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대법제자 구술, 수련생 정리
[밍후이왕] 나는 올해 63세로 농촌 부녀자이며 꿋꿋하고 무던한 성격이다. 대법 수련을 시작해서부터 대법은 나에게 무엇보다도 소중했는데 생명을 내어준다 해도 아까울 것 같지 않았다. 20여 년 수련하는 동안 많은 난관에 부딪혔지만, 자비하신 사부님의 도움으로 확고하게 지나올 수 있었다.
톈안먼(天安門)에 가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치다
2000년 여름쯤, 나와 수련생 둘은 우여곡절 끝에 베이징에 도착했다. 하지만 먼 곳에 나가본 적 없는 농촌 부녀가 대도시에 오니 길을 어떻게 걸어야 하는지 민원실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고, 다만 대법을 위하고 사부님의 억울함을 호소하려는 단순한 생각뿐이었다. 이렇게 좋은 대법을 정부가 오해하고 있으니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베이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웠고 우리는 민원실을 수소문했다. 걷고 걷는데 길 양쪽에 몇 미터 간격으로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여관을 찾을 필요 없이 의자에서 밤을 지새웠다. 이튿날 날이 밝아 눈을 떠보니 뜻밖에 바로 옆에 민원실 간판이 있었다. 알고 보니 우리 두 사람은 민원실 입구에서 하룻밤을 보냈는데 사부님의 세밀하신 배치에 우리는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민원실은 오전 8시가 돼야 문을 여는데, 너무 이른 시간이라 우리는 톈안먼 광장을 둘러보고 수련생을 만날 수 있는지 보기로 했다. 광장에 도착하자 중년 남자 한 사람이 우리에게 파룬궁 수련생인지 묻고는 일을 보고 다시 오겠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이 사람이 수상쩍어 우리는 바로 자리를 피했다.
기념비 부근에 이르자 시내의 수련생 같아 보이는, 차림새가 그럴듯한 몇 사람을 봤는데 확신할 수는 없었다. 그중 나보다 젊어 보이는 빨간색 옷을 입은 여자가 나에게 다가와서 대법을 실증하러 베이징에 왔는지 물었다. 나는 명쾌하게 “네”하고 대답했다. 그녀는 나에게 그녀들과 함께 ‘파룬따파하오’ 현수막을 펼칠 거냐고 물었고, 그녀들이 앞에서 펼치겠으니 나는 뒤에서 ‘파룬따파하오’하고 외치라고 했다. 나는 “내가 힘이 세니까 앞에서 잡아당기겠으니 당신이 뒤에서 외치세요!”라고 말했다. 우리 몇 사람이 서로 현수막을 당기면서 하늘도 진동할 ‘파룬따파하오’를 진정한 마음으로 다 같이 외쳤다. 그뿐만 아니라 높이 들어 올리고 기념비에서 서쪽으로 30여 미터나 걸어갔다.
경찰차 한 대가 우리를 쫓아오더니 경찰들이 달려들었고 우리는 체포됐다. 그러나 나에게 현수막을 들자고 요청한 그 여성 수련생은 매우 침착해 보였다. 현수막을 단정하게 잘 접더니 그녀의 주머니에 넣고는 곧바로 서쪽으로 냅다 뛰었다. 경찰은 누구도 그녀를 쫓아가지 않았다. 당시 나는 아주 의아했는데 그녀가 화려한 옷을 입었기 때문에 이치대로라면 당연히 눈에 잘 띄고 목표물도 매우 컸지만, 우리 몇 사람 중 유독 그녀만 피할 수 있었다.
톈안먼 파출소로 잡혀 왔다. 우리 지역에서 베이징에 파견 나와 근무하는 두 사람이 우리 둘에게 말하기를 “당신들 두 사람은 민원실에도 가고, 톈안먼에서 현수막도 펼치고 할 일 다 했으니 돌아가세요. 가족들에게 걱정 끼치지 마세요”라고 했다. 또 말하길 “당신들은 마음 놓으세요. 파출소에 알리지 않겠으니 차표를 사서 오늘 오후에 빨리 돌아가세요.”라고 했다.
