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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 집착을 찾고 계속 정진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1. 마음 조용한 법 공부가 나를 도와 한 차례 한 차례 난관을 돌파

나는 비교적 고결하지만 단순한 사람이다. 어떠한 일에도 주견이 없지만, 남편은 개성과 능력이 강한 사람이라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남편이 주관한다. 남편이 나를 아껴주어 나는 안식처를 찾았다고 생각하며 그를 의지하며 살았다.

하지만 좋은 상황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아기를 낳자마자 병마에 시달려 한약, 양약, 물리치료에 거의 매일 병원에 가야 했다. 남편은 사업이 한창 잘 되어 바깥의 접대가 쉴 새 없이 많아 나에게는 아예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는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서 스스로 헤어나지 못했다.

방법이 없는 상황에서 친구의 소개로 파룬궁(法輪功)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연공하고 오래지 않아 온몸의 병이 다 없어져 마치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하고 온몸에 힘이 넘쳐났다. 법 공부를 중시하지 않아 책을 읽으면 교란이 심했고,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몰라 연공이 곧 수련인 줄 알았고 또 환희심이 나왔는데, 결국 사악이 남편을 조종해 나를 교란했다. 연공과 법 공부를 하지 못하게 하고 단체 법 공부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며 욕하고 때렸다. 나는 그때 안으로 찾을 줄 몰라 나약하던 자태는 버리고 남편과 싸우기 시작했다. 연마하지 못하게 하면 나는 더 연마했는데, 남편을 이기지 못해 나는 집에서 몰래 법 공부하고 연공했다. 줄곧 7.20까지 유지했다.

1999년 7월, 직장의 안배로 성 정부 소재지로 가서 한 달간 교육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동료가 가기 싫어해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집을 떠나 교육 장소에 오니 온몸이 홀가분했고, 이 기회를 잘 이용해 책을 읽고 싶었다. 아침에 동료들이 일어났을 때 나는 이미 한 강(講)을 다 보았고, 점심때 동료들이 낮잠 자는 동안 나는 또 한 강을 다 보았다. 그때는 거리에 인기 있는 드라마를 틀어 놓고 있었는데, 밤에는 책을 볼 곳이 없어 어두운 가로등 아래에 쪼그리고 앉아 한 강을 보았다. 하루에 법을 세 강의 씩 배우며 갈증을 채우듯 완전히 자신을 법 속에 녹아들게 했다. 예전에는 대법에 대해 감성적 인식만 있어 대법이 좋은 줄만 알았지, 어디가 좋은 줄을 모르고 법리를 알지 못했다. 그 한 달간의 법 공부로 나는 알았다. 대법은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으로 잘못이 없다.

7.20 이후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고 직장과 집안의 이중 스트레스가 있었다. 하지만 그 한 달간의 법 공부 기초가 있어 나의 마음은 더욱 확고해졌다. 직장의 수련생 한 명이 나에게 물은 적이 있다. “너 아직도 수련하니?” 나는 “예전엔 그렇게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는데, 인제 와서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어!”라고 대답했다. 그 한 달 동안의 법 학습 기초가 없었다면, 나는 99년 7.20을 넘어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에서 사부님의 자비로운 배치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대법이 가장 바른 것이고 사부님은 결백하며 나의 선택에는 잘못이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돌아오니 또 자유롭게 법 공부하고 연공하는 환경이 없어지고 수련생들과도 왕래가 없어 사부님의 신경문을 얻을 수 없었다. 법을 실증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은 더욱 몰랐다. 당시에 잘 알지 못하는 수련생이 나에게 필사한 경문을 주기도 했는데 나는 혹시 가짜일까 봐 감히 받지 못하고 집에서 ‘전법륜(轉法輪)’만 읽었다.

