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베이(河北) 대법제자
[밍후이왕] 2010년에 가족의 권유로 나는 파룬따파 수련을 시작했다. 대법 수련에 들어선 후 무신론의 관점을 확실하게 깨뜨렸고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됐으며 정법시기 대법제자로서의 진정한 사명을 알게 됐다.
수련해 결벽증을 제거하다
시아버님은 올해 93세이고 농민이다. 남편은 집안의 유일한 아들이다. 현지 풍습에 따르면 부모님을 돌보는 것은 나와 남편의 책임이기에 최근 몇 년 동안은 주로 우리가 시아버님을 돌봐왔다.
시아버님은 대법의 복을 받아 몸이 그래도 정정하신 편이시지만 어쨌든 연세가 많으시니 가래도 많고, 몸도 2년 전에 비해 못하시다. 나는 결벽증이 좀 있어 더러운 것을 보면 밥을 먹지 못하고 심지어 토하기 때문에 시아버님을 돌보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는사소한 일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하나의 큰 관이었다.
내가 수련의 길에 들어섰기에 수련인의 요구대로 해야 하고 시시각각 다른 사람을 위해 생각해야 한다. 사부님께서는 “우리는 속인 사회 중에서 수련하기에 부모에게 효도하고, 자식을 가르치는 것은 모두 마땅한 것이다. 각종 환경 중에서 모두 다른 사람을 좋게 대해야 하고, 남을 선하게 대해야 하는데, 하물며 당신의 친인(親人)임에랴. 누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서, 부모에 대해, 자녀에 대해서도 모두 잘 대하고, 곳곳마다 다른 사람을 고려하는 이 마음은 곧 이기적인 것이 아니며, 모두 자선지심(慈善之心)이고 자비(慈悲)이다.”[1]라고 말씀하셨다. 아버님의 편의를 위해 나는 가래통 두 개와 요강 두 개를 준비해 아버님이 침대 양옆에 놓아 밤에 소변을 보거나 가래를 뱉는 데 편하게 해드렸다.
그러나 아버님은 때로는 밤에 가래를 뱉을 때 가래 통 안에 가래를 뱉지 못해 가래가 침대보를 따라 바닥에 떨어질 때도 있었다. 아침에 내가 청소할 때 가래가 끈적이고 딱딱해서 잘 닦아지지 않았다. 가래 통 테두리에도 전부 가래가 묻어있었다. 처음에는 경험이 없어서 더러움을 두려워할수록, 구역질이 났다. 나는 남편에게 하소연했고 남편은 나에게 일회용 장갑을 끼워주었다. 그렇게 하니 손에 묻지는 않았다. 그러나 변기에 가래를 부을 때 보고 싶지 않았고 몸에 튈까 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사방으로 더 튀었다. 가래는 아주 많이 끈적거려 소변처럼 한 번에 부어지지 않았다. 어떤 때는 실처럼 길게 늘어져 좌변기에 묻어서 솔로 깨끗이 닦고 깨끗한 물로 몇 번 씻은 후 마지막에 향수를 뿌려 냄새를 제거했다.
지금 말하기는 쉽지만 사실 내가 한 과정은 하나의 수련 과정이었다. 나는 수련인으로서 더러운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더러운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집착이므로 반드시 없애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번은 아버님이 고구마를 많이 드시고 산책하러 나갔다가 바지에 대변을 보셨다. 돌아온 후, 나에게 팬티를 갈아입게 찾아달라고 했다. 내가 왜 지금 갈아입으시려 하냐고 여쭤보니 아버님은 미안해하시면서 바지에 실수했다고 하셨다. 아버님은 화장실로 가서 혼자서 갈아입으려 하셨다. 나는 화장실에 가서 “화장실은 너무 추우니 방에 가서 제가 갈아입혀 드릴게요.”라고 말씀드렸다. 아버님은 나를 밀치면서 “너는 가거라, 내가 할 수 있단다.”라고 하셨다. 아버님께서는 비록 연세가 많고 현재는 거동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상당히 명석한 분이기에, 나는 반드시 공손하게 대해야지, 절대 조금이라도 꺼리거나 불쾌한 내색을 해서 아버님을 난처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아버님을 화장실에서 나오시게 하고 재빨리 침대 위에 비닐을 깔고 아버님을 앉게 한 다음 솜바지, 내복을 벗겨드렸다. 시간이 지체됐기에 일부 대변은 이미 몸에 말라붙어서 잘 닦아지지 않았다. 아버님이 추워하실까 봐 나는 따뜻한 물로 다리와 엉덩이 부위를 전부 깨끗이 닦아드리고 옷을 갈아 입혀드리고 나서 따뜻한 물을 따라드리면서 “마시고 계세요. 제가 세탁할게요.”라고 말씀드렸다.
