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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 자오저우: 연설자는 난법이고, 참여하고 뒤따르는 자 역시 난법이다

글/ 산둥 자오저우 대법제자

[밍후이왕] “수련생들 속에서 전문적으로 연설하거나 순회 교류하는 것은 바로 난법이다.” 이는 2013년 5월 4일 밍후이왕에 발표한 편집부 문장 “연설 난법”에서 첫 시작의 첫 한마디이다. 아울러 문장의 마무리도 이 한마디를 다시 중복했다.

여러분들도 알겠지만 밍후이 편집부에서 발표한 문장은 일반적인 교류문장이 아니고 모두 사부님의 승인을 얻은 것이다. 경문 “2013년 대뉴욕지역법회 설법”에서 이런 한 단락이 있다.

“제자: 밍후이왕은 난법을 제지하는 문장을 연속 발표했지만, 어떤 대륙 수련생은 여전히 청성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부: 그렇다. 사악에 통제되어 밍후이왕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여러분은 내가 왜 밍후이왕에 소식을 발표하는지 아는가? 바로 여러분에게 그것이 믿을만하다고 알려주는 것이며, 대법제자가 교류하는 플랫폼이다. 각도를 바꿔 말하면, 사부도 보고 있기에, 너무 큰 문제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부: 밍후이왕이 진상을 밝히는 중에서의 작용은 대신할 수 없으며, 그곳은 우리가 박해 진상과 대법, 대법제자가 법을 실증하는 형세를 내보내는 가장 중요한 창구이다. 대법제자의 일이라, 여러분은 모두 잘 협력해야 한다.”[2]

사부님께서 밍후이왕을 긍정하셨다면 그럼 대법제자는 밍후이왕을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밍후이왕에 협조하고 잘 수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필자는 감히 누구누구에게 무슨 정의를 내리지 못하니 자신이 대법에 대조하여 가늠해야 한다. 지금 단지 자오저우(胶州) 지역에서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연설 난법 이런 현상에 대해 선의적으로 일깨워주고 싶다. 필자 개인의 관찰과 수련생들과 끊임없는 교류에서 연설 난법의 현상은 자오저우 지역에서 오랫동안 존재했었고 범위가 넓다고 생각한다. 아래에 몇 가지 방면의 원인을 써내어 수련생들을 일깨워주고자 하며 이를 경계로 삼기 바란다.

한 방면에서, 자오저우에서 많은 수련생이 장기간 사부님의 각 지역 설법을 배우지 않고 일부는 몇 년 동안 각 지역 설법을 한 번도 채 보지 못했고 밍후이왕의 교류문장도 매우 적게 본다. 이는 현지에 보편적으로 있는 문제이다. 난법자의 법에 입각하지 않은 말과 소행에 대해 미혹되어 똑똑하지 못하다. 모두 내부 수련생 교류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라고 생각한다. 참여자 중 일부는 연설을 듣고 책을 십 년 배운 것보다 더 낫다고 여기면서 이후부터 이 사람에 대해 수호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데 사부님께서는 “정진요지” 속의 여러 편의 경문으로 제자에게 경고하셨다. “난법(亂法)에는 여러 형식이 있다. 그중 내부 제자의 무의식적인 파괴가 가장 알아차리기 어렵다. 석가모니교의 말법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 것이며 교훈은 엄중하다.”[3]

사부님께서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다시 여러분들에게 알려주겠다. 외부인은 영원히 모두 법을 파괴할 수 없으며 법을 파괴하는 것은 다만 내부 수련생일 뿐이다. 기억하라!”[4]

그 때문에 우리는 진지하고 엄숙하며 청성하게 알아야 한다. 우리의 수련을 지도하는 것은 영원히 사부님께서 밍후이왕에 공개적으로 발표하신 모든 저작이고 우리가 영원히 수호해야 하는 것 역시 대법이지 사람이 아니다!

약 몇 년간 우리 자오저우 지역에서는 줄곧 일부 수련생과 개별적인 협조인들이 새로운 것을 내세우기를 좋아하고 자신을 착실하고 착실하게 수련하는 것이 아니었다. 개인수련에서 어떻게 안을 향해 찾아 심성을 제고하는 것이 아니고, 사부님의 정법요구를 에워싸고 사부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원용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니라 원 구안현(冠县) 수련생 리모(李某)를 요청하는데 열중했다. 자오저우 지역에서 작은 범위의 교류에서 대면적인 전문 연설을 했으나 이름 좋게 ‘교류’라고 했다.

