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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존께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 주시다

글/ 중국 대법제자

저는 1996년에 수련을 시작한 대법제자로 올해 54세입니다. 20여 년 동안의 수련 중에 4·25 때 가슴을 도려내고 뼈에 사무치게 사람마음을 내려놓는 것을 경험했고, 암흑천지의 7·20을 겪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차례 비인간적 납치와 가산 몰수, 구류와 노동교양을 당하면서 대법에 대한 감성적인 인식에서 이성적인 인식으로, 미성숙에서 성숙에 이르렀습니다. 줄곧 걸어오면서 특히 감개무량했으며, 사존과 대법에 대한 견정한 믿음이 흔들린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근기가 얕고, 오성이 낮아 사존께서 저를 위해 감당하지 말아야 할 고난을 얼마나 겪으셨는지 모릅니다. 제자는 갚을 방법이 없습니다.

1. 대법제자는 존엄하다

1999년 7월, 중공악당은 박해 음모를 꾸미고 요언을 날조해 대법과 사부님을 모독했습니다. 대법 수련자로서 신속히(1999년 7월 21일) 문제의 해결을 요구하러 상경해서 대법을 수련해 좋은 사람이 되고, 심신에 혜택을 얻은 진실한 정황을 정부에 반영했습니다. 이로 인해 불법 구류 세 차례와 노동교양 두 차례(도합 4년여)를 당하고 가산 몰수도 여러 번 당했습니다. 2006년 가을, 정정당당하게 산산이 조각난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파출소에서 악경(사악한 경찰)은 소위 ‘대형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동료 수련생을 ‘누설’하라고 강요했습니다. 제가 불법 심문에 협조하지 않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악경은 아무 무기도 없고 오로지 좋은 사람이 되려는 저를 폭력적인 방법으로 대했습니다. 그 기간에 저는 여러 가지 혹형으로 시달림을 당했습니다. 8박 9일 동안 밥을 못 먹게 하고, 물을 못 마시게 했으며, 잠을 재우지 않았습니다. 살얼음이 낀 물을 머리에서 발끝까지 붓고 저녁에 창문을 열어 찬바람이 젖은 몸을 얼게 했습니다. 수갑을 채워 반쯤 매달았고, 코에 농축 식초를 부었으며, 모기향으로 양쪽 허벅지를 태웠습니다. 더러운 물통에 머리를 누르고, 질식할 때까지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웠으며, 야만적인 강제 음식물 주입 등으로 인해 몸에 생긴 흉터는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이런 혹형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자 2년 동안 불법 노동교양을 시켰습니다.

노동교양소 대대장은 저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고 포기서를 쓰게 하려고 미친 듯이 따귀를 때리고 가죽구두로 허벅지 안쪽이 검게 멍들 때까지 걷어찼습니다. 당시에 저는 아픔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모두 사부님께서 제자를 대신해 감당하셨습니다. 저는 악경에게 말했습니다. “나를 때려죽여도 나는 (포기서를) 쓰지 않을 것입니다.” 갑자기 그녀는 바람 빠진 고무공처럼 변했고, 당직실 침대에 주저앉더니 곧 저에게 약속했습니다. “앞으로 당신이 여기서 혼자 잘 있게 해주겠어요. 다시는 당신의 손가락 하나도 건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박해에 협조하지 않았고, ‘전향’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교양소에서는 저를 본보기로 혼내주는 ‘힘겨운 싸움’을 했습니다. 저는 강제로 40일 동안 격리당했고 벌금을 부과 당했습니다. 수면과 목욕, 아래층에 내려가서 식사하는 등의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매일 지정된 악경이 저를 찾아와 말을 걸었습니다. 사오(邪悟)한 사람들은 저를 세뇌시키고, 매도하고 모욕했으며, 기간을 연장하겠다고 협박하다가 결국 정신을 못 차리고 제 머리를 흔들며 말했습니다. “당신은 왜 아직 정신이 흐려지지 않지? 흐려져야 빨리 (파룬궁과 결별한다는) 결렬서를 쓰지.”

당시 저는 확고하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대법제자다. 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기서 끝낸다. 절대 다른 수련생을 박해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저는 법에서 수련해낸 이성과 인내, 다른 사람을 위하는 선념(善念)으로 사전에 모의한 박해를 중지시켰고, 몇몇 사오한 사람들도 포기서를 무효로 하겠다고 표명했습니다.

