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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불가능해 보이는 일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존경하는 사부님 안녕하십니까!
수련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펜을 드니 감개무량합니다. 저는 1999년 1월에 법을 얻었고 20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당시 7개월 된 아이는 21세의 청년이 되었고 그해 젊고 유망한 저는 지금 중년이 되었습니다. 20년을 되돌아보니 다행히도 어지러운 세상을 떠돌아다니지 않았고 짧은 인생을 낭비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에서 제일 소중한 20년 동안 사존의 보호하에, 우주 대법의 지도하에 반본귀진(返本歸真)의 길을 걸었습니다.

20년 동안의 소소한 일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습니다. 편폭의 제한으로 20년간의 일부 일을 사존께 보고 드리고 수련생과 교류하려 합니다.

1. 법을 외우다

2005년 전후로 저는 전법륜(轉法輪)을 세 번 외웠습니다. 처음 외울 때 기계적으로 외웠습니다. 저는 기억력이 비교적 좋아 2년 넘게 어렵고 힘들게, 외우다 말다 하며 세 번 외웠습니다. 그때 제일 명확한 느낌은 발정념을 하면 마음이 조용하고 잡념, 교란이 없었습니다. 애석하게도 후에 견지하지 못했습니다.

한 번 멈춘 것이 10년이란 시간이 흘렀습니다. 2015년 연말 그때 저의 수련은 거의 절망적인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둘째가 한 살이 좀 넘었고 큰아이는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며 저는 출근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의 집은 경제적으로 궁핍했고 아이를 돌봐주겠다고 약속했던 시어머니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으며 남편의 형제자매도 도와주지 않고 늘 비웃었습니다. 저는 원망이 극에 달해 고통스러웠고 몸에 불편한 반응이 많이 나왔으며 가장 심한 것은 왼쪽 유방이 붓고 알 수 없는 액체가 흘러나왔습니다. 저는 몸 왼쪽이 아파 잠을 못 자서 유방암에 걸린 줄 알았습니다.

어느 날 저는 한 편의 교류문장을 들었습니다. 한 수련생의 여섯 살 난 손녀가 할머니에게 감옥에 있는 수련생이 만약 법을 외우는 것을 견지하고 발정념을 하면 나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후에 이 수련생도 법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이 교류는 저에게 매우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저는 자신의 이 난이 감옥에 있는 수련생과 상대적으로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며 반드시 이겨낼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2015년 섣달 그믐날 이틀 전인 12월 28일 보서 ‘전법륜(轉法輪)’을 들고 자신에게 오늘부터 법을 외운다고 말했습니다. 당시 일찍 세 번을 외웠으니 다시 외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을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외우기 시작한 후 그런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기억력이 매우 좋기에 법을 외우는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한 단락은 10여 분 외우며 긴 단락은 30분이면 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응된 신체와 마음의 반응은 매우 강렬했습니다. 마음이 너무 심란해 앉을 수 없고 설 수 없었으며 침대에서 바닥까지, 바닥에서 침대까지 거닐다가 머리에 벽을 치받았습니다. 머리는 터지는 듯했으며 얼굴에 열이 나고 속이 뒤집어지는 것이 정말 머리에서 발 끝까지 괴로웠습니다. 때로는 외울 수 없어 집에 있지를 못해 아이를 안고 밖에 나가 거닐었습니다. 때로는 매우 짧은 한 단락도 한 시간 외워도 외우지 못하고 한 단락을 익숙히 외우고 다음 단락을 외울 때 마치 전신의 힘을 다 쓴 것 같았습니다.

신체와 심리적으로 얼마나 괴롭던지 저는 자신에게 이것은 좋은 일이며 모두 사부님이 도와주신다고 말했습니다. 때로는 혼미할 정도로 울며 자신이 일찍 방자하고 오만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저는 자신이 우주 대법 앞에 비천하고 미미한 것을 똑똑히 보았으며 우주대법에 대한 경외심이 솟아올랐습니다.

저는 6개월이란 시간을 들여 ‘전법륜(轉法輪)’을 한 번 외웠습니다. 다 외운 그 날 저는 그곳에 멍하니 앉아있었습니다. 머릿속에 ‘나는 수련인이다.’라는 일념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갑자기 저는 수련인이라는 이 말의 함의를 명백히 알았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법을 외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지금은 제가 법공부하는 일종의 방식이 되었습니다.

