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지린 대법제자
[밍후이왕] 각 지역에 모두 이런 현상이 있다. 한 지역의 대다수 수련생은 어느 사람을 숭배하는 마음과 행위가 있는데 가볍거나 혹은 중하다. 관찰과 분석을 통해 내가 보고 깨달은 것을 개괄하겠다. 일부 수련생, 숭배받는 수련생, 또는 숭배받는 협조인을 일깨워 주기를 희망한다
숭배받는 수련생은 흔히 어느 방면에서 비교적 뛰어난 표현이 있고 아울러 일정한 문화적 소양이 있다. 언어 구사 능력이 뛰어나고 말솜씨가 좋아 조리 있게 말하고 일사천리로 말하며, 생동감 있고 재미있으며, 유머가 있어 사람을 매료시킨다. 그러므로 모두 그의 말을 듣기 좋아한다. 아울러 그는 또 사부님의 일부 법을 외울 수 있다. 듣는 수련생은 말한다. “그가 말하는 것은 모두 법에 있고 법도 잘 배웠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제고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앞에서 칭찬한다. “당신은 말을 잘합니다. 제 문제도 해결해 주셨습니다.” 숭배심을 말로 표현한 것이다. 어떤 사람의 숭배 대상은 협조인이다. 협조인은 이전에 수련생을 데리고 법을 실증하는 많은 일을 했기에 숭배를 받는다. 혹은 일부 시련을 경험했거나 박해를 부정해 사부님의 보호 아래 정념으로 소굴에서 뛰쳐나온 협조인을 일부 수련생은 숭배하고 흠모하며 그 사람이 정념이 강하다고 부러워한다.
우리는 수련 중의 사람이고 모두 사람의 마음이 있다. 당신이 특별한 마음으로 그(그녀)를 대하고 오래되면 서서히 상대방은 집착심이 생기고 자아를 크게 보며 자아에 대한 집착심은 더 깊어지고 득의양양해 한다. “봐요. 다른 수련생들이 저를 잘 대해 주고 절 인정해 줍니다. 저와의 교류는 수련생의 제고에 도움이 됩니다.” 서서히 ‘교류’가 주업이 되고 ‘수련생을 도와 제고시킨다.’가 자신의 사명이 된다. 그는 각지에 가서 순회 교류하지만 어디까지나 자신 혼자만의 이야기이며, 수련생 누구도 자신보다 잘 수련한 사람이 없고 법에 대한 깨달음이 자기보다 높은 사람이 없으며 무슨 ‘큰 입자’이니 ‘작은 입자’라고 말한다. 몇 시간 동안 혼자 말하다가 심지어 스승의 법을 자신의 말처럼 말하고, 때로는 법과 자신의 말을 섞어 말하기도 하며, 수련생들은 알아듣지 못하는데 자문자답 형식으로 수련생에게 일부 자신의 것을 주입시킨다. 알아듣지 못하는 수련생은 그가 높게 수련했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이 거기까지 수련하지 못해 알아듣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마음을 조용히 하고 생각해 봐야 한다. 언어 구사력이 뛰어나다고 해서 심성의 높고 낮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가 아무리 맞게 말해도 당신은 그를 숭배하면 안 된다. 이런 교류 방식이 법에 부합되는가? 이런 문제를 생각하는 사람이 적고 흔히 사람의 정에 가로막힌다. 수련은 엄숙한 것이다. 좋고 나쁨을 가늠하는 것은 대법이고 개인의 취향이 아니다. 수련생마다 모두 사부님의 법신이 체계적으로 배치했다. 수련생마다 모두 자신이 걸어야 할 길이 있고 자신의 것을 깨달아야 하며 최후에 사부님께서 총결해 주신다. 당신이 많이 말하면 교란 작용을 일으킨다. 개인 수련의 좋고 나쁨은 개인의 문제이며 남의 수련을 교란하지 말기를 바란다.
