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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이 없어야 세상이 넓다

글/ 중국 대법제자 징롄(淨蓮)

[밍후이왕] 나는 대학에서 전문 기술직으로 근무했다. 1999년 초,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대법 수련을 들어섰다. 대법 수련은 나에게 도덕 수준을 높여주고 마음을 정화해줬을 뿐만 아니라, 일이 발생하면 ‘진선인(眞·善·忍)’의 법리로 자기의 행동을 대조하며 상대방 처지에서 문제를 고려하고 진정으로 타인을 위해 생각하는 좋은 사람이 되게 했다. 아래는 여러분에게 나의 47년간의 인생 중에서 가장 힘든 마음의 변화 과정을 교류하겠다. 대법 진선인의 법리가 나를 지도해 가정의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 남편과 그 가족과의 악연을 선해(善解)했다. 대법 수련생의 선량, 온화함과 관대함을 증명했다.

나는 1996년에 결혼하고 1998년에 시어머니께서 고향에서 도시로 오셔서 우리와 같이 사셨다. 시누이 4명이 있었고 남편이 일 년 내내 지방에서 일해서 집 안팎의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해야 했다. 시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오신 15년간 손님이 끊일 날이 없었다. 사람이 많을 때는 침대, 소파, 바닥에 자는 사람이 종종 있었다. 나는 지금까지 집에서 사람이 많은 것에 불평한 적이 없었고 음식을 많이 사 왔다. 그동안 시어머니의 옷들은 다 내가 사드렸고 몇 년간 아이들이 설날에 입는 옷도 다 내가 사줬다. 나는 그녀들을 친부모와 친자매로 대했고 그동안 사이좋게 지냈다.

남편은 내성적인 사람이고 무슨 말이든 마음에 담아 두었다. 1년에 집에 몇 번 오지 않았지만, 가끔 와도 양가 부모님이나 나와 딸에게 예전과 다름없이 잘해주어서 그의 변화를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2013년 상반기 어느 날, 나는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도 시인했다. 게다가 바로 나와 이혼하자고 했다. 그런데 그는 며칠 전 나와 딸하고 같이 외식할 때 “우리 가정이 금성탕지(金城湯池: 쇠로 만든 성과 둘러싼 끓는 연못, 견고하게 쌓은 성을 의미)처럼 견고해”라고 말했다.

우리 부부는 자수성가해 17년간을 함께 고생스럽게 걸어왔다. 그동안 나는 일편단심으로 그를 대하고 집에 올 때마다 항상 시중을 들어주고 집안일도 거의 한 적이 없다. 먹는 것, 쓰는 것, 입는 것 다 내가 미리 준비해 놨다. 세심하게 보살펴주고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말다툼하고 싸우는 일은 매우 드물었고 화목하고 온화하게 지냈다. 그가 갑자기 이혼 요구했다니 당시 나는 어리벙벙했다. 지금까지 이혼은 생각지도 못해서 당연히 동의하지 않았다. 첫째, 우리의 관계는 아직 되돌릴 수 없는 지경이 아니었다. 둘째, 딸이 막 고1로 올라가고 양가 부모님도 나이가 있으셔서 이런 큰 충격을 받아들이시기 힘들까 봐 걱정됐다.

나는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지 않았고, 돈을 들여 사진을 찍고 증거를 갖고 그들을 법정에 고소하지도 않았다. 나는 대법 수련생이니 모든 문제와 마주치면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으로 대한다. 나는 악한 마음으로 남편과 그 여자를 원망하지 않고, 잠깐의 만족감을 위해 그들에게 지위와 명예를 잃게 하지 않았다. 남이 나에게 좋지 않게 대할 수 있어도 나는 남에게 좋지 않게 대하면 안 된다. 남이 나를 해칠 수 있어도 나는 남을 해치면 안 된다. 나는 선한 방식으로 바르게 이 문제를 대처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계속 그에게 편지를 쓰고 문자를 보내 집으로 돌아오라고 권했다.

어느 날 갑자기 남편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슬프게 울면서 나에게 미안하고 잘못했다며 집으로 돌아오겠다고 했다. 나는 원망하지 않고 승낙했다. 예전 일도 언급하지 않았다. 잘못이 없는 사람이 있는가? 고치면 된다. 나는 여전히 예전처럼 그를 대했다.