이렇게 우리는 사부님의 보호 아래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경찰 전기봉이 충전되지 않다
2000년 우리 몇몇 수련생은 두 번째로 법을 실증하고 베이징에서 돌아와 향촌 진(鎭) 정부 후원에 불법 감금됐다. 파출소 경찰과 향 정부 사람들에게 욕을 먹었고 한 남자 수련생은 참혹하게 구타당해 비명을 질렀다. 정부 이웃에 사는 사람들도 듣고는 괴로워하며 눈물을 흘렸다.
그날 정오 무렵, 우리가 시멘트 바닥에 누워 쉬는데 진 정부 사람들 눈에 띄게 됐다. 그중 한 사람이 말하기를 “저들이 자게 내버려 두고 밤이 되면 다시 혼내주라”고 했다. 그들의 대화를 들었으나 우리는 사부님께서 계시기에 무엇도 두렵지 않았으며 동요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알게 됐는데 그날 그들은 밤이 되면 전기봉으로 우리를 혼내주려고 했었다. 저녁 식사 후 향 정부 사람들이 와서 우리에게 말하기를 “당신들은 운이 좋군요. 전기봉을 종일 충전했는데 충전되지 않았다.”라고 했다. 우리는 자비하신 사부님께서 이 마난을 제거하시고 제자를 보호해주심을 알았다.
감옥에서 법을 실증하며 박해에 맞서다
2003년 내가 있던 자료점 수련생은 모두 납치됐다. 구치소에 불법으로 갇힌 지 9개월 후 나는 8년 형의 불법적인 판결을 받고 성(省) 감옥으로 납치됐다.
감옥에 온 첫날 밤 나는 생각하기를 ‘여기 이제 막 왔으니 우선 쉬었다가 내일 다시 박해에 맞서겠다’고 했다. 하지만 꿈속에서 사부님께서 태만해서는 안 된다고 점화해 주셨다. 감옥 안의 죄수들은 매일 점호하고 인원수를 보고해야 했다. 내 앞사람 차례에 보고가 끝나고 내 차례가 됐다. 나는 “파룬따파하오!”하고 외쳤다. 유다(배신자)에게 사람이 없는 방으로 붙들려가서 한바탕 심하게 맞았으나 나는 시종일관 방법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에는 그녀들도 방법이 없자 나를 상관하지 않았다.
낮 동안 우리는 수출용 의류를 가공하는 작업장에 배치됐으며 매일 여유 시간이라곤 없었다. 하지만 정오에는 시간이 좀 있었는데 작업장에서 반 시간 쉴 수 있었다. 나는 이 시간을 이용해 연공하기로 하고 많이 생각하지 않고 가부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감시자가 고발했고 우리를 감독하는 대장이 뛰어와 나에게 엄하게 소리쳤다. 나는 협조하지 않았고 의연히 가부좌하며 눈을 살며시 감고 있었다. 옆에 있던 수련생도 나의 안위를 걱정해 일어나라고 권유했다. 그래도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 대장은 몇몇 형사범에게 명령해 나를 때리고 끌며 감금실로 데려가 따끔한 맛을 보이려고 준비했다. 그러던 중, 대장이 갑자기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며 그녀의 팔과 손이 너무 아프다고 했다. 그중 한 사람은 대장이 나에게 맞았다고 옥정과(獄政科)에 빨리 말하라고 했다.