리모는 지금 자오저우에 거주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자오저우 지역에서 이미 몇 년간 지속되고 있다. 자오저우 현지 수련생 중에서 가끔 파동을 일으키고 논쟁과 간격을 일으켰다. 동시에 현지 수련생들의 개인수련과 정체 협조, 정체 제고에 불량한 영향을 끼쳤다. 특히 사람을 구하는 환경에 부면적인 영향을 조성했다.

아울러 올해부터 시작하여 이런 순회 연설 난법의 형식은 자오저우 지역에서 갈수록 더 심해졌다. 십여 차례 리모의 연설 교류를 들은 노수련생과 협조인들은 수련생들을 만나면 끌어들였고 리모의 연설을 듣지 못한 수련생은 가서 들어야 한다고 곳곳에 가서 말했다. 이런 한 무리 사람들이 우상을 바라보듯 리모를 대하고, 십여 명 노수련생의 맹목적인 숭배와 이지적이지 못한 찬양 속에서 리모는 갈수록 자아를 팽창했고 난법을 그치지 않았다. 동시에 몇몇 노수련생과 협조인은 리모를 뒤따르면서 성과 마을 내외에서 오늘 한 무리 내일 한 무리 보기에는 법공부하고 ‘교류’하는 것 같지만 사실상 모두 자신을 선전하고 치켜세우는 것이었다.

연설을 들은 이들 중 적지 않은 수련생들은 리모가 “진짜 높게 깨달았다” “진짜 수련을 잘했다” “말이 진짜 맞다” “이렇게 오랫동안 법을 배워도 그의 몇 마디를 듣고 제고한 것이 더 빠르다” “20여 년 동안 헛되이 수련했다” “잘 모르는 것을 당신이 이렇게 말하자 모두 알게 되었고 진짜 높고 너무나 잘 말했다” 등등으로 여겼다. 또 일부 수련생들은 리모가 스스로 만든 발정념 요령으로 발정념했고 또 “자신은 공이 쑥쑥 위로 자라는 것을 즉시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더욱이 그 협조인은, 여러 명의 수련생이 그녀에게 교류하여 리모가 이렇게 오늘 한 무리 내일 한 무리 순회 교류하는 것이 선명한 난법 행위라고 지적했을 때 그 협조인은 전혀 듣지 않았다. 계속 도시 마을 내외에서 반복적으로 수련생을 끌어들여 리모의 난법 활동에 참여하게 했다. 더욱 심한 자는 리모가 말한 것은 법 위에 있다고 여겼고, 리모가 말한 것을 모두 고층의 법리로 여겼으며, 난법에 참여하지 말라고 와서 설득하는 수련생들을 극도로 배척했다. 무슨 당신이 “말이 입에서 나오기만 하면 죄업이 곧 형성된다”라고 말했다.

난법에 참여하고 뒤따르는 자들은 법에 대한 단호함과 정념을 수립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숭배가 일어나 제고하는 지름길을 찾았다고 여겼다. 사람마음으로 원만과 고층차를 망상하고 실질 수련으로 심성을 제고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끌린 수련생 중에 상당한 일부분은 몇 년 전에 구세력과의 서약을 없애는데 열중했었고 일부는 여러 해 동안 가정관을 돌파하지 못한 노수련생이고 또 장기간 대법에서 이탈하여 법 공부가 깊지 못한 노 수련생들이었다. 자오저우 지역에서 수련생들은 왜 장기간 그에게 시장을 주었는가? 이는 우리에게 보편적으로 이 방면 문제가 있어서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닌가?

다른 한 방면에서 연설가 리모와 협조인, 연설에 참여하고 뒤따르던 수련생들은 모두 자신과 법의 관계를 바로잡지 못했고 자신과 사부님의 관계를 바로잡지 못했으며 사람을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아 비로소 감히 가서 난법한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왜 생각해 보지 않는가. 특히 안내와 요청을 책임지고 이런 일을 한 책임자들, 당신들은 아마 대법제자에게 일정한 무형적인 해를 조성했을 것인즉, 더는 대법제자의 책임자가 될 자격이 없다. 나의 말을 듣지 않고 대법(大法)의 요구대로 하지 않는 사람이 나의 제자일 수 있는가? 이것은 대법(大法)과 맞서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파괴가 아니고 무엇인가?”[5]

