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미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저는 어릴 때부터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습니다. 인생은 기껏해야 백 년밖에 되지 않는데, 내세에 또 태어나는 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빈천과 부귀는 이 짧은 몇십 년 동안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선생님께 이 문제에 대해 논의했지만 아무도 저에게 만족할만한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한 동창이 저에게 “하늘은 당신에게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주었어요.”라고 했습니다. 외부인의 눈에 저는 하늘의 특별한 배려를 받은 듯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속의 괴로움은 저 자신만이 알고 있었습니다.
1997년 8월에 미국에 온 후, 저는 놀랍게도 공부 잘하는 주변의 20여 명 젊은이가 파룬따파(法輪大法)를 수련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1992년 가을에 이미 파룬궁(法輪功)에 대해 들었지만, 당시 저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기숙사를 나서면 길 건너편에서 상서롭고 감미로운 연공 음악이 흘러나왔습니다. 춘하추동(春夏秋冬) 춥고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음악에 따라 조용히 연공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저의 대학 생활 3년 동안 함께 했습니다. 당시 저는 이 사람들이 몸을 단련하기 위해 정말 끈기가 있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원래 노인들이 병을 고치고 몸을 건강하게 하려고 연공하는 걸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미국에서 연공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20대이고 공부 잘하는 젊은이가 많을까? 이런 의혹을 품고 저는 9일 학습반에 참가했습니다. 첫날 사부님의 설법 비디오를 보고 어릴 적부터 저를 괴롭혔던 문제가 한 번에 풀리면서 인생의 참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줄곧 찾던 그것이었습니다. 저는 수련하여 반본귀진(返本歸真)을 해야 합니다!
제가 수련한 지 2년도 안 되어 중국 공산당(중공)은 파룬궁을 불법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모든 언론은 중공의 거짓 선전을 전재했습니다. 대법제자도 진실을 말하는 매체—에포크타임스(대기원)를 설립해 저도 그 속에 참여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언론과 인연을 맺고 매체 일을 하는 중에서 수련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길은 순탄치 않았지만 진선인(眞·善·忍)의 가르침이 있어, 제가 불공평한 일에 부딪히면 “행하기 어려운 것도 행할 수 있다(難行能行).”[1]라는 사부님의 말씀대로 하면서 차분하게 대해 ‘미국의 소리(VOA)’ 동료들에게 대법제자는 좋을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줬습니다.
‘미국의 소리’에 채용되어 평탄하지 않은 길을 걷게 되다
2004년 봄, 한 친구가 저에게 ‘미국의 소리’ 채용 통지를 보내면서 시험 한번 봐보라고 건의했습니다. 시험을 무사히 통과했지만, 면접통지서를 받지 못했습니다. 몇 달 뒤 면접시험을 보자는 전화가 왔는데 한 편집인이 저에게 “당신의 시험성적이 매우 좋아도 반드시 채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이력서에 에포크타임스 기자로 있었다고 했기에 그들은 당신이 파룬궁을 연마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했다. 두 주임은 10분 동안 면접한 후 저에 대한 인상이 좋아 다음날부터 출근하라고 했습니다. 2004년 가을, 저는 ‘미국의 소리’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저는 사무실에서 늘 10여 명에게 ‘포위 공격’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중국공산당이 우리를 먹칠한 것은 거짓 선전이라면서 제가 말참견을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동료들의 눈빛에서 저는 그들이 저를 의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때로는 복도에서 마주치면 제가 인사를 해도 그들은 저를 외면했습니다. 주임은 또 매주 다른 팀으로 저의 위치를 바꾸면서 저의 업무 표현에 대한 각 팀장의 평가를 들었습니다.