2003년이 되어서야 나는 잘 아는 노년 수련생을 만나 겨우 사부님의 신경문을 몇 편 받고 법을 실증하고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한동안 정진하다가 나중에 모함당해 세뇌반에서 박해당했다. 세뇌반의 악인은 가족을 부추겨 함께 나를 박해하게 하고, 육친정을 이용해 강제로 나를 전향시키려 했다. 그런 고압 하에서는 대법만이 나를 도울 수 있다. 그러나 법을 얻지 못해 나는 밤에 잠자는 시간을 이용해 ‘전법륜’의 내용을 회상하며 제목부터 기억하고 다시 아래의 내용을 기억했다. 나중에 ‘전법륜’의 대부분 내용이 마치 물 흐르듯이 머릿속에서 지나갔다. 세뇌반에서 불법 수감 중인 반년 동안 나는 기본적으로 ‘전법륜’을 연속해서 외울 수 있었다. 물론, 글자를 빼먹고 구절을 빼먹고 단락도 빼먹는 상황이 있었지만, 사오한 자의 세뇌 교육은 아예 작용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나 정법 수련에 대한 법리가 명확하지 못해, 개인 수련의 기점에 서서 이번 박해를 바라보았기 때문에, 구세력의 안배를 어떻게 부정하는지를 몰라, 사악이 틈을 타 가족을 조종해 나를 박해하게 해 가족이 대법에 죄를 짓게 했다.

집에 돌아온 후 남편은 다른 도시로 전근해서 나는 또 법 공부할 시간이 많아져, 수련생과 접촉하며 법 실증하는 일에 협력하기 시작했다. 밍후이왕(明慧網)에 접속할 기회도 생겨 수련생들이 발표한 문장을 보며 대법제자의 사명과 책임을 알았다. 순정한 마음으로 나도 자신이 법 실증하는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때 현지의 자료점이 파괴되고 자료가 부족해 나는 수련생들과 함께 협력하며, 사부님의 가지(加持)와 보호 아래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모르던 데에서 알게 되며, 자료점이 곳곳에 피어나고 우리가 어디로 가면 진상을 어디까지 뿌렸다.

그러나 수련 환경이 개선되고 수련 형세가 느슨해지자 나는 법 공부를 느슨히 하고 일하는 것에 집착해 또 틈을 타였다. 미행당하고 감시당하며, 두려운 마음이 중해 수련생들과 감히 접촉하지 못하고 사람 구하는 일을 감히 하지 못해 마음이 극도로 고통스러웠다. 바로 그때, 나는 무심코 남편의 휴대폰에서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한다는 메시지를 보게 되어 정말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이미 자신을 수련해야 한다는 것을 잊고 그를 비난하고 훈계하다가, 집에서 넘어졌는데 당시에 일어나지 못해 간신히 일어나 한쪽 다리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조급해하며 병원에 가자고 했지만 나는 절대 동의하지 않았고, 며칠 지나면 낫는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렸다. 이것은 박해다. 비록 내가 누락이 있지만 절대 이런 박해를 인정하지 않는다. 나에게는 확고한 생각이 있었다. ‘절대 다칠 수 없다.’ 그리고 행동에서도 인정하지 않고 심한 고통을 참으며 무엇을 해야 하면 무엇을 했다. 평소대로 출근해 급한 일을 처리한 후 며칠 휴가를 내어 집에서 법 공부를 강화했다. 1~2주 후에는 거의 정상적으로 걸을 수 있었다.

이번 교훈을 통해 나는 겉으로는 더 이상 크게 떠들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내려놓지 못했다. 남편의 휴대전화 메시지에 민감하고 남편의 행방에 관심이 커지며 의심이 깊어져 고통스러웠다. 나는 사부님의 법이 생각났다. “법은 일체 집착을 타파할 수 있고, 법은 일체 사악을 타파할 수 있으며, 법은 일체 거짓말을 타파해 버릴 수 있고, 법은 정념(正念)을 확고히 할 수 있다.”[1] 나는 또 ‘전법륜’을 외우기 시작했다.