사부님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법 공부가 깊지 못한 일부 사람과 신 수련생으로 하여금 기로에 빠져들게 한다. 이런 사람들이 이 때문에 기로에 빠져 구도될 기연(機緣)을 잃고 장래 도태에 직면하게라도 된다면, 그럼 당신은 어떻게 갚으려는가? 단지 이러한 것만이 아니라, 난법이라는 이 책임만 하더라도 거대하기가 하늘과도 같다. 사부가 사람을 겁주려는 것이 아니라, 잘하지 못하는 이런 수련생들에게 한 마디 방할(棒喝)하는 것이다. 수련이란 곧 사람 마음을 제거하는 것인데, 어찌 또 사람마음을 위해 시장을 찾을 수 있겠는가? 어찌 수련 중에서 아직도 그처럼 집착할 수 있단 말인가?”[6]

물론 우리 모두 수련 중의 사람들이고 여전히 사람 마음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마음으로 리모를 대하면 오랜 시간이 흘러 천천히 그로 하여금 집착심이 생기게 하기 쉽고 자아를 확대하여 자아에 더욱 집착하게 한다. 하여 아주 가능하게 환희심, 과시심 등등이 생겨날 수 있다. 천천히 ‘교류’는 그의 경력이 되고 ‘수련생을 도와 제고한다.’가 마치 자신의 사명이 된 듯하다. 심지어 사부님의 법을 자신의 말로 여겨 말하고 가끔은 또 법과 자신의 말을 한데 섞어서 말하게 된다. 수련생들도 듣고 알아채지 못하고 늘 자문자답의 방식으로 수련생들에게 일부 자신의 것을 주입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원만했다면 바로 휘황하기 그지없는 신(神)·불(佛)·도(道)이며, 일체 불법신통을 완비한 신(神)의 위대한 형상이라 사람의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7] 신이라고 자칭하는 리모한테 묻겠다. 당신이 무슨 신인가? 리모의 미혹을 당한 수련생 중에 자신이 신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신은 사람마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고 신의 위대한 형상이 있는 것인데 당신은 수련생들 앞에서 히스테릭하게 리모를 위해 변호하고 있는데 그것이 신의 사상과 행위인가? 사실 한 발은 이미 자심생마의 길을 밟고 있다.

리모는 또 수련생 중에서 횡설수설 강조하기를, 구도중생은 밖의 중생뿐만 아니라 집의 그러한 탁자 의자, 밥그릇, 대야, 의식주행에 접촉되는 물품 등등도 더욱 구도해야 한다고 했다. 당신은 밖에서 매일 진상을 알려서 몇몇의 중생을 구할 수 있고 당신이 주변 현과 시의 사람들을 모두 구해도 겨우 몇 사람을 구하는가? 당신 집의 의식주행에서 매일 보고 만지는 것들은 그 안에 분자, 원자, 전자, 쿼크, 중성미자…… 한 층 한 층 입자이고 매 한 층 입자 속에 매 한 개 입자 속에는 모두 무수한 중생이다. 당신이 먹고 마시고 그것들을 사용할 때 마땅히 의념으로 그들 배후의 좋지 않은 것을 제거하고 좋은 것을 남겨야 한다 등등 등등. 이는 사오가 아니고 또 무엇인가? 리모가 말한 중생 동화는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구도 중생 내포와 반대로 나아가고 있다. 무슨 마음에 의해 촉성된 그런 사람들은 사오자의 허튼 소리를 따라가게 했는가?

사부님께서는 ‘7.20’이후 “북미순회설법”에서 대법제자는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한다고 요구하셨고 사부님께서는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고 지금 세상의 사람을 구하라고 똑똑히 말씀하셨다. 특히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부터 시작하여, 특히 중국대륙의 대법제자, 신노(新老) 수련생들은 장기간 집착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내려놓고 전면적으로 세인을 구도함을 다그쳐야 한다.”[8] “특히 중국대륙의 대법제자들은 사람마다 모두 나와서 말해야 하며, 곳곳마다, 사람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고 할 것 없이 모두 닿도록 해야 한다.”[8]

그럼 큰 것을 향해 말하면, 리모가 수련생들 속에서 한 말, 한 행동은 사부님께서 매 수련생들에게 배치해주신 수련하여 되돌아가는 길을 파괴한 것이다. 당신이 사부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당신이 리모의 난법하는 말을 듣고 난법하는 행동을 따르는데 당신도 난법하는 것이다. 작은 것을 향해 말하면 당신은 난법에 참여했고 자신이 조사정법하고 중생을 구도하겠다고 한 자신의 사전 서약을 교란하고 이탈한 것이다. 당신이 생각해 볼 때 이 문제는 그래도 작은 문제인가?