하루는 오전반 출근을 했는데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동료가 자발적으로 저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제가 창춘(長春)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그는 한 고향이라면서 기뻐했습니다. 그는 저에게 늘 창춘으로 가족을 방문하러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1999년 중공이 파룬궁을 박해한 후부터 중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파룬궁’이란 말을 듣자 바로 화가 나서 펄쩍 뛰었습니다. 감정 조절이 안 되는 그의 모습을 보고 저는 할 수 없이 침묵했습니다. 잠시 후 저희 맞은편에 앉은 동료가 도저히 볼 수 없어 그를 불러 밖에 나갔습니다. 나중에 돌아와서 저에게 “내가 방금 나가서 한바탕 혼내줬어요. ‘진선인’을 수련하는 사람을 이렇게 업신여기면 안 되지요. 그와 상대하지 말아요.”라고 했습니다. 그는 예전에 항공회사에서 근무할 때 캘리포니아에서 비행기에 앉아 워싱턴 DC에서 와서 행사에 참가하는 파룬궁 수련생들을 늘 만났는데 어떤 가족은 어린애도 데리고 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모두 자신이 비용을 부담한다고 했는데 저보고 정말인지 물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정말입니다. 예전에 저도 플로리다에 살았는데, 매년 아이를 데리고 자비로 워싱턴 DC에 와서 박해를 멈추라고 호소했습니다.”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나중에 옆자리 동료가 돌아와서 조용히 저에게 “미안해요, 저는 당신을 겨냥한 것이 아니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후 또 저에게 파룬궁 수련을 포기하라고 권했는데 제가 어떻게 설명해도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또 듣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그가 주최하는 TV 프로그램이 취소되어 그는 ‘미국의 소리’를 떠나게 됐습니다. 저는 이 고향 사람에게 진상을 알리지 못한 것이 유감이었습니다. 떠나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저는 그가 앞으로 다시 한번 대법제자를 만나 진상을 알 기회가 있기를 묵묵히 기원했습니다.
매일 사무실에 들어서면 저는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아 그만둘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 인쇄된 원고를 가지러 갔는데, 프린터 옆에 앉아 있던 한 동료가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이 서방 언론과 인터뷰한 기사를 스크랩해 벽에 붙이는 것을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사부님의 사진을 보면서 저는 자신의 느낌만을 의식하고, 거짓으로 독해 받은 중생을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마음속으로 묵묵히 ‘사부님, 근심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어려워도 제자는 이 환경을 떠나지 않고 반드시 대법제자가 모두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보여주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뜻대로 상황이 바뀌다
하루는 같은 팀의 편집자가 주위에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저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저에게 한 가지 문제가 있는데 이해할 수 없어요. 저의 사촌 동생은 중국 유명 대학의 아주 우수한 대학생인데 그도 파룬궁을 연마해요. 늘 베이징에 청원하러 가서 그의 부모들을 매우 걱정하게 만들어요. 그는 나이가 어린데 왜 자신의 앞길을 생각하지 않을까요?” 나는 듣고 나서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하마터면 눈물을 흘릴 뻔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당신의 사촌 동생은 대단해요. 사람이 일단 진리를 알게 되면, 어떠한 돈과 이익으로도 그의 의지를 꺾을 수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얼마 되지 않아 그는 베이징 특파원으로 파견되었는데 보내온 원고의 구절마다 정기(正氣)가 배여 있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전법륜(轉法輪)’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직원들이 당신들의 法輪大法(파룬따파)를 배운 후,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하며,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일하면서 상사가 무슨 일을 맡기든지 가린 적이 없고, 이익 앞에서도 다투지 않습니다.” 저는 항상 ‘진선인’의 기준에 따라 자신을 요구해야 한다고 스스로 자신을 일깨웠습니다.
두 달 후, 저는 주임의 신임을 얻어 오전반 뉴스팀에 고정 배치되었습니다. 매일 새벽 1시에 집에서 나와 2시부터 중국 본토에 생방송을 시작하면 10시에 끝났습니다. 그 당시에 중공이 파룬궁을 미친 듯이 박해하던 시기였습니다. 매일 오전 10시에 퇴근한 후 저는 에포크타임스의 취재 보도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어떤 때에는 심지어 밤을 새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한 번도 지각하거나 제시간에 방송 시작하는 것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한동안 시간이 지나자 같은 팀의 동료는 제가 겸손하고 선하며, 착실하게 일하는 것을 느끼고 천천히 먼저 저에게로 다가왔습니다. 칠순을 넘긴 한 베테랑 앵커는 그가 모아 정리한 방송 진행 성공비결과 흔히 볼 수 있는 오타를 저에게 주었습니다. 또 ‘미국의 소리(VOA)’에서 37년을 근무한 한 베테랑 아나운서는 퇴직하기 전에 저에게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았어요. 지금까지 어떠한 말썽도 일으키지 않았죠. 여기 환경은 매우 복잡하니 안전에 주의해야 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어느 해 여름에 가족과 함께 베이징으로 여행을 갔는데, 한 관광지에서 많은 사람이 베이징 올림픽 유치에 서명하는 것을 보고 그도 즐겁게 사인을 했는데 다음날 중국 신문에서 ‘미국의 소리(VOA)’ 베테랑 앵커가 베이징 올림픽 유치에 성원했다고 보도하면서 그의 사인도 신문에 실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또 우리가 모두 방송용 가명을 쓰지만 소용없다면서 중공 스파이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의 사적인 여행까지 감시하고 있다고 저에게 말해 주었습니다.
