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랴오닝 대법제자
[밍후이왕] 오랜 생각 끝에 얕게나마 내가 제고한 병업에 대한 인식을 수련생들과 나누고자 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병’이란 이 글자를 꺼내기만 해도 나는 듣고 싶지 않다.”[1]
나는 생각했다. 사부님께서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나는 대법제자의 수련은 수련을 시작할 때 사부님께서 수련생들의 신체를 유백체 상태로 정화해주셨다고 깨달았다. 그렇다면 마땅히 아주 높은 층차에서 문제를 보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대법제자는 병이 없다. 그러나 병이 있는 상태가 신체에서 표현되어 나온다. 왜냐하면 사람의 생명은 윤회 속에서 업을 지어 소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병이 아니다.
그럼 병이 없는데 왜 병업관을 넘는다고 말하는가? 병업관을 넘는다고 말하기만 하면, 병에 대한 사람의 습관성 사유가 질병의 발현으로 이어지지 않는가? 그럼 병에 걸린 상태를 일으키고 집착하게 되지 않는가? 그런 다음, 이 상태를 벗어나려고 표면에서 열심히 정진하는데, 실질적으로는 가능한 한 빨리 병의 표현 상태를 개선하려는 것이다.
애초에 첫 일념이 심성관으로 보고 진정으로 마음을 내려놓고 안을 행해 찾아야 했다. 장기간 내려놓지 못한 집착이 있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 진정으로 심성을 실질적으로 수련하지 않아서 조성된 것이 아닌가? 구세력이 대법제자가 심성에 누락이 있음을 구실로 틈을 타고 교란 박해하는 것이 아닌가? 사람의 생각이 너무 많아서 정념이 매몰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정념을 강화하지 않아 심성을 제고해야 한다는 인식을 첫 번째로 떠올리지 못했다!
개인 인식으로 대법제자의 머릿속에는 마땅히 병에 대한 관념을 버려야 하고 병이라는 글자의 개념이 없어야 한다. 병이 아니니까 당연히 병이라는 글자를 제기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단지 표현만 그러할 뿐이기 때문에, 대뇌 사유 속에서 병이라는 인상을 점차적 옅게 해야 하고 생명 속에 이 글자가 없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종종 신체에 이런 상황이 나타나면 습관적으로 ‘아이고! 나는 무슨 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겉으로는 인정하지 않는다, 나는 대법을 수련하기에 나는 병이 없다고 한다. 표면에서 보면 마치 정념 같지만, 사실 이미 병의 신체적 징후를 걱정했다. 왜냐하면 병에 대한 사람의 인식은 불편함과 동의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병에 대한 관념은 바로 배척이다. 그 이유는 불편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이후 신체가 더욱 엄중한 부정확한 상태가 나타나면 비로소 긴박감이 생기고 비로소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고 인식한다. 마침내 아주 많고 많은 집착심을 발견했고 법공부와 연공을 많이 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집착심을 제거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전혀 조용해지지 않는다. 계속 병의 신체적 징후를 생각해 단기간에 뚜렷한 변화가 나타나기란 아주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에게 의식하지 못했거나 깨닫지 못한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의 첫 사유는 자신의 신체가 하루빨리 좀 호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명백히 말하면 그가 정진하는 목적이 불순했다. 그는 이런 업력의 표현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다. 혹은 잠재의식에 편안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이런 상태가 빨리 지나가기를 바랐다. 그는 아주 조급했다. 그렇다면 그는 그저 표면적으로 아주 정진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자신의 신체 상태에 대해 내려놓을 수 없었다. 그의 정진은 바로 유위이고 병을 제거하기 위함이며 신체가 편안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그의 이런 신체 상태는 오히려 아주 오랜 시간을 끌게 된다.
아마도 수련생들의 갖은 도움으로 천천히 상태는 변화할 것이다. 이후 아마 그는 많고 많은 집착심을 더는 찾지 않을 것이다. 또 정진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편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성은 오히려 이 한차례 관을 넘는 중에 진정하게 제고하지 못했다. 이번 기회에 그가 찾아낸 많고 많은 집착심을 진정으로 닦지 못했다. 그는 단지 약간의 소업의 고통을 감당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 관을 진짜로 넘은 것인가?
구체적인 일은 구체적인 사람을 겨냥해 나타난다. 이런 마음이 있기에 이런 마음을 제거하는 이런 일이 나타난 것이다. 그는 장기간 집착심을 제거하지 못했고 시시각각 안을 향해 심성을 닦지 않았다. 진정으로 심성을 제고하지 못해 법에서 승화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침내 이런 집착은 거대해졌고 관이나 난은 점점 쌓였다.
일부 수련생은 병업 가상이 나타나거나 병업관을 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런데 수련 과정 중에 나타난 매 하나의 난과 관은 모두 심성 제고를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모두 심성제고를 위해 나타난 것이라면 그것은 모두 좋은 일이 아닌가? 그럼 왜 이런 관을 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사실 바로 병에 대해 형성된 관념이 주는 두려움이 농간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불편함을 두려워하다니! 수련하는 사람이 심성제고의 기회나 요소를 거부한단 말인가?
‘암증상이 있었던 수련생도 모두 나아졌다! 왜 좋아졌는가? 개인적 인식으로, 그가 전혀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에 대한 집착이 없었고 ‘병’의 개념이 없었으며 ‘병’의 상태를 개선하겠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명백히 말해서 그는 바로 전혀 ‘병’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병’에 대한 근본 집착과 관념을 내려놓았다. 그럼 상태는 당연히 아주 빠르게 변한다!
우리 수련은 심성수련이고 심성을 제고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이다. 대법제자가 한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은 중생구도다. 그것은 우리의 역사적 사명이다. 만약 우리가 머릿속에 담은 것이 모두 법이면 또 어찌 신체 표현 상태를 생각할 시간이 있겠는가? 만약 이런 순정한 심태가 없다면, 높은 오성이 없다면, 법리 속에서의 인식의 제고가 없다면, 부정확한 신체 상태가 어떻게 좋아지겠는가? 이런 것은 모두 정념이 아닌가!
나는 정념으로 구세력의 교란과 박해를 부정하고 제거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인식한다. ‘병’이라는 그릇된 올가미에 빠지지 말고 ‘병’에 대한 인식을 개변해야 한다. 마음에 잡념이 없고 순정한 심태로 진정하게 안을 향해 찾아야 한다. 아울러 장기간 내려놓지 못하거나 의식하지 못한 집착을 내려놓고 그 뿌리를 찾아 제거해야 한다. 여기에 법에서 정념을 더하면 이 관은 보증코 넘을 수 있다! 만약 우리의 주이스가 아주 강하고 또 법에서 자신의 사유를 바로 잡을 수 있다면 어떠한 것도 우리가 용맹정진하는 것을 가로막지 못한다!
개인적으로 사유는 간단할수록 더욱 좋다고 인식한다. 나는 간단한 사유는 층차의 낮음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심성 제고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얕은 인식이 수련생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층차의 제한으로 법에 맞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자비로 시정해 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전법륜’
원문발표: 2021년 1월 2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1/1/22/41812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