에 이미 접수됐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어 성 공안청 기율위에 전화해 ○○가 발송한 우편을 받았는지 묻자 그들은 선뜻 인정하지 못했다. 나는 “당신들은 서류 가방 회사가 아니고 떳떳하게 군중에게 봉사하는 성 공안청이 아닙니까. 내가 등기로 보냈는데 우체국에서는 당신들이 이미 받았다고 합니다”라고 말하자 공안청 기율위는 놀라며 다시 찾아보겠다고 했다. (처리하지 않으려 했다가 태도를 바꿈). 1주가 지나 나는 또 전화했다. 공안청 기율위 직원은 나에게 “○○ 파룬궁 사람이 고발한 건입니까? 당신은 그 사람과 어떤 관계지요?”하고 물었다. 나는 가족이라고 했다. 상대방은 “저는 파룬궁 안건은 많이 받아봤고 횡령 건도 처리했지만, 당신의 이 건은 우린 두렵습니다!”라고 말했다. (미룰 것이니 포기하라는 뜻). 내 마음은 열정으로 충만했고 우리가 가장 바르다고 생각하며 다른 것은 고려하지 않았다. 나는 “중국 최고의 권위는 헌법이잖습니까? 헌법 제36조는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고 있지요? 당신은 파룬궁이든 아니든 누가 경찰법을 위반해 고문하고, 자백을 강요하고, 체벌이나 변형된 체벌을 가했다면 추궁해야겠지요! 국가가 공안 기율위를 설립했으니 위법경찰을 조사하는 것은 당신의 업무 아닙니까. 만약 당신이 내 고발 건을 수리하지 않는다면 장래에는 법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당신 사무실도 존재하지 않게 되고, 당신 의자도 없고, 벽에 있는 시스템도 없을 것이고, 당신 경찰복도 효력이 없을 것인데 그럼 나는 어찌해야 합니까? 국가 기율 조사위원회에 어느 부서 누가 경찰법을 무시했으니 국가가 설립한 공안 기율위가 직권 조사해 바로잡아달라고 반영하는 수밖에 없겠지요.”라고 했다. 사부님께서 지혜를 한 꿰미나 열어주셨기에 그들은 마치 자신들이 곧 직을 잃게 될 것처럼 두려워했다. 내가 그들의 상사라도 되는 것처럼 “걱정하지 마시고 화내지 마십시오. 즉시 청장님께 보고 드리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고발 건은 근 1개월 동안 진행되었는데 이성적으로 공안청 기율위에 진상을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다. 가까이 있는 동료 수련생은 나를 돕고 싶어 하며 폭행당한 남자 수련생에게 정보를 전달하고 어디까지 진척됐으니 배상받을 준비를 하라고 알려줬다. 과정 중에 내가 발정념과 법공부를 잘했기에 정념이 충만할 수 있었다. 밤에 꿈을 꿨는데 내가 주먹으로 이음새 없는 강철 수도관을 깨부쉈다. 그것이 철제인지 아닌지 보지는 못했으나 있는 힘껏 부쉈다. 마침내 깨부수자 물이 쏟아져 나왔다. 아침에 일어나서 이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깨어난 후 중공의 쇳덩이 같은 기구(기관)를 깨부쉈으며 이어 더 작은 쇳덩이도 부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전화로 성 공안청 기율위에 문의한 결과 직원이 답하기를 “우리 청장님께 보고했고, 우리 성이 상급 부서이기에 이 건을 시 공안국에 이첩했으며 시 공안국이 잘 처리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들은 시 공안국 기율위가 나에게 전화하도록 했다.