나는 그렇게 고생을 하셨으니 연세도 많은 아버님이 분명 아주 피곤하셨으리라 생각했다. 그 당시 아버님은 울면서 “너는 내 딸보다 더 낫다.”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당연한 일인걸요. 절대 마음에 담아두지 마세요.”라고 말했다. 전반 과정은 아주 자연스러웠고 아주 평온했으며 악취도 맡지 못했고 구역질도 나지 않았다. 마치 다른 집안일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일을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다. 그 당시 어떻게 그렇게 평온하고 자연스러웠으며 난감하지도 않았고 남편이 집에 돌아오면 처리하게 해야겠다는 생각도 애초에 없었다. 그것은 모두 수련에 들어선 후의 수련 상태일 것이고 사부님께서 내가 심성이 제고된 것을 보시고 나의 결벽증을 제거해주셨을 것이다. 사부님께 감사드린다.
작은 집안일에서 심성을 수련하다
나는 될수록 세심하고 꼼꼼하게 시아버님을 돌봐드렸다. 아버님 입맛에 맞춰 늘 밥을 지어드렸다. 매일 아침 우유 하나, 달걀 두 개는 필수였고 질리실까 봐 달걀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요리해드렸다.
아버님이 잘 드실 수 있게 평소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몇 가지 간식을 골라서 드시게 했다. 한번은 큰고모가 빵을 보내왔다. 나는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반드시 아버님부터 드시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저녁에 설거지할 때 보니 아버님은 빵은 건드리지 않으시고 다른 간식은 전부 드신 것을 발견하고 “맛있는데 왜 안 드셨어요?”라고 묻자 아버님은 “나는 네가 만든 콩가루 떡인 줄 알고 소화가 안 될까 봐 먹지 않았다.”라고 하셨고, 그 당시 나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다음 날, 다시 빵을 드렸지만, 아버님은 드시지 않았다. 나는 “왜 드시지 않으셨어요?”라고 묻자 차가워서 드시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다음엔 데워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또 세 번째 데워서 드렸지만, 여전히 드시지 않으셨다. 나는 데워드렸는데 왜 드시지 않으셨냐고 묻자 아버님은 빵이 푸석거리고 한 번 먹으면 없어진다고 하셨다. 나는 “지금이 어느 시댄데, 우리가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좋아하시면 더 사 오면 돼요.”라고 말씀드렸다. 그 당시 나는 아버님이 아끼는 것이 습관 되어 아마 아까워서 드시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오후에 나는 마트에 가서 다시 똑같은 빵 한 봉지를 사 와서 아버님께 “보세요. 많아요. 아주 부드러워요. 데워드릴게요”라고 말씀드렸고 아버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식사하시고 나서 다른 것들은 다 드셨지만, 여전히 빵만은 드시지 않으셨다. 그제야 나는 알았다. 원래 아버님은 빵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것은 나를 헛수고하게 하는 게 아닌가?’라고 생각하면서 화가 치밀어서 화내면서 “좋아하지 않으시면 말씀을 하셔야 제가 넘겨짚지 않지요.”라고 말씀드렸다. 저녁에 아버님은 남편을 방으로 불러서 내가 번거롭게 한다는 둥 나를 나무라셨다. 아버님의 목소리가 커서 나는 똑똑히 들었다. 그 억울함은 말이 아니었고 눈물이 흘렀다. 진짜로 뛰어들어가 따지고 싶었다. 속으로 파룬궁을 연마하기에 그렇게 대했지 요즘 시아버님을 두려워하는 며느리가 어디에 있냐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연공인이기에 참아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가서 따지지는 않았지만, 마음을 진정시키지 못했다. 나는 바로 사부님의 법을 외웠다. ‘무엇이 참음인가’, ‘누가 옳고 누가 그른가’를 한번 또 한 번 외웠다. 마음이 평온해진 후, 안으로 찾아보았다. 첫째는 아버님의 입장에 서서 문제를 고려하지 못했다. 아버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나는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둘째는 좋은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이었다. 대가를 치렀는데 칭찬을 듣지 못하고 오히려 원망을 들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던 것이었다.
