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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적인 데에서 자아를 내려놓기까지

글/ 산시(陝西) 대법제자

[밍후이왕] 양친이 모두 수련하면서 나는 운이 좋게도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대법을 수련하고 있다. 대법에 대해 모호하여 의혹을 품기도 했지만 20여 년간 수련하면서 분명해졌고, 피동적으로 수련하던 데에서 주동적으로 수련하게 되었다.

1999년 중공이 박해를 시작하면서 나는 수차례 불법적으로 가택수색, 협박, 납치를 당했고, 심지어 가족과 생사이별을 겪었다. 이렇게 많은 일을 경험하고도 다행히 나는 수련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박해에서 초탈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사존께서 보우하신 것임을 알고 있다.

사부님께서 ‘홍음’에서 말씀하셨다.

“속인은 나를 모르나니나는 심오 속에 앉아 있도다이익과 욕구 속에 나 없나니백년 후에는 오로지 나로다”[1]

여러 해 동안 나는 줄곧 곤혹스러웠다. 이 속에서 ‘나’가 누구를 가리키신 것일까? 그래서 내 수련의 매 한 걸음은 자아에 대해 끊임없는 인지하는 과정이 관통돼있었다.

1. 다른 의견을 듣지 않던 데서 나(私我)를 내려놓기까지

나는 외동딸로,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고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데다 학교성적도 비교적 좋아서 남을 내려다보는 우월감이 있었으며 자존심도 강했다. 성인이 되어 수련생들과 접촉했을 때는 기술적으로 아는 것이 좀 많아 수련생의 건의를 듣지 않고, 나와 관점이 다르기만 하면 즉시 반박했다. 다른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의 나는 나이도 어리고 경솔했다.

일부 좌절과 마난을 경험하고서 참음을 배워내고, 대법의 요구에 대조해 일을 하기 시작했지만, 자신의 이런 상태가 ‘나’를 보호하는 것임을 인식하면서 눈에 거슬리는 일부 사람이나 일에 대해 점차 일부러 인내하게 되었다. 다른 사람의 말이 내 관념에 부합되지 않을 때, 안색은 나빠졌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참았다. 이렇게 몇 번의 고험을 경험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런데도 여전히 자기가 고통 속에 빠져 있는 느낌이었으며, 항상 자기가 옳다고 여기면서 고뇌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도 몰랐다.

그때 항상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참음(忍)은 心性(씬씽)을 제고하는 관건이다. 화가 나 원망하고, 억울해하면서 눈물을 머금고 참는 것은 속인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는 참음이다. 화를 내거나 원망함이 전혀 생기지 않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는 것이야말로 수련자의 참음이다.”[2] 나는 이 경지를 마음속으로 동경했지만 어떻게 도달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작년이 바로 그 전환점인데, 나는 불법적으로 10일간 세뇌반에 감금되었다가 결국 사부님의 가지 하에 정념으로 벗어났다. 돌아온 뒤에 자기가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 같았는데, 늘 이전의 그 나에서 떨어져나온 느낌이었다.

가장 뚜렷한 것은 어느 한 번 수련생의 집에 갔을 때였다. 가기 전에 이메일로 연락했을 때 좀 오해가 있어 수련생이 나를 만났을 때 나를 원망하며 한바탕 나무랐다. 예전이라면 나는 급히 변명하고 억울함을 느끼고 나서야 참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계속 활짝 웃으며 이 일을 지켜보고 변명도 하지 않았는데, 그녀가 하는 말이 ‘나’를 나무라는 말 같지 않았다. 이런 느낌을 예전에는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미묘하지만 억울하거나 화가 나지는 않았는데, ‘나’와는 상관이 없는 상태였다. 예전에는 이 일이 나에게는 시험이었는데, 지금의 나는 이것을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다.

