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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인에 대한 정(情)의 교란을 경계하자

대법제자, 어떤 정황에서든 세 가지 일 잘해야 한다

글/ 구이저우(貴州) 대법제자

[밍후이왕]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어떤 일이든지 모두 인연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사람은 왜 사람이 될 수 있는가? 바로 사람에게는 정(情)이 있으며, 사람은 바로 이 정을 위해서 산다. 육친정ㆍ남녀지정ㆍ부모지정ㆍ감정ㆍ우정, 매사에 정분(情份)을 중시하며, 곳곳마다 이 정을 떠날 수 없다. 하려고 하거나 하지 않으려고 하거나, 기뻐하거나 기뻐하지 않거나, 사랑과 미움, 전반 인류사회의 모든 것이 전부 이 정(情)에서 나온 것이다. 만약 이 정을 끊어버리지 못하면 당신은 수련하지 못한다. 사람이 이 정에서 뛰쳐나왔다면 누구도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며, 속인의 마음은 당신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그것을 대체하는 것은 자비이며, 더욱 고상한 것이다.”[1]

사부님께선 법에서 매우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우리 대법제자는 수련 과정 중에서 끊임없이 이런 집착을 제거하지만 우리는 속인 중에서 수련하기에 속인과 접촉할 때가 많고 거기에 속인 중에서 장기간 형성된 관념과 습관 때문에 정이 표현되어 나올 때 흔히 알아차리지 못한다. 심지어 그 속에 빠져 교란받고도 모르거나 혹은 어쩔 수 없어한다.

1. 육친 정의 교란

우리 이 법문은 속인 사회에서 수련한다. 절대다수 수련인은 모두 가족과 자녀가 있다. 홀몸이더라도 친척, 친구가 있다. 그럼 인정이 오가는 중에 정의 교란이 체현된다. 수련인의 주이스(主意識)가 강하지 않고 법을 다그쳐 배우지 않으면 정의 교란에서 벗어나기 몹시 어렵다.

내 주변에는 이런 두 수련생이 있다. 모두 99년 이전에 법을 얻은 노제자다. 20년의 비바람 속에서 사악한 탄압 속에서, 장쩌민 고소 중에서 매우 바르고 표현이 매우 좋았다. 세 가지 일도 비교적 잘했으며 중생 구도(救度)에 큰 노력을 했다. 그러나 최근 그녀들에게 모두 어느 정도 느슨함이 나타났고 수련상태가 예전과 같지 않았다. 원인을 따져보면 주요하게 정의 교란을 받아 고난 속에 빠져 고전분투하고 있었다.

한 수련생은 남편에 대한 원망이 매우 깊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녀가 그녀 남편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말을 늘 들었다. 방관자로서 그녀가 너무 심하게 정에 이끌린 것을 알지만 법에서 교류하기 어려웠다. 이리하여 이 수련생의 상태는 좋지 않았다. 심신이 세상사에 얽매여 세 가지 일하는 데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다른 한 수련생의 정황은 정반대였다. 그녀 남편은 그녀를 매우 잘 대했다. 그녀를 세심하게 돌봐 그녀는 거의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매사에 그녀 남편에게 의지했고 심지어 본인이 법 공부하는 대법 책도 그녀 남편이 치웠다. 그러나 그녀 표현 상태는 좋지 않았다. 엄중한 ‘병업’ 가상이 나타났다. 글씨를 잘 보지 못했고 무엇이든 기억을 잘하지 못했다. 평소 일상생활을 모두 가족이 챙겨주며 돌보아 주어야 했다. 대법제자 같지 않고 오히려 돌봐줘야 할 환자 같았다. 이 두 수련생은 표면적인 정황은 같지 않지만 사실 깊이 따져보면 한 사람은 표현이 미움이고 한 사람의 표현은 사랑이지만 모두 육친 정에 대한 집착 때문에 불러온 교란이다. 아울러 그녀들은 모두 후손에 대한 육친 정에 강렬하게 집착했다.

어떤 수련생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자녀에게 끊임없이 대가를 치르는 것으로 혼동하고 있다. 집안일을 다 맡는다. 자녀 심지어 손자, 손녀 일도 모두 도맡아 자기의 많은 시간을 점유했기에 세 가지 일을 잘하고 싶어도 힘이 따르지 않았다. 장기간 이런 상태에서 배회하면서 매우 고뇌하고 어쩔 수 없어 하면서도 이것이 육친 정에 대한 집착 때문에 가져온 교란임을 의식하지 못한다.

2. 수련생 사이의 교란

물욕이 넘쳐흐르는 지금 사회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심으로 대하는 사람이 적고 다수는 서로 이용하고 서로 속고 속인다. 특히 중국에서 악당의 당(黨)문화 해를 입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알 수 없는 한을 품고 있으며 이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있다는 것과 양심과 선한 마음씨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고 선악에는 응보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에 모순에 부딪히면 투쟁으로 문제를 해결할 줄밖에 몰라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는 매우 긴장한다. 그러나 대법제자 사이는 다르다. 대부분은 평화적이고 선량하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서로 믿는다. 이런 환경에서 다수 수련생은 다른 사람을 경계하지 않고 마음의 문을 연다. 매우 평온하고 마음이 편안하다. 이런 환경에서도 정의 교란이 생길 수 있는데 바로 수련생에 대한 정이다.

