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헤이룽장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올해 81세고 본적은 산둥(山東)이다. 나는 공업대학을 졸업한 후 동북의 어느 공업중심 진(鎮)에 배치됐고 시 정부에 들어가 공무원이 됐다. 나중에 나는 과장급, 처장급, 국장급 간부로 승진했다. 내 인생의 꿈은 점차 현실로 됐다.
그러나 허무하고 실망해 서서히 나의 일과 생활의 일상이 됐다. 일의 내용은 제한돼 있고, 정치 설교는 무미건조해 일찍 싫증났다.
기쁘게 대법을 얻다
1994년 8월 어느 하루, 아내는 기뻐하며 2장의 티켓을 가져와 함께 ‘파룬궁(法輪功) 전수반’에 참가하자고 했다. 그러나 이튿날부터 각종 번잡한 사무가 잇따라 왔다. ‘바쁘다[忙]’라는 한 글자로 나와 이 만고의 기연은 스쳐 지나갔다! 매일 밤 아내는 전수반에 사부님 설법을 들으러 갔고 나는 업무와 접대로 바빴다. 아내가 참가한 전수반이 끝나자 나도 지도자들을 돌려보냈다.
다행인 것은 법을 들은 첫날에 아내는 나에게 ‘파룬궁’ 소중한 책을 청하게 했다. 책은 두껍지 않아 나는 이틀 만에 제1편을 다 읽었다. 나는 책 속의 법리에 깊이깊이 탄복했다. 3일째 되는 날 나는 제2편을 보았다. ‘파룬궁’에서 “공력은 心性(씬씽)에 의하여 수련해 낸 것이다.”[1]라는 법리는 나를 감동하게 했다. 심성을 제고하면 공이 자라고 부처로 수련 성취할 수 있다. 이것은 나를 고무격려해 주었다.
1년 뒤 나는 ‘전법륜(轉法輪)’ 우주 대법을 청했다. 업무 외 시간은 모두 내가 법공부를 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진지하게 법공부를 했고 나의 사상은 환골탈태의 변화가 일어났다. 나는 대법제자의 풍모를 갖추게 됐다.
법속에서 착실히 수련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 후 나는 시 정부 기관에서 유일하게 스스로 점심 도시락을 싸서 다니는 국장급 간부였다. 사람들은 모두 내가 파룬따파를 수련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청렴모범’이라는 명성을 해마다 얻었다. 나는 대법의 표준으로 문제를 처리해 진선인(真·善·忍)의 법광이 일체를 비추게 했다.
1995년 봄, 우리 시는 북경에서 새로운 시장 한 명이 전근 왔는데, 나의 주요 책임자이었다. 새 시장은 나에게 한 프로젝트의 가능성 조사를 시켰다. 나는 사람을 조직해 즉시 첫 번째 조사대상에 갔는데, 바로 건축부의 난방 전문가였다. 전문가는 말했다. “당신들이 만약 끌어들이고 생산에 들어가면 투입한 자금은 근본적으로 회수하지 못하고 적자는 이미 정해진 일입니다.” 진퇴양난의 국면이 내 앞에 놓였다. 새 시장은 이 프로젝트를 그가 재임 중에 설립하고 착공하기를 바랐다. 이것은 재직 중 치적이었다! 건축국의 친구는 내 생각을 알고 있기에 말했다. “이것은 시장의 프로젝트이기에 자네가 부정하면 자네의 이 국장 직위는 할 수 없지 않겠나? 다른 사람은 모두 아첨하는데 자네가 감히 당해낼 수 있겠나?”
사실은 확실히 그러했다. 만약 사실대로 말해서 보고하면 스스로 앞길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거짓말을 할 수 있는가? 2년간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한 대법제자이고 매일 ‘진선인(真·善·忍)’을 염하는 사람이다. 이 ‘진(真)’은 어떻게 체현해야 하는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국장을 하지 않아도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 나는 국가기술권위의 의견과 현지 실제상황, 경제적인 면에서부터 기술상의 성패와 이해관계를 조사한 보고서를 써서 올렸다. 결론은 ‘이 프로젝트를 우리 시에 끌어들이는 것이 적합하지 않습니다’였다.
새 시장이 열람한 후 생각이 어떠한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가 조사보고서에 기재한 의견은 좀 극적이었다. “내가 제출한 프로젝트를 당신은 감히 부정했다. 이것은 참 좋다!”