2015년 직장에서 새집을 분양받았다. 방 세 개에 거실이 있고, 고층이었으며 엘리베이터가 있었기에 노인이 살기엔 환경이 매우 좋았다. 나는 집을 꾸미고 가전제품과 가구를 사는 데에 10만 위안(약 167만 원)을 썼다. 시어머니와 큰 시누이를 모시고 새집에 들어갔다. 그들은 매우 기뻐했고, 그렇게 해서 그녀 가족이 함께 모여 살게 됐다. 나는 그녀들을 자주 찾아갔고 매번 선물을 사고, 가끔 직장 주변 마트에서 채소와 과일을 사 갔다. 이렇게 일 년이란 시간이 지나갔다. 남편은 이상해졌다. 출장을 가서 집에 잘 돌아오지도 않고, 출장을 갔다 돌아올 때는 시어머니 집에 가서 자고 가기도 하며, 심지어 한번은 그 집 사람들 앞에서 나한테 “꺼져”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때 그와 다투지 않고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지 생각하며 묵묵히 눈물만 흘렸다. 그 일이 있고 난 뒤에도 나는 변함없이 그를 잘 돌봐줬다. 그런데 나중에 그에게 준비해준 옷들을 거의 입지 않았음을 알았다. 이것 때문에 시누이들이 내가 남편을 보살피지 않는다고 여겨 나를 원망했다. 심지어 어느 한 번은 셋째 시누이가 화가 나서 남동생(남편) 옷들을 챙기러 우리 집에 왔다. 게다가 동생이 외도도 하지 않았으며 내가 보살피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화를 내지 않았고 단지 일의 원인을 설명했다. 나중에 나는 막내 시누이에게 전화해 남편의 말과 행동을 알려주었더니 그녀는 듣고 나서 울었다.

2016년 9월, 남편은 우리 사이에 정이 전부 없어졌다며 다시 이혼을 제의했다. 나는 그때 여전히 이혼하지 않겠다고 했고 기다림을 선택했다. 남편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고, 딸이 온전한 가정에서 행복하게 잘 자라기를 기다리며, 양부모님이 마음 상하지 않고 노년을 보내기를 기다렸다. 그동안 나는 여전히 시댁에 가서 맛있는 것을 사드리고 관리비를 내드렸다.

2017년 설날까지 나는 남편을 만나지 못했다. 설날 전에 일찍 딸을 데리고 시댁에 가서 시어머니와 설을 보냈다. 나는 예전처럼 남편과 시어머니께 새 옷을 사드리고 시댁에 가서 시어머니를 보살피면서 청소하고 설날을 보내기 위해 준비했다.

설날 이틀 전에 막내 시누이의 남편과 아들이 와서 내가 잘 방을 그 부자에게 양보했고 나와 딸은 작은방에 있는 매트 위에서 잤다. 어느 날 조카가 침대의 나무 받침을 부러뜨렸는데 시누이의 남편이 나에게 “침대 품질이 왜 이래요?”라고 말했다. 나는 웃으면서 비상용 받침이 하나 있으니 같이 고치자고 했는데 그가 침대 매트리스가 이렇게 무거워서 우리 아들은 들 수 없다고 했다. 사실 조카는 이미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나는 그와 다투지 않고 조카에게 외숙모를 도와 침대를 들어달라고 했다. 조카는 두말없이 따랐고 같이 나무 받침을 고쳤다.