법을 외우는 시간이 길어지고 횟수가 많아짐에 따라 안으로 찾는 것을 배우고 무조건 안으로 찾았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수련하고 일사일념을 잡고 자신을 보았으며 바르지 않은 사상 염두를 수련했습니다. 속인 습관의 사유방식을 고치고 수련인의 사상으로 문제를 보는 것을 배웠습니다. 선량을 배우고 자비를 체득하고 깨달았으며 당 문화의 각종 표현을 똑똑히 인식했습니다. 동시에 신체는 정상으로 회복되고 불편한 느낌이 없어졌습니다. 가정환경도 변했고 큰아이는 순조롭게 중점대학에 붙었으며 남편은 갑자기 월급이 올랐습니다. 저도 적합한 일자리를 찾았으며 아이도 돌볼 수 있고 또 세 가지 일을 할 수도 있게 되었습니다. 가족관계가 화목하게 변했고 시부모, 고모, 백부도 모두 우리 가족에 관심을 두고 대해줍니다. 그뿐만 아니라 저는 두 차례나 경찰의 납치를 피했으며 두 차례 모두 제가 막 떠나자 경찰이 왔습니다.

매번 ‘전법륜(轉法輪)’을 한 번 외우면 마치 한 층의 껍데기를 벗은 것 같았고 매번 다른 체득과 깨달음이 있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여 느낌은 표현할 수 없습니다.

2. 불가능해 보이는 일-수련생을 구출해 출옥

2011년 가을, 우리 친정집이 있는 도시에 대규모의 단체납치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50여 명의 대법제자가 같은 시간에 납치되었습니다. 그 전에 저도 구출 항목에 많이 참가했지만 한 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납치된 사건은 처음입니다.

그때 저도 한 달간 불법 감금된 후 보석으로 집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으며 심신에 입은 상처도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원래 전문지식도 다 잊어버렸고 익숙히 알고 있던 곳도 어느 차를 타야 하는지 몰랐습니다. 상점의 아이 옷을 보고 멍하니 이렇게 작은 옷을 어디에 쓰는가? 하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태에도 저는 자신을 생각하지 않고 현지-박해가 계속된 곳에 갔습니다. 가기 전에 남편은 저에게 당신이 가서 무엇을 하겠는가, 당신 신체가 괜찮겠는가? 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순식간에 눈물이 솟아났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붙잡혔는데 가봐야죠.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22개월에 걸친 구출 과정을 벌여 2013년 10월, 이번 납치에서 불법적으로 14년의 중형을 선고받은 수련생을 감옥에서 구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우리는 일반 사람들의 규칙과 제도를 타파하고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불가능을 현실로 바꾸는 기적을 만들어냈습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변호사를 선임했습니다. 1심 재판, 2심, 실형을 선고받고 노동교화소로 가는 과정까지 전후로 7명의 변호사가 참여했고 불법 법정에서 파룬궁 수련생은 처음으로 ‘공산당원은 회피한다.’고 제의했으며 납치된 수련생에게 가혹한 고문을 하고 자백을 받았다는 증거도 입수했습니다. 또 14년의 중형을 선고받고도 포기하지 않고 신념을 지키며 끊임없이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것을 견지했습니다.

말하자면 깁니다. 납치당한 지 보름 만에 35명의 수련생이 동시에 불법 노동교화소에 보내졌습니다. 소식을 들은 그날 저는 오전 내내 울었고 여러 가지 생각이 다 들었습니다. 우리 집은 5대째, 이 현성에서 100여 년을 살면서 온 마을마다 친척, 친구 동창이 있습니다. 저는 20세에 대학을 입학하면서 그곳을 떠났습니다. 옛사람들은 공을 세워 명성을 쌓고 금의환향하여 고향 어르신들을 위해 길을 닦고 다리를 놓아 양육의 은혜에 보답하였습니다. 오늘 저는 수련을 했습니다. 수련의 목적은 자신을 성취하고 중생구도를 위해서입니다. 작게 말하자면 고향 사람들이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존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대법제자들 마난(魔難)을 겪지만 훼멸되는 것은 중생이라네”[1] 수십 명이 납치당해 박해받고 고문당했으며 극도로 흉악하고 잔인합니다. 이런 불법(佛法) 수련인을 박해하는 행위는 어떤 벌을 초래할 것인가? 저의 고향에서 중공악당 장쩌민 집단이 수련인을 박해해 겁난을 당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었습니다.

