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밍후이왕] 나는 2011년에 법을 얻은 청년 대법제자이고 2015년에 해외로 나왔다. 진학 문제로 원래 다니던 대학이 있던 미국의 소도시에서 호주의 대도시로 왔다. 수련환경이 변하고 수련생들과 어울리는 등 각종 문제로 나는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수련환경에 적응하며, 수련생과의 관계를 파악하다
대도시에는 수련생이 많고 항목이 많아 수련환경이 복잡하다. 일부 항목은 수련생 사이에 각종 모순이 있어, 서로 마음에 들지 않아 하고 이해하지 못한다. 소도시에서는 수련생이 적었지만, 대도시에는 수련생이 많아 관계가 더 긴밀하고 소속감이 있어 주변 수련생을 더 많이 아낀다. 방금 왔을 때는 적응하지 못해 사부님 말씀이 생각났다. “그러나 생명체가 많이 생겨나자 일종의 군체(群體)적 사회관계가 발생했다. 그중에 일부 사람들은 아마 사심(私心)이 증가됨으로써 그들의 층차가 서서히 낮아져 이 한 층차 중에 있을 수 없게 됐으며, 그들은 곧 아래로 떨어져야만 했다.”[1] 사람이 많은 환경은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 때문에 원래 있던 도시의 수련생들이 여기 수련생보다 낫다는 말은 하기 힘들었다.
안으로 찾아 많은 원인과 집착심을 찾아냈다. 대학에 다닐 때 현지 수련생들은 아직 학생인 우리 젊은 수련생을 많이 배려해 주었다. 관심 가져주고, 격려해주며, 우리를 인정해 주는 것이 많았다. 강제로 요구하지 않고 어린 나이에 수련을 견지하는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했다. 각 항목에 도우러 가면 모두 감사하다는 말과 칭찬하는 말이 많았다. 나는 항목을 위해 의무적으로 일을 했다고 여기며, 각 항목이 나에게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하며, 자신의 서약을 실현하는 기회를 주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그곳에서도 수련생 사이에 가끔 모순이 있었으나, 수련에서 모두 이해할 수 있었다. 모순이 없고 모두 평화로워 사람 마음을 제거하고, 제고하는 기회가 없어 수련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모순이 자신에게 오지 않으니, 늘 단체 환경이 평화롭다고 느껴졌었다. 지금 새로운 환경에 와서 수련생에게서 ‘온기’를 느끼지 못하고,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며, 졸업 후 사회에 들어가 적응해야 하는 문제에도 직면해 있다. 마치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생활 중의 고생을 자신에 대한 불공평으로 여겨”[1] 수련에서 정념으로 대하지 못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정진하는 동년배 수련생들은 전직으로 매체나 기타 항목에서 바쁘게 일하고 있어, 평소 항목 일 외에는 나와 교류하는 시간이 아주 적었다. 대학 다닐 때 학우 수련생들처럼 아침저녁으로 붙어서 친하게 지내지도 않는다. 나도 전직으로 매체에 들어가 일할 것인지, 진학해 연구생 공부를 할 것인지 갈등했다. 한동안 현지 동년배 수련생들을 보며 압력이 크게 느껴졌고, 어떻게 그들과 지내야 할지 몰라 피하고 싶었다. 중간에 평형을 이루지 못하는 질투심이 있다. ‘왜 주변 젊은 수련생은 다 매체로 갔는데 나는 가지 못했는가? 왜 내 수련길은 매체가 아닌가?’ 잠재의식에서 다른 수련생과 높낮이를 겨루어 보고 싶었고, 진상 알리고 중생을 구하는 신성한 일을 속인의 비교로 여겼다. 또 심한 우정과 수련생 정이 있으며, 젊은 수련생들은 가깝게 지내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다. 상대방이 장시간 대답이 없거나 태도가 약간 차가우면 ‘항목 일이 바빠서 그러니 지지하며 도와야지 번거롭게 해서는 안 된다. 내가 정이 많은 것이고 수련생은 나를 도와 고독과 적막을 닦아주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았지만, 뼛속 깊은 곳의 구(舊)우주 위사위아(爲私爲我)의 속성은 그렇게 쉽게 제거되는 것이 아니어서, 실천 중에서 한번 또 한 번 갈고 닦아야 했다.
