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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하나의 난관을 넘을 수 있도록 나를 보호해 주신 사부님의 은혜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1949년 3월생이며, 집에는 형제자매가 7명으로 저는 장녀입니다. 스스로 선천적인 괴로움과 고생을 참고 견뎌내며 장기적인 과로로 말미암아 병이 생겼고, 잠복해 있던 질병마저 모두 발작했습니다. 극도로 원기가 허약하고 빈혈증이 있어 저는 “아이스맨“이 되어 종일 온몸이 차가웠고 아무리 따뜻하게 해도 잠을 잘 수 없었습니다.

1990년 10월 시어머니가 위중하여 저는 절에 가서 부처님께 빌었지만 소용없었고, 오히려 부체(附體)공을 연마하게 됐습니다. 저는 부체공을 매우 열심히 연마하여 시 기공협회에서도 ‘유명’했습니다. 부체공은 저의 어떤 질병도 치유하지 못했지만 제가 다른 사람에게 ‘병 치료’를 할 수 있는 약 처방을 해주었고, 저의 몸은 해를 입어 ‘전체 유착’이 되어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아 병원과 기공협회는 저를 ‘산송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저는 마흔 살 초반에 생활을 혼자 할 수 없었고, 지팡이를 짚어야 걸을 수 있었습니다. 1993년부터, 머리부터 발까지 다 병이었고, 어느 병원에 가도 결과는 모두 가족에게 후사를 준비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절망의 상태에 직면한 그때, 저는 행운으로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얻고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대법의 신기함이 주는 아름답고 훌륭함

1994년 5월 28일 오전, 저는 사존의 설법을 들으러 갔습니다. 도중에 버스를 갈아탈 때 남편이 저를 부축하고 같이 간 두 사람이 저를 위로 끌어 올리고 아래에서 두 사람이 저의 발을 들어 올렸습니다. 버스에서 내릴 때 한 사람이 버스 아래에서 저를 받고 버스 위에서 한 사람이 저를 잡아주었습니다. 그러나 사부님의 설법을 다 듣고 돌아갈 때, 저는 스스로 오르내릴 수 있었습니다. 학습반 나흘째 되는 날, 저는 난소를 제거한 사람인데, 생리가 와서 파룬따파의 신기함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9일 학습반 기간 남편은 매일 퇴근 후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저를 데리러 왔을 때 마침 사존께서 우리에게 연공을 가르쳐주셨습니다. 사존께서는 남편에게도 연마하라고 하셨고, 직접 남편의 동작을 바로잡아주셨습니다. 그 이후로 남편의 위출혈, 빈혈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치유되었습니다.

9일 학습반이 끝난 후 어느 날 오후, 저는 갑자기 침대 세 가장자리에 한 자 높이의 황금색 불꽃이 솟아오르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신기하고 현묘한 장면이 약 3시간 정도 지속되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잠잘 때 매우 더운 감을 느껴 남편에게 침대에서 전기담요, 모피 외투, 보온병을 치우라고 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몸은 차갑지 않았고, 잠잘 때 춥지 않았습니다.

9일 학습반이 끝난 후 6월 12일 며느리가 출산 후 허약해져 침대에 누워있었고, 남편과 아들이 모두 집에 없었습니다. 아기가 울어 저는 자연스럽게 가서 손녀를 안아주었습니다. 바로 이때 물이 끓어 저는 한 손에 아기를 안고 한 손으로 난로 위의 주전자 물을 보온병에 부어 넣었습니다. 일을 다 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습니다. ‘아니! 이전에 혼자 생활할 수 없던 사람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와! 나는 병이 없다.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 나는 가고 싶은 곳을 어디든 갈 수 있다! 나는 하고 싶은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괴팍하고 불안하던 저는 그때부터 쾌활해지고 온종일 싱글벙글 웃고 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대법이 너무 신기합니다. 너무 아름답고 훌륭합니다. 당신들도 이 대법을 배우세요”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사존에 대한 무한한 숭경(崇敬)과 은혜에 대해 감사함을 품고, 이후로 혼신의 힘을 다해 대법을 널리 알리는 활동에 돌입했습니다. 수련생들과 함께 본 현의 48개 향진(鄉鎮)에 연공장을 설립했고, 주변 현에 가서 법을 널리 알리고 시 보도원을 따라 각처로 가서 홍법을 했습니다. 우리는 랑중(閬中), 창시(蒼溪), 충칭(重慶), 쑤이닝(遂寧), 젠양(簡陽), 쯔양(資陽), 펑저우(彭州), 원촨(汶川), 아바(阿壩), 구이양(貴陽),스자좡(石家莊)에 발자취를 남겼으며, 줄곧 사부님의 보호로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功)은 사부에게 달렸다.”[1]입니다.