박해 시작
1999년 7월 20일 중공은 파룬궁 수련생에 대한 사악하고 잔혹한 박해를 시작했다. 10월 초 나와 아내는 함께 베이징에 갔다. 국가 신방국(信訪局)은 파룬궁 수련생에게는 이미 유명무실했다. 베이징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에 나와 아내는 베이징에 처음 오는 수련생의 숙소 배치를 책임졌고 비용은 내가 부담했다.
그동안 장(江)마두가 프랑스에 머물렀고 그는 프랑스 ‘르 피가로’지에 파룬따파를 모욕한 후 모든 베이징의 대법제자는 함께 천안문광장으로 달려가 외쳤다. “파룬따파의 결백을 돌려 달라! 대법 사부님의 결백을 돌려 달라! 파룬따파는 정법입니다!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함성이 끊임없었다. 수련생은 모두 인민대회당에 가서 그들에게 파룬따파는 정법이라고 알려주려 했다. 인민대회당에 가기 전에 한 무리 무장경찰이 가는 길을 막았다. 수련생들은 모두 함께 베이징 경찰국으로 납치됐다.
나와 아내는 납치돼 고향에 돌아왔다. 고향 경찰은 내가 국장급 간부인 것을 알고 그들은 공을 세우기 위해 나의 일을 승급해 ‘큰 사건, 중요 사건’으로 심사했다. 나를 베이징에 청원하러 간 조직자이자, 베이징에 가서 소란을 피웠다고 모함했다. 나에게 시간 개념이 없는 엄중한 신체 자유를 침해해 불법적으로 구금했다.
간고한 선택
‘국장이 파룬궁을 수련해 감금됐다!’가 시 정부의 폭발적인 이슈로 됐다. 첫 번째로 나를 보러 온 사람은 구(區) 공안국장이었다. 이 도시에서 이렇게 큰 사건이 터지고 그의 관할지에 있었기에 그는 첫 공로를 새우려 했다. 그는 나에게 ‘약속’했다. 그가 말한 대로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으면 나를 신문에 보도하고 라디오방송에서 표창한다는 등등을 말했다.
나는 허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문화대혁명이 어찌 된 일인지 압니까? 10년 동안 떠들어댔지만, 마지막에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당신들은 지금 파룬궁 수련생을 붙잡는데 당신들은 파룬궁 진상을 아는가? 당신들이 이렇게 하는 것이 옳은가요?” 그는 말했다. “저는 당신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저는 구의 작은 국장이고 당신은 대 국장입니다. 저는 갑니다.” 이 국장은 멋쩍은 모습으로 갔다.
이튿날부터 최소 10명의 국장급 간부와 동료, 지도자가 구치소로 나에게 권하러 왔다. “당신은 대립 면으로 걸어가려 합니까?” 나는 내 경험을 예로 들어 이야기했고 자선적으로 그들과 대법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했다. 국가와 인민에 유익하고 백 가지 이로움만 있으며 단 한 가지 해로움도 없다고 말했다. 많은 사람은 말없이 떠났다.
3일도 지나지 않아 건강한 아들들이 구치소에 왔다. 몇 마디 하지 않아 내가 대법 수련에 확고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세 아들은 동시에 무릎 꿇고 대성통곡했다! 아들들의 눈물과 애원을 보고 대법에 대한 바른 믿음을 지켜야 하는지 동요됐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누워서 나는 술술 외울 수 있는 ‘홍음‘에서 한 시가 떠올랐고 내 눈앞에 똑똑히 글자마다 빛이 났다. “대법을 굳게 수련하여 마음이 움직이지 않나니 층차를 제고함이 근본이로다 고험 앞에서 진성을 보나니 공성원만하여 불도신이 되는도다”[2] 내 느낌에 글자마다 소리가 나고 글자마다 나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 순간 나는 우뚝 선 느낌이었다.
시 기술감찰위원회 국장은 단도직입으로 나에게 선택하라고 했다. “당신은 국장을 가지려 합니까, 파룬궁을 가져려 합니까?” 나는 답했다.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합니다. 이것은 우주 대법이고 좋은 사람으로 되게 하고 저의 신심건강 각 방면에 좋은 점이 있습니다. 저는 확고하게 이 길을 가겠습니다!” 최후 나의 답안을 정연하게 종이에 적었다. “파룬따파를 수련하겠습니다!” 국장은 평온하게 쓰는 내 모습을 보고 현장에서 멍해졌다.