나중에 깨달았다. 다른 수련생을 만나고 싶어 하고 만나기 싫어하는 것 모두 옳지 않았다. 수련생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은 적막함을 두려워하고, 따뜻함을 추구하는 의지심이다. 우정과 수련생 정을 이용해 괴로운 심정을 완화하려는 밖으로 구하는 마음이다. 수련생을 만나기 싫어하는 것은 더욱 옳지 않다. 질투, 원한, 모순을 회피하려는 마음, 자신과 같지 않은 생명을 포용할 수 없는 마음이다. 장기간 이렇게 하면 구세력에게 틈을 타기 쉽고, 수련생 사이에 간격을 조성해, 서로 협조하고 진상을 알리고 중생을 구하는데 손실을 줄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모두 동수인데, 당신들은 적인가? 당신들은 하나의 공동 목표를 위해 세상에서 사람을 구하고 있으니, 당신들은 응당 가장 친밀해야 하며, 서로 도와야 하는데, 당신은 누구를 보고 눈에 거슬려 하는가? 그의 표면 형상과 행위는 다만 사람 이곳의 것인데, 그러나 당신들은 모두 신(神)이 온 것이 아닌가? 신의 그 면이 이럴 수 있겠는가? 수련 상에서 보아야 한다.”[2] 사부님의 법에 대조하니 부끄럽다.
사실 환경의 변화 역시 마찬가지로 내 수련에 대한 배치다. 수련인은 하나의 층차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사부님은 모든 제자가 한층 더 올라가기를 바라신다. 복잡한 환경은 사람의 심성, 견고한 의지, 시시각각 타인을 위해 고려하는 자비를 더욱 시험한다. 사부님께서 명확히 말씀하셨다. “대법제자 외부에서 오는 압력은 고험이자 정진의 기회이며, 대법제자 내부에서 오는 모순과 압력도 마찬가지로 고험이자 정진의 기회이다.”[3]
자신을 잘 수련해야 환경을 이끌 수 있다
호주에 온 후, 나는 다른 어린 수련생의 건의하에 현지 청년 수련생 단체 법공부를 조직하는 일을 맡았다. 협조 일을 하며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니, 협조 수련생이 고생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예전에는 큰 팀, 작은 팀 법공부, 혹은 단체 활동이 있을 때 책임자와 협조인 수련생이 얼마나 큰 공을 들였는지 생각해보지 못했다. 간단한 것 같은 한 차례 인터넷 법공부도, 기술 설비에서 발언을 조직하는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나는 기타 수련생이 단체 법공부와 진상 항목을 위해 치른 대가를 더욱 소중히 여기게 됐다.
미국에서 호주로 와서 항목과 일부 책임자를 접촉할 때 잠재의식에서 늘 양자를 비교하곤 했다. 특히 올해 호주에서는 처음으로 션윈 매표에 참여하면서 원래 있던 도시와는 매표 방식이나 협조 방식에서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1년간 많은 호주 수련생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호주 수련생은 북미 수련생보다 정진하지 않는다”, “법 실증 항목에서 느슨하다” 등이다.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 비디오는 사부님께서 남긴 유일한 동영상 설법이다. 호주 수련생이 당시에 잘하지 못해, 사부님은 설법 중에서 말투가 비교적 엄하셨고, 많은 수련생도 이것은 체면이 깎인 일이라 여겼다.
처음에는 이런 말들이 자신 마음속의 일부 불평에 부합해, 정념으로 대하지 못하고 오히려 이런 말에 이치가 있다고 여겼다. 일부 새로 만들거나 비교적 ‘흥미 있는’ 진상 항목은 거의 북미에 있어, 미국에서 호주로 온 것이 ‘좌천’된 느낌이었다.
