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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심을 가볍게 말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원한은 ‘원(怨)’과 ‘한(恨)’의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요소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원 속에 한이 있고, 한 속에 원이 있다. 원한은 바로 사람이나 일에 대한 강렬한 불만으로 인해 발생하는 적대감 혹은 증오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원’이 뿌리인데 처음에는 아주 심하게 표현되지 않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원망(抱怨)과 불평(埋怨)이다. 그러나 모순이 일어나고, 격화돼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면 역시 조용히 화를 심게 될 것이다. 원으로 인해 한을 품는 것은 하나의 축적되고 발전하는 과정이지만, 이 과정은 오히려 쉽게 발견되거나, 간파되지 않아 제때 억제하거나, 발생을 피하기가 몹시 어렵다.

중국에서는 원한이 공기처럼 가득해 없는 곳이 없다. 사회, 직장, 학교, 마을, 가정, 가족 등등, 누구도 피할 수 없으며, 벗어나지 못한다. 원한을 가진 쌍방은 공개적으로 폭발하든, 꾹 참고 눈물을 삼키든지를 막론하고, 승자든 패자든 막론하고, 모두가 피해자다. 그것의 뿌리를 캐 보면 잘못은 공산 사령(邪靈)인 중공 사당(邪黨)에 있다. 왜냐하면 공산 사령이 바로 ‘증오와 우주 저층 공간의 각종 부패물질로 이뤄졌고,’ 그것이 곧 한이며, 그것이 한을 심고 퍼뜨리고 선동하고 수확하기 때문이다. 한이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날 때, 곧 공산 사령이 한 속에서 영양을 흡수해 자신을 살찌우고 성장시키며, 더욱 힘 있게 사람을 해침으로써 전 인류의 훼멸이라는 최종 목적에 도달하게 된다.

대법제자는 속인 사회에서 수련하므로 수많은 원한과 마주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타인이든 자신이든, 피동적이든 주동적이든지를 막론하고 모두 마땅히 법으로 가늠해야 한다. 한은 악(惡)이며, 마성의 표현이다. 우리 수련의 목적과는 물과 불처럼 상반된 것이다. 우리의 수련은 바로 끊임없이 마성을 제거해 우리의 불성(佛性)을 충실하게 하는 것이다. 불성은 선(善)이며, 그 표현은 자비이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선(善)은 부동한 층차와 부동한 공간에서 우주 특성의 표현이며 또한 대각자들의 기본 본성이다. 그러므로 수련자는 반드시 선(善)을 수련해야 하며 眞(쩐)ㆍ善(싼)ㆍ忍(런) 우주특성에 동화되어야 한다. 방대한 천체는 우주의 眞(쩐)ㆍ善(싼)ㆍ忍(런) 특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대법(大法)이 전해온 것은 그가 우주 중의 생명에 준 선천적 역사특성의 재현이다. 대법(大法)은 원용(圓容)한 것으로, 眞(쩐)ㆍ善(싼)ㆍ忍(런) 세 글자를 갈라놓아도 마찬가지로 眞(쩐)ㆍ善(싼)ㆍ忍(런)의 특성을 완벽히 갖추고 있다. 왜냐하면, 물질은 미시적인 물질로 구성되었으며 미시적 물질은 또 더욱 미시적인 물질로 구성되어 줄곧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진(眞) 역시 眞(쩐)ㆍ善(싼)ㆍ忍(런)으로 구성되었고, 선(善) 역시 眞(쩐)ㆍ善(싼)ㆍ忍(런)으로 구성되었으며, 인(忍)도 마찬가지로 眞(쩐)ㆍ善(싼)ㆍ忍(런)으로 구성된 것이다.”[1]

생각해 보자. 만약 우리가 자신에게 선(善)을 요구하지 않고, 주변의 모든 사람과 일을 선으로 대하지 않으며, 자신의 육친을 포함한 각종 모순을 선념과 선행으로 해결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선을 행하지 못한 것일 뿐 아니라 진(真), 선(善), 인(忍) 세 글자 중 하나도 해내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선이 곧 진선인으로 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우리가 수련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도 파룬따파(法輪大法)의 수련자이겠는가?