파룬궁(法輪功)은 저의 고향에서 일찍 전해졌습니다. 법을 얻은 사람이 많았고 사부님 설법반을 따라다닌 수련생도 매우 많았습니다. 오랜 세월 정법하면서 줄곧 앞에서 걸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일을 하는 마음, 개인 수련이 따라가지 못해 정체가 박해받는 상황이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수련생 중에 갖가지 원망, 질책, 요언이 나타났고 바른 목소리가 없었습니다. 박해당한 사람이 많아 관련된 가정이 많았고 이 일을 안 속인이 많았습니다. 속인은 편향적으로 대법에 대한 나쁜 말을 했습니다.

구출하는 과정의 난이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협조에 참여한 수련생은 손꼽을 정도였습니다. 심지어 두려운 마음에 자신을 지키기 위해 방해하기도 했습니다. 개정할 때 뜻밖에도 변호사를 현지에 숙박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저는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다섯 명의 변호사를 어디로 안내합니까? 그뿐만 아니라 변호사들이 이런 상황을 알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섯 명의 유명 변호사를 모시고 식사하며 환담을 하고 현지 호텔에서 묵었습니다. 그런 다음 변호사들을 법정에 보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영광입니다.

그때 구세력이 수련생의 사람마음을 이용해 한 줄 한 줄 쇠사슬을 잠그고 매듭을 하나하나 매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박해를 부정하고 중생을 구도하고 수련생을 구출하려면 쇠사슬을 한 줄, 한 줄 잘라야 하고 매듭을 하나하나 풀어야 합니다. 방법은 오직 하나 바로 진상을 알리는 것입니다.

경찰들은 구세력의 기제(機制)하에 무감각하게 그들의 소위 업무를 합니다. 그들의 본성은 나쁘지 않습니다. 저는 그들을 사악의 대명사로 보지 않았습니다. 매번 경찰을 만날 때마다 그들을 친구로 간주했습니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미소를 지으며 당신에게 처리할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파룬궁 일이기에 매우 자연스럽게 진상을 말할 수 있었습니다. 경찰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악한 경찰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2013년 초, 저는 임신 7개월이 되었습니다. 수련생은 웃으며 다른 사람은 임신하면 모두 산수 좋고 경치 좋은 곳으로 가는데 당신은 날마다 감옥으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줄곧 구출에 참여한 사람은 우리 세 명의 수련생과 납치된 수련생의 여동생이었습니다. 같이 교도소에 갈 때 때로는 두 사람, 때로는 한 사람이며 돌아오면 바로 교류해서 다음 단계는 어떻게 할지 결정했습니다. 수련생의 여동생이 종종 나에게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는 매번 정상적으로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만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먼저 만나서 얘기하자”라고 말했습니다.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으며 머릿속은 정말 안개 속에 잠긴 듯 갈피를 잡지 못했습니다.

박해당한 수련생과 만난 후 경찰을 찾았습니다. 경찰을 만나면 무엇을 말해야 할지 알았고 지혜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경찰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하고 그들에게 위치를 바로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당신 이 일을 하기도 쉽지 않아요. 당신도 집에 부양하는 노인과 아이가 있잖아요. 우리 가족이 당신 여기에 갇혀 있으니 우리는 당신을 찾아 폐를 끼치는 수밖에 없어요. 하지만 이것은 당신 업무의 일부분이에요. 당신이 귀찮고 관리하고 싶지 않으면 위에 미세요. 게다가 파룬궁의 일은 진정한 의미의 범죄자가 아니에요. 어느 날 억울한 누명을 벗으면 당신은 어쩌면 책임질 일이 있을지도 몰라요.”

후에 불법으로 감금된 수련생이 교도소에서 4, 5개의 감구역(監區)을 바꾸었습니다. 어느 감구역에 갔는지, 어느 감구역도 위에 보고한 적이 없었고 그녀를 머무르게 하지 않았습니다. 교도소장도 이상해 이 사람은 무슨 내력이 있는지 물은 적이 있습니다.