우리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들은 만약 사부님 법신의 보호가 없다면, 자비하고 위대하신 사존의 가지 보호가 없다면 생명마저 보장을 못 받고 스스로 제도받는 것 마저 문제가 되는데 또 어찌 당신 집의 일체 물질을 동화시켜야 한다는 망언을 할 수 있는가? 특히 일부분 수련생들은 리모의 여러 차례 연설을 들은 후 갑자기 가족이 자신의 세 가지 일을 하는 태도에 대해 아주 큰 변화가 생겼고 가정환경도 화목해졌으며 친구들과의 관계도 친밀해졌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생각을 했다. 즉 당신이 보라, 내가 리모의 교류를 들은 후 높게 깨닫고 공도 자랐으며 원래 화목하지 못했던 가정환경도 좋게 원용했다 라고 한다.

그것은 무슨 원인인가? 한 방면으로 수련은 무척 엄숙하고 누락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친구, 가정환경 그런 일에서 장기간 잘 수련하지 못했고 자신은 장기간 중시하지 못했는데 그것이 바로 문제가 아닌가. 다른 한 방면으로는 자신의 법리가 똑똑하지 않아 리모를 맹목적으로 숭배하고 이지적이지 못하게 리모를 찬양하고 사람을 배우고 법을 배우지 못했다. 하여 리모를 따라 난법하고 법의 길에서 갈수록 더욱 멀어졌다. 그렇다면 리모는 진짜로 그렇게 큰 재간이 있는가?

법공부를 통해 모두 알게 되었는데 당신 주변 사람의 변화와 가정환경의 화목함은 사부님 정법 형세가 앞으로 추진되면서 우주 중 좋지 못한 것들이 대량으로 소멸되고 소멸된 것이 갈수록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사상을 통제하는 사악한 요소가 갈수록 적어져서 지금 사람들은 모두 청성해질 수 있었다.

수련생들이여, 우리 마음을 조용히 하고 생각해 보자, 당신은 리모가 말한 것이 자신의 수련하지 못한 두려운 마음, 안일함을 구하는 마음, 자신의 각종 소원에 부합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대법제자의 수련의 길인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사실 사람을 제도하는 것은 법이며, 이 일을 하는 것은 오로지 사부뿐이다.”[9] 이 일체의 일체는 모두 사존께서 고심하게 배치하신 것이다. 만약 사람이 하늘의 공적을 훔쳐서 자신의 공적으로 한다면 그의 결말은 어떠한가?

리모의 언어 표현능력이 강하지만 그것은 심성의 높낮이를 대표할 수 없다. 이 문제를 사고하는 수련생은 아주 적을 텐데 항상 사람의 정에 의해 가려졌다. 리모가 망언하기를, 당신이 무엇을 먹으면 무엇을 지니는데 그렇지 않으면 당신 장래의 세계에는 그 종류가 없다 등등을 말하며 탐욕심이 모자란다고 하는데 일부 사람들은 이 말을 보배로 여겨 듣는다.

필자는 정상적인 교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상적인 교류방식은 모두 같이 앉아서 평상적인 발언을 하고 당신이 말하고 그도 말하는 것이다. 어떻게 세 가지 일을 잘하는가를 에워싸고 자신의 수련 체험을 이야기하고 구도중생의 과정에서 곤란, 모순, 장애에 부딪혔을 때 어떻게 대법에 따라 안을 향해 자신을 찾고 심성을 제고하고 자신의 일언일행, 일사일념을 바로잡았는가의 체험을 여러 사람과 교류하는 것이다. 혼자서 주로 말하고 자신의 이해와 인식을 크게 말하거나 혹은 자신이 어떠어떠하다고 선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오저우 지역에서 하루빨리 이런 난법행위를 단절하기 위해서, 그런 연설자와 연설 난법에 참여하고 뒤따르는 이들은 벼랑 끝에서 멈춰야 할 뿐만 아니라 보고 들은 대법제자들도 마땅히 안을 향해 자신을 찾아야 한다. 이후부터 법을 스승으로 모시고 수련생을 도와 법에서 제고하고 정진해야 한다.

이상은 자신의 현재 층차의 한 점 인식이고 여러분들이 공동으로 교류하고 부족한 부분은 수련생들이 지적해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경문: ‘2013년 대뉴욕지역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2004년 미국서부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급히 깨어나라’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법정’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맹격일장’
[6] 리훙쯔 사부님 경문: ‘각성하라’
[7]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마지막 집착을 제거하자’
[8]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3-사람 마음을 내려놓고 세인을 구도하자’
[9]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광언을 하지 말라’

 

원문발표: 2020년 6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6/24/4081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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