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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시심을 제거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수련은 사람의 집착심을 제거하는 것이다. 어떤 집착심은 사람에게 고통을 가져다준다. 예를 들어 원한, 증오, 질투, 쟁투, 두려움 등 이런 집착심은 사람을 화나게 하고 우울하게 하며, 성질을 부리게 하고 또 초조하게 만든다. 모두 불쾌감을 자아내 마성의 일면을 드러내기 쉽다. 당시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나중에 마음을 가라앉히면 쉽게 이런 집착심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과시심은 다르다. 흔히 자신의 환희심과 뒤섞여 있어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자기가 하기 좋아하는 일이나 자신의 어떤 면에서의 능력, 자질, 용모 등이 남보다 뛰어나서 자신이 출중하다고 생각하는 우월감 때문에 많은 사람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편안하고 흥분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집착심은 흔히 등한시하기 쉽다.

사부님께서 일찍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과시심은 수련자 중에서 사람을 심하게 해치는 것이다.”[1] 하지만 이 과시심은 편안한 곳에 숨겨져 있어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1. 넘어진 후 과시심을 찾다

5~6년 전쯤에 몇 년 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를 만났다. “오랜만이네. 모 대학의 배구 클럽에 가서 자주 배구를 하는데 너도 와라.”라고 그는 말했다. 나는 체면 때문에 대답했지만 가지 않았다. 얼마 후 그는 위챗 단체방에서 나와 약속해 나는 시간을 짜내 갈 수밖에 없었다.

클럽에 도착해보니 프로와 아마추어도 있고, 남녀노소도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주 잘 했는데 딱 봐도 프로 시합을 해본 것 같았다. 스파이크를 연습할 때 나는 2단 패스를 맡았는데 프로 젊은이들은 스파이크할 때 아주 빠르고 강하게 때렸다. 그들은 오랫동안 이렇게 스파이크를 해보지 못했다면서 2단 패스를 잘해 주어 너무 멋지다고 했다. 시합할 때는 모두 내 옆에 서려고 애썼다. 결국, 시합을 잘 치러 당연히 우리가 우승했고, 상대 팀은 2단 패스를 잘 해주는 사람이 없어 스파이크를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패배했다.

그런 후 나는 또 한동안 가지 않았다. 그 젊은이들은 기다릴 수 없어 늘 나와 배구를 하자고 약속했다. 하지만 나는 갈 때도 있고 안 갈 때도 있었다. 그때 마침 여러 대기업에서 조직한 아마추어 배구 동호회 시합이 있었다. 내가 다녔던 이 클럽은 기어코 나를 초청하면서 거절하지 못하게 해 나는 참가할 수밖에 없었다. 몇 차례 시합하고 우리는 1등을 했다. 이로 인해 나는 배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매주 한 번은 시간을 짜내서 배구를 하러 갔다. 당시 나도 집착심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지만 이 마음을 억제하지 못했다. 마침 내가 배구하러 가기로 한 전날, 이 생각을 철저히 없애게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날 퇴근해서 집에 오는 길에 채소를 좀 샀는데 전동차(전기 자전거)의 바구니가 다 채워져 있었다. 나중에 두부 한 모를 더 샀는데 둘 곳이 없었다. 바구니 아래에 놓으면 부서지고 위에 놓으면 또 떨어질까 봐 두려웠다. 그리하여 전동차 손잡이에 걸고 갔는데 두부를 넣었던 비닐주머니가 물이 새는 것을 발견했다. 비닐주머니가 터져 두부가 흘러나올까 봐 한 손으로 두부를 받치고,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버스 정류장 앞에 거의 도착할 무렵, 사람이 많은 탓에 브레이크를 잡아 전동차를 멈추었다. 그 결과 전동차가 갑자기 균형을 잃으면서 손잡이에 걸었던 두부가 날아갔다. 나는 순간 땅바닥에 세게 부딪혀 넘어졌다. 아래턱이 먼저 땅에 닿았고 이어 머리가 진동을 느끼며 멍해졌는데 움직일 수 없었다. 하지만 의식은 똑똑했다. ‘나는 수련인이다. 아무 일도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한 후 15~16초쯤 꼼짝하지 않고 있다가 일어섰다.