또 공산당 문화의 변이된 생각의 영향으로 나도 모르게 미끄러진 도덕 표준으로 자신을 가늠한 것이었다. 그때 다시 나를 보니 수련이 부족해서 속인 중의 좋은 사람보다 못했다. 내가 어찌 90세 노인과 겨루는가? 내가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었다. 오로지 선한 마음으로 아버님을 대한다면 자연적으로 아버님의 인정과 신임을 얻게 될 것이다.
며칠 전에 큰고모가 한동안 모신다면서 고향으로 아버님을 모시고 갔다. 내가 아버님을 뵈러 갔을 때 이웃들은 나에게 “할아버지가 당신이 딸보다 더 잘해준다고 당신을 칭찬했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듣고 나서 기뻤고 위안이 됐다. 내가 아버님의 인정을 받아서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시골 사람들은 모두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신의 작은 행동으로 대법의 아름다움을 실증했고, 그들은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사당(邪黨: 공산당)이 파룬궁을 더럽히려고 날조해서 말한 것처럼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대법제자는 세간에서 대법의 홍보대사이다
사부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또 당신들에게 알려주겠다. 사실 당신들 이전의 본성(本性)은 위아위사(爲我爲私)의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다. 당신들이 앞으로 일함에 먼저 남을 생각해야 하고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2]라고 요구하셨다. 대법제자로서 우리는 반드시 시시각각 자신이 연공인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어떤 일을 하든지 상대방 처지에서 문제를 생각하고 확실하게 사부님의 요구대로 해야 한다.
2015년 5월, 나는 고향에 가서 설을 보냈다. 임시로 며칠 있었기에 작은 연탄난로와 전기난로를 사용했다. 마을에서는 마침 창시(唱戲-중국 전통 가극)를 공연하고 있어 출연자들은 모두 여러 집에 나누어 숙박했다. 시골의 많은 가정은 겨울이면 불편해서 출연자들을 재우려 하지 않았다. 마을 간부들은 우리가 임시로 잠깐 있다가 간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 집에 와서 상의했는데 우리는 흔쾌히 승낙했다. 출연자들이 돌아다니면서 숙박하고 여러 집에서 밥을 먹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나는 방을 깨끗이 청소하고 매트리스를 그들에게 깔아주었다.
출연자들이 온 후 우리도 잠시 와서 거주하는 것이라고 알려줬고 집안의 인덕션, 가스레인지, 보온병 등 모든 기구를 자기 집처럼 편하게 사용하라고 했다. 출입문도 잠글 필요 없이 아무 때나 오고 가면서 편하게 지내라고 했다. 우리가 있으나 없으나 마음대로 와서 물건과 난방을 사용하라고 했다. 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사탕과 해바라기 씨를 주며 손님처럼 맞아주었다. 저녁에 우리도 추웠지만, 그들이 추워할까 봐 우리가 쓰던 전기난로를 그들에게 양보했다. 또한, 전기를 아끼려 하지 말고 몸이 우선이니 추우면 사용하라고 했다.
출연자들이 우리 집에 있는 동안, 우리 방에 와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우리는 파룬궁을 수련한다고 말하고 파룬궁 진상을 알렸다. 그들은 진상을 알고 나서 자진해서 사당 조직에서 탈퇴했고 정중하게 우리에게 인사를 하면서 감사하다고 했다. 우리는 그들에게 사부님이 안 계셨다면 우리도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라며 대법 사부님께 감사드려야 한다고 알려줬다. 그들은 내 행동에서 대법제자의 선량함을 느꼈고 대법에 대한 견해가 달라졌다.
사실 그 당시 속으로 그들이 정월에 집을 나와 돈을 버는 것도 힘든데, 도울 수 있으면 도와주자고만 생각했다. 남편이 놀러 왔을 때 마을의 한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녀는 남편에게 “당신 부인은 너무 착해요, 그날 연극을 할 때 ○○출연자는 무대 아래에서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당신의 부인이 착하다고 칭찬했어요.”라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이 내가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것을 알기에 나는 나의 일거일동(一舉一動), 일언일행(一言一行)에 특별히 주의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표현은 중생이 대법을 이해하는 하나의 경로이고 대법제자는 세간에서 대법의 홍보대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대법 요구에 부합되게 표현하는 것은 바로 대법을 실증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매번 고향에 가서 대법제자의 아름다운 형상을 그들에게 보여준다.