1년 후 일부 동료들은 저에 대한 태도가 변했습니다. 어떤 동료는 먼저 저에게 와서 파룬궁을 알아보았고, 또 어떤 동료는 시어머니와 서로 맞지 않거나 혹은 남편과 갈등이 생기면 저를 찾아와 하소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저는 자신이 대법 중에서 깨달은 법리로 그들을 이끌어 주어, 그들은 모두 제가 마음이 착하고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어떤 동료는 그의 아들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해 달라고 하면서 우리는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한 편집자는 워싱턴에 있는 유명 로펌의 동업자인데, 그는 저에게 로펌에서 근무할 파룬궁 수련생을 추천해달라고 했습니다. 한번은 한 동료와 함께 아침 시사 뉴스를 진행하고 있는데 그가 갑자기 배가 아파 참기 어려워하면서 고통스러워하자, 저는 그에게 함께 연공 해보지 않겠는지 묻자 그는 “한번 시험해보죠, 정말로 아파서 참지 못하겠어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프로그램 사이에 쉬는 몇 분의 시간을 이용해 생방송실에서 제1장 공법을 연마했는데, 연공을 다하고 나자 신기하게도 그는 배가 아프지 않다고 했습니다.
어떤 동료는 먼저 저에게 ‘전법륜’을 빌려 보려고 했습니다. 한 동료는 어린 딸을 데리고 우리 현지 연공장에 와서 연공을 배웠습니다. 그는 매일 출퇴근할 때 차를 운전하면서 연공 음악을 들으면 여러 해 동안 그를 괴롭혔던 불면증이 어느새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2년 전 그는 (중국)국내에서 온 친척 언니 부부를 데리고 저를 찾아와 연공을 배웠습니다. 귀국한 뒤 꾸준히 연공을 견지해 이 부부의 여러 가지 노인병이 사라졌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주 현지 중국인 모임에 가서 파룬궁을 비방하는 사람을 만나면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알려 주면서 그가 접촉한 파룬궁 수련생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다시 파란이 일다
2006년 ‘미국의 소리(VOA)’는 TV 발전에 전력을 다하기 위해, 주임은 저를 TV팀으로 전근시켜 방송과 TV 뉴스 앵커를 겸하게 했습니다. TV 프로에서 생방송 뉴스를 저에게 맡기는 것은 저에 대한 신임이었습니다. 적어도 그들이 저의 파룬궁 수련에 대해 더는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프로그램 방송을 앞두고 당시 중공 지도자 후진타오가 미국을 방문하자 한 파룬궁 수련생이 백악관에서 중공의 파룬궁 수련생 생체장기 적출 만행을 저지하라고 외쳤습니다. TV 화면에서 외치는 장면이 나타나자 사무실 전체가 떠들썩했습니다. TV팀의 편집자는 “파룬궁은 절대로 우리와 함께 섞여 있으면 안 됩니다.”라고 하면서 저를 보고 “당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에요.”라고 했습니다. 동료들이 수군거리는 것을 듣고 저는 다시 한번 압력을 느꼈습니다. 전문 언론인이라면 이런 수법을 채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저도 그 수련생이 이성적이지 못하다고 마음속으로 원망했습니다. 하지만 냉정하게 다시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수련생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신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행동은 자신과 가족의 삶에 손해와 압력을 줄 수 있었습니다. 또 의사인 그녀는 생체장기적출 죄악에 대해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이 죄악을 저지하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자 더는 원망하지 않았고 저의 생각을 동료들과 공유했습니다. 그러자 동료들은 중공의 파룬궁 수련생 생체장기 적출 사건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더는 백악관의 외침에 대해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이 파동은 곧 잠잠해졌고, 저도 예정대로 TV팀에 배치되었습니다. 다른 동료들에 비해 저는 뉴스를 전공한 출신도 아니고 또 정규 방송 훈련을 받은 적도 없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시청자들은 제가 뉴스를 방송할 때 평화롭고 침착하게 하는 것이 좋다고 피드백을 해주었습니다. 저장(浙江)대학의 한 대학원생은 동영상을 캡처해서 저에게 보내왔습니다. 그는 동영상 사진을 프린트해서 그들의 기숙사 벽에 붙여놓자 기숙사의 여섯 친구가 모두 저의 팬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상사도 저의 업무에 만족했고, 매번 임금을 인상할 때 저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매일 전체 부서에 주차증이 몇 개밖에 없었는데 어떨 때는 저의 키보드 아래에 주차증이 두 개나 놓여있었습니다. 저는 환경이 점점 더 느슨해지는 감을 느꼈습니다.