한번은 악경이 작업장에서 대법과 사부님을 비방하는 책을 읽었습니다. 저는 여기에 독을 퍼뜨리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해 숨겨둔 연필을 꺼내어 종이에 “파룬따파(法輪大法)는 정법입니다. 사부님은 결백합니다. 대법제자는 박해를 받고 있습니다”라고 써서 그녀의 눈앞에 보여주었습니다. 당시에 박해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에 다리가 떨렸지만, 대법을 수호하는 것은 마땅히 제가 해야 할 일임을 이성적으로 알았습니다. 악경은 두려워하면서 벌떡 일어나 히스테리의 고함을 지르며 저에게 자리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그런 후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계속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다시는 그 책을 읽지 않았습니다.

며칠이 지난 뒤, 악경은 여전히 포기하지 않고 TV를 가져와 사부님을 비방하는 영상을 틀었는데, 저는 그녀를 저지하면서 이건 모두 거짓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듣지 않고 계속 영상을 틀었습니다. 저는 종이에 발정념 구결 ‘법정건곤 사악전멸(法正乾坤,邪惡全滅)’을 써서 수련생들과 협조해 TV 아래에 붙였습니다. 결국 TV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매우 많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박해를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동하지 않았고, 호명에 협조하지 않았으며, 보고서를 쓰지 않고, 체조하지 않았고, 인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박해가 엄혹한 소굴에 매일 전국에서 수련생들이 실려 와 불법 노동교양을 당했습니다. 입소하면 먼저 격리해 우리처럼 포기하지 않는 대법제자와 접촉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오한 사람들이 그들을 세뇌시키고 연공하지 않는다는 보증서를 쓴 후에야 각 소대로 보내집니다. 당시에 비록 말을 하지는 못하게 했지만 화장실이나 식당에서 항상 만날 수 있었는데, 말을 하지 못하게 해서 새로 들어온 후 ‘포기서’를 쓴 수련생은 우리를 보기만 하면 자신들이 곧 속임수에 빠져 포기한 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고, 그 후에 성명서를 써서 다시 새롭게 바른길로 돌아오도록 했습니다. 악경은 그것이 두려워서 우리가 있는 중대에 오랫동안 수련생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소굴에서 악경을 볼 때마다 인사를 해야 하지만 저는 한 번도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악경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나에게 인사를 할 줄 모르나?” 저는 평화롭게 말했습니다. “나는 진실만을 말해야 하는데 당신이 하는 일은 모두 좋은 사람을 박해하고, 수련인을 박해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인사를 할 수 있겠어요?” 한번은 세 명의 바오자(수감자로 구성된 감시자)와 함께 화장실에 가다가 복도에서 악경을 만났고, 세 명은 함께 악경에게 인사를 했습니다. 저는 말하지 않았고, 악경은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아무개 안녕.” 저는 미소를 지으며 지나갔습니다. 또 한 번은 음력 정월 초하루에 우리가 활동실에 모였고, 한 감옥 경찰이 근무를 교대한 후 활동실로 와서 검사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일어나서 인사를 했습니다. 결국, 감옥 경찰은 또 저에게 와서 말했습니다. “아무개 안녕.” 저는 여전히 선의의 웃음으로 화답했습니다. 저는 대법제자는 마땅히 박해당하지 않아야 하며, 우리는 가장 좋은 사람이 되고 있고, 대법 수련은 사람들에게 백 가지 이로움만 있고 한 가지 해로움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대법은 매우 올바르고 수련자는 모두 바른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 중생 앞에서 법에 부합하지 않는 일체 요소를 억제할 수 있습니다. 정념은 법에서 나옵니다. 사존께서 특별히 정법구결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이미 자신을 보호하고 중생을 구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자신도 보호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중생을 구도할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사람마음이 작용을 일으키거나 법에 있지 않으면 법의 힘이 없습니다. 따라서 법학습을 많이 하고 법학습을 잘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이것은 또한 구세력을 부정하고, 사람의 관념을 제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2. 가정에서 대법을 실증하고 자신을 수련하다