법을 외우는 과정은 마음을 닦는 과정이고 고생을 겪는 과정이며 정념을 확고히 하는 과정이다. 법을 외우는 과정에서 조급한 마음, 임무를 완수하는 마음, 끝없는 대법을 작디작은 나의 마음에 담으려는 마음, 사부님께 불경(不敬)하고 법에 불경한 마음, 대법을 이용해 난을 해결하고 원만을 구하려는 등 사람 마음을 닦아내야 하는데, 법을 외우는 것은 단지 대법에 동화하기 위해서다.

그때 나는 걸으면서 외웠는데 멈출 수가 없었다. 멈추기만 하면 서서 잠들 수가 있었다. 하루 한 시간 이상 쉬지 않고 걸으면 힘들어서 피곤하고 기억도 하지 못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지금은 법 암송이 매우 쉬워져 법 공부를 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외워낼 수 있고, 매일 두 시간씩 쉬지 않고 걸어도 피곤한 느낌이 전혀 없다.

법 암송을 통해 나는 주이스(主意識)를 강화했고, 법 암송을 통해 나는 안으로 찾는 것을 배웠다. 많은 내려놓지 못한 사람 마음을 찾았고 대법의 법리가 부단히 드러났다. 법 암송을 통해 나는 일사일념을 닦는 것을 배웠고, 남편에 대한 정과 명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았으며, 자신을 수련인으로 여기고 고생을 낙으로 삼았다.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당신들은 미혹 속에서 수련하므로, 그 법이 어떠한 모습인지 보지 못한다. 진정으로 보았을 때는, 그 어떤 언어로도 형용할 수 없고, 형용할 길이 없다. 나는 과거에 당신들에게 알려주기를, 글자마다 층층이 겹친 불ㆍ도ㆍ신이라고 했다. 당신들은 사부가 모든 것을 그 법 안에 압축해 넣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며, 당신들 현재 사람의 사상으로는 그 한마디 말을 이해할 수도 없다. 무엇이든 모두 얻을 수 있는데, 당신이 마음을 어떻게 쓰는가에 달렸고, 당신들의 심태가 어떠한가에 달렸다. 그 법 안에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수련은 엄숙한 것으로서, 약간의 모호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각종 각양의 순정하지 못한 사상을 품은 채 그 법을 보고 그 책을 보면,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사람들, 많은 대법제자가 박해받은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법을 볼 때 마치 제고가 없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사실 당신들이 그때 머릿속에 담은 것은 모두 박해의 일이어서, 그 마음이 조용해지지 못했다. 수련은 엄숙한 것으로, 당신이 반드시 순정한 상태로 아주 솔직하고 성실하게 보고 수련해야만 비로소 제고가 있을 수 있고 수확이 있을 수 있다.”[2]

2. 안으로 찾아, 근본 집착을 찾아내다

자신의 수련 여정을 돌아보면서 생각했다. ‘왜 이 고비와 난들을 만났는가? 왜 꾸준하게 정진하며 법 공부를 할 수 없는가? 매번 문제에 부딪혀야만 법 학습을 강화하는가? 왜 “수련을 처음처럼” 하지 못하는가?’

나는 자신의 수련에 큰 누락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수련에 들어왔다. 방금 수련에 들어왔을 때 나는 대법에서 해탈을 얻으려고 했다. 나는 인생은 덧없고 세상은 험하며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믿을 수 없지만, 대법 이곳은 정토이고 서로 다투거나 속이지 않으며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것이 바로 자아에 대한 집착이다. 자신의 명, 리, 정에 집착하는 것이다. 수련하러 온 게 아니라 보호를 구하러 온 것인데 나는 이곳을 피난처로 여겼다. 남편에게서 받지 못한 것을 여기에서 얻었기 때문에, 당시 남편의 필사적인 반대에도 불구하고 수련을 계속해야 했던 것이었다.

세뇌반의 고압 속에서, 그런 극단적이고 사악한 환경에서, 자신이 전향될까 봐 수련성취하지 못할까 봐 두려워했다. 그것이 바로 자아에 대한 집착이고, 원만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위선 앞에서 육친정 앞에서 나는 또 남편에게 환상이 생겨, 그가 나를 도와 해탈시켜주기를 바랐는데, 그 결과 사악이 남편을 조종해 나를 박해하게 했다.