사악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나에 대한 박해가 공개적으로 변했다. 당적을 제명하고 직무를 해임했다. 공직에서 제명하려 했는데 기획위원회 부주임들은 “공직에서 제명하는 것을 반대하고 반드시 그가 살아가게 해야 한다.”라고 견지하여 일반 간부처럼 임금 받는 권익을 얻었다.
재차 베이징에 가다
나는 일할 권리를 빼앗긴 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매일 ‘전법륜(轉法輪)’을 읽었고 매일 소중한 책을 펼치고 현묘한 법리에 빠져들었다. 신경문마다 모두 사부님께서 나에 대한 가르침이었다. 나는 사부님의 법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법은 일체 사악을 타파할 수 있으며, 법은 일체 거짓말을 타파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히 할 수 있다.”[3]를 반복적으로 읽었다.
나와 아내는 2000년 12월 10일 세계인권의 날에 천안문광장 중앙에 서서 두 손으로 ‘파룬따파는 좋다!’는 현수막을 들고 동시에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다’ ‘파룬따파는 정법이다!’를 외쳤다.
나는 재차 납치됐고 불법으로 고향의 구치소에 구금됐고 불법 1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구 구치소에서 집행했다. 구치소에서 2~3명이 한 이불을 덮어야 했다. 나는 옴에 걸렸고 온몸이 가려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게다가 이도 내 몸으로 옮겨졌다. 매일 가려워서 참기 어려웠다. 나는 홍음 “수련의 길에 고생 있음이 아니라 생생세세 업력이 가로막음이로다 마음 굳혀 소업하고 心性(씬씽) 수련하리니 영원한 사람몸 얻어야 부처로다”[4]를 외웠다.
같은 감방에 파룬궁 진상을 모르는 죄수 우두머리가 있었다. 나에게 호된 맛을 보여주려 했다. 나의 수련 경험과 파룬궁은 왜 좋은가를 상세하게 전체 감방 죄수에게 알려줬다. 죄수들은 듣고 마음속으로 파룬궁을 존경했고 모두 나와 친구가 됐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아침 3시에 일어나 연공했다. 이 좋은 습관은 지금까지 견지하고 있고 20여 년 동안 매일 한결같이 견지하고 있다. 구치소에서 법공부를 하고 연공도 하는 동시에 정정당당하게 ‘전법륜’을 보았다.
사악을 제거
구치소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 내가 한 첫 번째 일은 직장에 가서 알고 있는 사람에게 진상을 알리고 파룬궁은 박해당하고 모함당했고 천고의 억울한 사건이라고 알렸다. 파룬궁은 좋은 사람이 되게 가르치고 국가와 백성에 모두 백 가지 이로움이 있고 한 가지 해도 없는 고덕대법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알고 있고 내가 이야기한 것은 모두 알고 있는 실제 진상을 알린 것이다. 나의 진상을 들은 사람들은 대법에 정확한 인식이 생겼고 그들 인생에서 정확한 선택을 하게 했다.
사당의 각종 형식으로 대법을 모욕하는 선전 게시판과 표어 구호는 번화가와 사람들이 자주 집결하는 곳에 나타났다. 사람들이 진상을 아는 것을 가로막았고 시비를 전도하고 세인을 독해하는 작용을 했다. 어떻게 하는가?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붙인 표어에 대해 나와 아내는 걸어가면서 찢어버렸다. 그러나 610사무실 앞의 파룬궁을 모욕하는 특별판을 제거하는 것은 진열창이 있어 어려움이 컸다. 이 게시판은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교통 요지에 설치돼 있었으며 이미 시간이 오래됐다.
어느 하루 아내는 비를 무릅쓰고 집으로 돌아왔다. 우산을 펼쳐 말릴 때 나는 눈이 밝아졌다. 이것은 보호산이 아닌가? 매일 나가 진상을 알릴 때 반드시 우산을 들고 가고 비가 올 때 진열창에 가서 비가 오는 기회에 사악 표어를 제거하자고 아내와 약속했다.
기회가 왔다. 7월 어느 하루 정오, 큰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우리 둘은 비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리 두 사람의 신발과 바지가 모두 젖었다. 우리는 진열창 앞으로 갔다. 승용차 2대가 진열창 위치와 2m 떨어진 곳에 있었고 차 안에 사람이 있었다. 또 비를 피하는 사람 3~4명이 근처에 있었다. 아내는 우산을 낮게 들고 몇 명에게 진상을 알렸고, 나는 우산을 어깨에 놓고 진열창을 열고 칼을 휘둘렀다. 선전화보는 급히 비속으로 떨어졌고 나는 빗속에서 또 몇 번 짓밟았다. 그 그림은 진정한 쓰레기가 됐다. 그 외 3장도 같은 방법으로 제거했다. 그 후부터 이 게시판에 더는 사악한 표어가 나타나지 않았다.