나는 두렵지 않았으며 그녀들이 가련하게 생각될 뿐이었고, 대법제자를 모함하고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음흉한 속셈을 엄숙하게 지적했다. 옥정과에서 경찰 둘이 와서 보고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갔다. 그 후 나를 들어 올린 그 몇 사람에게 진상을 말하며 그녀들이 파룬궁 수련생 박해에 참여하지 않기를 바랐고 그녀들에게도 좋지 않다고 말했다. 대장이 응보 받은 일을 그녀들도 직접 봤다. 이후 내가 그녀들에게 진상을 말하고 평소에도 친절히 대하자 그녀들은 감화됐고 많은 사람이 지혜롭게 우리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그들은 나와 다른 수련생 간의 교량 역할을 해줬다(감옥 내에서는 파룬궁 수련생의 사사로운 접촉이 금지됨).
한번은 다른 구역에 있는 수련생에게서 사부님 경문을 얻어왔는데 나는 매우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감옥의 환경이 열악해 떳떳하게 배울 시간과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의류 작업하는 틈을 이용해 감춰둔 곳에서 경문을 가져다가 한 구절씩 보고 외웠으며 되도록 빨리 외우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옆에는 이제 막 들어온 죄수가 내가 없는 틈을 이용해 나를 일러바쳤고 게다가 경문까지 몰래 경찰에게 가져다줬다.
나는 경찰 사무실로 연행됐다. 경찰은 “경문은 누가 준 것이며 왜 배우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말하기를 “저는 파룬따파를 배우는 사람이라 법이 없으면 정신적 지주도 없게 됩니다. 대법제자는 반드시 법을 배워야 하는데 배우지 않으면 그게 어디 대법제자입니까? 경문을 누가 줬다고 제가 말하면 그녀에게 표창을 주려는 겁니까? 저는 다른 사람을 팔 수 없습니다. 제가 말하면 당신들이 가서 그녀를 박해할 것이니까요.”라고 했다.
경찰은 더는 나를 난처하게 하지 않았다. 나는 일하던 기계 옆으로 빨리 돌아왔고 나를 팔아먹은 사람에게 경문을 갖다 준 것을 캐물었다. 그녀는 완강히 부인했다.
그날 일이 끝날 때 그녀가 갑자기 놀라 소리를 지르며 그녀의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이 살을 에듯 아프다고 했다(경문을 가져갈 때 바로 이 두 손가락을 사용함). 나는 그녀에게 진상을 말하며 그녀에게 좋은 미래가 있기를 바랐다. 절대 작은 이익을 추구해서는 안 되며 그러면 자신을 해치게 된다고 했다(파룬궁 수련생을 고발하면 죄수는 평점을 좋게 받을 수 있는데 목적은 감형을 위한 것이다).
정을 내려놓고 제삼자를 구도하다
2011년 추석 전, 나는 8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고생을 겪을 수도 있고 견딜 수도 있는 사람이다. 가족 앞에서도 대법을 실증하려고 바삐 많은 일을 하며 남편을 쉬게 했다. 남편은 몸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돌아온 첫해 정월 초아흐렛날 조카가 우리를 차로 데려가 이모에게 세배드리기로 친정 오빠, 누이동생과 약속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초여드렛날 비가 좀 내리더니 눈까지 내려 길이 미끄러웠다. 조카는 나에게 갈 수 없게 됐다고 알렸고 초아흐렛날 이모님께 세배드리기로 한 약속은 잠시 취소됐다. 남편은 아마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초아흐렛날 오전 내가 뜰에서 일하고 있는데 문득 대문 앞에 나보다 젊은 부인이 술 한 상자를 들고 들어오는 것을 봤다. 나는 “누구 집 손님인지요? 잘못 찾으신 것 같네요”하고 말했다.
남편이 방안에서 “잘못 찾은 거 아니에요. 우리 이웃 학생의 부모입니다.”하고 소리쳤다(이웃의 큰딸이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괴외 수업을 운영하는데 평소 학생의 공부를 지도해주고 돈을 벌었다).