이 수련생은 불법으로 14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규정에 따르면 형기의 3분의 1을 넘지 않고 생명에 지장이 없는 병에 걸린 사람은 놓아주지 않는 등 사람을 석방하지 못하는 많은 규정이 있습니다. 속인의 설에 따르면 나가고 싶으면 태양이 서쪽에서 떠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표면에 이끌리지 않았습니다. 박해를 저지하기 위해, 사람을 구하기 위해, 중생에게 아름다운 미래가 있게 하려고 이런 규정은 우리의 목적과 전혀 맞지 않지만 우리는 자신을 잘 수련하여 사람을 구하고 일체는 사부님의 결정에 맡겼습니다.

후에 많은 경찰이 묵묵히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보기에는 예절이 없는 전화 같지만, 자세히 분석해보면 우리에게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었고 감금된 수련생의 근황을 알려주어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실천이 증명하다시피 확실히 그러했습니다. 우리는 더욱더 확신이 섰고 미혹 속에서 사람을 구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경찰이 그 직책에서 감히 말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혔으나 속으로는 선한 일념이 나와 소리 없이 우리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바로잡아놓았으며 그는 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정면으로, 올바르게 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딸이 태어난 지 두 달이 되었을 때 저는 아이를 안고 마지막으로 감옥에 가서 수련생을 데려왔습니다.

수련생이 돌아온 후 현지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반응이 컸습니다. 여러 수련생은 격동되어 대법에 대해 견정히 믿었습니다. 또 수련하지 않던 이도 돌아왔습니다. 일찍 사오한 이도 돌아왔습니다. 오직 법을 꽉 잡고 자신을 내려놓고 수련하기만 하면 불가능해 보이던 일도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속인 중에서도 반향이 매우 컸습니다. 파룬궁이 대단하며 돈 한 푼 쓰지 않고 14년 형을 선고받은 사람을 데려왔으니 다르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여한 변호사도 탄복했고 후에 수련생이 그를 찾아 감옥 방면의 구출 일을 처리하려고 찾아가면 그는 수련생을 저에게 데려와 그들에게 말해주라고 했습니다. 그는 나에게 방법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웃기만 했습니다. 저에게 무슨 방법이 있겠습니까, 모두 사부님이 하신 것입니다!

3. 자료를 만들고 배포하다

이 일은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원고를 쓰는 과정에서 갑자기 사소한 부분까지 정리하게 되어 수련생과 교류하려 합니다.

자료점을 곳곳에 꽃 피우라고 갓 제기할 때 저는 나이가 어리고 지식이 있어 매우 빨리 가정 자료점을 건립해 우리 이 지역 110호 사람들의 자료공급을 책임지고 7년간 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매우 바빴습니다. 일주일에 5일간 출근하고 2, 3일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저도 늘 자료를 배포했으며 한밤중에 나갔습니다.

교외 지역에 수련생이 적어 진상자료가 매우 부족하며 어떤 곳은 수년 동안이나 자료를 볼 수 없었다고 우연히 들었습니다. 저는 농촌에서 법을 얻었고 박해 초기인 2000년에 농촌에서 자료를 배포했기에 농촌이 낯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외의 농촌에 자료를 배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3, 4명의 수련생은 의논하고 함께 갔습니다. 밤에 교외로 가는 막차를 타고 길을 따라 각 마을에 자료를 배포했습니다. 수련생이 저에게 돌아올 때 어떻게 하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웃으며 사부님이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후에 자료를 배포하고 집에 가야 할 때마다 차가 나타나 우리를 집으로 데려주었습니다.

횟수가 많아지니 참여하는 수련생도 갈수록 많아졌고 수련생도 모든 일에 태연하게 대처하면서 누구도 집으로 돌아가는 일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료 배포를 다 하면 차가 왔습니다. 때로는 한밤중 12시까지 걸으면 좀 힘들고 발에 물집이 생기는 일도 늘 있는 일입니다. 걸을 수 없을 때가 되면 저는 걷자, 견지하자, 어느 정도 걸으면 사부님께서 차를 배치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후에 차가 있는 수련생이 참여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방식을 주동적으로 바꾼 사례입니다.