우리는 대법제자이며, 대법제자라는 칭호는 너무나 신성하고 너무나 영예로운 것이다! 이는 천지개벽 이래로 없었다. 우주 중의 수많은 불도신이 가지려 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인간 세상의 일체가 우리에게 속하지 않으며, 우리는 단지 나그네에 불과하고, 잠시 이용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이 마음을 닦을 뿐인데, 어떻게 오히려 쓰레기 더미 속의 것에 집착할 수 있겠는가? 당신이 그것을 원하면 그것은 곧 당신을 붙잡아 사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신으로 수련 성취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생각해 보면, 표면적으로 버리지 못하는 배후에는 허영심, 사람의 자존심, 명예를 구하는 마음, 자아에 집착하는 마음, 사심(私心) 등이 있다. 말을 삭히지 못하는 배후에는 쟁투심, 이익을 바라는 마음, 불평하는 마음, 질투심이 있다. 풍파를 피하고 가정의 안락함을 갈망하는 배후에도 구하는 마음과 연연하며 포기하지 못하는 사람의 정이 있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증오함 역시 정이요,”[2], “이 정을 끊어버리지 못하면 당신은 수련하지 못한다. 사람이 이 정에서 뛰쳐나왔다면 누구도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며,”[2]

그리고 정은 바로 모든 사람의 마음과 집착의 뿌리다. 물론, 대륙이라는 십악독세한 곳에서 사당이 대법제자를 잔혹하게 박해하고, 수련생이 늘 피해를 보는 데다, 다른 한 방면에서는 버리지 못한 사람의 마음이 있으니 마음이 정말 괴로울 것이다. 그러나 어떤 상황을 만나든 간에 사람들과 맞설 수 없다는 이 한 점도 분명하다. 커다란 고통을 받으면 늘 마음속에 억울함과 울분이 쌓인다. 그러나 수련은 바로 사람의 마음을 버리고 집착을 버리는 것이며,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마음속으로만 내려놓지 않아도 안 된다. 강압 속에 원한이 남몰래 쌓이고 쌓이면 자신을 속일 수는 있지만, 오히려 사부님을 속일 수 없고, 다른 공간의 불도신을 속이지 못한다. 만약 오랫동안 수련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곧 구세력이 이를 핑계로 박해할 것이며, 심지어 생명을 빼앗을 것이다.

사존께서는 가르쳐 주셨다. “원망하는 마음은, 바로 그런 좋은 말만 듣기 좋아하고 좋은 일을 좋아하는 데에서 양성되며, 그렇지 않으면 곧 원망한다. 여러분, 생각해보라. 이것은 안 되며, 수련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줄곧 말했듯이, 수련인은 반대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 당신이 좋지 못한 일에 부딪혔을 때 당신은 좋은 일로 여겨야 하고 당신을 제고시키기 위해 온 것이라고 여겨야 하며, 이 길을 나는 잘 걸어야만 하고, 이것은 또 넘어야 할 관이며 수련하라고 온 것으로 여겨야 한다. 당신이 좋은 일에 부딪혔을 때 당신은 생각하라. 아이고, 나는 너무 기뻐하지 말자, 기쁜 일은 제고할 수 없고 또 떨어져 내려가기 쉽다. 수련이라, 당신은 곧 반대로 문제를 보아야 한다. 곤란이 오고 좋지 않은 일이 왔는데, 당신이 모조리 배척하고 모조리 막으면, 당신은 바로 관을 넘기를 거부하고, 당신은 바로 위로 향해 가기를 거부하는 것인데, 그렇지 않은가? 이는 그런 박해와는 또 서로 다른 일이다.”[3]

사람은 타인과 교제하는 환경 속에 살고 있어 수많은 원한이 생길 수 있으며, 미미한 것과 강렬한 것이 모두 있을 것이다. 오래된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다시 온다. 크게 맞은 것, 심한 상처를 입은 것은 후반생을 함께 할 것이다. 수련인은 속인을 초월한 사람이다. 그러나 수련하는 사람이 마땅히 버려야 할 마음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 하나의 표현상에서는 곧 속인이다.

원한심은 또 다른 공간의 좋지 않은 것을 초래할 수 있다. 나는 가족과 한 차례 갈등이 생겼을 때,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듣기 거북한 말을 몇 마디 했고, 잔뜩 성이 난 채 내 방으로 돌아와 문을 쾅 하고 닫았는데, 문의 잠금쇠가 떨어졌다. 나는 그것을 주워 책상 위에 두었다. 머리를 들자 한쪽 벽이 한눈에 들어왔는데, 각양각색의 기이하고 괴상한 것이 가득 엎드려 있었다. 나는 놀라서 황급히 말했다. “사부님,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제자가 잘못했습니다!” 나의 사죄하는 소리에 따라 그것들은 “휙”하며 단번에 사라졌다. 이후, 나는 서둘러 가족에게 사과했다.

당시 나는 아주 커다란 교훈을 얻었다. 그때 이후, 나는 인자하고 평온한 심태를 유지하기 위해 특별히 주의했고, 사람들을 선한 마음으로 대하면서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았고, 제멋대로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의 수련은 문의 잠금쇠처럼 떨어졌을 것이다.