나온 후 사부님의 가지 하에, 수련생들과 함께 법을 실증하고 중생구도하는 중에서 나는 점차 자신의 길을 걸어나갔다. 그런데 다시 자아가 팽창하기 시작했고, 나와 사부님과의 관계, 나와 대법과의 관계, 나와 수련생과의 관계를 바르게 놓지 못했다. 수련생이 법에 있지 않은 행위를 보면 눈에 거슬리고 다른 사람을 바꾸려 하며 자신을 실증하려 해 수련생과 간격이 생겨, 그 결과 또 사악이 틈을 타 악인을 조종해 나를 미행하고 감시하게 했다.

자아에 대한 집착이나의 근본 집착이다.

내가 정법수련의 길을 바로 걸을 수 있을 때, 끊임없이 정진할 때는 자신을 내려놓고 정체에 녹아들 수 있을 때였다. 두려운 마음이 중해 나오지 못할 때는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고 위험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며 정체를 고려하지 않을 때였다.

그동안 수련의 형식에만 치중했다.—법 공부, 연공, 진상 알리기. 표면의 일을 하는 데만 치중하다 보니 본질에서 자신을 개변하지 않아 수련이 무엇인지, 어떻게 수련하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수련인가?

사부님께서 알려주셨다. “만약 정말로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을 타파하고 사람의 본성적인 견해를 되돌려 나타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온 그곳이다. 초기에 형성된 당신의 관념이 바로 초기에 당신을 만들어낸 곳의 관념이다. 하지만 후천적인 의식관념을 타파하기란 아주 어려운데 이것이 바로 수련이기 때문이다.”[3]

나는 이해한다. 사부님께서 ‘전법륜’에서 논술한 것은 바로 초기에 만들어진 우리의 관념이다. 법을 배우는 목적은 바로 생생세세 형성된 다양한 관념을 제거하고, 대법에 완전히 동화하여 대법의 우리에 대한 일체 요구를 해내는 것으로 바로 반본귀진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련이다.

나는 이제 사부님께서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에서 ‘수련’에 관하여 하신 설법을 조금 이해했다. “당신들은 아는가? 단지 이 하나의 수련 문제만 하더라도 우주의 낮은 층에서는 대단히 복잡하지만 고층차에 이르면 간단한 것으로 수련이라는 개념이 없으며 오로지 업력을 없애는 개념만 있을 뿐이다. 더욱 높은 층에서 말한다면 모든 번거로움은 단지 하늘로 올라가는 길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며, 더욱 높은 층에서는 무슨 소업이요, 무슨 고생이요, 무슨 수련이요 하는 이러한 개념이 없으며 바로 선택이다! 우주의 고층차는 바로 이런 하나의 이치이며, 보아서 누가 되면 바로 그를 선택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이치이다. 수련이라고? 우리들은 수련을 배치하지 않았다. 무엇이 수련인가? 우리들은 그를 깨끗이 씻어버리며 한 걸음 한 걸음 위로 올라가면서 깨끗이 씻는데 바로 깨끗이 씻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층차 중에서는 길을 닦고, 번거로워하고, 고생하고, 소업하고, 수련을 하는 등 이렇게 닦고 저렇게 연마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4]

내가 이해하기로 우리들에 대해 말하면, 수련은 바로 선택이다. 자신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대법을 선택하는 것이고 100% 신사신법(信師信法)하는 것이다.

자아를 내려놓고 마음을 가라앉혀 더 이상 허황한 생각을 하지 않고 걱정하지 말아야만, 생명의 진정한 해탈과 홀가분함을 느낄 수 있다. 자아를 내려놓아야만 법을 으뜸으로 보고 진정한 대법제자가 될 수 있으며 진정으로 대법에 동화할 수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교란을 배제하자(排除幹擾)’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9 – 2009년 대뉴욕국제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전법륜 [제2권]’
[4] 리훙쯔 사부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원문발표: 2020220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2/20/40047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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