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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적 ‘자아’를 인식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많은 갈등이 나타난 뒤, 사실은 기술 문제가 아닌 자아의 문제였고 자신의 심성의 문제였습니다. 이하는 제가 최근에 부딪힌 일련의 일들입니다.

어제 저는 수련생과 함께 시골 그곳의 수련생에게 프린터를 수리해주러 갔습니다. 우리는 먼저 한 곳에 가서 프린터의 헤드를 교체했습니다. 우리는 작업절차에 따라 인쇄 헤드를 교체했는데 일부 비정상적인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이것은 기술 문제가 아니라 사악이 교란하고 있다고 생각되어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도움을 요청드렸습니다. 그러자 즉시 신기하게 인쇄가 잘 되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완성됐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감사드렸지만, 당시에 저는 안으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또 다른 한 시골 수련생 집에 갔습니다. 그녀의 프린터 문제는 인쇄되는 페이지가 부족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작은 문제라고 여겨 ‘페이퍼 롤러’의 면을 바꾸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꾼 후에도 여전히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또 ‘용지 걸림’ 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저는 시간이 너무 늦어져 마음이 몹시 조급해졌습니다. 제가 매번 나와서 늦게 돌아가면 가족들이 걱정돼 저를 한바탕 야단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계속 이것을 사악이 가족을 통제해 제가 법을 실증하는 길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몹시 초조했습니다. 비록 제가 이미 가족들에게 아마 조금 늦게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말했지만, 시간이 확실히 너무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무리 저와 함께 간 그 수련생을 재촉해보면서 “우리 먼저 돌아가요. 오늘은 너무 늦었어요. 돌아가서 좀 연구해보고 다음에 다시 와요”라고 말해도 그 수련생은 마치 제 말을 듣지 못한 듯했습니다. 여전히 느릿느릿 수리하고 있었고 사소한 문제라도 천천히 사색했습니다.

저는 마음이 이미 너무 급했지만, 또 겉으로는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마지막에 문제를 여전히 철저히 해결하지 못했고 시간이 확실히 너무 늦었으므로 우리는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집에 도착하자 가족들은 모두 저를 걱정하느라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들었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조용해졌습니다.

다음날 깨어나서 저는 ‘왜 나는 매번 나갔다가 늦게 돌아오면 가족들이 나를 뭐라고 하는 걸까’하고 반성해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가족들이(모두 수련생) 모두 자신을 찾지 않고 하는 말은 법에 있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도 늦게 돌아오고 싶지 않았지만 실제 상황은 제가 전혀 일찍 돌아올 수 없어 저는 수련생의 차를 타야만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수련생이 가지 않는데 제가 어떻게 가나요? 그러나 이것은 사람의 이치가 아닌가요? 사람의 이치로 옳고 그름을 가늠하는 것 아닌가요?

저는 계속 찾아보다가 매우 깊이 숨겨진 것을 찾았습니다. 제 모든 생각은 전부 ‘자아’의 입장에 서서 한 것이며 전혀 상대방 입장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줄곧 자신에게 ‘사심’이 매우 적고 다른 수련생에게 문제가 생기면 가능한 한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해왔습니다. 저는 자신이 이른바 수련생을 돕는다거나 ‘무사(無私)’에 도달하는 것이 모두 ‘자아’의 기점에 서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나는 왜 상대방 입장에 서서 문제를 생각할 수 없는가? 어떤 요소가 내가 상대방 입장에 서서 문제를 생각해야 하는 것을 가로막았는가?’하고 한층 더 깊이 파보았습니다. 저의 진정한 자아는 무사의 생명으로 상대방 입장에 서서 문제를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아’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는 것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저는 그것은 하나의 깊이 숨겨진 ‘자아’의 요소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시에 저는 마침내 이 ‘자아’를 찾은 줄 알았습니다.

이 ‘자아’는 매우 교활합니다. 그것은 어떤 때 당신의 일을 하려는 마음, 명(名)을 구하는 마음, 과시심 등 사람의 마음을 이용해 법을 실증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남의 눈을 끌어 속임수를 쓰면서 자아를 실증합니다. 그것이 위협을 느낄 때면 다른 집착심을 이용해 큰 것을 위해 작은 것을 버려가며 그것 자신을 보호합니다.

