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해마다 자신의 1년 동안의 수련 상황을 총괄하는, 이 기회를 아주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원고를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고 일이 많았다는 이유였지만, 사실은 마음속의 두려움이 주도한 것이고 그 배후의 동기는 자신의 좋지 못한 면을 직면하기 싫어한 것입니다. 당연히 그런 업력의 방해도 있습니다. 그것들은 폭로되어 제거될까 봐 두려워합니다. 이번에 저는 한 해 동안에 수련 중의 체험을 적어내려 합니다.
2019년 저의 일과 생활에 아주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동영상 촬영은 3월부터 했는데 그 기간에 많은 도전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것들을 회고해 어떻게 제 마음을 수련했는가에 대해 총괄하려 합니다.
1. 동영상을 촬영하면서 질투심을 제거하다
동영상 촬영 중에서의 수련 체험은 지난번 교류문장에서 일부 적었습니다. 그러나 매 수련 단계에서 중점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예를 들면 동영상을 클릭한 횟수를 표시하는 숫자는 마치 족집게와도 같아 저의 많은 마음을 끄집어냅니다. 특히 클릭 횟수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제가 촬영한 동영상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동영상이 클릭 횟수가 오히려 많으면 ‘이런 동영상을 이렇게 많이 클릭했다고?’라고 생각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어떻게 시골 아주머니가 이렇게 많은 조회 수를 얻을 수 있지? 인정하지 않는 마음, 질투심, 원망하는 마음, 조급한 마음 등 많은 사람의 마음이 나왔습니다. 특히 질투심이 나올 때는 속인이 촬영한 괜찮은 동영상을 보아도 평점에 ‘좋아요’를 클릭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이 더 잘될까 봐 질투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어느 날 문득 깨닫게 되었는데, 저는 남들에게 칭찬을 안 해주는데 어떻게 남의 칭찬을 바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말씀하신 질투심 아니겠습니까? “다른 사람이 만약 잘되면,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평형을 이루지 못한다.”[1]
자신의 심각한 집착심을 의식한 후 안으로 자세히 찾아봤습니다. 왜 다른 사람이 잘되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찾고 찾다가 질투심의 근원은 이기적인 욕심과 소유하려는 마음, 자신에 대한 집착이 너무 많았으며 자신을 실증하는 데 집착하고, 다른 사람의 좋은 점을 보고 감사하고 존경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과 비교하고, 심지어 그들을 능가하려 온갖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다른 사람들의 노력은 생각하지 않을까? 왜 다른 사람들의 장점을 보지 않을까? 왜 자신의 문제를 되새기지 않을까? 다른 사람들이 쉽게 성공했다 해도 그것은 그들의 운명입니다. 사존께서는 우리에게 일에 부딪히면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고 문제가 생기면 자신에게서 원인을 찾고 자신의 마음에서부터 잘하라고 하셨습니다. 사(私)를 위하는 생명의 본성을 바꿔서,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당신들이 앞으로 일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2]에 도달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안으로 더 깊이 찾아보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수련하는가? 부처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부처는 자신을 위해 사는 생명인가,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하는 생명인가? 부처는 대가를 논하지 않고 자비로 다른 사람들을 도우려 하지 않는가? 부처가 우주 중에 있는 다른 생명이 자신보다 나은지 두려워할까? 여기까지 깨달았을 때 정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자신만 생각하는 생명은 부처가 될 수 없고 제아무리 법을 많이 배우고 연공을 많이 한다고 해도 원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식을 제고한 후, 법으로 자신을 바로잡아야 했습니다. 저는 ‘전법륜-질투심’ 중의 한 단락을 외웠습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질투심 이 문제는 아주 엄중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직접 우리가 수련하여 원만할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문제에 연관되기 때문이다. 질투심을 버리지 못하면 사람이 수련한 모든 마음이 모두 아주 취약하게 변해 버린다. 여기에 한 가지 규정이 있다. ‘사람이 수련 중에서 질투심을 제거하지 못하면 정과(正果)를 얻지 못하는데, 절대로 정과를 얻지 못한다.’”[1]
현재 저는 좋은 영상을 보면 그 게시물 주인을 위해 기뻐합니다. 당연히 그를 위해 ‘좋아요’를 클릭합니다. 저는 질투심 이 문제에서 아직 완전히 내려놓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엄격하게 자신을 수련하기 시작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의지하는 마음을 제거하다
지금에 와서 작년에 촬영한 영상을 보니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때를 돌이켜보면 어투나 내용 등 여러 면에서 정말 개선해야 할 점이 많았습니다. 동시에 자아를 내려놓고 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을 배워 조금은 진보한 것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제고가 느리다고 조급해하는 마음이 늘 나옵니다. 이럴 때면 마음이 조급해져 원망하는 마음이 참지 못하고 나오곤 합니다.