섣달 30일 날 눈이 엄청나게 내렸다. 나와 딸, 셋째 시누이의 딸이 설날 용품을 사러 나가려고 하는데 살 것이 너무 많아 막내 시누이의 아들을 데려가 물건을 들어달라고 하려 했다. 그런데 막내 시누이의 남편이 “눈이 많이 내려서 우리 아들은 가면 안 돼요. 눈을 맞으면 어떡해요? 형님댁이 딸을 데리고 눈과 바람을 맞으면서 가세요.”라고 말했다. 그때 내 마음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정말 참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데 나는 대법 수련생으로서 언제나 다른 사람을 고려하고 이해하며 용서해야 하고 그와 같이 대하면 안 됐다. 바로 두 아이를 데리고 가서 물건들을 많이 샀다. 집 입구에 도착했는데 시어머니는 한마디 말씀도 없으셨고 막내 시누이 남편 부자도 물건들을 받으러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을 악물고 참고 웃으면서 집에 들어갔다. 들어간 다음에 먼저 흰 우유에 빨대를 꽂아서 시어머니께 드시라고 드렸는데 시어머니가 드시면서 말씀하셨다. “이 우유가 ○○(남편의 친구)가 보내준 것보다 별로야!” 나는 웃으면서 “어머님, 제가 마트에서 그 우유를 찾아봤는데 없었어요. 나중에 찾으면 사드릴게요”라고 말씀드렸다. 남편은 설날에 집에 돌아올 줄 알았는데 결국 이번 설날에 집에 오지 않았고 그 여자하고 같이 설날을 보냈다. 사실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은 이미 남편 일을 알고 있었는데 나와 딸만 몰랐다. 이틀 동안 내 마음은 정말 큰 충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몸 상태도 안 좋았다. 그러나 나는 내색하지 않고 평소대로 그들에게 밥을 해주고 집 청소를 해주며 시어머니를 보살펴드렸다. 30일 날도 한 상의 요리를 차렸고 시어머니와 설날을 보낸 다음에 딸과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한 다음에 남편에게 문자를 보냈다. ‘당신, 돌아와요. 내가 이혼해줄게요.’ 그는 자신의 삶만을 위해 살아오면서 내게 평생을 빚졌다고 답장이 왔고 나는 눈물이 비 오듯 흘러내렸다. 이혼 절차 일에 시어머니를 뵈러 갔다. “걱정하시지 마세요. 그가 밖에서 잘살고 있으니, 제가 그를 축복할 거예요. 만약 그가 어디가 아프거나 돌봐줄 사람이 없거나 집에 돌아오고 싶으면 제가 옛날처럼 잘해주고 보살펴줄게요.”라고 말씀드렸다. 시어머니께서 듣고 나서 감동해 우셨다. 그제야 아들이 밖에서 이미 아이가 생겨서 이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알려주셨다.

나와 남편은 원만하게 이혼했다. 원래 남편이 집 한 채를 원했지만, 나중에 아무것도 달라고 하지 않았다. 게다가 집과 적금을 나와 딸에게 주었다. 우리는 합의 이혼을 했고 아무 경제적 분쟁도 없었다. 그는 계속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이혼 수속일을 남편에게 물었다. “우리 이혼 수속도 다 끝났고 당신 소원이 이루어졌어요. 이제 솔직하게 말할 수 있죠? 도대체 무슨 원인 때문에 점점 집에서 멀어졌어요? 왜 우리 사이를 만회할 수 없는 지경으로 만들었어요? 내가 대법 수련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아니면 내가 뭘 잘못했나요?” 그는 “당신은 모든 일을 다 잘했고 문제가 없어. 가장 중요한 원인은 내가 변한 거야. 본질이 변해서 그래. 내 직장은 일 년 내내 외지에서 공사(도로 보수, 다리 보수)를 하청받는 것이라, 만나는 사람과 환경이 매우 좋지 않아. 사실 처음에 몇 년간 나는 정말 순수했었어.” 그리고 나중에 딸이 남편을 고를 때 이런 직장을 가진 사람을 고르지 말라고 말했다. 또 집에서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나 달려갈 테니 알려달라고 말했다.

이혼 후 딸은 마음속으로 아빠를 계속 원망했다. 나는 딸에게 “아빠를 원망하지 마. 아빠는 너를 사랑했고, 이 몇 년간 줄곧 너에게 잘 해왔잖니. 아빠는 이미 새로운 인생을 선택했으니 우리 아빠를 축복해 주자.”라고 말했다. 지금 딸과 아빠는 잘 지내고 있다. 아이 아빠는 나에게도 매우 정중하다. 여름방학, 겨울방학마다 우리는 모두 같이 공항에 가서 아이를 마중하고, 영화도 보고, 밥을 먹고 생일을 보냈다. 우리 부모님과 가족들도 이 일의 결과에 매우 만족한다. 양가의 화목을 상하게 하지도 않으면서 일이 원만하게 해결됐다.