수련생과 교류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교류는 필요하다. 정상적인 교류 방식은 모두 한자리에 앉아 평등하게 발언해야 한다. 협조인은 겸손해야 하고 자신을 수련생 중에 놓거나 혹은 자신을 낮춰야 한다. 그도 어떻게 세 가지 일을 잘해야 하는지를 놓고 말해야 하고 자신의 수련 체험을 말해야 한다. 중생 구도 과정에서 어려움, 모순, 장애에 부딪히면 어떻게 대법에 따라 안으로 자신을 찾고 심성을 제고하며 자신의 일언일행(一言一行), 일사일념(一思一念)을 바로잡는 체득을 수련생과 교류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주관하는 것이 아니고 추상적으로 자신이 법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이야기하고 혹은 자신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2013년 5월 4일 밍후이왕 편집부 문장에 ‘연설하는 것은 난법이다.’라는 문장을 발표했다. ‘수련생 속에서 특별연설을 하거나 혹은 순회 교류를 하는 것은 바로 난법(亂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문장의 첫마디인데 마지막에 또 이 말을 되풀이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밍후이 편집부에서 발표한 문장은 일반 문장이 아니고 모두 사부님께서 인정하신 것이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정의를 감히 내리지 못하고 내가 가늠하지 못한다. 나는 단지 이런 현상을 보고 선의로 일깨워 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하는데 우리가 영원히 지켜야 하는 것은 대법이지 사람이 아니다.
일을 잘하는 협조인 수련생은 다른 수련생에게 숭배받고 심지어 ‘존경’을 받으며, 숭배받은 수련생은 사람 마음이 끊임없이 팽창해 자신의 자아에 대해 훌륭하다고 느낀다. ‘나는 정념이 족하고 내가 가장 많이 하며 나만 잘하고 있다.’ 말할 때 태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이 높은 곳에 있다. 환희심, 과시심, 자아에 대한 집착이 끊임없이 확대된다. 입으로는 말한다. “모든 것은 사부님께서 하신다.” 그러나 이 말은 이미 팽창된 사람 마음을 덮어 감출 수 없다. 자아를 실증하는 마음은 갈수록 강하고 일하는 것은 갈수록 많아지고 순조로울수록 사람 마음이 올라오고 두려움과 이기심이 심한 수련생을 얕본다. 최근 수련생 교류에서 말한 것처럼 ‘오만하고 방자한’ 것을 정념이 강하다고 생각하며, 곤두박질쳐야 정신을 차리고 착실한 수련의 중요성을 알게 된다. 사부님께서 명시하셨다. “사실 우리는 누가 어떠하든 법은 오로지 하나이며, 오로지 이 대법(大法)에 따라 하는 것만이 비로소 진정한 표준이다.”[1]
오랫동안 교류한 수련생은 숭배받은 후 박해당해 감옥에 간 사례가 여러 건 있다. 어떤 사람은 감옥에서 사오(邪悟)하게 되고 나온 후 계속 사오한 이론으로 수련생을 아래로 끌어내린다. 최근 어떤 지역은 오랫동안 교류한 수련생은 납치당해 중형을 선고받았다. 곳곳에서 오랫동안 그를 숭배해 그의 교류를 들은 수련생은 책임이 있지 않은가? 여러분이 숭배하고 의지해 그 사람을 해친 것이 아닌가?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특히 중국 대륙의 대법제자는, 마난의 박해 중에서 일사일념(一思一念)이 모두 아주 관건적이다. 당신이 잘하고 못하고, 당신이 박해를 받고 안 받고, 당신이 바르게 하고 못하고, 박해가 어느 정도인지는 모두 당신 자신이 걷는 길, 당신의 사상이 생각하는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2]
법에서 우리는 수련은 지극히 엄숙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의 길은 좁고 조금 빗나가도 안 된다. 수련생 중에서 맹목적으로 남을 숭배하고, 숭배받은 수련생은 사악에 납치돼 형을 선고받거나 사악에 생명을 빼앗겼다. 몇 년간 수련생들에게 이런 교훈이 너무 많다. 그러면 주변 수련생은 모두 책임이 없단 말인가? 수련생이 오랫동안 법에 있지 않은 결과가 아닌가? 수련생이 법에서 똑똑히 일찍 인식하고 칭찬하지 않으며 수련생을 숭배하지 않으면 일부 박해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고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다.