당시 도로에 아무도 없었지만, 버스 정류장에 있던 10여 명은 모두 조용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신발 한 짝이 없어진 것을 발견했는데 전동차 부근에도 없었다. 알고 보니 10여 미터 밖으로 내던져져 있었다. 신발을 다 신고 전동차를 일으켜 세운 다음 바닥에 흩어진 채소를 정리했는데, 두부는 뭉개져서 가지지 않았다. 이때 차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운전대가 180도로 돌아갔다. 혼자서 돌려세우지 못하자 마침 뒤에서 오던 한 남녀 청년이 선의적으로 나를 도와 운전대를 돌려줬다. 마음씨 좋은 이 두 젊은이에게 감사드린 후 전동차를 시험해보았는데 탈 수 있어 집으로 타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후 전동차를 검사했는데 고장 나지 않았다. 무릎이 넘어져서 시퍼렇게 멍들었고, 바지도 구멍 났으며, 아래턱은 살갗이 좀 벗겨졌는데 갈수록 더 부어올랐다. 마음속으로 ‘내일 배구하러 갈 수 없다. 이 모양으로 어떻게 가지?’라고 생각했다.

저녁에 마음을 조용히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모두 이 두부 때문에 사고가 난 거야, 두부를 사지 않았다면 이런 일이 없었을 거고, 또 비닐주머니가 새지 않았어도 아무 일 없었을 것이다.’ 이 ‘샌다[漏]’는 것을 생각하자 나는 갑자기 내 마음에 빈틈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식했다. 수련인이 어떤 일에 부딪히면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다. 틀림없이 나에게 무슨 집착심이 있는 것이다. 점오해 주셔도 안 되니 이런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내일 배구하러 가려고 생각했던 일이 또 생각났다. 마음속으로 아마 이 일을 겨냥해서 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후 조금씩 안을 향해 찾았는데 자신의 과시심, 환희심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과시심, 게다가 환희심은 마(魔)에게 이용당하기가 가장 쉽다”[2]. 그때 나는 정말로 마성이 매우 커서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다시 돌이켜 방금 발생한 일을 보면 넘어진 것은 더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발[鞋, xié]이 내 던져진 것은 이 ‘사[邪, xié]’자를 특히 강조해서 부각한 것인데 사악한 길에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역자 주: 鞋와 邪는 발음이 같음] 운전대가 180도로 돌아간 것은 자기 생각에 따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정반대로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까지 생각하자 나는 이 사고가 바로 나의 집착심을 겨냥해 온 것이라는 것을 완전히 깨달았다. 깨닫고 나서 나는 배구하러 가지 않았고 또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2. 잠재의식 중의 과시심

왼쪽 목 부위에 한동안 종기가 있었다.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았지만 필경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에 나는 승인하지 않았다. 항상 발정념으로 그것을 청리했지만, 작아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커졌다. 이것은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틀림없이 아직 발견하지 못한 무슨 집착심이 있는 것이다. 업력도 좋고, 누구에게 빚진 것도 좋고, 모두 자신의 좋지 못한 마음과 관련 있다고 생각했다. 구세력은 나의 빈틈 있는 마음을 통해 나를 교란하고 박해하는 것이다. 나에게 빈틈이 없다면 누구도 나를 교란하지 못한다. 그 때문에 될수록 빨리 각종 집착심을 찾아 제거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하여 나는 일부러 자신의 마음을 관찰하면서 무슨 나쁜 생각이 튀어나오는지 보았다.

한번은 발정념할 때 어머니가 내 앞을 지나갔다. ‘내가 앉은 자태가 얼마나 보기 좋은가.’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 일념이 나오자 나는 바로 그것을 붙잡았다. ‘좋아, 또 과시심이구나.’ 예전에도 이런 생각이 있었지만 의식하지 못했다. 오늘 붙잡았으니 다시는 그것에 넘어가지 않고 반드시 제거해 버릴 것이다. “동작을 좀 보기 좋게 해도 과시하는 사람이 있다.”[3] 사부님의 이 말씀은 나를 말하는 것이 아닌가?