우리 집 건물은 좀 특수합니다. 시동생 집과 우리 집은 대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웃해 있었고, 시동생은 제가 불법 수감된 기간에 결혼해 딸을 낳았으며, 제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이가 태어난 지 이미 몇 개월이나 되었습니다. 아이는 피부병에 걸려 피부가 건조해 갈라지고 진물이 났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부가 성한 곳이 없었고, 수많은 치료법을 써도 효과가 없었습니다. 올케도 출산 시기에 허리 통증이 생겨 피곤해져 허리를 굽히거나, 빨래를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돌아온 후 올케에게 연공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올케는 매우 빨리 좋아졌고 아이의 피부병도 치료를 받지 않았는데, 저절로 치유됐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 사람이 연공하면 온 식구가 혜택을 본다”[1]였습니다. 이렇게 또 대법의 아름다움과 초범함을 실증했습니다.

시어머니는 처음엔 저를 좋아하지 않아서, 저에게 좋은 인상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퇴근해 집에 돌아올 때 시어머니는 시누이와 웃으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가도 제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면 곧바로 웃음을 거두고 문을 닫았습니다. 명절 때마다 제가 돈을 드리면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이로 인해 저는 한때 시어머니를 원망했습니다. 대법을 수련한 후 저는 생생세세에 쌓은 죄업은 대부분 사존께서 감당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감당한 것은 모두 사존께서 제자의 제고를 위해 안배하신 것입니다. 저는 잘못을 인정했고, 갚을 것은 갚았습니다. 시어머니를 선하게 대하고 생활의 모든 면에서 시어머니를 위해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매번 목욕할 때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씻겨드렸습니다. 시어머니는 점점 변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제가 얼마나 깔끔하고, 살림도 잘하며, 손자 교육을 잘한다고 칭찬했습니다. 게다가 월급 카드도 제게 맡겼습니다. 저는 시어머니에게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우라고 알려주었습니다. 70세가 되던 해에 시어머니는 병이 없이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아래층의 아주머니가 말했습니다. “나는 80여 년을 살면서 다른 사람을 질투한 적이 없는데, 자네 시어머니만은 질투했네. 어쩌면 이렇게 좋은 며느리를 얻을 수 있었을까? 고부끼리 싸우지 않고, 동서끼리 돌봐주면서 너나 할 것 없이 한 집안 같네.”

저는 평소 계단 청소를 깨끗이 합니다. 이웃집 아저씨는 “이렇게 좋은 사람이 있다니”라고 말했습니다. 건너편 큰언니도 말합니다. “자네 집의 복은 모두 자네가 가져오네.” 저는 그들에게 “대법 사부님께서 ‘진선인(真·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되고, 덕을 중히 여기고 선을 행하라고 하셨어요. 우리가 이웃이 된 것은 인연 때문이에요. ‘파룬따파하오’를 기억하면 복보를 받아요”라고 알려주었습니다. 큰고모가 병이 나서 문병을 하러 가자 고모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우리 엄마가 와도 나는 울지 않았고, 누이동생이 와도 울지 않았는데, 자네를 보니 울고 싶어지네.” 제가 말했습니다. “고모, 사람이 양식을 먹고 살아서 병에 걸리지 않는 사람은 없어요. 고생을 겪고 고통이 지나가면 좋아져요. 언니는 벌써 삼퇴(중국공산당, 공산주의 청년단, 소년선봉대 탈퇴)를 했어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쩐싼런하오(真善忍好)’만 외우세요. 복보를 받고 평안해 질 수 있어요.” 저는 고모의 명백한 일면이 대법에 감사를 드리고 생명에 희망이 생긴 것을 알았습니다.

남편을 말해보자면, 남편은 제가 불법 수감됐을 때 사회와 가정 여러 면에서 매우 많은 압력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남편도 사부님께서 얻도록 해주신 것을 일반 사람들은 표면적으로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번은 남편이 무치거(無齒鋸-이가 없는 톱)를 사용하면서 바짓가랑이를 감아올리다 발목에 두 개의 큰 힘줄이 잘렸는데 다행히 뼈는 다치지 않았습니다. 그날 마침 아들이 집에 있었고, 조카도 마침 밖에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남편은 다친 후 바로 소리를 질러 아들을 불렀습니다. 아들은 보고 나서 아버지에게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외우라고 했습니다. 조카는 수건을 가져다가 남편의 상처를 묶었습니다. 아들과 조카는 남편을 부축해서 병원에 데려갔고, 수술하고 나서 저에게 알렸습니다. 그날 저녁 남편은 집으로 돌아와서 진통제를 먹지 않고 매일 아홉 글자 진언(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을 외웠습니다. 남편은 종종 “근육과 뼈를 다치면 100일이 지나야 완쾌돼”라고 말했지만, 29일 만에 완쾌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대법 법력이 무한하다는 것을 증명합니다. 저는 항상 현재 병원은 죽음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부상자를 돌보기 위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돈을 구하고 있어 돈이 없으면 병을 치료할 수 없고, 돈이 있어도 목숨을 구할 수 없다고 남편에게 말합니다. “당신이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를 믿을 수 있고 금생에 대법제자의 가족이 된 것은 인연 때문이에요. 마음속에 선량함을 지키면 대법의 기적을 볼 수 있어요.”