박해는 진작에 사전 모의가 있었다

1999년 설이 막 지나서 현지 파출소는 사람을 보내어 매일 아침 8시에 저를 현 체육위원회로 데리고 간 후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려보냈습니다. 현 체육위원회에서 파룬따파가 우리 현에 널리 알려진 상황을 알아보겠다고 하여 당시 저는 매우 기뻐했습니다. 체육위원회에서 지지하면 파룬따파가 더욱 빨리 더 순조롭고 확고하게 전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매일 성실하게 그들에게 제가 간 곳에서 보고 들은 것과 현지에 파룬따파가 전해진 후 나타난 새로운 풍모와 끊임없이 나타난 좋은 사람, 좋은 일을 말했습니다. 그중에는 정부 기관, 공장과 광산, 행복원 등이 포함됩니다. 매일 저는 행복한 회상에 잠기곤 했습니다.

1999년 3월 20일 제 생일날에 친정 식구가 생일 축하를 해주려고 우리 집에 왔습니다. 밥 먹으러 가자고 저를 데리러 왔을 때 현 체육위원회 관계자가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우리는 아주머니가 하루빨리 파룬궁(法輪功)을 떠나도록 하고 있으니 당신들은 방해하지 마시오. 다시 오면 공무를 방해하는 겁니다.” 놀란 사람들은 점심도 먹지 않고 돌아갔습니다.

아들이 불복하여 파출소에 가서 물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당신들 다시는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니를 데려가서는 안 됩니다.” 소장은 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별일 없습니다. 그들은 파룬궁이 우리 현에서 널리 전해진 상황을 알아보려 한 겁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도 상급에 사람들이 파룬궁을 연마한 후 파출소도 마찬가지로 혜택을 본 일을 말했습니다.”(예를 들면 매년 가장 조절하기 어려웠던 모내기 철에 물을 빼앗는 일로 싸워 일어나는 유혈 사건이 없어졌다. 형제의 불화, 고부간의 모순, 이웃 간의 모순이 적어졌음.)

집에 가서 아들이 이 일을 말하는 것을 듣고, 저는 아들을 설득했습니다. “그들에게 많이 들려줘야 해. 엄마가 대법을 널리 알리는 거야. 사부님이 계시고 대법이 있으니 별일 없을 거야.” 그래서 저는 매일 또 더 자세하게 파룬따파가 전 세계 각지에 전해진 성황을 소개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들에게 아바주(阿壩州) 공안국장에게 한 말을 들려주었습니다. “파룬궁이 어디에 전해지든 그들이 가는 곳마다 일률적으로 비용을 받지 않습니다” 또 그들에게 파룬궁을 수련한 후 나타난 신기한 사례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탈모였던 한 여성은 수련한 후 머리카락이 수북이 자랐고, 뇌 위축으로 반신불수가 된 청년이 3개월 만에 회복한 일……

4월 초 그들은 마침내 참지 못하고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그 지도자가 말했습니다. “돌아가서 잘 생각해 보시오. 아주머니 사부와 연락 비밀번호, 보도원 명단을 넘겨주지 않으면 가족과 만날 생각하지 마시오.”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알고 보니 그들은 나쁜 의도를 품었고 음흉하고 악랄했구나! 어디에 무슨 비밀번호가 있고 내가 어떻게 무슨 명단을 제출한단 말인가?!’

파출소 소장의 간여로 그들은 우리 집에 와서 저를 데려가지 않았지만 제 주변에는 많은 낯선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강에 빨래하러 가면 기슭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고, 거리에 채소를 사러 가면 몇 m 밖에서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암시하는 사람이 있었고, 채소 줍느라 쪼그리고 앉으면 즉시 까치발을 하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있었으며, 집에서 일하면 항상 창문 앞과 문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저는 두려운 마음이 전혀 없었고, 그들이 너무 우습게 느껴졌으며, 저는 해야 할 일을 또 했습니다.

1999년 7월 20일 이른바 체육위원회 지도자는 음험하게 웃으며 저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현 공안국 형사수사과 ○○과장입니다. 우리는 아주머니를 반년 넘게 조사했습니다. 곳곳에 아주머니 발자취가 있더군요. 아주머니가 보도원 명단을 넘겨주거나 내 차를 타고 아주머니가 갔던 곳에 가서 한번 지명해 주면 아주머니는 괜찮을 겁니다.”