원한심의 배후에는 정이 있는데, 우리의 정이 큰 타격을 받아 아주 큰 상처를 입었다고 느껴질 때, 정말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내려놓기가 몹시 어렵다. 내가 수련하기 전에 남편은 보일러 기사였는데, 5촌 당숙(현위원회 서기)의 권력 덕분에 공농병(工農兵; 노동자, 농민, 군인) 학생 신분으로 대학에 들어갔고, 나중에는 또 대학원생 시험에 합격해 졸업 후 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가르치던 외지의 위탁교육생(남편보다 열네 살 적음)과 관계를 맺었고, 우리는 이혼했다.

남편의 명예와 나의 부귀를 위해 나는 꼬박 5년 동안 혼자 아이 둘을 키우면서 나의 수입을 네 사람을 위해 썼고, 모든 노력을 쏟아부으며 그에게 희망을 걸었지만, 결국에는 엉뚱하게 제삼자가 개입했다. 당시 두 사람에 대한 나의 원한은 정말 형언할 수가 없었다. 몇 년 후, 남편은 재결합을 바라며 나를 찾아왔다. 그는 그녀와 이혼하려 했지만, 아직 수속을 밟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내가 재결합에 동의하면 이혼 수속을 밟겠다고 했다. 당시 나는 이미 파룬따파를 수련하고 있었다. 나는 인연이 이미 다했고, 정이 사라져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가 이혼 수속을 하지 않았으니 도리에 맞지 않았다.

한 동료가 나에게 말했다. “먼저 하겠다고 하고, 그가 이혼하면 재결합을 거부해요. 닭도 날아가고 달걀도 깨지게 해서 둘 다 놓치게 해요. 이런 사람은 혼이 나야 해요.” 나는 생각했다. ‘나는 진선인을 수련하는 사람이니 그녀가 우리 가정을 파괴할 수는 있어도 내가 그들의 가정을 파괴할 수는 없어.’ 나는 수련인이므로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당시 나는 나의 원한심이 이미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그들에게 보복할 좋은 기회를 포기하면서 거꾸로 그들을 얼마간 동정했고, 두 사람의 가정을 파괴해도 결국 행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한 동료가 황달형 간염을 앓았는데, 격리치료 기간에 그녀의 남편이 외도해 이혼하게 됐다. 몇 년 후, 동료의 전남편이 재결합 의사를 밝혔다. 동료는 나를 찾아와 상의했고, 나는 솔직한 생각을 말해주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깨진 유리를 다시 붙이자고 말하지만, 그 유리는 깨졌고, 다시 붙여도 금이 있는데, 원래처럼 되겠어요?” 나는 동료가 간 후에 생각했다. ‘이것도 폐품을 고르는 것이 아닐까? 필요하면 줍고, 버리고 싶으면 버리고.’ 나는 여기까지 생각하고 깜짝 놀랐다. ‘이건 원한심이 아닌가? 어째서 아직도 있어!’ 결국 동료도 재결합하지 않았다.

두 달 후, 신문에 동료의 전남편이 공금을 가지고 잠적했다가 체포돼 십몇 년 형을 받았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처음에 나는 동료가 운 좋게 재결합을 하지 않은 것을 남몰래 기뻐했다. 곧이어 강대한 자책이 나를 습격했는데, 재결합했더라면 혹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정말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많은 업을 지었을까! 이것은 사람을 해친 것이 아닌가?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후회가 된다. 수련인으로서 나는 속인의 일에 관여해서는 안 되며, 모든 일에 인연 관계가 있음을 안다. 나는 우리 집 속인들의 다툼에도 끼어들지 않는데, 그날은 무슨 이유로 생각 없이 입을 놀렸을까? 지금 생각하면 바로 그 원한심이다. 그 동료의 사정이 나와 아주 비슷했기 때문에 그녀를 동정하고, 그녀를 위해 불평한 것이었지만, 사실은 나를 위해 불평한 것이었다.

원한심은 보통 단독으로 나오지 않고, 흔히 쟁투심, 질투심과 한패가 되어 나온다. 이것도 사악한 당문화의 것이 우리에게 반영된 것이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원한심은 우리가 아주 쉽게 버릴 수 있지만, 잠복해 있고, 깊이 숨어 드러나지 않는 원한심은 자신과 남을 속이는데, 방심하기만 하면 우리로 하여금 업을 짓게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원한심을 버릴 때는 반드시 궁지에 몰아넣고 호되게 쳐야 하며, 철저히 제거되어야만 중지하고, 절대 느슨히 하거나 타협해서는 안 된다. 만약 끝을 잘 맺지 않는다면 틈틈이 뛰쳐나와 풍파를 일으킬 것이다.

개인적인 층차에서의 인식을 말했을 뿐이니 법에 있지 않은 곳은 수련생들의 자비로운 지적을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서: ‘정진요지-선을 알기 쉽게 해설’
[2] 리훙쯔 사부님 저서: ‘전법륜’
[3] 리훙쯔 사부님 경문: ‘2018년 워싱턴DC 설법’

 

원문발표: 2020년 12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20/12/3/41590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