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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룬따파를 수련하면 많은 기적을 보게 된다

글/ 산둥성 파룬궁수련생

[밍후이왕] 최근 파룬궁수련생이 쓴 ‘대법을 수련하자 신기한 일들이 나타났는데 아주 자연스럽고 정상적이었다.’라는 글을 본 것이 내가 이 글을 쓴 계기가 됐다. 이전에 사람들에게 불가사의한 일로 생각되던 것들이 나에게 늘 나타났지만 써내지 못했고 또 어찌 된 일인지도 몰랐다. 이 문장을 보자 나는 단번에 알게 됐다. 수련 중 내게 나타난 많은 기적을 정상적인 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진상을 말하면서 종종 이런 것들을 말하면 어떤 사람은 신이 당신을 보호하고 계신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불가사의하다고 하며, 완고한 사람은 잘못 본 것이라고 한다.

처음 수련을 시작할 때도 나는 치료나 건강을 위한 것이 아니라 수련을 하려는 마음이었다. 파룬궁이 신(神)과 부처 수련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것이 바로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이고, 이것이 바로 내가 와서 사람이 된 목적이라고 아주 확고하게 생각했다. 나는 신불(神佛)을 믿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줄곧 찾고 있었기에 신을 믿고 부처를 믿는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상태였다. 내가 비록 40∼50대 사람이긴 하지만 생활 중의 일에 대해 무슨 체험이 있거나 관념을 갖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따금 일에 부딪혀도 복잡한 사상이 없었고 순수했다.

1. 연탄가스에 중독됐으나 무사하다

2003년 겨울, 나는 어느 단독 주택 서편 사랑채에서 살았다. 대략 10평 정도 됐는데 문 하나에, 창이 하나, 평평한 지붕이었고 매우 추웠다. 난방을 위해 잠자는 스프링 침대 옆 1m 정도 거리에 구공탄(벌집처럼 구멍을 뚫은 연탄) 난로가 있었는데 중간에는 어떤 가림막도 없었다. 다른 사람이 이전에 내게 연탄난로는 안전에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나는 전혀 몰랐다.

어느 날 밤 날은 흐렸고 나는 한밤중까지 잤다. 깊이 자다가 갑자기 튕기듯 일어났는데 그 동작은 의식적으로 한 것이 전혀 아니었고 몸이 저절로 한 것이었다. 일어나 앉았지만 숨을 쉬지 못할 것 같고 가슴이 답답해 터질 것 같았다. 하지만 잠재의식 중에 자신이 수련자임을 알고 있었다. 너무 견디기 힘들었고 나는 돌연 뒤로 벌렁 넘어졌다. 두 개의 동작이 하나처럼(동시적인) 느껴졌는데 몇 초 내에 일어나야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 당시 나는 그것이 연탄가스 중독 때문임을 전혀 몰랐다.

이튿날 아침 5시쯤 깨어났는데 속이 좀 메스껍고 머리가 아팠으며 기운이 없었다. 일어나 앉자 궁둥이가 축축함을 느꼈다. 온수 주머니가 새는 것으로 알고 온수 주머니를 보니 조금도 새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중에야 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침대에 쌌다는 것을 알았음). 이때 나는 다급하게 본채의 이웃에게 가서 내 언니에게 전화를 부탁하며, 언니에게 내가 일하는 직장에 가서 밥을 지어달라고 했다. 노동자들의 식사를 지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웃이 전화를 마친 다음 내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내 방으로 보러 왔다. 문에 들어서자 이웃은 큰소리로 “언니, 연탄가스 중독이에요.”하고 외쳤다. 침대에 누운 채 그녀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나는 웃으며 “연탄가스 냄새도 없잖아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언니는 냄새도 못 맡나요. 문에 들어서니 그을음 냄새가 심한데, 빨리 창문을 열어요.”하고 말했다. 말하면서 창문을 열고 문도 열어줬다.

이웃이 언니에게 서둘러 다시 전화하자 언니가 황급히 나를 보러 왔다. 밥하러 간다는 건 생각할 틈도 없었다. 나는 괜찮다며 얼른 밥을 하러 가라고 언니를 내쫓았다. 언니는 밥을 하러 가자니 내가 걱정됐으나 나는 언니를 마구 쫓아냈다.