몇 년간 사부님께서도 번거로움을 귀찮아하지 않고 이 방면의 법을 말씀하셨다. 단지 우리는 중시하지 않고 착실히 수련하지 않았다. 우리 함께 다시 사부님의 관련 설법을 배워보자.
“남의 공능이라든가 신통이라든가를 보지 말아야 하는데, 일부 것을 보면, 당신은 곧 그를 따라갈 것이고, 곧 이렇게 받아들일 것이다. 당신은 그를 해칠 수도 있는데, 그는 환희심이 생겨날 수 있어 최후에는 자신의 어떤 것도 다 잃어버리고 닫혀버려, 결국 떨어져 내려가게 된다. 개공해도 떨어져 내려갈 것이며, 파악하지 못하면 개오해도 떨어져 내려갈 것이다. 그 부처도 잘 파악하지 못하면 역시 아래로 떨어지는데, 하물며 당신은 속인 중에서 수련하는 사람임에랴!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공능, 얼마나 큰 공능이 나왔든지, 신통이 얼마나 크게 나타났든지, 당신은 반드시 파악해야 한다.”[1]
“심지어 우리 어떤 수련생에게 집착이 있든 없든 상관없이, 그것은 한 사람을 고르는데, 이 지역의 사람들에게 고험이 되고 다른 사람의 심성제고와 신념에 고험이 된다고 여기면 그것은 이 수련인을 죽게 할 것인데, 이 대법제자를 먼저 가게 하여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킨다.”[3]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면 자기도 어떻게 하길 좋아하는데, 그것은 자기가 수련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따라가는 것이다. 그러나 수련인은 자신을 원만에 이르게 하는 길을 걸어가야 한다. 구세력은 당신에게 교훈을 주고 당신을 반성하게 하려고 심지어 당신이 따라 배우는 본보기에게 번거로움을 조성해 주고, 심지어 그를 일찍 가게 한다.”[4]
“나는 수련인에게는 본보기가 없으며, 누굴 본보기로 삼고 자신이 법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문제를 촉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구세력은 당신이 그를 보고 수련하는 것이지, 자신이 법을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고 여길 것이고 그럼 아마 그로 하여금 세상을 떠나게 할 수도 있다.”[5]
우리 수련생들이 법을 사부로 모시기를 바라고 일찍 성숙하기를 바란다. 법에서 법을 인식하고 이성적으로 자신 주변에 발생한 모든 것을 대하며 시시각각 법으로 부딪히는 모든 일을 가늠하고 수시로 자신의 일사일념을 바로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좋고 나쁨, 선과 악을 가늠하는 표준은 우주 특성이기 때문이다.”[1]
나는 이 문장을 쓸 때 부담이 있었다. 수련생들이 심적으로 충격을 받거나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가볍게 써서 실질적인 문제를 지나치면 나도 책임지지 않는 것과 같다. 매번 박해가 발생하면 모두 마음이 아프다. 중생을 구하는 데 손해를 본 것이다. 생각해보고 자아를 내려놓고 정체의 수련환경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인식을 표현해야 한다. ‘무골호인’은 대법 수련에 부합되지 않는다.
이상은 개인의 약간 인식이고 교류를 위한 것이고 부족한 점은 수련생이 지적해주시기를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서: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서: ‘각 지역 설법 11-무엇이 대법제자인가’
[3]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15년 미국서부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세계 法輪大法의 날 설법’
[5]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13년 대뉴욕지역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10월 12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0/12/394485.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