여러 차례 불법적으로 당한 수색 중의 두 차례

1999년 7월 20일 그날 저는 명단이란 것을 제출하지 않았고, 지명도 하지 않았으며, 끊임없이 파룬따파가 좋다는 말만 하여 그들은 화를 내며 저를 자정까지 감금한 후에야 집에 돌려보냈으며, 동시에 불법적으로 제 집을 수색했습니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벽에 붙여 놓은 ‘파룬궁 동작 도해’와 붓으로 쓴 ‘파룬궁 소개’를 찢어 버렸고, 벽에 걸린 사부님의 법상(法像), ‘논어’, 파룬은 항상 돈다(法輪常轉) 사진, 나의 수강증, 수료증서와 사부님과 찍은 기념사진, 나의 장애인증(5살 때 왼쪽 눈 실명), 홍법(洪法)을 위해 준비한 수십 개의 파룬 뱃지 판(100매/판), 자원봉사로 연공을 가르치는 현수막, 몇 무더기 파룬궁 종이 전단지, 연공복장 수십 세트를 빼앗아갔습니다.

2003년 5월 23일 오전 9시 무렵 현 ‘610’ 불법 직원이 경찰차 3대와 구치소 소장이 거느리고 온 10여 명이 경찰이 공장 안에 있는 우리 가족을 속여 문을 열게 한 후 강제로 불법적으로 집을 수색했습니다. 구치소 소장은 “증거가 부족하다”라고 말하며 조기 철수했습니다. (법을 어기지 않은 이 구치소 소장은 당일 해임된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위법자들은 제가 사부님을 만난 적이 있기에 상황을 알아본다는 이유로 저를 파출소에 연행해 간 후 연금(軟禁)했습니다. 그들은 또 우리 집으로 되돌아와 문을 부수고 수십 개 파룬 배지와 ‘진선인(真·善·忍)’ 긴 휘장 30매, 파란색으로 수놓은 새틴 깃발, 연공복장 두 세트, 홍보 사진 233장, 대법 책 10여 권, ‘홍음’ 두 무더기, 저의 개인 돈 5만 위안(약 850만 원)과 손녀의 세뱃돈을 훔쳐 갔습니다.

박해당하여 심하게 맞았으나 사부님께서 나를 보호하시어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2003년 5월 23일 오전, 저는 파출소에 끌려간 후 경찰은 저를 긴 의자에 수갑을 채웠습니다. 두 명의 경찰이 교대로 불법 취조하고 음식과 마실 것을 주지 않았습니다. 5월 24일 오후 6시, 저를 세뇌반으로 보냈습니다. 저는 문밖에 열쇠가 있고 안에는 빗장이 있으며 빈 침대 하나, 플라스틱 대야가 있는 빈방에 감금됐습니다.

2003년 5월 25일 새벽 6시경 뭔가에 머리를 심하게 맞는 꿈을 꿔 저는 몸을 일으켜 앉았고, 바로 세 명의 우람하고 건장한 남자가 침대에 올라와 저를 때리고 차는 것에 마주했습니다. 저는 “왜 나를 때립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감히 질문을 해?”라고 말하고는 또 연이어 저의 뺨을 때렸습니다. 그들은 구둣발로 저를 차 침대에서 떨어뜨렸습니다. 그들은 저의 가슴, 허리, 하반신을 걷어찼습니다. 그러고 나서 여성용 스타킹으로 제 두 손을 뒤로 묶었고, 종려승(종려털로 꼰 줄)으로 쫑쯔를 묶듯이 묶었습니다. 저의 두 어깨에서 발목까지 묶은 후 저를 땅에 넘어뜨리고 발길질을 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여전히 용서를 빌지 않아?”

세뇌반에서 둘러싸고 보던 동료들이 문밖에서 말했습니다. “어젯밤에 여기에 온 사람을 오늘 이렇게 대하는 건 너무 심하네!” 그 세 명은 욕하며 그제야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나가기 전, 한 뚱뚱한 경찰이 또 저의 허리를 힘껏 걷어찼습니다.