마을 경조사에는 일찍 가고 늦게 돌아오면서 바삐 일하고 앞뒤로 돌봐주며 열정적으로 고향 사람들과 어울린다. 마을 사람들과 이웃들은 다른 사람들은 얼굴을 높이 쳐들고 시골 사람들을 거들떠보지 않는데 나는 그들과 달리 건방지지 않다고 했다. 고향에 돌아갈 때 이웃들은 늘 그들이 재배한 채소를 나에게 가져다주는데 남편은 기뻐하면서 “당신은 나보다 인기가 더 많아요!”라고 말하면 나는 “그건, 내가 대법제자니까요!”라고 말한다.
근무하면서 대법제자의 풍모를 드러내다
대법제자로서 집에서 수련인답게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회에서, 직장에서도 모두 사람들을 선하게 대해야 하고 일에서 책임을 다해 사람들이 마음으로 대법제자에게 탄복하게 해야 한다. 근무하면서 대법의 아름다움을 실증하기 위해 나는 본분을 지키면서 성실하고 부지런하게 잘한다. 상사들은 나를 신임해 나를 관리하기 어려운 곳이지만 돈이 생기는 좋은 부서에 보냈다. 상사는 그 당시 나에게 농담하면서 “당신은 흠차대신[欽差大臣-청대(淸代)에 특정한 중대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황제를 대리하여 파견된 관리]처럼 가서 공장의 손실을 최대한 줄여주세요.”라고 말했다.
새 근무지에 가서 며칠 관찰한 후,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외부 회사에서 우리 회사에 납품한 제품의 수량을 점검할 때 누군가에 의해 수량이 부풀려졌고 나는 그런 현상을 엄숙히 제지했다. 그들은 내가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몰래 나에게 돈을 건넸지만 나는 받지 않았고 나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어서 공평하고 공정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오늘날 도덕이 떨어진 사회에서 만약 내가 파룬궁을 수련하지 않았다면 주는 돈을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편법을 써서라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시각각 내가 대법제자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나쁜 것에 물들지 않았다.
근무하면서 나는 자신의 편리한 조건을 이용해 중생들을 구했다. 한번은 한 고객이 우리 공장에 일을 처리하러 왔다가 길을 몰라 나에게 어떻게 가야 하는지 물었다. 나는 그를 데리고 가면서 진상을 알렸는데 그는 매우 공감했다. 그에게 삼퇴를 해주려고 성씨를 물었더니 그는 ‘수(舒)’씨라고 했다. 내가 어떤 이름을 지어드릴지 묻자 그는 바로 ‘정의(正義), 수장정의(舒張正義)’라고 말했다. 나는 또 그에게 전국적으로 많은 사람이 장쩌민을 고소한다고 알려줬고 그는 어떻게 고소하는지 물었다. 나는 그가 동의하기만 하면 내가 다 알아서 해주겠다고 했더니 그는 고맙다고 했다. 내가 그와 헤어져서 가고 있을 때 그는 나에게 “누님, 저에게 그 일(삼퇴, 장쩌민 고소를 말함)을 해주는 것을 잊지 마세요!”라고 외쳤다. 나는 알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이 직책은 규정대로라면 보통 몇 달밖에 머무르지 못하며 교체해야 한다. 그것은 시간이 길어지면서 그 부서의 사람들과 친해지면 모두 음모를 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서 퇴직할 때까지 근무했다.
퇴직 몇 개월 전에 절차를 밟을 때, 상사가 나를 다시 채용하려고 찾아왔지만 나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상사는 아주 유감스러워했고 동료들도 그렇게 좋은 직장을 어디 가서 찾느냐면서 아쉬워했다. 농담으로 내가 할머니가 되어 손자를 보는 것도 아닌데, 한가하고 자유로운 직업인데 몇 년 더 벌면 얼마나 좋냐고 했다. 사실 그들은 대법제자가 중생을 구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나는 집에서 막내라 총애를 받는 편이었다. 아버지는 현(縣) 간부고 언니, 오빠는 모두 좋은 직장이 있었다.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는 나를 한 국영기업에 취직시켜 주셨고 일도 비교적 편하고 자유로웠다. 그래서 성격도 비교적 나약했다. 대법을 수련한 후 나는 성격이 더 명랑하고 밝게 변한 것을 느꼈다. 관대해지고 양보하며 고생도 견딜 수 있게 됐다. 대법을 수련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속인과 마찬가지로 매일 길거리 춤을 추거나 마작을 하면서 인간 세상에서 영원히 길을 잃었을 것이다.
사부님께서 저를 미혹 중에서 깨우치게 해주시고 자비롭게 보호해주신 것에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법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서: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서: ‘정진요지-불성무루(佛性無漏)’
원문발표: 2020년 3월 3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언행으로 대법을 실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3/30/403111.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