매번 떠나기 전에 저는 사전에 가야 할 곳을 한 번 가봅니다. 코스를 잘 고르고 마을이 몇 개 있는지, 대개 마을마다 몇 가구가 있는지, 얼마나 많은 진상 자료가 필요한지, 차의 노선은 어떻게 갈지, 수련생이 어디에서 타고 어디서 내려야 하는지, 아주 작은 세부 사항들을 최대한 고려해서 미리 배치합니다. 한 팀에 두 사람씩, 젊은이와 연세가 있는 수련생이 한 팀이 되어 헤어짐을 방지하고 노년 수련생을 잘 배려하기 위해서입니다. 농촌 길은 걷기 어렵고 깊은 한밤중에 길이 울퉁불퉁해 넘어지는 것을 예방해야 합니다. 어떤 노년 수련생은 불복합니다. 자신은 문제가 없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이 할 수 있고 당신이 긍정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의 이치에 부합해야 하며 구세력에게 아무런 틈도 주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많을 때는 20여 일에 한 번에 세 대의 차에 22명이 참여했습니다.

매번 각기 다른 신기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매우 감동됩니다. 한번은 나와 한 젊은 여 수련생이 한 팀이 되었습니다. 그때 간 마을은 길이 평평하지 않았고 곳곳마다 울퉁불퉁했고 또 늘 막다른 골목이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동작이 매우 빨랐고 자료를 배포하면서 현수막을 걸었습니다. 우리는 매우 빨리 다른 팀 수련생과 모여 밤 12시 전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며칠 후 우리 현지 한 노년 수련생이 나를 찾아와 그 마을에 자료를 배포하러 갔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그렇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 마을에 친정집이 있는데 친정에서 한 사람이 놀러 와 “당신 파룬궁은 정말 대단해요. 그날 밤 마을에 갑자기 흰 옷을 입은 두 선녀가 왔는데 순식간에 집집마다 자료가 생겼어요. 현수막은 그렇게 높은데 낚싯대도 닿지 않았어요. 보통 사람이면 걸 수 있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듣고 매우 기뻤습니다. 속인이 파룬궁에 존경하는 마음이 생기면 그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매우 불편했습니다. 그날 마침 생리가 와 저는 가고 싶지 않아 망설였지만 갔습니다. 수 시간 걸으니 생리가 끊임없이 솟구쳤고 자료를 배포하느라 바빠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손이 더러워지고 진상자료에 불경 될까 봐 바꾸지 않고 버텼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후 바지 두 다리 안쪽 전체가 위에서 아래 세 겹까지 모두 피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무런 불편함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 후로 생리통이 말끔히 나았고 더는 재발하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잠시 환희심이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마을에 들어섰습니다. 저는 앞에서 걸었습니다. 한 현지인이 뒤에서 오던 수련생을 막으면서 어디 사람인가? 무엇하러 왔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수련생은 그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떠났습니다. 그 사람은 길에 서서 쳐다보았습니다. 수련생은 저를 쫓아와 뒤에 사람이 있으니 앞으로 가자고 말했습니다. 저는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마을 입구까지 걸어온 후 이 길이 막다른 골목인 것을 알았습니다. 앞에는 집이 있어 가지 못해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여러 사람이 망설였습니다. 저는 생각하지도 않고 “제가 앞에서 갈 테니 여러분은 50m 간격으로 저의 뒤를 따라오세요. 갑시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걸어가면서 만약 그 사람을 만나면 먼저 말을 걸거나 혹은 길을 묻거나 혹은 물을 마시자고 할 거야. 아니면 직접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잘 이야기를 할 거야. 모두 소박하고 선량한 농민이며 나쁜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발정념을 했습니다.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는 것을 구세력은 감히 반대하지 못한다. 일체 교란을 전부 해체하고 제거하자! 그러나 마을을 벗어날 때까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수련생들도 따라 나왔고 차에 올라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러한 일은 매우 많으며 편폭의 제한으로 하나하나 쓰지 못합니다. 마지막에는 몇 차례 갔는지, 얼마나 되는 마을에 갔는지 통계할 수 없었습니다. 기본적으로 비가 적게 오는 봄, 가을은 모두 가고 겨울, 설날 전에도 어김없이 갔습니다. 단오에는 집집마다 큰 조롱박을 배포했습니다. 폐 CD로 만들고 여러 가지 진상 단어를 적었으며 매우 보기 좋았습니다. 중국은 새해 전후에 친지들의 모임에 꼭 가야 합니다. 우리는 진상 자료를 시민들의 집으로 배포했습니다. 여러 해 뒤 자료를 배포한 일부 시골 마을에 가서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진상을 알리니 말하기도 어렵지 않고 간단히 몇 마디 하면 쉽게 삼퇴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당시 자료를 배포한 것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4. 전화로 진상을 알려 사람을 구하다

딸이 태어난 후 저의 수련에는 매우 큰 변화가 발생했습니다. 저는 딸을 안고 일대일로 진상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매우 어렵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많이 걷지도 못하고 얼마 가지도 못하며 또 안는 것이 힘들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저는 사부님께 지금 저의 조건에 근거해 진상을 알리는 일을 하게 해달라고 빌었습니다.