2003년 5월 25일 오전 10시경 현 ‘610’ 불법 직원과 현 공안국의 여성 정치 지도원이 온 후 이 상황을 공안국 국장(이 여성 정치 지도원의 남편)에게 보고해서야 세뇌반 사람은 철제 집게로 제 살에 감긴 종려승과 스타킹을 잘라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저는 이미 온전하게 설 수 없어 부축을 받아 아래층 사무실 문밖에 이르렀고, 세뇌반 두목이 많은 사람 앞에서 저의 뺨을 몇 차례 때리며 제가 화를 일으켜 자신이 해고되었다고 했습니다. 당시 저는 온몸이 떨려 서 있을 수 없었고, 누군가가 끊임없이 제 이름을 부르며 제 손을 잡고 긴 의자에 앉아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당시 구타하여 이빨 3개가 뽑혔고, 며칠 뒤 또 4개가 뽑혔습니다. 정오가 되자 제 허리 복부가 부어서 10개월 만삭의 임산부 배만큼 커졌습니다.

오후 4시에서 6시까지 그들은 저의 얼굴을 닦아 주었고, 선후하여 저를 정싱(正興) 병원과 화양(華陽)2병원으로 데려갔고, 모두 의사에게 문책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이 지경이 됐습니까? 이제야 데려온 겁니까? 인명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둘러서서 보고 있었습니다.

세뇌반에 돌아오니 이미 새벽 1시가 넘어있었습니다. 4명의 남성 경찰, 2명의 여성 경찰이 저를 동반했고, 한 여성 경찰이 저에게 ‘610’ 경찰이 저를 죽여 입을 막으려 했으나 소장이 그들에게 24시간 나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나중에 소장이 저에게 제가 그렇게 구타당하게 될 줄은 그들도 생각지 못했다며 전력을 다해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저를 보호해줄 수밖에 없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 선량한 소장은 나중에 교통경찰서로 전근되었습니다.

저의 당시 그러한 상황은 손바닥 뒤집듯 살해당할 수 있었습니다. 사존의 보호로 파출소 6명의 경찰을 보내주시어 엄밀하게 보호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틀림없이 죽었을 것입니다.

더 신기한 것은 제가 그렇게 심하게 두들겨 맞았지만, 그 과정 내내 저는 아파서 괴로운 느낌이 없었습니다.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저를 위해 감당해 주셨고, 그렇지 않았다면 그렇게 심한 뇌진탕, 장기 손상, 내출혈로 인한 극심한 통증과 상해를 저는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고 살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 후 저는 일주일 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고, 입이 부어 석 달 동안 입을 벌릴 수 없었습니다. 저는 계속 명단을 제출하거나 다른 사람의 신원을 밝히지 않아 2003년 5월 30일 저녁 7시에 유치장에 보내졌습니다. 유치장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피를 콸콸 토했습니다. 감옥 의사는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되어 수시로 감방으로 검사하러 왔습니다.

이튿날 아침 저에게 수갑과 족쇄를 채워 현 병원으로 이송했습니다. 의사는 놀라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너무 잔인하군요! 사람을 이렇게까지 때리다니!”

돌아갈 때 배가 더 부어올라 차를 탈 수가 없어서 그들은 그제야 수갑을 풀고 저를 밀치락달치락하며 차에 밀어 넣었습니다. 오후에 피를 끊임없이 토해 다시 현 한방병원으로 이송하여 크고 작은 약을 7포 가지고 왔습니다. 저는 정신이 뚜렷하여 사람을 보면 말했습니다. “이것은 병이 아니라 세뇌반 사람에게 맞은 것입니다.” 저는 계속 약을 먹지 않고 버텼고, 구치소에서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세뇌반에서 당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고, 사부님의 경문 ‘진수(真修)’를 외웠습니다.

사존께서 보호해 주셔서 살아서 감옥을 나오다

2003년 12월 30일 저는 불법적으로 3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촨시(川西) 여성감옥에 보내졌습니다. 감옥에 도착한 후 저의 몸은 갈수록 악화되어 피를 토하고 기절하여 쓰러졌으며, 온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두 번이나 생산작업장에서 노예 노동을 하다가 쓰러져 더는 저에게 노예 노동을 시키지 않았고 수시로 감옥 경찰이 저를 맞은편 산에 있는 남성 감옥 병원에 보내 진찰을 받게 했습니다. 의사는 말했습니다. “내장은 엉망으로 뒤얽혀 어디가 어딘지 분간할 수 없습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저는 맞은 경과를 말하고 동시에 진상을 알렸습니다. 누가 저에게 묻기만 하면 진상을 알려 사람들 특히 감옥 경찰은 파룬따파에 대한 적대시와 저에 대한 냉담함이 바뀌어 선하게 대하기 시작했습니다.