2013년에 남편이 막 이혼을 제안했을 때. 시어머니와 세 시누이는 모두 동의하지 않았다. 심지어 막내 시누이는 오빠랑 한바탕 싸웠다. 큰 시누이는 처음에 나보고 없는 사실을 꾸며낸다고 했고 자기 동생을 모함했다고 했다. 사실이 밝혀진 후에도 나를 원망했다. 그동안 나는 큰 시누이를 친언니로 대하고 존중하고 관심을 두고, 내 옷도 그녀가 좋아하면 다 주었다. 사이좋게 지냈는데 제일 힘들 때 오히려 위로의 말 한마디 없었다. 게다가 시어머니를 자기 집에 모시고 가서 나와 딸 둘만 덩그러니 남았었다.

2016년 9월 남편이 다시 이혼을 제안한 후에도 큰 시누이의 태도는 여전했다. 대략 한 달 넘어 큰 시누이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줄곧 톈진, 베이징에서 방사선 치료를 하고 두 차례의 큰 수술을 했다. 나는 그녀를 원망하지 않고 그녀의 처지를 이해했다. 2018년 겨울방학 때 큰 시누이가 집에서 요양하는 동안 나는 딸에게 3천 위안(약 50만 원)을 갖고 병문안을 가라고 했다. 셋째 시누이는 시골에서 살았고, 둘째 시누이는 외지에서 살았다. 그녀의 딸들은 매년 방학 동안 거의 우리 집에서 지냈다. 나는 여자아이 셋을 같이 보살펴 줬다. 먹을 것을 사줬고 맛있는 것을 해줬으며 방 정리를 해줬고 그녀들을 내 딸처럼 대했다. 먹는 것, 쓰는 것을 모두 책임졌다. 이혼한 후에도 그들이 우리 집에 오면 나는 여전히 옛날처럼 대했다. 셋째 시누이는 매우 감동했고, 내 딸에게 시골에서 자기가 심은 채소, 옥수수를 가져가라고 했다. 또 자주 자기 집에 놀러 오라고 했다. 셋째 시누이의 딸은 “이전에 우리 아빠 엄마가 이혼할 때 엄마는 온종일 울부짖었어요. 외숙모는 엄마하고 완전히 달라요. 외숙모에게서 나는 파룬따파의 아름다움을 보았어요.”

둘째 시누이의 딸은 우리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가장 길었다. 내가 해준 것도 가장 많다. 내 딸이 가장 힘들고 위로가 필요할 때 그녀는 모든 상황을 알고 있었지만 전화 한 통도 없었고, 문자 하나도 없었다. 셋째 시누이의 딸에게 들었는데 둘째 시누이의 딸은 남편의 여자를 본 적이 있었고, 외삼촌과 같이 자기 집에 갔었다. 누가 외숙모인지 자신에게는 다 마찬가지라고 했다. 내가 들은 다음에 마음이 정말 슬펐다. 또 어느 해 가족 여행을 가기로 했는데 둘째 시누이가 돈이 부족해서 돈을 내줬다. 올해 겨울방학에 둘째 시누이의 딸이 다시 우리 집에 왔는데 나는 수련생으로서 그녀를 용서해주고 심지어 더 잘해줬다. 그녀와 내 딸의 발은 모두 차가웠다. 나는 날마다 생강을 썰어서 뜨거운 물을 부어서 족욕을 하라고 했다. 이번 휴가는 막 그녀의 생일 기간이었다. 나와 딸은 그녀에게 옷과 케이크를 사주고 호텔에 가서 생일 축하를 해줬다. 이번 생일은 우리 셋 다 즐겁게 보냈다.

그리고 막내 시누이의 아들 이야기는 상세하게 하지 않겠다. 이 아이들은 나와 친해서 예전처럼 나를 ‘외숙모’라고 부르기도 한다. 모두 대법이 좋다는 것을 알고 나를 지지한다. 나중에 큰 시누이, 작은 시누이는 가족 모임에 날 초대했다. 나는 그녀들을 생각해서 갔고 그녀들은 모두 울면서 안타까워했다. 그녀들은 여전히 예전처럼 내 별명, 혹은 언니라고 부른다. 나를 여전히 그녀들의 가족처럼 여긴다.

파룬따파는 나에게 질병의 아픔을 제거해주고, 내 마음을 정화해줬을 뿐만 아니라 생명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해줬다. 완전히 남을 위하는 도덕적으로 고결한 좋은 사람이 되게 지도해 준다. 지금 내 마음을 그렇게 차분하고, 평화롭다. 수련은 정말 좋다. 파룬따파는 정말 좋다.

 

원문발표: 2019년 12일 1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2/14/37271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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