사부님의 배치 하에 2014년 여름, 딸이 13개월 되었을 때 저는 딸을 데리고 수련생 4명과 함께 차를 타고 전화로 사람 구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줄 몰라 모두 수동으로 번호를 눌렀으며 시간이 매우 지체되었습니다. 어느 날 한 수련생이 오더니 우리 휴대폰에 반자동 음성 소프트웨어를 설치해 주고 우리에게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후에 문제가 있어 그 수련생에게 물어보아야 했습니다. 우리는 매우 힘들게 그 수련생을 찾았습니다. 뜻밖에 그녀는 우리에게 반자동 소프트웨어를 설치한 적이 없으며 그녀는 정말 이 소프트웨어를 사용할 줄 몰랐습니다. 저는 정말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부님이시여, 모두 자비로운 사부님의 고심한 배치입니다.

후에 저는 소프트웨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톈디싱(天地行)’ 논단에서 찾아 아침 일찍 일어나 밤늦게까지 공부했고 천천히 저는 휴대전화 기술자가 되었습니다.

소프트웨어가 있으니 많이 편리해졌습니다. 사전에 전화번호를 휴대폰에 넣으면 진상을 알릴 때 번호를 누를 필요가 없어 효율이 훨씬 높았습니다. 수련생의 심성 제고에 따라 삼퇴한 인원수도 갈수록 많아졌습니다. 처음에 3, 5명에서 후에 10여 명이 되었고 수십 명이 되었습니다. 이 반자동 소프트웨어는 줄곧 수련생이 사용하다가 수년 후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갱신했습니다.

진상을 알리는 과정은 정말 시시각각 심성을 검증합니다. 한번은 현지의 한 대학의 대학원생이 전화를 받았는데 저는 독선적이었고 그녀와 국내, 국외의 큰일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으며 마치 다른 사람들이 저보다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았습니다. 다음 저는 그녀와 같은 전공을 배웠다고 자랑했습니다. 사실 저는 졸업 후 다시는 그 전공을 하지 않아 일찌감치 소홀히 했습니다. 그 결과 상대방은 모르면서 아는 척하며 사기꾼이라고 야단을 치더니 무작정 전화를 끊었습니다.

이 일에 저는 매우 큰 자극을 받아 오랫동안 자신이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찾았습니다. 우선은 과시심이며 정말 깊이 알지 못합니다. 다음은 쟁투심, 질투심, 잘난 체하는 마음, 겸손하지 않은 등등입니다. 이런 마음을 찾은 후 정말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후에 말할 때는 저는 어떤 사람을 만나도 매우 겸손하고 존중하며 대했습니다.

속인에게 진상을 알릴 때 저는 저의 수련 경지가 정말 너무 차하고 속인마음이 너무 많으며 자비심이 매우 적게 나타나고 모두 자신을 실증한다는 것을 체득했습니다. 그러나 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법공부하고 안으로 찾아 많은 집착을 제거했습니다. 저는 정법수련의 세 가지 일을 다 해야 제고할 수 있으며 진상을 알리는 이 일 자체가 개인수련 제고에 이런 큰 작용이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체득했습니다.