남자감옥 병원으로 가려고 여자감옥 대문을 나갈 때마다 감옥 경찰은 저에게서 수갑과 족쇄를 풀어주고 제가 자발적으로 말하는 파룬따파의 신기함이 주는 아름답고 훌륭한 대법이 전국 각지에 전해진 정황을 들었습니다. 가족이 어느 날에 오든지 모두 볼 수 있었고, 물품을 살 수 있었습니다. 감옥 경찰은 감옥 의사의 당부에 따라 저에게 나무 침대에 반드시 눕게 하여 매일 두 번 뜨거운 물로 온몸을 찜질하게 했습니다.

어느 날 오후 희미한 가운데 사존께서 철제 난간 밖에서 저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더 쓰러지지 않는다!” 저는 정말 더는 기절하여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후 두 차례에 걸친 밤 9시 수감 신청을 할 때 저는 독감 증상이 나타났고, 얼굴이 온통 벌겋게 달아올라 아무리 불러도 깨어나지 못하여 나중에도 제 이름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감옥 측은 이 일로 제가 언제 쓰러져 다시 깨어나지 못하게 될까 봐 저를 엄중하게 관리하려고 건물 1층으로 옮겼습니다. 게다가 감옥 의사가 형기를 물어보고는 병력서를 가지고 돌아가서 다그쳐 치료하라고 신신당부하여 감옥에서 저를 2006년 7월 27일 앞당겨 석방했습니다.

저는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은 사존의 자비로운 안배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2004년 5월 동료수련생들이 저를 응원하러 왔고, 같은 감방에 있던 한 여성 경제범이(그녀는 남편이 매주 밖에 데리고 가 외박함.) 3일 연속 저를 면회하겠다고 신청한 사람 30~40명이 감옥 주위에 있었다고 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2005년 12월 하순의 어느 날 아들이 저를 보러 왔을 때 저에게 양로보험에 가입하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 않을 것이다. 공산당에게 수혈하지 않겠다! 게다가 나는 여전히 감옥에 있는데 할 수나 있을까?’ 저를 동반하여 나온 감옥 책임자가 말했습니다. “오세요. 당신 아들이 돌아가서 가입할 수 있게 제가 사진을 찍어 드릴게요.” 그날 아들은 저의 사진을 가지고 집에 돌아간 후 빠르게 제 양로보험을 들어주었습니다.

저는 자비로운 사부님께서 제자가 신체의 장애를 입고 석방 후 생계원이 없어 제자를 위해 미리 양로보험을 들어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사존께서 나를 소침함에서 걸어 나오도록 구해주시다

2007년 3월의 어느 날 아침, 본 현 A 수련생이 가부좌할 때 사부님께서 그녀에게 점화해주셨습니다. “빨리 가서 OO(나의 이름)를 구하라.” A 수련생은 즉시 일어나 B, C 부부수련생을 찾아갔고, B 수련생에게 저를 위해 집안을 청소해주도록 해주고, 그녀는 C와 함께 저를 데리러 왔습니다. 저는 매우 뜻밖이어서 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A, C 수련생 둘은 적극적으로 저를 도와 옷을 챙겨주고, 저를 데리고 문을 나서서 개인 승합차를 타게 했습니다. 안전을 위해 또 세 번 차를 갈아타고서야 B, C 수련생 집에 도착했습니다. 그들 집은 방이 두 개밖에 없어서 그들 자신의 방을 저에게 양보해 내주고 그들은 잡동사니를 갓 치운 그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오후, 우리는 법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이튿날 또 다른 수련생을 통지하여 두 팀으로 나누어 저를 동반해 법공부를 하게 했습니다. B, C 수련생이 저와 함께 연공하여 저는 감동했습니다.

보름 후에 저는 사존의 모든 설법을 한번 다 배웠습니다. 그들은 “내일 법공부 교류회에 참가하고 나서 집으로 가셔도 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회의에서 토론과 교류 외에도 사존의 설법과 연공을 가르치는 동영상을 방영했습니다. 제가 갈 때 한 보따리 진상 자료를 준비해주면서 저에게 반드시 매주 A 수련생 집 법공부 팀에 가서 법을 배우고 ‘밍후이 주간’을 가져가라고 당부했습니다.

시내 수련생들도 우리 집에 와서 저를 도와 박해를 폭로하는 원고를 쓰고, 저를 도와 대법 책과 ‘전법륜(轉法輪)’ 글자 바로잡기의 통지와 문구를 찾아주었습니다. 저는 깊이 감동되어 사존의 자비로운 보호에 감사드렸고, 대법의 자비로움과 수련생의 따뜻함이 몸과 마음에 녹아들었습니다.