나는 머리가 단순해서 많이 생각하지 않고 친절하게 그녀를 안으로 들게 하고 몸을 녹이라고 했다. 점심때가 되어가자 그녀를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려고 했다(그녀가 이웃한 곳에서 온 손님으로 여기고 남편의 소개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 남편이 말하기를 “그럴 것 없어요. 우리 집에서 먹지요”라고 했다. 나는 그때야 그녀와 남편의 관계를 눈치챘는데 그녀의 눈빛이 자연스럽지 못함을 봤다. 나는 진정하고 친절히 말하길 “부인, 여기서 드시지요. 쉬고 계세요. 저는 요리하러 갈 테니.”라고 하자 남편이 “내가 할게요. 당신은 손님과 얘기 나누세요.”라고 말했다.
그녀가 마치 자매인 것처럼 나는 일상을 얘기하며 나의 경험과 박해당한 것을 말했다. “남편도 따라서 고생을 겪었는데, 요 몇 년 그도 정말 쉽지 않았을 겁니다. 모든 것은 장쩌민의 박해로 조성된 것이며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 집은 화목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대법의 아름다움을 말했고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은 ‘진선인(真·善·忍)’을 표준으로 좋은 사람이 되며 누구라도 좋게 대합니다.”고 했다. 그녀는 조용히 들었고 마지막엔 사당(邪黨)의 소년대에서 탈퇴했다.
점심이 끝나고 그녀가 가려고 하자 나는 골목 입구까지 배웅하며 선악에는 응보가 따른다는 이치를 말하고 그녀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나쁜 일은 하지 않기를 바랐다. 사람이 부딪히는 어려움은 사실 모두 자신의 업을 갚는 것이다.
그 이후 그녀는 다시 오지 않았고 나도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녀와 얘기하면서 나는 한 점의 원한이나 질투도 없었으며 남편이 자신을 배신했다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내가 집을 떠나 있는 8년간, 남편도 집안을 돌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것 역시 장쩌민의 박해로 조성된 것이다. 이렇게 나는 난관을 평온하게 넘길 수 있었다.
사람을 구하며 발생한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하다
우한 폐렴이 갑자기 폭발해 올해 정월 초이틀부터 도시와 마을, 도로가 봉쇄되기 시작해 인심이 흉흉했다. 집마다 문을 걸어 잠가 거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기 어려웠다. 어떻게 사람을 구할까? 나는 마음이 조급했다. 마을 밖으로 나갈 수 없자 나는 문에 진상 자료를 걸어두려고 했다. 평소 가지 못했고 진상을 알리지 못한 곳을 나는 별도로 찾아갔다. 전염병이 퍼지고 있는 때라 모두 집 안에 있었으며 그들의 태도가 어떠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몇 마디 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됐고 그 숫자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염병이 지나가자 평소에 협력하던 우리 수련생 몇 명은 다시 시장에 가서 진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집에 돌아오는 길에 우리 세 사람이 탄 삼륜 오토바이가 길에 주차해 있던 삼륜 전동차를 들이받았고 그 차의 타이어 튜브가 밖으로 삐져나왔다.
그 차의 주인은 노인이었는데 사실 주차를 잘못한 책임도 있었다. 수련생의 친척 한 분이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우리는 노인에게 책임을 추궁할 생각이 없었는데 우린 사람을 구하러 온 것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스스로 그의 가족과 연락해 배상 문제를 협의했다. 만사는 모두 인연이 있는 것이고 무엇이나 우연한 것이 아니며 어쩌면 이 기회를 이용해 우리에게 그의 일가족을 구하라고 하는 것일 수도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나쁜 일이 좋은 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노인은 그의 차가 새 차라고 하며 8천 위안(한화 약 135만 원) 주고 샀으니 7천 위안을 달라고 했다.
이튿날 우리는 돈을 가지고 그의 집으로 갔다. 그의 일가족은 만족해했고 우리는 그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곳에 있던 친척에게 대법 진상을 말했다. 그들 모두 통쾌하게 사당 조직에서 탈퇴했고 자신을 위해 좋은 미래를 선택했다.
원문발표: 2020년 10월 13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s://www.minghui.org/mh/articles/2020/10/13/41327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