며칠 후 법 공부 소그룹에서 “그러나 그들의 그 마음은 어느 정도로 고요한가? 고요하기가 두려울 정도까지 이르렀다. 당신 한 사람이 이런 정도로 고요하다면 그래도 괜찮은데, 네댓 사람이 거기에 앉아 모두 그런 정도로 고요하고, 마치 깊은 못의 고인 물(一潭死水)과도 같이 아무것도 없어, 내가 그들을 감수(感受)하려고 해도 감수할 수가 없었다. 그 며칠 동안 나는 정말 마음속으로 아주 괴로운, 그런 기분을 느꼈다. 우리 일반인은 상상하지 못하며 감각할 수 없는 것으로서, 완전히 무위(無爲)이며 텅 빈 것이었다.”[3]라는 법을 배웠다. 이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리면서 일종 비교할 수 없는 경지를 느꼈다. 예전에 나는 “사부님께서 왜 이 단락을 말씀하셨을까?”하고 줄곧 나에게 물었다. 이번에 깨닫게 된 것은 나의 마음과 대각자들의 마음이 대비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거기서 발정념한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으로 과시심이 튀어나오면 “마치 깊은 못의 고인 물(一潭死水)과도 같이 아무것도 없어”[3]라는 경지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 한 사람이 쉽게 조용해지려고 하는데 다른 사람이 있기만 하면 그 과시심은 밖으로 나오려고 한다. 자신이 숨겨둔 과시심이 이렇게 많으면 어찌 될 수 있는가? 다그쳐 용맹정진해야 한다.

3. 생활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표출되는 과시심

자신의 일사일념을 중시한 후부터 나는 정말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많은 과시심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밖에 나가서 걸을 때 ‘내 몸매가 얼마나 보기 좋은가, 내가 얼마나 사뿐사뿐 걸어가는가, 내가 얼마나 젊은가’라는 생각을 한다……

집에서도 자신을 과시할 때가 있었다. 예를 들면 어느 날 컴퓨터 의자의 쇠다리를 천으로 쌌다. 이렇게 하면 의자를 움직일 때 소리가 나지 않게 된다. 이렇게 한 것이 잘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바로 가족을 불러 자신의 총명함을 과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 생각이 또 잘못되었다는 것을 곧바로 인식하고 참고 부르지 않았다. 이런 작은 일로도 과시하려고 하니 정말 자신이 나아진 것이 없다고 웃었다.

이 과시심은 정말로 나의 잠재의식 속에 깊이 들어와서 이미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주의하지 않으면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한다. 나는 또 많은 마음이 모두 이 과시심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질투심을 예로 들면 다른 사람이 자신을 초과했을 때 자신이 과시하지 못해 마음속으로 질투가 생긴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마음도 과시심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잘하고 강하다는 것을 과시한다. 쟁투심도 자신을 과시하는 것이다. 우위를 차지하려고 하면 쟁투가 생긴다. 한신(韓信)처럼 사타구니 밑을 빠져나가는 치욕을 참는다면 어찌 쟁투가 생길 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말해 이 과시심은 진선인(真·善·忍)과 반대 방향으로 간다. 그것은 진선인과 정반대되는 표현이고, 진짜 나에서 벗어난 가짜 나가 필요한 허영심이다. 왜 공능이 있는 사람이 과시심을 품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공능을 잃어버리게 되는가? 과시심은 매우 나쁜 마음이기 때문이다. 신은 이런 마음을 허락하지 않는데 수련인이 조금이라도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명리정(名利情) 각 방면에서 과시심이 모두 없어야 마음이 비워지고 차분해진다.

층차의 제한으로 적절치 못한 곳은 수련생들께서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파룬따파의해-베이징(北京) 法輪大法(파룬따파) 보도원회의에서 말씀하신 정법(正法)에 관한 의견’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정론’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0년 11월 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1/3/41449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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