저는 매우 빠르게 이전에 홍법할 때 열정을 되찾아 이웃 지역에 십여 개 법공부 팀과 3개 자료점(資料點)을 설립했습니다. 과정 속에서 엄격하게 사존의 가르침에 따라 부딪힌 각종 모순과 사람과 일을 대했습니다.

사존께서 다시 정진하도록 나를 인도하시다

2009년 후, 현 책임자 및 자료를 만드는 한 수련생이 저에게 이후에 그런 법공부 팀에 가서 법을 배우지 말고, 우리 집 법공부 팀도 취소하라고 통지했습니다. 이유는 제가 본 현에서 박해받는 중심이기 때문에 안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법공부 팀의 수련생에게 안전을 위해 모두 저와 연락하지 말라고 거듭 공표했습니다. 책임자의 행동은 저에게 매우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저는 책임자와 맞서지 않고 가지 말라면 가지 말자고 결정했습니다. 저와 연락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우리 집 법공부 팀은 절대 취소할 수 없었습니다. 어느 수련생이 법공부하러 오든 저는 환영할 것입니다. 속으로 수련생들이 수련하여 올라갈 수 있기만 하면 되니, 제가 어느 정도 수련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음의 답답함을 풀기 위해 제가 예전에 홍법했던 현시에 가서 예전의 수련생들을 찾아 옛 추억에 잠겼습니다. 저는 세 가지 일을 잘하지 못했고, 상태도 좋지 않았지만, 자신이 바꿀 힘이 없었고,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몰랐습니다.

2014년 7월, 저를 잘 아는 수련생이 퇴직하고 외지에서 우리 지역에 이사 온 수련생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습니다. 이 수련생은 법리가 명확하고 사유가 민첩했으며, 저와 흉금을 털어놓고 법리로 다방면으로 토론 교류했습니다. 수련생은 저에게 말했습니다. “문제는 ‘내가 어느 정도 수련되든 상관없다.’에 있습니다. 이것은 수련하는 둥 마는 둥 하는 것입니다! 사존께서 수련생을 제도하시고 구해주시고 보호해주시고 수련생을 대신해 감당하신 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세요. 누구에게 떳떳할 수 있습니까? 이 만고에 만나기 어려운 대법 수련의 기연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사존과 중생과의 연분을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다년간의 사존의 세심한 보호를 소중히 여기지 않고, 정진하지 않고, 착실하게 수련하지 않으면 사존께 죄송하지 않겠습니까? 사존께 실망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엄숙한 문제입니다. 이렇게 수년간 수련했는데 어째서 아직도 마성에 이끌려갑니까?”

수련생은 이어서 말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심하고 정진하여 착실하게 수련해야 합니다. 법을 사부님으로 삼고 법을 많이 배우고 잘 배워야 하며 열심히 법을 배워야 합니다. 법으로 자신의 일사일념(一思一念), 일언일행(一言一行)을 지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정진하고 착실하게 수련하는 것이고 자연스럽게 제고할 수 있습니다.” 사존께서 벌써 명시하셨기 때문입니다.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법은 일체 사악을 타파할 수 있으며, 법은 일체 거짓말을 타파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히 할 수 있다.”[2]

그렇습니다. 동료수련생이 얼마나 잘 말해주었습니까! 저는 소중히 여기고 자신을 수련하고 법을 많이 배우고 잘 배워야 합니다. 대량의 법공부를 거쳐 진지하게 마음에 닿도록 법을 배웠고, 저의 마음은 침착해져 일에 부딪히면 더는 사람 마음이 일어나지 않았고, 정말로 법을 사부님으로 삼아 안으로 찾았으며 자신을 닦았습니다. 사존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心性(씬씽)이 올라오면 다른 것들도 모두 따라 위로 올라오며”[1] 저와 법공부 팀의 수련생들은 착실하게 자신을 닦고 세 가지 일을 매우 잘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각 법공부 팀 수련생들은 사존의 대법의 인솔하에 온건하게 신으로 돌아가는 길을 걷고 있으며, 마음은 충실하고 낙관적이며 향상하고 있습니다.

엎드려 사존께서 구도(救度)해주신 크나큰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교란을 배제하자(排除幹擾)’

 

원문발표: 2020년 12월 2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12/28/4171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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