그들이 모두 간 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사과 하나와 케이크 한 조각을 가져다 침대에 누워서 먹으며 ‘만약 수련하지 않았다면 나는 억울하게 죽었을 것이다. 지금 수련하기에 이처럼 동요하지 않고 일체를 대할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언니가 사람들의 밥을 해주고 나서 다시 나를 보려고 급히 와서는 집에 가서 녹두탕을 끓여 오겠다고 했다. 나는 하지 말라고 했다. 앞쪽 방 이웃이 “연탄가스 중독은 병원에 입원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을 겁니다.”라고 했다. 나는 한밤중에 체험한 일은 그들에게 전혀 말하지 않았다.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할 일을 하다나중에 연탄가스에 중독됐던 어떤 언니의 말을 듣게 됐다. 그녀는 두 시간 남짓 연탄가스에 중독됐다. 견딜 수 없었으며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고 병원에 보내져 입원했는데 울며불며 야단이었고 만감이 교차했었다고 했다. 내가 “연탄가스 중독이 그렇게 무섭나요?”라고 물어보자 그녀는 무서울 뿐 아니라 후유증이 생기기 쉽다고 했다. 그 뒤 또 다른 언니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직장 동료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병원에 입원했는데 얼마나 긴 시간 입원했는지 모르며 후유증으로 대뇌가 아무것도 인식하지 못하고 사유가 없었으며 몇 년이 지나서야 점점 의식이 있게 됐다고 했다.

그때야 나는 ‘나에게 있었던 연탄가스 중독이 그렇게 무서운 것이었구나! 만약 사부님의 보호가 없었다면 뒤로 벌렁 넘어졌을 때 깨어나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깨달았다.

2. 13일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않다

사부님의 자비하신 보호를 나는 깊이 알고 있는바, 내가 겪은 신기한 일은 매우 많다. 예를 들면 2001년 8월,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실증했다는 구실로 나는 구치소에 불법 수감됐다. 13일 동안 밥 한 숟가락 먹지 않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너무나 견디기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생명 위험은 겁나지 않았으며 단지 뭘 먹고 마실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경찰은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들이 어머니 집에서 막 나가자마자 나는 부뚜막 솥뚜껑을 열고 콩국수 한 사발을 들이켜고는 온돌방에 누워 잤다.

이전에 한 언니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녀는 젊었을 때 어머니와 사이가 틀어져 6일이나 먹지 않았다. 그 뒤 음식이 먹고 싶어서 무엇을 먹으면 다 토했으며 결국 입원해야 했다. 속인 중에는 남자는 6일을 넘기지 못하며 여자는 7일을 넘기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말하자면 남자는 6일 먹지 않고, 여자는 7일 먹지 않으면 견디지 못한다는 것이다.

3. “정말 구사일생이네요”

2006년 나는 진상 자료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불법 징역 판결을 당했다. 감옥 측은 내 수감을 거부했으나 정법위원회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고 나는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할 때 구치소에 불법으로 갇힌 지 이미 9개월이 된 때였고 구치소 환경으로 인해 신체는 벌써 망가졌지만 단식하자 빠르게 더 손상됐다.

그때 나와 함께 갇힌 다른 사람들이 내가 이러는 것을 보고 무서워하며 “당신이 이렇게 해서 뭘 할 수 있습니까? 청산만 있으면 땔나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지 않습니까? 당신 이러면 죽겠다는 것인데 어쩌자는 겁니까?”라고 울며 말했다.

나중에는 하루 또는 이틀에 우유 한 팩을 마셨지만 나는 이미 어렵게 됐고 몇 번이나 자다 죽을 뻔했다. 이미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람의 말로 하면 원기가 상했으며 마치 휴대전화 배터리의 수명이 다하면 더 충전할 수 없는 것과 같았다. 이때 감옥 측은 나를 병보석으로 풀어줬다.