남편도 점차 대법에 동화되었습니다. 한번은 외지에서 일할 때 물건을 사러 갔다가 전신주에 붙어있는 “파룬따파하오” 스티커가 바람에 날리는 것을 보고 손에 든 작업용 테이프로 다시 붙였습니다. 아래층에서 누군가가 “파룬따파하오” 스티커를 떼어 땅바닥에 던지는 것을 보고 수중에 테이프가 없어서 문에 붙어있는 광고용지로 다시 붙였고 집에 돌아와서 말하지 않다가 이후에 형님(수련생) 집에서 식사 시 대화 하다가 말을 했습니다.

남편이 대법을 인정했기 때문에 여러 번 위험천만한 일을 겪으면서도 모두 평안 무사했습니다. 당연히 저는 남편에게 사부님께 감사드리라고 말했습니다. 2015년에 장쩌민 고소 이후 경찰은 사전에 모의하고 여러 차례 집에 와서 저를 납치했습니다. 남편은 그때마다 있는 힘을 다해 저지하다가 두 번 분국에 끌려갔습니다. 저도 여러 번 사부님의 보호 아래 위험을 지나왔습니다. 여기서 제자와 가족을 보호해 주신 사존께 공손히 절을 올립니다.

3. 직장에서 대법을 실증하고 정체를 원용하다

생계를 유지하고 대법을 실증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저는 2007년부터 전화카드를 팔아 매월 600위안을 받았습니다. 생활비를 보조하고, 남편의 압력을 덜어주는 동시에, 일이 있는 수련생이 직장으로 저를 찾으러 올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습니다. 저는 필요한 수련생에게 진상화폐를 바꿔주고, 경문, 명혜주간, 진상달력, CD 등을 전해주었습니다. 컴퓨터가 없는 수련생이 인터넷을 볼 수 있도록 휴대전화를 구매해 소프트웨어를 설치하도록 도와주고, 직장의 편리를 활용해 대면 진상을 알렸습니다. ‘장쩌민 고소’ 이후 현지 기술 수련생이 박해를 당했고, 자료를 가지고 나가서 대면 진상을 해온 많은 수련생이 미행을 당해 납치됐습니다. 악경은 집에서 저를 납치하지 못하자 직장으로 납치하러 왔습니다. 저는 출근하지 못하게 됐고, 한 수련생과 자료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매우 많은 사람마음을 닦아내고 사람마음을 제거한 일이 있었습니다.

‘장쩌민 고소’를 할 때 어떤 수련생은 글을 쓰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글을 쓸 줄 몰랐습니다. 저는 제가 쓴 글의 사본을 보여주었습니다. 글을 쓰지 못하면 박해를 받은 과정을 적고 형식에 따라 정리한 후 속달로 보냈습니다. 어떤 수련생은 제 고소장을 보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심각하게 박해당하고 용기 있게 여기에 있네요(법을 실증하는 일을 가리킴).”

저는 수련생의 도움으로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자료점의 안전을 고려해 달력을 다 만든 후 자료를 수련생 손에 건네주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에는 매우 정진했기 때문에 법에서 인식할 수 있었습니다. 매우 바쁘고 힘들 때는 물도 마시지 못했습니다. 실내는 몹시 후텁지근했고, 매일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가면 날이 벌써 어두워졌습니다. 다행히 남편이 외지로 일하러 가서 저는 아무것이나 먹고 허기를 채울 수 있었고, 매일 매우 정진하며 살았습니다. 한번은 바쁘게 자료를 만들어 수량을 채웠고, 약속한 시각이 되어 서둘러 짐을 싸 아래층으로 내려갔는데, 밖에 비가 내리고 있어서 마음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이 일었습니다. 이때 어떤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당신이 한 일은 하늘이 알고 있다.”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사존께서 저를 격려해 주셨습니다. 제가 세상에 온 목적은 자신을 잘 수련하고 인연 있는 중생을 구도하는 것입니다. 이 일체는 모두 사부님께서 하고 계시고 사부님의 가지가 없다면 우리의 오늘도 없습니다. 저는 대법제자가 된 것이 매우 영광입니다.