올해 초에 로스앤젤레스의 한 팀과 함께 공부할 때 그들 팀의 5~6명이 한 해 동안 벌어들인 경제적 수익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들의 피나는 노력과 열심히 연구하는 정신도 보았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힘들었지만 성실하고 정성스러운 협력에 마침내 오늘의 결실이 있었습니다. 정말 저와 그들과의 격차를 보았습니다. 원망? 그것은 당연히 아무런 도움이 안 됩니다. 제가 속상해하던 어느 날, 한 수련생에게 제 심정을 털어놓았습니다. 수련생은 우리 집에 있는 화분을 가리켰습니다. 그 화분은 시들어 죽은 것 같았습니다. “여기에 화분 두 개가 있는데 당신은 꽃이 피어 있는 이 화분에는 매일 물을 주고 싶죠? 죽어간다고 생각하는 이 화분에는 물을 줄 생각이 있나요?”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화분은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니 그 존재를 무시했고 살든 죽든 그것은 그의 운명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제가 바로 그 화분이 아닌가요? 일도 마찬가지의 이치가 아닌가요? 스스로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어 주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모두가 금상첨화(錦上添花)를 원하고 그 꽃이 핀 화분에 도움을 주려고 하는데, 이것은 인지상정입니다. 이 점을 깨닫고 저는 더는 자신이 중시되지 않는다고 원망하지 않게 됐습니다.
기대만큼 많은 지지와 관심을 받지는 못했지만, 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백하고 하는 일마다 수련할 수 있으니 헛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현재는 인터넷에서 동영상 제작에 관한 정보를 찾아 공부하는 것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영상을 볼 때 좋다고 생각하면 바로 적고 좋은 문구를 보면 그대로 베끼면서 조금씩 모으고 있습니다. 그 과정 중에서 가장 힘들 때, 사부님께서 제 곁에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영상을 보게 되고, 제게 유리한 여건을 열어주시고, 제가 낙담할 때 다른 사람의 입으로 격려해주시고, 저를 점화시켜 주십니다.
사부님이 계시는데 제가 의지하고 원망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3.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수용하다
영상을 클릭하는 횟수를 높이려면 대부분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최근에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 방면에서 재차 일깨움과 점화를 받았습니다. 제 고모(수련생)도 너무 고상하여 보고 싶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비로소 사람과 사람의 차이가 정말 너무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됐습니다. 당신이 대중의 인정을 받으려면, 그들의 요구와 그들의 수용 범위를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역사 중 대 시인 백거이는 시 한 수를 쓸 때마다 노부인에게 읽어주고, 모르면 고치고, 그녀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힘썼다고 합니다. 어쨌든 그 시는 대중에게 보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 다른 사람의 영상에 대한 댓글을 보았는데 팬들과의 진정한 교감을 보았습니다. 저는 문득, 우리가 중생을 구하려면 먼저 상대방의 사랑과 믿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 과정 중에 자신의 마음을 열어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자신을 포장하고 보호하며 허울을 만들어 자신을 과시하는 이런 것은 소용없을 뿐만 아니라 사람을 구하려는 목적에 이를 수 없었습니다. 여기에는 ‘진(真)’을 수련하는 문제도 있고 자신의 도량을 넓히는 문제도 있으며, 중생에 대한 마음을 고취하는지에 대한 도전도 있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진정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만한 그런 자비와 웅대한 소원은 없다면 결국에는 역시 사(私)입니다. 애초에 자신이 생활영역의 영상을 만들 때 목적은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시사 영역을 다루는 수련생들을 보면 정정당당하게 진상을 알리는 것이 얼마나 후련한가요? 저는 이런 생활영역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면서 약간의 마음의 불균형과 노심초사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시사 영상은 그 영상을 보는 사람들을 구할 수 있지만, 시사를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제 생활영역의 영상이 보완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지금 매일 아침 하는 첫 번째 일은 시청자의 댓글을 보고 질문 하나하나에 답하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사소하고 시간이 걸리지만, 제 생각엔 다 착실하게 기초를 다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클릭 횟수와 경제적 수익은 목적이 아니고 다만 결과일 뿐입니다. 저의 초심은 현재 저의 프로그램이 완벽하지 않더라도, 제 영상이 정말로 시청자에게 도움이 되도록, 항상 배우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부님께서는 매 제자에게 제일 좋은 길을 배치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어느 날 집 앞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니 많은 나무가 보였습니다. 한 그루 한 그루가 저절로 위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이 삼림 속에서, 보는 사람도 없고, 칭찬하는 사람도 없는데 홀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는 자신의 성장에 책임을 다하고 비바람과 추위에 견뎌내고, 다른 나무와 비교하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스스로 잘하는 것이 일종의 생명의 원만(圓滿)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도 한 그루의 튼튼한 나무처럼 성장하기를 희망합니다.
이상은 최근 수련 중의 약간의 체험이니 부족한 점은 수련생들이 바로 잡아주시기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서: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서: ‘정진요지-불성무루’
(2020년 ‘희망의 소리’ 수련심득교류회 원고)
원문발표: 2020년 6월 1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18/40781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