석방할 때 구치소 한 경찰이 내 옷가지를 검사하며 다른 사람에게 건네려는 쪽지가 있는지 보며 말하기를 “당신은 지금 자신의 생명도 돌보지 않으면서 남을 돌보려 하는가.”라고 했다.

구치소 사무실에서 나는 올케언니를 보고 “언니”하고 불렀다. 놀랍게도 언니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언니가 왜 대답하지 않지? 나는 바로 언니 맞은편에 있는데’하고 생각했다. 언니는 생각하더니 나라고 짐작했는지 “아이고, 못 알아봤어.”하고 말했다.

나와 언니는 구치소를 나와 정거장으로 갔다. 만두가 먹고 싶어 1위안을 꺼내 언니에게 주면서 하나 사달라고 했다. 언니가 사서 돌아왔고 나는 꿀떡꿀떡 먹었다. 우린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집에 온 후 오빠가 서쪽 창에 놔둔 찬 고구마를 집어다 먹었다. 오빠를 깜짝 놀라게 했는데 오빠가 소리치며 “먹으면 안 돼, 벌써 며칠이나 지난 거야.”라고 했다. 나는 괜찮다며 맛있게 먹은 다음 온돌에 누워 잤다.

저녁에 사촌 언니와 숙모가 나를 보러 왔다. 내 모습을 보고는 괴로워하며 끝장났고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조촐한 저녁 파티에 셋째 언니와 형부가 나를 보러 왔는데 내 모습을 보더니 괴로워하며 화를 냈다.

두 달 후 나는 앵두 한 상자를 들고 구치소에서 밥하는 사람을 찾아갔다. 그는 가족을 대신해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는데 나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었다. 문에 들어서자 그가 누구냐고 물었다. 나라고 설명하자 그는 믿지 못했다. 정말 나라고 말했고 그는 불가사의하다며 “정말 구사일생이네요.”라고 말했다.

4. “당신 그러고도 앉을 수 있어요!”

2001년 2월 나는 베이징으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다)’를 실증하러 갔다가 첸먼(前門) 파출소 경찰에게 딱딱한 고무 곤봉으로 엉덩이를 심하게 맞았다. 그들은 나를 강제로 탁상에 엎드리게 하고 5∼6명의 젊은 경찰이 돌아가며 때렸다. 그들이 “스물다섯”하고 세는 소리를 듣고 나는 혼절했다. 세 차례 기절하고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그 안의 경찰이 말하기를 “이제 됐네.”라고 했다. 뜻은 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다 때리고 나서 나를 철창에 가뒀다. 나는 엉덩이가 이미 짓물러진 줄 몰랐는데 바닥에 앉자 심장을 파고드는 고통이 엉덩이에서 등 부위로 올라왔다. 아픔으로 온통 식은땀이 흘렀으며 계속 명치까지 파고들었다. 통증은 대략 1분이 지나자 사라졌다. 나는 그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을 대법 사부님께서 나를 대신해 감당해 주신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었다.

이때 구타에 참여하지 않은 조금 나이 든 경찰이 내가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나는 조금도 과장 없이 말하는데, 그는 정말 두려워하며 눈을 둥그렇게 뜨고는 “당신 그러고도 앉을 수 있어요!”하고 말했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나는 당신을 때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며 재빨리 피했다.

그 뒤로 나는 펑타이구(豐台區) 장신(長辛) 파출소로 분류됐고 거기서 온종일 서 있었으며 어떤 때는 앉아 있기도 했다. 5일 낮 5일 밤을 자지 못했고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다. 그 기간 내가 아는 것이라곤 두 허벅지가 부어 조금도 틈이 없었고 정말 괴로웠다는 것뿐이다.

5일째 밤 우리는 석방됐고 6일째 밤 현지에 도착해 새벽 1시 30분 언니 집으로 갔다. 한밤중이라 문을 크게 두드릴 수 없었는데 어머니가 나오셔서 문을 열어주셨다. 어머니께 “문 두드리는 소릴 들으셨어요?”하고 여쭈자 어머니는 귀가 어두워 듣지 못했다고 하셨다. 나는 대법 사부님께서 어머니를 일어나게 하신 것임을 알았다. 당시 언니도 붙잡혔으며 형부도 집에 없었다.

