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주변 수련생의 핸드폰이 감시 통제된 경우, 구체적으로 나타난 이상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현상이다. 첫째, 통화할 때 에코 또는 잡음이 있다. 둘째, 사용하지 않을 때 영문도 모르게 발열(發熱)한다. 셋째, 신호가 좋지 않다. 때로는 전화를 걸 수 없거나 오는 전화를 받을 수 없다. 넷째, 대기시간이 짧아져 하루나 이틀이면 충전해야 한다.
물론 다른 상황도 있을 수 있기에 수련생이 추가해도 된다. 그러나 한 가지는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핸드폰에 위와 같은 상황이 없으면 감시 통제받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핸드폰 안전에 주의를 기울이는 문제는 ‘오래된’ 화제이지만 지금도 그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구실을 찾아 핸드폰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수련생이 있다.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핸드폰을 통해 사악(邪惡)에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악인의 말로 하면, ‘우리는 문을 나서지 않아도 당신들이 뭘 하는지 알 수 있다’이다.
최근 우리 지역에 대규모 납치 박해가 발생했다. 박해받은 수련생 중에는 폴더폰을 사용하는 수련생이 있었다. 1년 내내 거기에 두고 진상 자료를 만들거나 수련생과 얘기 나눌 때 (폴더폰을) 치우지 않았다. 수련생이 핸드폰 안전에 주의할 것을 거듭 일깨워주었으나 여러 해 이 수련생은 그의 이런 행동은 구세력을 부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결과 도리어 핸드폰을 통해 많은 정보가 사악에 노출되어 큰 손실을 보았다.
현재 수련생 중에서 보편적으로 핸드폰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구체적인 표현은, 수련생을 만나 얘기 나눌 때 핸드폰을 옆에 두고 다른 수련생의 이름이나 성과 관련된 말을 하거나 다른 수련생이 무슨 항목을 한다거나 심지어 수련생의 생활상의 문제까지 논의한다.
수련생이 핸드폰 안전에 주의하지 않는 이유는 흔히, 나의 핸드폰은 폴더폰이고 수련생과 연락하지 않고 가족과만 가끔 통화할 뿐이다, 나는 전화번호를 바꾸었다거나 새 핸드폰으로 바꾸었다, 나의 정념이 강하기에 당신은 두려워해도 나는 두렵지 않다 등등이다.
수련생들이 함께 얘기 나눌 때 핸드폰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사실 어려운 것은 수련생의 그 고유한 ‘자아(自我)’ 인식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자아’가 인식한 그 ‘이치’가 옳다고 여길 정도로 강해 다른 수련생이 한 말이 ‘자아’의 그 일관된 인식에 부합되지 않으면 일률적으로 배척한다.
다음은 우리가 수련의 길에서 가지고 있는 각종 ‘인식’이나 자기가 법에서 깨달은 그 ‘이치’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지를 한번 논의해 보자.
사존께서는 “법무정법(法無定法)”[1] 법리를 말씀하실 때 석가모니를 언급하셨다. “그가 매 층차를 제고할 때마다 돌이켜보면 방금 자신이 말한 법이 모두 맞지 않았다. 다시 제고한 후에 그는 말한 법이 또 맞지 않음을 발견했다. 그가 또 제고한 다음에, 그는 방금 말한 법이 또 맞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49년간 내내, 그는 모두 이렇게 끊임없이 승화했으며, 매 층차를 제고한 뒤마다, 그가 이전에 말한 법이 모두 인식상에서 매우 낮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또 매 층차의 법은 모두 법의 매 층차 중의 체현(體現)이며, 매 층차에는 모두 법이 있지만, 모두 우주 중의 절대적인 진리가 아님을 발견했다.”[1]
사존께서는 한 승려가 가부좌하고 연공할 때 왠선(元神)이 극락세계에 갔을 때 “왜냐하면 그의 층차가 미치지 못해, 다만 그의 이 층차 중에서 그가 마땅히 보아야 할 불법(佛法)의 체현만을 그에게 현현(顯現)해 주었기 때문이다.”[1]라고 말씀하셨다.