같은 팀의 동료들은 점점 더 진상을 알게 되면서, 우리 대법제자들에게 탄복했습니다. 가끔 방송이 나오자마자 편집자는 저보고 일찍 퇴근하라고 암시를 주면서 당신들이 힘들고 할 일이 많다는 걸 안다고 했습니다. 또 한 프로그램 진행자는 저에게 그의 아버지는 중국의 유명대학 중문 교수인데, 그가 우리가 꾸린 ‘에포크타임스’를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외국에 파견된 어떤 기자는 돌아온 후에 몇 편의 파룬궁 뉴스를 보도하면서 이 몇 년 동안 우리에 대해 빚진 것이 너무 많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들의 선의에 진심으로 위안을 느꼈습니다.
TV팀의 가장 골치 아픈 작업은 바로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가장 많이 들고, 복잡하게 얽혀 있어 압력도 가장 높아서, 매주 하루 한 명씩 돌아가며 하기로 했습니다. 같은 팀의 젊은 동료들은 자주 실수하는 바람에 부담이 너무 커 통곡하는 것을 보고, 저는 먼저 편집장에게 뉴스 앵커를 그만두고 프로그램 기획·제작을 담당하겠다고 했습니다. 어떨 때는 일주일에 7일을 근무했습니다. 매일 사무실로 들어가면 방송이 끝날 때까지 몇 시간 동안 거의 쉬지도 못했습니다. 때로는 방송 몇 분 전까지도 기사 원고를 기다리고 있어, 오프닝 전까지 시간에 맞춰 프로그램을 조정해야 했기에 생방송 실에 가서 미국팀과 협력해 현장 지휘를 배치해야 했습니다. 진행자, 초대손님, 시청자의 핫라인, 화면 전환, 사진, 화면, 자막 등 모든 부분을 순조롭게 보장하면서 진행해야 했습니다. 수련인은 편안한 마음으로 일을 처리하고 그렇게 큰 압력을 받지 않아, 저는 몇 년 동안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었습니다. 동료들은 제가 먼저 압력을 분담한 것에 감사했고, 편집자는 매일 아침 사무실에 들어와서 저를 보면 그의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했습니다.
사직 전의 파문, ‘미국의 소리(VOA)’ 동료는 대법제자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미국의 소리’에서 8년 근무했습니다. 2012년 여름, 에포크타임스에서 전업 직원이 필요해 저는 ‘미국의 소리(VOA)’에서 사직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사직하기로 했을 때 또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어느 토요일 방송이 끝나자마자 사회자가 와서 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같은 팀의 동료 중 한 명이 갑자기 제 앞에 와서 고함을 치며 욕을 해서 저는 당시 멍해졌습니다. 그 사회자도 그를 제지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정신을 잃은 듯 감정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어느 한번 제가 휴가를 내서, 상사가 그녀에게 저를 대신해서 하라고 했는데 그녀가 지각하는 바람에 프로그램을 지체시켰고, 그 과정에서 또 실수해서 비평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중국 언론 대학을 졸업했고, 중국 TV 방송국에서 사회자로 일했던 그녀는 ‘미국의 소리(VOA)’에서 중용되지 않자 저에 대해 질투를 느낀 나머지 제가 연공해 주화입마(走火入魔)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습니다. 욕하는 소리가 사무실의 모든 동료를 놀라게 하여, 그들은 모두 달려와 그녀의 무리한 욕설을 제지했지만, 그녀는 전혀 충고를 듣지 않고 욕을 할수록 사납게 굴었습니다. 십몇 분 동안 저는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았고, 머릿속으로 제가 어디에서 잘못해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는지 되새겨 보았습니다.