자려고 침대에 올라가 옷을 벗었는데 어머니가 내 엉덩이와 허벅지를 보시더니 굵은 눈물을 흘리셨다. 어머니는 눈물이 별로 없는 분이었다. ‘내 엉덩이와 다리가 어떻길래 어머니가 저렇게 우실까?’하고 생각했다. 이때 내 다리를 살펴보니 무릎부터 위로는 온통 검푸른 어혈이었으며 빈틈이 조금도 없었다. 어머니를 위로해드리고 우린 잠을 청했다.

그날 밤 다리를 한 번 본 후로 나는 엉덩이와 다리가 어떻게 됐는지 더는 생각하지 않았다. 같은 해 8월, 베이징으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를 실증하러 갔다가 또 불법 체포당했고 웨이하이(威海) 구치소에 수감됐다. 여자감방의 경제사범이 말하기를 “서편 남자감방에 ○○가 며칠 전에 고무호스로 몇십 대를 맞았어요. 그런데도 그는 진짜 사나이라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요. 밤에 잘 땐 누워서 잘 수 없고 엎드려서 잘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라고 했다. 그때 나는 첸먼 파출소 그 경찰이 내가 바닥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 왜 그렇게 놀랐는지 생각났다.

몇 년 후 한 파룬궁수련생이 그가 박해당한 것을 말하자 나는 이 일을 떠올리며 그에게 말했다. 그 파룬궁수련생이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자 나는 아주 이상했다. 이 수련생이 말하기를 “만약 속인이 그랬다면 아마 다리를 절단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라고 했다. 내가 왜요? 하고 묻자 그는 “어혈이 생기면 피가 통하지 않게 돼 혈관이 썩게 되니까요.”라고 말했다. 속인의 이치로 생각해 보니 그럴 것 같았다.

최근에 의자를 딛고 천정의 먼지를 청소하다 부주의로 의자가 넘어졌다. 바닥에 세게 넘어져 무릎 안쪽 옆부분이 의자 측면의 나무판에 부딪혔다. 이튿날 어혈이 퍼지기 시작했고 어혈이 퍼진 그곳이 누르면 아팠으며 미열도 있었다. 이때 나는 그때 엉덩이와 다리가 맞아서 그렇게 됐지만 내가 감당한 고통은 그 1분뿐이었고 나머지 고통은 사부님이 감당하셨다는 것을 생각했다.

5. 여러 병원의 단언도 통하지 않다

20년 전 나는 불법 노동교양 처분을 당했고 노동교양소에 가서 신체를 검사했는데 병원은 난소암이라고 하며 수술하지 않으면 많이 살아야 반년이라고 했다. 노동교양소는 수용을 거부했다.

2006년 함께 지난(濟南) 감옥으로 보내졌고 또 싸우기도 했던 사람이 1년 반 만에 돌아와 나를 보자 말하기를 “○○ 언니, 그들이 언니가 무슨 병이 있다고 하던데 알고 계세요?”라고 했다. 나는 웃으며 “암이겠죠.”라고 말했다. 그녀는 내가 모른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녀는 이어서 말하기를 “언니의 지금 이런 모습을 보고 누가 암 환자라고 생각하겠어요?”라고 했다.

몇 년 뒤 루산(乳山) 정법위원회에서 몇 차례 나를 수감하려 했으나 여러 병원이 모두 오래 버티지 못한다고 단언했다.

2012년 나는 웨이팡(濰坊)에서 납치돼 박해당했다. 웨이팡 병원 검사에서도 아주 위험하다고 했다.

나를 박해하는데 참여했던 많은 사람이 불가사의하게 생각했다. 어떤 경찰은 내 앞에서 “당신,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군.”이라고 했다.

내 신상에서 발생한 기적은 아주 많다. 나는 단지 끝없는 불법(佛法) 중의 작고 작은 한 입자일 뿐이며 일체 기적은 모두 사부님께서 하신 것이고 대법에서 온 것이다.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감사를 나는 정말 말로는 다할 수가 없다.

 

원문발표: 2020518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5/18/40564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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