5. 노교소를 해체

2012년 현지 노교소는 매우 사악해 수련생들이 늘 발정념을 하러 갔습니다. 6월 초의 어느 날, 나와 한 수련생은 차를 몰고 노교소에 갔습니다. 수련생은 기발한 발상이 떠올라 나에게 물었습니다. 우리는 교도소 경찰들의 집주소를 찾아낸 후 그 집 근처에 가 자료를 배포해 폭로해요. 그가 감히 대법제자들을 박해하는지 봅시다. 저는 네, 그럴듯한데 어떻게 찾겠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깨닫지 못했을 때 각종 자원, 여러 가지 조건이 전부 구비되었습니다. 참여한 수련생들은 모두 열정적이었고 서로 교류하지 않아도 주동적이었으며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수련생들에게 떠밀려 협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교도소에서 대법제자를 때리는 가장 사악한 교도관을 만났는데 그녀가 아는 사람에게 끊임없이 웃으며 인사하고 또 길가의 개를 놀리며 즐거워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당시 매우 이상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악독한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순진하고 선량한 면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교류를 통해 경찰들도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사회에서, 가정에서 보통 사람들처럼 다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아버지, 어머니며 어떤 이는 아들, 딸이며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도소 그 특별한 곳에 도착해 경찰 옷을 입으니 그들은 마치 부체가 붙은 것처럼, 공산 사악한 영과 구세력의 조종 아래 사납고 포악하며 거리낌 없이 대법제자를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구하려면 교도소를 해체하고 그들이 그 사악한 환경, 사령의 통제에서 빠져나와 정상적인 인간사회로 되돌아가야 하며 정상적인 인간의 삶을 살고 정상적인 일을 하도록 해야 합니다. 이 점을 깨달은 후 수련생들은 자비심이 나왔습니다. 경찰관들이 정말 가련하고 구세력에 이용당해 무지하게, 무감각하게 나쁜 짓을 저질러 자신과 가족에게 재앙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했습니다.

석 달 동안 수십 명이 노력한 끝에 우리는 교도소에서 박해에 관여한 경찰의 집주소를 찾아냈습니다. 마지막에 우리가 경찰들의 집주소를 밍후이왕에 공개했을 때 거의 하룻밤 사이에 교도소의 박해 행위는 중지되었습니다. 교도소에 있다가 돌아온 대법제자들에 따르면 그날 아침 경찰관들은 출근했을 때 모두 고개를 떨구고 하나같이 풀이 죽어있었으며 예전의 광기가 없어지고 서로 “어찌된 일인가요? 그들이 집 주소를 어떻게 알았을까요?”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했습니다.

1년 후 중국정부는 노교 제도의 해체를 선언했고 그 기간에 그 교도소에서는 경찰이 대법제자들을 괴롭히는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맺음말

지난 20년을 되돌아보니 주변 속인의 변화가 매우 큽니다. 백만장자에 사업을 성공한 이도 있고 가난한 이도 있습니다. 성공하든 실패하든 명리 중에서 발버둥을 칩니다. 정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며 고생스럽게 찾고 있습니다. 일찍이 한 동창이 나에게 고대에서 건너왔다며 여행도 가지 않고 영화도 보지 못하며 고급 호텔에 가본 적이 없다고 비웃었습니다. 그들이 보기에는 내가 인생을 헛살았고 그들이 인정하는 삶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또 어떤 동창은 20년 동안 한 신앙을 위해, 한 이념을 위해 한 가지 일을 고수하면서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아끼지 않았다고 탄복했습니다.

그러나 저 자신은 20년 동안 어리석고 무지하고 오만방자한 데서 겸손하고 자상하고 이지적으로 성숙함에 이르렀습니다. 정열 중에서, 적막 속의 바라보기까지, 번잡한 세상을 떠도는 데서 “사람은 세속 중에 있지만, 생각은 그밖에 있는 사람”[2]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은 파란만장하고 심금을 울리며 20년 인생은 원망도 후회도 없습니다.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사존께서 우주의 수많은 중생 중에서 저를 제자로 선택하여 조사정법, 구도중생의 사명을 부여한 것에 감사드립니다. 20년 동안 함께 협조해준 수련생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매번 법을 실증하는 협조는 모두 한 차례의 심성제고이며 신성한 서약의 실행입니다. 오늘 생각해보니 너무나 소중합니다! 더없이 소중합니다!

대륙대법제자 법회를 앞두고 제자는 사부님께 큰절을 올립니다! 이 길이 아직도 얼마나 멀고 얼마나 길든지 제자는 지난날과 다름없이 반드시 견정하게 걸어갈 것이며 이번 생은 정법을 위해 존재하며 후회가 없습니다!

부당한 곳은 자비롭게 시정해주시기 바랍니다! 허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시사: ‘홍음3-세세생생 금생을 위해’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5-2005년 맨해튼국제법회 설법’

(밍후이왕 제16기 중국대륙대법제자수련심득교류회)

 

원문발표: 2019년 11월 4일
문장분류: 대륙법회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1/4/39538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