퇴근 후 마음이 괴로웠습니다. 일찍 그만두면 이번 파문은 없었을 것이라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상사에게 메일을 보내 사직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다음날 이 일이 사무실 전체에 퍼지자 많은 동료가 전화를 걸어 위로해주었습니다. 일부 편집자들은 자발적으로 회의를 열어 이 사건을 어떻게 처리할지를 논의했습니다. 한 편집자는 “좋은 사람은 내쫓기고, 나쁜 사람은 잘난 체하는데 선악에 보답이 있다는 천리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했습니다. 방송팀의 책임자도 주임을 찾아가 그녀가 사람을 너무 업신여긴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당시 상사가 저를 대신해 그녀에게 배치한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특별히 그녀에게 상세한 업무 과정을 써주고 현장에 데리고 가서 직접 시범을 보여줬습니다. 그때 방송 책임자는 제가 너무 착하다고 하면서 그녀의 일에 대해 제가 가르쳐야 할 의무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기왕 동료들이 모두 이 일을 알고 있는 이상 저는 이 일을 분명하게 설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전체 부서의 130여 명 직원에게 메일을 보내, 진심으로 그녀에게 사과한 것은 비록 내가 정당하게 휴가를 낸 것이었지만 어쨌든 저의 휴가로 인해 그녀에게 번거로움을 가져왔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파룬따파를 수련하고 또 ‘미국의 소리’에서 8년 동안 근무하면서 지금까지 ‘진선인’에 따라 좋은 사람으로 되려고 노력했기에 여태껏 어떠한 요구도 제기하지 않았다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동시에 또 근무시간 이외에 파룬궁을 수련하는 중국 동포를 박해하는 중공을 저지하기 위해 자신의 힘을 다해 노력했는데, 그 동료가 이런 행위로 저를 주화입마했다고 해 받아들이기 힘들었다면서 저도 ‘미국의 소리(VOA)’에서 타인의 신앙을 공격하는 일이 발생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책임자는 현장에 있던 동료들에게 거듭 사실을 확인해보았습니다. 제가 욕을 먹고도 말대꾸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믿지 않아 동료들은 모두 저를 위해 증언을 하면서 그녀를 해고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3일 후, 그 동료는 보안관에 의해 사무실을 떠났고 ‘미국의 소리’에서 해고되었습니다. 상사는 즉석에서 저에게 전화를 걸어 이 ‘희소식’을 알려줬는데 저는 마음이 쓰려 상사에게, 이것은 제가 바라는 결과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상사는 그녀가 그렇게 당신을 무리하게 대했는데 어찌 그녀를 가련하게 여기느냐고 이해가 안 된다는 듯이 말했습니다.
이 사건은 바로 워싱턴의 뉴스 기관에서 퍼져나갔습니다. 때로는 행사에서 다른 언론의 기자들을 만나면 그들은 모두 달려와서 저와 포옹하기도 했습니다.
동료들은 모두 저를 사직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제가 이미 사직을 결정했고 아무리 해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줄곧 저를 만류하여 저는 또 돌아가서 한 달만 더 하기로 했습니다. 이 사건이 가라앉은 후 저는 정식으로 사직했습니다. 40여 명의 동료는 자발적으로 저를 위해 환송회를 조직했습니다. 동료들은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고 저도 “여러분도 모두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그럼 당신은 좋은 사람 중의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동료는 ”당신과 동료가 될 수 있는 것은 저의 복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사직 절차를 마치고 ‘미국의 소리(VOA)’ 빌딩을 나서는 순간, 저의 마음은 사부님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저는 속으로 묵묵히 사부님께 ‘사부님. 제자가 약속을 지켰습니다. 이 8년 동안 그들에게 대법제자가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맺음말
25세부터 파룬따파를 수련하여 오늘까지 이미 23년을 걸어왔습니다. 이 기간은 저의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간난신고를 겪기도 했지만 ‘진선인’은 저를 인생길에서 앞을 향해 나아가게 했고, 하나하나의 난관을 돌파하도록 이끌었습니다. 파룬따파는 저에게 무한한 지혜와 힘을 주었고, 선의 힘을 주변 사람들에게 전달해주어 주변의 환경도 조용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5.13을 맞이해 사부님에 대한 제자의 고마움을 수많은 말로도 표현할 수 없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0년 5월 1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5/11/40493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