4. 자신을 잘 수련해 다음 세대를 잘 이끌고 사람 구하는 사명을 잊지 않다

2017년 가을에 아들이 결혼했고, 일 년 후 손녀가 생겼습니다. 이때 저는 퇴직을 한 상태였습니다. 사돈댁은 농촌에서 살았으며, 농촌은 비교적 바빠서 손녀를 보는 일은 자연히 제 몫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저는 법리가 명확하지 않아서 아들을 도와 아이를 돌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돌보지 않으면 아들과 며느리가 이해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고, 돌봐주면 자신의 수련에 영향을 받을까 봐 두려워했습니다. 정체 환경을 벗어나 정진의 발걸음이 느슨해지는 것도 두려웠습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이것도 사심이었습니다. 수련생도 고부 관계는 처리하기 어렵다고 말했습니다. 당시에 저는 생각했습니다. ‘함께 있을 수 없으면 분명 나에게 문제가 생긴다. 문제가 있으면 스스로 고쳐야 한다. 자신이 걸을 길을 스스로 안배할 수는 없다.’ 저는 자신의 위치를 낮춰 매사에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많이 배려했습니다. 모순이 생겨서 마음속이 불편할 때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에게서 찾아 법으로 자신의 일언일행을 바로잡았습니다.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마음속으로는 계속 내키지 않았습니다. 피곤하고 괴로워서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 번 사부님께 도움을 청하고 수련생을 찾으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저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잘해야 했고, 깨끗한 것을 좋아해 집안이 엉망진창인 것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신체의 고통을 받을지언정 얼굴이 타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이것은 명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다른 사람이 저를 만족해하지 않을까 봐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대법을 실증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사람이 구도 받는 것에 영향 줄까 두려워했지만, 배후에는 명을 구하고 자신을 실증하며 좋은 말을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금전 문제에서도 제가 너무 많이 지불한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은 대학을 졸업한 후 성도에 집을 샀고, 계약금밖에 없어서 실내장식, 결혼, 차량 구매를 위해 집안의 모든 재산을 써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또 아이까지 돌봐달라고 합니다. 마음속으로 달갑지 않았지만 거절할 수는 없었습니다. 며느리가 산기가 있은 지 20개월이 됐고, 그동안 자신의 매우 많은 사람 마음이 폭로됐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악의적으로 다른 사람을 추측하고, 안일심과 보답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돈을 쓰지 않고 힘을 들이지 않는 사돈을 질투했고, 저를 얕보고 며느리를 더 아끼는 아들을 질투했으며, 자신이 고생하며 귀하게 키운 아들이 저를 알아주지 않아 질투했습니다. 사실 이것은 모두 사심이 장난치는 것이었고, 강렬한 질투심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만약 잘되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2] 사람 마음과 욕심을 내려놓고, 기대하는 관념을 구하지 않으며, 사(私)를 위하는 마음이 없이 어디서든지 대범해야 합니다.

이제 어린 손녀는 19개월이 되었는데, 항상 사부님 법상에 절을 하고 두 손으로 허스(合十) 합니다. 아들과 며느리도 최선을 다해 집안일을 하고, 저녁에 퇴근하면 자발적으로 아이를 데려가 아이가 저의 법학습을 방해하지 않게 합니다. 사실 제가 정진하지 못하고 느슨해지는 원인은 스스로 안일심을 방임해서 거짓 자아가 자신을 주재하게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로 저는 마성을 극복하고 걸어 나가 제한된 정법시간 동안 자신을 잘 수련하고 사람을 많이 구하겠습니다. 사존께서 안배해주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잘 걷고 바르게 걷겠습니다.

층차의 제한으로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으면 수련생분들이 시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수련생 여러분,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오스트레일리아법회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0년 10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0/8/40971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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