법 속에 빠져들다
신세기에 들어선 후 33세 아들은 결혼하고 아들을 낳았다. 건강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있으니 아들들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려 하지 않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보게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자에게 말을 가르치고 일찍이 대법으로 지혜를 열어주기를 바랐다. 나와 아내는 이미 인식이 같아 손자는 볼 수 있지만, 대법제자의 세 가지 일은 지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의 아들 셋은 모두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들 중에 또 박사, 석사도 있다. 1999년 7.20 후 나와 아내는 동시에 납치됐고 사당의 유혹 아래 아들 셋은 무릎 꿇고 나에게 대법을 떠나라고 한 적이 있었다. 이 일이 있고 난 뒤 그들은 자신의 언행을 모두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들은 자발적으로 나를 위해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하는 소모품, 기재를 사주었다. 그들은 부모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을 실증했고 대법을 진심으로 존경했다. 그들은 자신의 가족에게 좋은 일이 끊이지 않는 것은 부모가 대법 수련을 견지한 것과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큰아들의 타이완 사장은 내가 파룬궁을 수련해 박해당한 것을 알고 아들에게 물었다. 아들은 말했다. “아버지는 파룬궁을 수련해 좋은 사람으로 되려는데 모함을 받아 박해당했습니다.” 사장은 진상을 알고 짧은 시간 내에 아들을 세 번 승진시켜 주었다. 마지막에는 사람, 재물, 물건을 장악한 공장장으로 됐다. 그 외 둘째 아들도 사업이 순조롭고 번창하고 작은아들은 관직이 국장급으로 승진했다. 그의 직장에서 그에게 사당에 가입하라고 해도 그는 가입하지 않았다.
손자들은 잇따라 태어나 나와 아내는 손자와 단란함을 즐겼다. 즐거운 것은 즐거운 것이고 대법제자가 사람을 구하는 사명을 우리는 시시각각 마음에 새겨놓았다. 어두워지면 나는 자전거를 타고 아들이 나를 도와 제작한 진상자료를 베이징 둥창안(東長安) 거리의 공용전화에서 시창안(西長安) 거리의 공용전화까지 배포했다.
손자가 외출해 햇볕을 쬘 수 있게 되면서 우리는 직접 대면해서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했다. 나는 먼저 말한다. “사당은 나라를 해치고 백성을 해치고 많은 죄를 지었고 천멸중공은 하늘의 뜻이고 백성의 소원입니다.” 아내는 이어 말한다. “이런 악당조직에서 빨리 탈퇴해야 당신은 평안을 보장받습니다. 행복도 이어 따라올 것입니다!” 많은 사람은 순조롭게 삼퇴한다. 헤어지기 전에 나는 신신당부한다.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真善忍好-진선인은 좋습니다)를 자주 읽으면 복은 따라올 것입니다!”
내가 아들 집에 가면 또 하나의 중요한 사명이 있는데, 바로 며느리 생활권의 사람에게 최대한 진상을 알리고 삼퇴를 권한다. 며느리 집에서 며느리는 삼퇴의 주역이다. 며느리들은 친정집에서 다 삼퇴시켰다. “파룬따파하오!”는 우리 가족의 식사 후 영원한 주제다.
대법은 행복한 가정을 만들었고 그 행복 역시 더욱 깊은 내포가 있다. 손자들은 부지불식중에 대법이 그들 마음속에 바른 믿음의 힘을 나타냈다. 큰 손자는 아버지 어머니를 따라 캐나다에 갔다. 영어 표현능력을 강화해야 해서 몇 개 학원을 물어보았는데 비용이 모두 비쌌다. 한 친구가 좋은 소식을 보내 주었다. 한 학교 영어 보충반에 비용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큰 손자는 이 학교에 가기로 했다. 학교는 교회 학교라 입학 조건은 반드시 기독교를 믿어야 하고 세례를 받아야 학비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큰 손자는 듣고 말없이 있다가 아버지의 손을 잡고 가자고 했다. 학교에서 나온 후 아버지에게 말했다. “불이법문입니다. 가지 않겠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파룬따파를 믿고 있습니다!”