나중에 법리에서 자세히 생각해봤다. 북미 수련생은 정체(整體)로서 확실히 일부 일에서 앞서가고 있어 따라 배울 가치가 있다. 하지만 하늘 아래의 수련생은 모두 사부님의 제자고, 같은 법에서 수련하고 있으며, 모두 세 가지 일을 하는데, 단지 정진 정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정체 상태가 부족하다고 해도 개인으로서 자신을 잘 수련해 환경을 이끌어야지, 어떻게 주관적으로 환경을 고를 수 있는가? 호주는 필경 서방 민주국가다. 비록 많은 공산사령(共產邪靈)이 침투하는 현상이 있고, 우리가 진일보 주류사회에 가서 진상을 알려야 하지만, 매년 션윈 공연을 할 수 있고, 야외에서 단체 연공, 퍼레이드를 할 수 있으며, 전국 법회 등 대형 활동을 할 수 있다. 환경은 많은 노수련생이 여러 해 노력해 만들어낸 것이고, 조심하며 신중하게 지금까지 수호해왔다. 그렇다면 대법제자가 몇 명만 되는 나라의 수련생은 어떠한가? 러시아, 베트남 등 독재 국가의 수련생은 어떠한가? 동남아, 유럽 등 일부 중공이 심각하게 침투한 국가의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수련생들은 어떠한가? 중국 수련생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피와 불의 시험에서 정념으로 돌파해왔는데 벌써 20년이 지났다. 자신의 수련환경이 너무 나쁘다고 그들이 불평한 적이 있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니 부끄러워서 견딜 수 없었다. 사부님께서는 각지 설법 중에서 여러 차례 밍후이왕 수련생, 장기간 중국영사관 앞에서 묵묵히 하는 수련생들을 인정하셨다. 되돌아 자신을 보니 능동적으로 정체를 위해 무엇을 하고, 진상 알리는 환경을 위해 무엇을 할 생각은 전혀 안 하고, 정체 환경을 요구하며 주고받으려 했다. ‘흥미 있는’ 항목만 하고 싶어 하고 견지하기는 싫어했는데,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젊은 사람은 앉아 있기 힘들다는 것과 같았다. 결국 한마디로 말하면 모두 이 ‘사(私)’자에서 나온 것이다.
‘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에서 호주에 관한 질문이 또 있었는데 사부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사부는 희망을, 전반 호주의 희망을 어느 한 개인이나 불학회에 기탁하지는 않았으며, 나는 당신들 모든 대법제자 매 개인이 어떻게 잘 수련할 것인가에 기탁했다.”[4] 이로써 개인은 자신을 잘 수련하는 것이 정체 환경을 제고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최근 밍후이왕에서 교류문장 한 편을 보았다. 그 수련생도 사부님께서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을 남겨 놓은 작용 중 하나는, 그런 사오(邪悟)한 사람에게 박해 발생 후의 사부님 설법을 믿고 다시 돌아오라는 것일 거라며 예를 하나 들었다. 여러 해 사오한 친구가 있었는데 ‘호주 수련생에 대한 설법’ 비디오에서 사부님의 모습을 보고 즉시 깨어나 엄정성명을 썼다고 했다. 그 교류문장은 나에게 큰 계시를 주었다. 우리는 사부님의 이번 설법을 깨어나는, 더 잘하는 동력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금강불파
사부님께서는 각지 설법에서 여러 번 ‘금강(金剛)’이란 단어를 언급하셨다. “대법제자라, 무엇이 대법제자인가? 가장 위대한 법이 육성한 생명이다. (열렬한 박수) 반석같이 견고하고, 금강불파(金剛不破)한 것이다.”[5]
만약 대법제자 사이에 정념이 확고하고 금강불파해, 함께 더 좋은 수련환경을 형성할 수 있다면, 이것 역시 우리가 대법을 원융하는 한 층의 표현일 것이다.
개인의 옅은 깨달음으로 층차에 한계가 있으니, 타당하지 않은 곳은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허스(合十).
주:[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2] 리훙쯔 사부님 경문: ‘대법홍전 25주년 뉴욕법회 설법’[3] 리훙쯔 사부님 경문: ‘유럽법회에 보내는 축사’[4]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9 – 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5] 리훙쯔 사부님 경문: ‘각 지역 설법 4 – 2003년 워싱턴DC법회 설법’
(2020년 청년 대법제자 인터넷 법회 원고)
원문발표: 2020년 5월 3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5/30/40704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