2. 곤란한 생활, 애써 버티던 데서 더는 자아를 걱정하지 않다

나는 프리랜서라서 수입이 일정하지 않고, 우리집이 20여 년간 박해를 당하면서 저축해둔 돈도 없다. 가족 수련생을 급히 구조하느라 내 예금을 거의 썼는데, 그즈음 직업도 불안정해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

4년 전 가장 처음 이 곤경에 부딪혔다. 당시 가족 수련생이 납치되어 급히 변호사를 선임해야 했기에 내가 저축해둔 돈을 거의 다 썼는데, 이때 갑자기 일거리도 없어져 수입이 없었다. 하지만 급전이 필요한 곳이 여전히 많았다. 나는 너무 당혹스러웠고, 돈이 없어 벼랑 끝에 놓인 것 같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애가 타 법공부도 잘 안 됐지만 방법이 없었다. 마지막에는 그래도 스스로 마음을 내려놓고 안을 향해 찾으며 자아를 돌파해 보름간 심경을 바꾸고 곤경을 돌파했다. 그 보름 동안의 시달림에 나는 돈에 대한 의존과 육친에 대한 집착을 깊이 인식했다. 자신이 재물에 대한 보장 없이는 살아가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 것 같았는데, 생사관을 넘는 것과 같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고대에 수련하는 사람은 모두 돈, 지위 등 모든 물질과 명리(名利)를 포기하고 사회에서 행각하거나 구걸하고, 산에 들어가 수련했는데, 재물에 대한 포기는 그들이 가장 첫째로 해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돈에 대한 의존과 갈구를 ‘나’로 여기면서, 그것을 제거하느라 죽을 둥 살 둥 했는데, 얼마나 우습나.

2019년 상반기에 또 한 번 경제적인 곤경에 처했는데, 거의 같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처음에만 당황하고 곧 어느 것이 진정한 나인지 명백해져 바르지 않은 사상을 배척하고 다시 유유자적한 상태로 돌아왔다. 비록 그 속의 깊은 곳에 있었지만 오히려 ‘나’와는 무관했고, 당연히 소위 그 곤경이라는 것도 없어졌다.

3. 자기중심적으로 말하던 데에서 ‘나’와는 무관한 데에 이르다

수구, 나에게는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나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주관의식이 강하고 성격이 강해 주위 발생한 일에 대해 늘 몇 마디 해야 한다. 질투심, 쟁투심, 환희심 등 집착심의 영향으로 그 몇 마디에는 차가운 조소와 신랄한 풍자가 적지 않다. 매번 의식은 하지만 말이 이미 나간 뒤다.

나는 점점 입을 열기 전에 수구를 의식할 수 있게 되어 마음으로만 생각하고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느낌은 참으로 견디기 힘들었는데, 진심으로 말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법이 요구한 대로 해내야 한다고 자신을 핍박한 것이다. 이것은 도리어 진정한 개변이 아니었고, 말하고자 하는 그 마음이 진정한 내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는 각종 후천적인 관념과 집착이 나의 대뇌를 통제하여 반영해낸 생각이었다.

더욱이 주위 수련생들이 법에 부합되지 않는 일을 했을 때, 예를 들어, 일부 수련생은 병업상태가 나타난 뒤에 심태를 파악하지 못하고 병원에 가서 치료받고, 남녀수련생 사이에 주의하지 않는 등등 문제가 나타나면 나는 당당하게 나서서 이 일을 지적해야 한다고 여겼는데, 이것이 대법에 먹칠하는 일이므로 수련생을 일깨워야 하다고 생각했다. 보기에는 논리적으로 무슨 문제가 없지만 실행하면 늘 모순이 발생했다. 때로는 자신이 너무 억울했다. 분명히 내가 옳은데, 어째서 상대방은 내가 말하는 대로 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도리어 대법 중의 옳고 그름은 누가 이치가 있는가로 구분하는 것이 아님을 잊었다.

고집을 부릴수록 내려놓지 못했고, 억울할수록 더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때, 나의 목적은 이미 불순해졌고,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해 고려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아를 실증하고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하게 하려 했으며, 대법을 실증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나는 항상 한마디 말을 하는데, 만약 한 사람이 어떠한 관념도 없이, 개인의 이익에서 출발한 것이 아닌, 진심으로 남이 좋아지도록 남에게 그의 부족함을 말해주거나, 혹은 그에게 어떤 것이 바른 것이라고 알려준다면, 그는 감동하여 눈물을 흘릴 것이다.”[3]. 하지만 나는 줄곧 이런 것을 체험하지 못했다.