둘째 손자는 아버지를 따라 베이징에 갔고 우수한 성적으로 중점고등학교의 국제반에 입학했다. 모범 학생이고 반장으로 선정됐는데, 교육국은 손자가 단원(團員)이 아니라서 동의하지 않았다. 학교는 그에게 단원에 가입하라고 부추겼다. 오늘 신청서를 쓰면 내일은 단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손자는 하하 웃으며 한 무리 설득자에게 미지근하게 대충 얼버무렸다. 이제 곧 졸업인데, 그 신청서에 아직 도장을 찍지 않았다!
나와 아내는 아이들과 매일 사부님의 설법을 듣고 함께 대법 음악을 듣는다. 손자가 첫 번째 할 줄 아는 노래는 ‘파룬따파하오’였다. 아이들은 나를 따라 진상자료를 배포한 적도 있고 스티커도 붙인 적이 있다.
이지적으로 정진
내가 신체 자유를 회복한 후 일부 수련생은 나를 찾으러 왔고 나에게 협조인을 하라고 했다. 나는 작은 범위 내에서 서로 교류하고 토론해도 큰 정법 형세가 와도 법공부를 많이 하고 밍후이왕을 많이 보면 정법노정에 따라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15년 장쩌민 고소에 여러 사람이 한 것은 특별히 지혜로웠고 용감했다. 나는 5월 초 실명으로 장쩌민 고소장을 최고 인민 법원과 최고 인민 검찰원에 보냈고 현지에서 먼저 행했다. 2개월간 장쩌민 고소 과정에서 나와 수련생들은 법공부하고 밍후이 문장을 보았고 근본적으로 대형회의를 하지 않고 3, 5명이 법공부하며 서로 교류하고 장쩌민 고소에 공동인식이 생겼다. 내 생각에 착실한 수련에서 떠들썩하게 회의를 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단번에 사람이 많이 와서 회의 문제로 단체로 납치된 참혹한 교훈은 지금까지 고통으로 남아 있다!
협조인의 일을 좀 냉각시킨 후 한동안 많은 사람이 나를 찾아 법리를 교류하러 왔다. 나도 자신이 깨달은 법리를 이야기하기 좋아한다. 한 수련생은 일만 있으면 나에게 물으러 왔다. 점차 나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한 가지 일이 나를 깨어나게 했다. 어느 하루 한 법공부 팀에서 한 편의 문장을 인쇄해 각자 배웠다. 나는 그때 말했다. “이렇게 하면 옳지 않습니다. 법공부 교류 문장은 밍후이왕에 특간이 있고 소책자도 있습니다. 우리는 시간을 내어 배울 수 있습니다. 이 한 문장을 인쇄해 보면 사람을 배우는 것입니다. 법공부를 하는지 사람을 배우는지 분간해야 합니다.” 수련생들은 나의 의견에 동의하고 이 문장을 돌아가 폐기했다.
이 일을 통해 나는 안으로 자신을 찾았다. 수련생들은 모두 나를 찾아 교류했는데, 아주 많을 때 모두 나의 문제에 대한 처리 방법을 들었다. 나는 쓸데없이 부풀렸는데, 마치 잘못된 방향을 바로잡아주는 것처럼 나의 ‘고견(高見)’을 말했다. 이것은 수련생에게 자신을 따라 배우라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내가 난법한 것이 아닌가? 나는 놀라서 식은땀이 났다. 그날부터 나는 매 수련생에게 “‘법을 배우는지 아니면 사람을 배우는지‘에 대한 체득을 말하고 자신이 착실히 수련하지 않은 점과 겉만 번지르르한 심각한 교훈을 찾았는데, 자신을 해치고 수련생을 지체했다고 교류했다. 수련생들도 모두 이지적으로 자신을 찾았고 모두 법에서 제고했다.
경자년에 들어서며 나는 81세가 되었다. 아내는 나와 나이가 같다. 두 고령의 사람은 정정하고 신심이 건강하다. 우리는 20년 전 3시에 일어나 연공하는 습관을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견지하고 있다. 매일 오전에 법공부하고 오후에 진상을 알리러 나가고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상관없이 삼퇴를 권했는데, 10여 년을 견지했다. 우리의 생활은 규칙성이 강하고, 대법은 우리의 수련 생활이 교란되지 않게 보장하는데, 1년 내내 견지하며 변하지 않는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파룬궁-제1장 개론’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2-진성을 보다’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교란을 배척하다’
[4]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홍음-인과’
원문발표: 2020년 9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9/18/40838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