한동안 수련생은 기계 수리로 저를 찾지 않았습니다. 저는 가끔 낙담하거나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날 수련생이 저를 찾아와서 기계 수리를 부탁할 때, 저는 마음속에 한 가닥 기쁨이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시에는 일하려는 마음이 오랫동안 일하지 않아 죽게 됐는데, 갑자기 기회가 와서 정말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린 격이 되어 일하려는 마음에 살 기회를 가져다준 것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이 일을 하려는 마음이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때는 더 깊이 찾아보지 않고 이미 안으로 찾아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아’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하려는 마음’을 ‘배반’하는 것으로 자신을 보호한다고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제가 돌아와 질책을 당한 다음 날, 깨어나자 다시 안으로 찾아봤습니다. ‘자아’가 다시 위협을 느끼자 ‘제가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튀어나와 자신을 속이면서 그것 자신을 보호했습니다. 제가 다시 안으로 찾을 때 그것은 갈수록 안전하지 않다고 생각해 또 ‘덮는 것으로 덮어 감추는’ 수법을 이용해 자신을 보호하도록 저를 미혹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자신이 늘 자아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고려한다’라는 것을 찾았을 때, 그것은 저를 속여 가며 저를 자신이 이미 그 매우 깊이 숨겨진 ‘자아’를 찾았다고 생각하게 했습니다. 사실 저는 단지 ‘자아’가 형성한 ‘자신이 늘 자아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고려한다’라는 후천적인 한 층의 관념을 찾았을 뿐, 그 ‘자아’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때 이 점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자아’가 형성한 후천적인 그 관념을 ‘자아’로 여겼습니다. 저는 기만당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잘못됐다고도 느꼈지만 분명하게 말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다음날 점심, 저와 함께 갔던 그 수련생이 우리 집에 와서 가족에게 너무 늦었고 가족을 미처 배려하지 못하고 기계를 빨리 잘 수리하는 것만 생각했다며 사과했습니다. 수련생이 간 후, 저는 수련의 격차를 느꼈습니다. 저는 왜 가족에게 사과하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사부님께서는 저에게 수련생이 사과하는 모습을 보게 하신 것은 반드시 제게 문제가 존재한다는 것인데 어떤 문제일까요? 이때, 저는 즉시 놀라 깨어났습니다. 비록 저는 ‘자신이 늘 자아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고려’하는 이른바 ‘자아’를 찾았고 저도 앞으로는 ‘자신이 반드시 타인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라고 생각했으며 마치 진정한 자아를 찾은 것 같았지만 매우 성실하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이때, 저는 한 가지 문제를 봤습니다. 바로 진정하게 상대방 입장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는 생명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자아이며, 진정하게 상대방 입장에 서서 문제를 생각하는 생명은 자신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줬을 때, 표면적으로 당신을 원망하든지 여부를 떠나 당신은 모두 내심으로부터 자신의 잘못을 인식하게 되고 상대방에게 미안해지게 되며 내심으로부터 상대방에게 사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때 사과하려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저는 그 ‘자신이 반드시 타인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라는 것은 ‘자아’가 ‘자신이 늘 자신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고려한다’라는 이 관념을 이용해 내보내는 진의를 숨긴 행동이나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이 점을 깨달았을 때, 저는 다시 한번 제가 기계를 수리했던 전반과정과 돌아온 뒤의 이 과정을 생각해보았을 때 즉시 자신이 정말 잘못했고 가족에게 상처를 줬다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몹시 괴로웠습니다. 저는 또 제가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이른바 수련하고 법을 실증한 것은 표면적으로 상대를 위한 것 같았지만 사실 모두 ‘자아’의 기점에 서 있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저는 줄곧 후천적인 ‘자아’에 기만당하고 있었고 착실히 수련하지 않았으며 너무 많은 귀한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제가 여기까지 인식했을 때, 저는 자신의 사고체계에 하늘과 땅이 뒤집힐 듯 큰 변화가 일어났다고 느꼈습니다. 완전히 새롭게 상대를 위해 생각하는 사고체계가 제 사상 속에 녹아들었습니다.

수련은 정말 매우 엄숙하며 매우 간고합니다. 매 일사일념에 구세력은 모두 함정을 마련해놓았기에 대법으로만 비로소 판별할 수 있습니다. 대법은 마치 길을 밝혀주는 불빛처럼 저를 되돌아가는 길에 구세력이 애써 생각해서 저를 망치려고 안배한 일체를 점차 분명하게 볼 수 있게 했습니다. 법을 많이 배우고 잘 배워 대법으로 지도해야만 비로소 온전하게 수련의 길을 잘 걸을 수 있습니다.

 

원문발표: 2020년 7월 3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7/30/40977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