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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이된 ‘자책’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나는 어떤 사람이 악행을 한 뒤 보응 받은 것을 보고, 나에게 일종 참기 어려운 마음과 자책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만약 내가 일을 좀 더 잘했다면 그들이 변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마음이 괴로웠다. 한편으로 그런 정서는 이지적이지 않다는 것도 깨닫게 됐는데, 그런 ‘마음의 병’이 악인을 더욱 악하게 하고, 선량한 사람을 소홀히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가정부터 말하자면, 어머니는 이혼할 때 일체를 모두 포기하고 맨몸으로 집을 나와 온갖 고생을 겪으셨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단지 아버지와 그 가족의 이기심과 욕심을 채워줬을 뿐 대법조차 인정받지 못했다. 결국 아버지는 주식투자로 거액을 잃었고 아직 부유하지만 여전히 돈쓰기에 인색하시다. 아버지는 낡은 주택에서 혼자 할아버지를 모시고 사시는데, 오래된 가구와 가전제품을 보면 비참할 정도다. 한편 어머니는 생활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고 비록 저축은 많지 않지만 겉으로는 부유해 보인다. 그 때문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측은하게 생각하고 자신이 잘못한 것이 아닌지 스스로 자책과 후회하기 시작하셨다. 그래서 어머니는 아버지 가족의 각종 집안일을 챙겨드렸다. 그러자 아버지와 그 가족은 은근히 어머니와 내가 할아버지를 모셔주기를 바랐다. 돈은 아버지와 그들이 모두 가져갔는데, 우리가 또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부양해야 하다니. 내가 거절하자 그들은 악담을 퍼부었다. “네 엄마는 고생해도 싸다 싸!”

일부 다른 수련생도 그러하다. 집에서 열심히 일하며 원망을 감수하고, 고생과 고통을 겪었지만 가족관계는 점점 더 나빠진다. ‘좋은 사람’이 되라고 말해도 그들은 밖에서 먹고 마시고, 도박하며 수련생의 돈을 쓰려고 경제권을 뺏거나 줄이거나 이혼해 아이 명의로 생활비를 요구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대체로 두 부류의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됐다. 첫 번째 유형은 표현이 극단적이어서 비교적 쉽게 구분할 수 있는데, 사람을 욕하고 때리며 심한 말을 한다. 사람을 속이고 함정에 빠뜨린다.

다른 한 유형은 잘 표현하지 않고 겉으로 친한 척하며 대법이 좋다고 하고 폭력적인 행동이나 의견 없이, 수련생의 선(善)과 정(情), 지위를 최대한 이용하고 온갖 방식으로 일하게 해 목적을 달성한다. 그들은 목적에 달성하지 못했을 때 진면목이 나오는데, 대법을 욕하고 그들이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것은 수련생 잘못 때문이라고 몰아세운다. 도덕이 매우 타락한 사람들이다.

이 두 부류가 가장 악한 사람인데, 수련생이 자기에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대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라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단맛을 본 뒤 그들의 도덕은 오히려 더 부패해진다. 그들은 각종 폭력과 자극적인 말로 목적을 달성하는데, 그들이 보응 받을 때까지 계속된다. 그들은 보응을 받은 후에도 수련생을 계속 괴롭히는데, 수련생이 그들을 가련하게 생각하고, 수련생 자신이 잘했더라면 그들이 개변됐을 거라고 ‘자책’하기 때문이다. 이제 와 보니 그들이 자신과 남을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결과 수련생의 관념을 변화시키고 그런 몇 사람 주변을 맴돌게 해 갈수록 자신감을 잃고 절망하게 한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으니 법공부에 몰입할 수 없고, 수련에 정진해 제고할 수 없게 된다. 또 자신이 주변의 일부 괜찮고 좋은 사람을 구하는데 소홀히 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나는 밍후이왕에서 한 편의 글을 읽었는데, 누가 한 수련생의 전남편과 재결합하지 못하도록 반대했는데, 그 뒤 전남편은 공금횡령으로 19년 형을 받게 됐고, 그 수련생은 재결합했다면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을 자책했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한 내 견해는 이러하다.

우리는 개인 수련뿐 아니라 대법과 좋은 사람을 반드시 책임져야 한다. 많은 일을 아름답다고 상상하지만 실제로 일부 사람의 도덕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타락한 도덕은 그들이 대법 진상을 이해하는데 엄중한 장애가 되고 있다.

오랫동안 나는 줄곧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다. 나는 왜 더 잘할 수 없는가? 나는 왜 사람을 구하지 못하나? 사부님의 점화와 수련생들의 깨우침으로 나는 발견했다. 나는 계속 도덕이 좋지 않은 사람들 주변을 맴돌고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많은 어려운 사정이 있었고, 스스럼없이 말하는 중에 스쳐 가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어 계속 내 ‘마음의 병’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두 함께 좋은 사람이 되려고 그들 주변을 맴돌았지만 다른 사람을 구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됐다.

도덕적으로 좋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린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점점 관념이 변이되면서 법을 생각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게 됐으며, 자신도 더욱 나쁘게 변했다.

‘마귀는 우리 세계를 통치하고 있다(공산주의 유령은 어떻게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가?)’를 읽고 나는 그런 변이를 분명히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비굴하게 그런 비도덕적인 사람들에게 구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주인공인 우리가 개변할 수 없는 사람이라면 그들은 개변될 수 없다. 가능하면 그런 사람을 멀리하고 멀리할 수 없다면, 최대한 그들 스스로 책임을 다하도록 해야 한다. 만약 여전히 말이 통하지 않으면 마음을 움직이지 말고 그런 사람을 더 이상 상관하지 말고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잘하면 된다. 적당한 선에서 멈춰야 한다. 우리는 자책할 필요가 없으며 자비롭게 이치를 분명히 설명하면 되고, 진정 구원할 수 없다면 그만이다. 어떤 선택을 하느냐는 그 자신의 일이다. 비록 그가 구원받지 못해도 그가 자신을 망치면서 동시에 일부 좋은 사람과 우리 자신, 다른 수련생까지 망치게 할 수는 없다.

 

원문발표: 2020년 12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12/20/4167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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