어떤 수련생은 놀러 다니기 좋아한다. 일이 있든 없든 수련생 집에 가 이야기를 나눈다. 자기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수련생을 찾아가 털어놓고 자기감정의 필요를 만족하려 한다. 법을 실증하는 일 때문에 얘기 나누거나 공동으로 무슨 일을 하려고 상의하거나 수련생들이 함께 법 공부하고 수련 체험을 토론 연구하는 이것은 물론 반드시 해야 하기에 비난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수련 상의 일을 교류할 때는 많지 않고 너무 자주 집안일이나 당신은 좋고 그는 나쁘다는 것과 같은 말은, 서로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 공부하고 일하는 것에 영향 주지 않겠는가? 게다가 중국의 지금 정황에 안전 문제도 있는데 마땅히 자아 단속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울러 수련생에 대한 이런 정은 악이 이용하여 빈틈을 타 소란을 피우고 박해할 수 있지 않겠는가? 중생 구도 시간이 다급하고 어려움이 많으며 임무가 중한 정황에서 우리에게 어디에 이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한가한 시간이 있는가?

법에서 우리는 매 사람의 수련의 길은 다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즉 매 사람은 모두 반드시 독립적으로 자기의 수련의 길을 걸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도움에 의지하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떠나면 스스로 어떻게 수련할지 모르거나 심지어 구체적인 일을 어떻게 할지 모르고 이 상태를 줄곧 바꾸지 않으면 이 사람은 수련 성취할 수 없다. 즉 그의 의뢰심을 버리지 않으면 원만으로 나아갈 수 없다. 아울러 수련 단체 중에 일부 오성이 비교적 좋고 능력이 좀 강한 사람은 흔히 수련생들이 의존하는 대상이 된다. 그에게 결정하라 하고 그를 따라가기 좋아한다. 이런 분위기에 이 사람의 과시심, 명을 구하는 마음을 조장하기 매우 쉽다. 그는 다른 사람이 본인을 의지하는 느낌을 누리기 좋아할 수 있어 점차 잘난 체할 수 있다. 법 공부를 중시하지 않고 자아 팽창 심리를 알아차리지 못하면 대법을 파괴하는 무슨 일을 하여 하루아침에 망칠 수도 있다.

사실 진수(眞修)하는 대법제자는 모두 안다. 우리가 수련의 길을 걸으려면 사부님과 대법에만 의지해야지 사람을 배우고 법을 배우지 않아서는 안 되며 ‘법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다.’ 그러므로 수련생 사이에 절대 자기도 모르게 의뢰심(의존하는 마음)을 방종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해치고 자기를 해치는 엄중한 문제다. 이런 정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만고의 기연을 놓칠 수 있다.

3. 자아 교란

사람은 적막을 두려워한다. 사람의 칠정 육욕은 모두 그것의 동경과 털어놓을 대상이 있다. 상응하게 보답을 바라며 적어도 조금이나마 보답이 있길 바란다. 속인도 이 때문에 즐거워하고, 걱정하며 사는 재미를 느낀다. 혼자 있을 때 자기의 희로애락을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나눌 수 없으면 매우 괴로워한다. 장기간 이런 처지에 처하면 적막을 느끼게 마련이다. 어느 한 수련생의 일이 생각난다. 그때 그녀는 가족과 모순이 생겨 그녀의 남편, 아들이 모두 그녀를 떠나갔다. 그녀 표현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공허감을 느꼈고 마치 살아갈 수 없는 것 같았다. 이것이 아마 적막이 그녀 몸에 나타난 표현일 것이다.

또 일부 수련생은 속인 일에 매우 열중한다. 누구 집 자녀에게 소개팅해주고 다른 집 가정의 갈등도 참견하기 좋아하고 속인 중의 친척, 친구 모임에도 열심히 참가한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진상을 알리면 당연히 매우 좋지만 어떤 때 이렇지 않다. 떠들썩하게 노는 것을 좋아하는 속인 마음이 있어 그는 이렇게 한다. 그러고도 이것은 대법제자의 선량함을 표현한 것이라고 여긴다. 사실, 이것은 대법제자의 선량한 함의를 오해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자기가 적막함을 견뎌내지 못한 사람 마음의 표현이다.

그럼 한번 생각해보자. 우리 자신이 자기 정서를 통제하지 못하고 적막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어찌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배우고 연공하며 세 가지 일을 할 수 있겠는가? 마음을 조용히 하고 법을 배우지 못하면 고층 법리가 어찌 우리에게 펼쳐질 수 있겠는가? 법 글자의 뜻만 보면 어찌 높일 수 있겠는가? 어떤 때 심지어 법 글자 표면 뜻마저 알지 못하는데 어찌 수련할 수 있겠는가?

사실 정의 표현은 다방면이다. 물론 우리가 정을 내려놓는다고 해서 냉담하게 변하고 인정이 없으며 속인이 이해할 수 없게 변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최대한도로 속인 사회상태 수련에 부합되어야 하며 가정을 잘 수호하고 자기 일을 잘할 수 있고 친척, 친구들과 정상으로 교제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 내심은 반드시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중대한 사명을 가진 정법시기 대법제자라는 것을. 우리가 진정 잘해야 하는 것은 사부님께서 요구하신 세 가지 일이다. 그럼 우리는 각종 환경에서 일의 우선 순위를 분명히 가릴 수 있고 각 방면에서 관계를 잘 평형시킬 수 있으며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세 가지 일을 잘할 수 있다. 더 많은 중생을 구도하여 사존의 부탁에 어긋나지 말고 중생의 기대에 어긋나지 말자.

약간의 깨달음이니 법에 부합되지 않은 점은 수련생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원문발표: 2020127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20/1/27/4003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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