속인의 단어에는 ‘자기주장을 고집하다’는 말이 있다. 수련인으로서 ‘자기주장을 고집하면’ 법리에서 진보할 공간이 없다. 사존께서는 “인류 고유(固有)의 오랜 관념이 한 세트의 사업ㆍ사유방법으로 형성된 후에는 새로운 인식을 받아들이기가 매우 어렵다.”[1]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사유 습관을 바꾸기 매우 어렵다. 이른바 ‘강산은 변하기 쉬워도 본성은 변하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인이 아니라 수련인이기에 점차 ‘사람’의 사유를 신의 사유로 바꾸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주장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수련은 ‘사람’을 포기하는 과정이고 후천적인 관념과 업력으로 형성된 그 가짜 ‘자아’를 끊임없이 포기해야 하며 법에서 끊임없이 진짜 ‘나’를 찾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수련의 길에서 어제 우리가 옳다고 여긴 것을 오늘 제고한 후 틀린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법을 사부님으로 삼아 끊임없이 자신이 예전에 옳다고 여긴 그 어제의 무수한 ‘자아’를 변화시켜야 법(法)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층층의 더 높은 이치를 펼쳐 보여줄 수 있다.
일부 수련생은 같지 않은 의견 앞에서 늘 ‘자아’의 고유한 표준으로 판단을 내린다. 그것이 정확하더라도 ‘자아’ 관념이 인식한 것에 부합되지 않으면 일률적으로 부정한다. 이런 수련생은 사람들에게 ‘강하고’ 붙임성이 없으며 심지어 때로는 표현이 정말 선량하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수련생의 ‘자아’가 너무 강하여 ‘자기’ 생각이나 결정을 쉽게 바꾸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그가 법에 매우 확고하고 세 가지 일도 게을리하지 않는 것 같지만 수련생이 ‘자아’를 너무 고집하면 법을 사부님으로 삼아 수련할 수 없고 ‘자아’의 원칙에 따라 수련하는 것이다.
한 수련생은 10년을 하루같이 세 가지 일을 했고 대법 진리를 따르고 대법을 실증하는 길에서 엄중한 시험이 닥쳐도 변하지 않았으며, 의지가 금강처럼 강하여 무너뜨릴 수 없었다. 개인 수련에서는 도리어 아주 ‘유순’했는데, 예를 들어 수련생이 부족한 점을 지적하면 그렇게 ‘자아’를 견지하지 않고 법으로 옳고 그름을 가늠하며 그릇된 점은 매우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바로잡았다. 이런 수련생은 ‘부드럽고’ 선량하며 ‘진선인(真·善·忍)’의 법리에 동화하여 끊임없이 바르지 않은 ‘자아’ 인식을 바꾸고 층층의 진정한 수련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다시 핸드폰 문제로 돌아가서 말해보자. 당신이 자신의 핸드폰이 폴더폰이고 가족과만 연락하거나 핸드폰을 바꾸어 문제없다고 여기는데, 이것은 사람의 각도에서 이 측면에서 본 ‘자아’ 인식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수련생이 방문했을 때 핸드폰이 있든 없든 관계없이 사부님께서 그것을 ‘도청기’라고 말씀하셨으니 당연히 핸드폰을 다른 방에 두어야 마음이 평온하고 두려움과 우려가 없을 것이며 사부님의 말씀을 듣고 수련생을 위해 생각하고 책임진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원래 고유한 ‘자아’를 버리고 이전의 그 ‘자아’를 수련하는 과정이다. 법을 사부님으로 삼고 고유의 ‘자아’라는 그 인식을 바꾸는 것이 바로 안으로 찾고 자신을 수련하는 과정이다.
끝으로 사존의 한 단락 법을 복습하자. “제자: 사부님께서 휴대폰 사용 안전문제를 주의하는 것에 대해 좀 더 말씀해주시기 바랍니다.
사부: 이는 말할 것도 없다. 당신은 하나의 도청기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간첩과 정부뿐만 아니라, 누구든 마음대로 당신을 도청할 수 있는데, 매우 간단하다. 바로 이러한 일이고, 핸드폰을 끄든지 안 끄든지 마찬가지이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데, 당신이 알다시피 중공사당 거기에서도 듣고 있다.”[2]
개인적으로 우리 핸드폰이 도청되었던지 되지 않았던지 사존께서 법에서 핸드폰이 도청기라고 분명히 말씀하셨기에 핸드폰 문제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스스로 그것이 괜찮다거나 괜찮지 않다고 여기면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무시하고 ‘자아’가 작용을 발휘하게 해서는 안 된다. 마땅히 다른 수련생, 전체 안전을 고려하고 이지적으로 핸드폰을 한쪽에 치워야 한다.
본문은 개인 층차에서의 약간의 인식이므로 법에 있지 않은 점은 수련생께서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허스(合十).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경문: ‘2016년 뉴욕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0년 10월 2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0/27/41430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