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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생을 도와줄 때의 관념을 닦다

약간의 체득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우리 지역의 몇몇 수련생이 병업 상태가 나타났다. 나는 수련생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의식하지 못한 관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해 수련생들과 소통하려 한다.

수련생을 도와줄 때 우리는 늘 병업은 가상이며 수련생이 이 가상을 인식하고 타파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수련생을 도와주는 수련생도 병업 중의 수련생의 가상 상태에 이끌렸다. 특히 병업 중의 수련생이 자신의 부정확한 수련 상태를 인식하지 못하거나 혹은 자신에게 존재하는 집착심을 직시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또는 병업 중의 수련생과 소통할 때 갈수록 명백해지고 정념이 생기지만 도와주는 수련생이 돌아간 후 병업 중의 수련생은 또 그 부정확한 상태로 돌아가고 정념이 없어진다. 수련생의 종종 좋지 못한 상태가 반복되는 것을 보면 우리는 그것이 수련생의 진실한 상태라고 오해할 수 있다. 사실 그것은 단지 인간 세상에 미혹돼 후천적인 각종 집착과 관념이 수련생을 포위한 것이며 그것은 진정한 그 자신이 아니다.

‘전법륜(轉法輪)’ 제8강에 “여러분은 ‘달마의 면벽 9년(達摩面壁九年)’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인데, 과거에 많은 승려가 한번 앉으면 몇십 년이라, 역사상 기록에서 가장 긴 것은 90여 년이나 되는데, 더 긴 경우도 있다. 눈까풀 위에 먼지가 아주 두툼하게 쌓이고, 몸에 풀까지 자라났어도 여전히 거기에 앉아 있다.”[1]는 구절이 있다. 시간이 너무 길어 몸의 먼지가 매우 두툼하기에 풀이 자랄 수 있다. 그 두툼한 흙은 우리가 천백 번 윤회전생 중에 인간 세상에서 많은 관념을 형성하고 관념의 작용에 의해 또 많은 집착심이 생겨나며, 그 집착은 먼지에서 자란 풀과 같다. 우리 수련 과정은 풀을 뽑은 다음 먼지를 한 층 한 층 제거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자신은 먼지가 없으며 풀은 자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병업 수련생의 좋지 못한 상태에 직면해 수련생의 진정한 자신을 보고 그의 근원을 보아야 한다. 먼지와 풀이 진정한 그 자신을 에워쌌다. 현재 수련생의 바르지 못한 표현은 진실한 그 자신이 아니다. 우리는 수련생을 도와 풀을 뽑아주고 먼지를 제거해주며 그가 진정한 자신을 되찾아오게 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수련생을 대하자 좋지 않은 부정적인 사유가 생겨나지 않았고 수련생의 좋지 못한 상태에 이끌리지 않았다.

수련생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우리는 수련생이 법에 있지 않은 많은 점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수련생과 소통하면서 되도록 빨리 법에서 명백히 알고 자신의 바르지 않은 점을 바로잡기를 바란다. 시간이 좀 지난 후 수련생이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면 일부 부정적인 사유가 생겨난다. 예를 들면 수련생은 다년간 일하는 것을 많이 중시해 법리가 똑똑하지 못한 곳이 많고 착실히 수련하지 않아 튼튼한 기초가 없으며 큰 난을 만나자 몹시 어렵게 걸어왔다…… 이런 것이 비록 모두 사실이지만 수련생이 지금 그렇게 큰 정념이 있거나 혹은 짧은 시간의 교류를 통해 바뀐다면 아마 이 시련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장기간 착실히 수련하지 않았기에 구세력이 손을 쓴 것이다. 그 때문에 수련을 잘하지 못한 많은 것은 단번에 쌓여진 것이 아니며 얼음이 석 자 언 것도 하루 추위에 언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는 수련생을 도와 정념을 강화하고 법에서 제고하는 것을 도와주며 얼음을 녹이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련생을 도와줄 때 우리는 그의 각도에 서서, 그의 감당 능력의 기점에서 그가 법에서 제고하게 도와주어야지 우리가 있는 층차의 각도에서 수련생이 우리의 표준에 도달하게 요구해서는 안 되며, 수련생과 필요한 소통 외에 제일 주요한 것은 수련생과 법공부를 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선 말씀하셨다.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법은 일체 사악을 타파할 수 있으며, 법은 일체 거짓말을 타파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히 할 수 있다.”[2]

수련생은 가끔 우리가 말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충족한 정념이 없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다. 정념은 법에서 온다. 오직 수련생이 그가 있는 층차에서 제고하고 주동적으로 자신을 바로잡으면 역경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우리가 생각한 표준에 도달해야만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부님께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하자. 만약 대법제자가 어떤 마난이나 소업에 부딪힌다면 그는 틀림없이 원인(前因)이 있는데, 자신에게서 좀 찾아보라. 그렇다, 찾은 후에 즉시 잘하면 그 정황은 즉시 좋은 쪽으로 향하고, 바른 방향으로 바뀔 것이다.”[3]