나는 시 공안국 기율위에 전화로 “내 고발 건은 파룬궁 수련생을 때린 사건이며 성 공안청이 당신 여기로 이첩해 처리하도록 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상대방 직원은 파룬궁은 정치적 억압이니 말하지 말자고 하면서 사부님께 일부 불경한 말까지 했다. 사부님께서 내게 지혜를 주셔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모두 봉해버릴 수 있었다. 나는 “헌법은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며 파룬궁은 불법 수련입니다. 당신 직책은 기율을 위반한 경찰을 조사하는 것인데 불필요하게 파룬궁 수련자에게 죄를 지을 필요 있겠습니까? 경찰이면 국민을 위해 근무하고 나쁜 사람을 단속해야지요. 형사과는 형사과 일을 하고 법심과는 법심과 일을 하고 당신 기율위는 기율위 일을 하면 되겠지요. 경찰이 때린 사람을 붙잡든 횡령자를 붙잡든지 간에 경찰이 사람을 때리거나 체벌하는 것은 기율 위반입니다. 국민이 고발하면 당신은 직권을 행사해 처리해야지요. 게다가 이 파룬궁 수련생이 얻어맞은 고발 건은 당신의 상급 공안청이 당신에게 이첩해 완결하도록 한 것입니다. 당신 상급 부서에서 당신에게 파룬궁 제자를 위해 말할 기회를 준 것입니다. 당신은 오늘 하늘만큼 좋은 일을 만났습니다. 당신도 일찍이 우리 사부님의 친인이었습니다. 나의 고발은 당신이 정정당당하게 권력을 행사하도록 하고 복을 받게 할 것입니다. 이렇게 좋은 일을 어디에 가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정정당당하게 파룬궁 제자를 위해 말하면 이 곤란이 당신에게 좋은 직위를 얻을 기회가 될 것이고 전도가 광명할 것입니다. 당신이 알아들으면 모두 자신을 위해 한 것이고 또 합리적이고 합법적인 데다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상대방은 격동돼 나에게 “걱정하지 마세요. 모레 제가 우(吴) 씨에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말했다. 나는 구세력이 설치한 거대한 난을 대법제자가 그 쇳덩이를 부숴버림으로써 중생이 구원받을 수 있게 됐음을 깨달았다.

좀 지나 나는 시 공안국 기율위에 회신을 요청했는데 직원이 나를 상사처럼 여기는지 조심하며 부드러운 말로 “아시는지 모르겠는데요, 맞은 파룬궁 수련생은 시 국안이 체포하려는 중점 인물입니다. 그들(국안)은 믿는 구석이 있어 겁이 없습니다. 우리 말은 전혀 듣지도 않으며 아주 건방집니다. 횡령범은 우리가 잘 처리하지만 우리는 그들 국안을 해볼 수 없습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 안건은 당신이 성 공안청에 고발했고 다음 우리에게 조사하라고 이첩됐지요. 우리는 그들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어찌하겠습니까? 우리는 성 공안청에 보고할 수밖에 없었지요. 결국, 청장이 직접 왔고 시내 모든 파출소 소장과 소장 이상의 간부 지도자 대회를 개최해 그들을 질책했지요. 대회에서 청장이 말하는 분위기에 우리는 아주 긴장하며 두려워했습니다. 청장이 질책하기를 ‘누가 당신들에게 사람을 때리라고 했습니까? 네? 파룬궁은 때려도 됩니까? (원래의 말) 지금 이후로는 각 소장이 파출소 당직 게시대에 기율위 고발 전화를 게시하십시오. 누구라도 고발할 수 있게요”라고 했다.

나는 이런 좋은 결과를 수련생에게 알려주자 수련생은 듣고 아주 감동했다. 어떤 수련생은 “이번에 사악의 쇳덩이 같은 기관을 무너뜨렸고 사악의 기세를 소멸했다”라고 말했다. 또 어떤 수련생은 우리 수련하는 사람은 정말로 배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고, 나는 이미 한 달 넘게 일을 지체해 돈을 벌지 못했는데 생활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나는 정말로 배상 추궁을 한 것은 아니었으며 일하러 나갔다.

조사정법하고 구도중생하는 중에 나는 자신의 집착을 내려놓고, 자신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꺼이 감당하고 싶다. 사심을 내려놓아야만 대법에 동화될 수 있고, 법 중에서 지혜가 나올 수 있으며, 법 중에서 정념이 생길 수 있다. 사람의 것을 내려놓아야만 신의 것을 얻을 수 있다. 사부님의 자비하신 구도에 감사드린다. 수련생의 도움에 감사드린다.

허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시사: ‘홍음-악비(岳飛) 묘를 거닐며’

 

원문발표: 2021년 1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1/1/12/41827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