최근에 나의 사유방식이 변한 후에 많은 말이 입가에 다다르면 갑자기 무의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수구는 이렇게 한 가지 간단한 일로 변했다. 심경이 변한 후에 한 가지 일을 보고 표면적으로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누구든 어느 일보에 다다르면 무슨 일이 나타나기 마련인바, 수련생 곁에서 사부님께서 지켜주고 계시며, 어떻게 힘들든지 모두 여전히 법공부와 수련을 견지하고 있으며, 모두 사부님께서 안배하신 길을 걷고 있다. 나는 또 무엇에 집착하는가?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는 그 ‘자아’는 마치 부서진 것 같았고, 온몸이 가벼워진 것 같았다. 수련생과 교류할 때, 자기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더 많이 들었다. 때로는 무의식적으로 몇 마디 말을 하는데, 수련생이 이를 듣고 갑자기 크게 깨달았으나 나는 도리어 영문을 몰랐고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는 일이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심태가 바로잡힌 후에 한 그런 말은 사부님께서 나의 입을 빌려 수련생을 깨우쳐주시는 것이기에 ‘나’와는 무관한 것이다.

4. 목적을 가지고 제고하기 위해 수련하던 데서 자아를 내려놓기까지

수련하면서 정진하고 싶고 제고하고 싶은 이 자체는 잘못이 없지만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다른 한 극단으로 갈 수 있다. 본래 나는 단지 자신이 수련하면서 법의 요구에 따라 해야 한다는 것만 알았기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 나는 점차 내가 빗나갔다는 것을 발견했는데, 주된 표현은 다음과 같다.

1. 일을 잘못하는 것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가끔씩 자신도 모르게 돈을 더 얻고 돌려주지 않으면, 비록 금액이 적을지라도 마음속에 일어나는 첫 번째 반응은 두려움이었다. 이것 때문에 업을 짓고 층차가 떨어질까 두려웠다. 또한, 대법책을 만들다가 망치면, 대법에 죄를 범하는 것이 될까 봐 감히 태우지 못하고, 수련생더러 태우게 했다. 이런 일은 많으며, 가장 첫 번째 반응은 거의 다 자기가 업을 짓고 층차가 떨어질까 봐 두려워한 것이었지, 교훈을 얻거나 잘못한 이유를 안을 향해 찾아 다음번에 잘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2. 제고하기 위해 일을 했다. 막 진상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두려움 때문에 진상을 알리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는 정부에 맞서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떨어져 내려가기 싫고 층차를 제고하고 싶은 마음에 마지못해 사부님 말씀대로 했다. 당연히 심성이 제 위치에 있지 않아 효과도 좋지 않았다. 또 장쩌민을 고소하기 시작했을 때도 처음에 이해하지 못했지만 주위 수련생들이 다들 하는 것을 보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원만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마음속으로 애가 타서 추세에 따라서 했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대법제자는 중대한 책임이 있는데, 단지 개인적인 원만만으로는 안 되며, 반드시 세인을 구도하고 중생을 구도하는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이는 역사상 여태껏 없었던 일이다.”[4] 그러나 나는 두려움 등 사람 마음에 가로막혀 그 속의 의미를 느릿느릿 깨달았다.

이런 수련상태는 보기에는 수련을 위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개인 원만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고, 자아를 둘러싸고 전개하는 것이었다. 자기를 위하는 이런 심태 속에서 진정한 나를 잃은 줄 모른 채 내가 제고가 늦다고 느꼈는데, 발걸음이 멈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느낌이었다. 늦을수록 조급해졌으며 서둘러 제고하고 싶었다. 조급함은 또 자신을 계속 빗나가게 했고, 목적성을 가지고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함으로써 일찍이 스스로 사상을 불순하게 했으며, 사람을 구함에 있어 마땅히 있어야 할 효과에 도달하지 못했다.

지금의 나는 그렇게 많이 생각하지 않고, 단지 대법의 요구에 따라 하며, 세 가지 일을 잘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수련하여 원만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하자면, 일체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되어 갈 것으로 생각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당신이 얼마만큼 대가를 치르면 얼마만큼 얻는, 바로 이 이치다.”[5] 나는 내가 해야 할 일만 잘 하고 나머지는 더는 사람의 관념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수련하면서 떠오른 변화를 적어냈는데, 물론 이것은 극히 일부분이다. 대법은 내 생활의 모든 것을 일찍이 개변해주었다. 지금은 그렇게 많은 생각이 없고, 매일 심신은 편안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잘 하고 자기의 사명을 완성하고 있다. 동요하지 않고 수련을 처음과 같이 하는 것을 잊지 않으면 일체는 모두 가장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홍음-각자(覺者)’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무엇이 참음인가(何爲忍)’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싱가포르 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10- 밍후이왕(明慧網) 10주년 법회 설법’
[5]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20320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3/20/40271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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