사실 수련생을 도와주는 과정은 자신을 수련하는 과정이다. 이 이치를 여러분은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수련생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일에 빠지기 쉽고 병업 중에 있는 수련생에게 주의력을 많이 집중하기에 자신을 수련하는 것을 소홀히 한다. 이 과정은 수련생의 제고를 도와주는 동시에 자신을 제고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오직 이 근본적인 기점이 바뀌어야 우리는 제고한 것이다. 어떠한 부정적인 사유 혹은 구세력과 같은 사상 염두가 나타나지 않고 수련생에게 정념을 더해야만 비로소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걷는 것이다. 사실 우리 신변에서 발생하는 매 큰일, 작은 일, 좋은 일, 나쁜 일, 설령 타인이 자신에게 한 말 모두 우리의 수련을 떠날 수 없다. 수련인이기에 우리의 인생길은 한 갈래 수련의 길이며 우연히 만난 모든 것이 수련을 떠나지 못한다. 그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주의력을 수련 제고에 놓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을 잘 수련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것은 모두 사부님께서 하시며 우리가 단지 그 소원이 있으면 사부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주신다.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는 법이 가늠하며 결과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셨다. “수련은 자신에게 달렸고, 공은 사부에게 달렸으므로 당신은 이런 소원만 있으면 된다. 진정으로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사부가 해주는 것이지 당신은 전혀 해낼 수 없다.”[1] 이 과정에서 쌍방이 모두 법에서 자신을 수련하고 바로잡으면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을 걷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에 왜 그런 부정적인 일이 발생하는가? 당연히 박해는 발생하지 않는다. 관건은 우리가 그 과정에서 자아를 내려놓고 이기적인 것을 닦고 모든 출발점이 타인을 위하는 선한 마음을 닦는 것을 중시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병업 중의 수련생과 몇 마디 말하려 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련 중에서 당신들이 부딪힌 좋은 일이든 좋지 않은 일이든, 모두 좋은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당신들이 수련하기에 비로소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4] 우리는 정면으로 문제를 보는 것을 배워야 하며 본능적으로 고통을 배척해서는 안 된다. 만약 지금 시련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우리의 닦지 못한 사람 마음은 정법이 결속됐다고 자동으로 없어지는지 생각해보라. 닦지 못한 일부분이 다른 공간에서 대응하는 것은 모두 무량한 중생이다. 만약 정법이 결속되면 그 생명은 당신이 수련을 잘하지 못했기에 없어진다. 오직 정법이 결속되지 않으면 수련의 기회가 있고 바로잡을 기회가 있다.

또 수련생과 소통할 한 가지 문제는 근본 집착이다. 우리는 대법 수련에 들어설 때 모두 하나의 근본적인 집착이 있었다. 대법이 당시 우리 사람의 관념에 부합됐기에 들어온 것이다. 당시는 잘못했다고 할 수 없지만, 끊임없이 수련하면서 이 근본적인 집착은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 수련의 기점은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오늘 ‘전법륜’을 배우다가 “당신이 진정하게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法輪(파룬)은 당신을 보호해 줄 것이다. 나의 뿌리는 모두 우주에 박혀 있으므로 누가 당신을 움직일 수 있다면 곧 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그는 곧 이 우주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1]를 읽게 됐다. 이 단락 법을 배울 때 그중의 “당신이 진정하게 수련하는 사람이라면”[1] 이 부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어떻게 해야 진정한 수련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람은 고통 속에서 본능적으로 고통을 배척한다. 수련생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려 할 때 ‘어떻게 해야 빨리 좋아질까?’라고 생각한 목적은 무엇인가? 자신의 신체가 먼저 편안해진 후 안으로 찾아 자신을 수련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자신은 사명이 있는 대법제자이며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이 구해주기만을 기다리기에 신체가 되도록 빨리 좋아지려고 생각한 것인가? 이 사(私)를 위한 것과 타인을 위한 것의 기점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구세력은 이기적이고 구 우주의 속성 역시 이기적이다. 그러나 사부님께선 우리에게 이기적인 것을 버리고 타인을 위한 생명이 되어야 하며, 대법을 실증하고 조사정법(助師正法)하고 세인을 구도하라고 하셨다. 단지 나 자신의 원만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다.

수련은 신성하고 엄숙한 것이다. 정법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이 미혹의 세상에서 다시는 세상의 명리에 이끌리지 말자. 다시는 이 세상의 가상을 그렇게 진실하게 보지 말자. 사람이 되는 것은 우리들의 목적이 아니다! 우리는 시시각각 어느 것이 진정한 자신인지 똑똑히 인식하고 올 때의 서약을 잊지 말고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법시기의 대법제자’라는 유사 이래 없는 위대한 칭호를 욕되게 하지 말자.

이상은 개인의 깨달음이며 바르지 못한 곳이 있으면 수련생이 자비롭게 시정해주길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轉法輪)’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교란을 배제하자(排除干擾)’
[3] 리훙쯔 사부님 경문: ‘2019년 뉴욕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3-시카고 법회’

 

원문발표: 2020년 8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8/11/4102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