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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시심의 한 표현을 인식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요 며칠 무언가가 목구멍을 막아 불편했다. 언제 생긴 것일까? 바로 동수와 교류하면서 내가 법리를 하나 깨달았다고 말했지만, 상대방이 알아듣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았을 때 생겼다. 나는 그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가지지 않으려 했으나 그것은 여전히 있었다.

책을 들고 보니 바로 나의 문제를 말하고 있었다.

“당신들이 법에 대해 책임지는 것 외에, 어떠한 인간적인 집착이 없고, 자신의 것이 없으며, 자신의 개인적인 요소가 없다면, 이 일을 꼭 잘할 수 있을 것이다.”[1]

동수와 교류할 때 내가 한 말 속에 ‘자아’의 것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생각해보았다. 처음에는 “하나의 법리를 명백히 알게 됐는데, 아직 분명하지는 않으니 교류를 좀 해 봐요.”하고 말하지만 이야기하다 보면 더욱 자신의 인식이 매우 옳다고 여겼으며, 최후에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변했다. 그런데 상대방이 공감하지 않을 때, 목구멍을 ‘막는’ 그것이 생겼다. 설마 그것이 ‘자아’란 말인가?

이것은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나 자신을 표현하려 한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고 반대로 상대방을 위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인데, ‘당신이 보라. 당신이 현재 마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내가 이렇게 말하자마자 당신은 명백해졌잖은가? 명백해졌으니 곧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닌가? 내 말이 이리도 옳은데 당신은 어째서 받아들이지 않는가?’라고 여겼다. 오, 그렇다. 이것은 ‘자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좀 인식을 하게 되었다.

나는 사부님께서 ‘호주수련생에 대한 설법’ 동영상에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내가 이해한 대체적인 의미는 당신들이 의도적으로 명백하게 자신을 실증하고자 한 것은 아니나 당신의 행동에서는 그렇게 했다는 뜻이었다.

알고 보니 나의 사유 중에 여전히 ‘내가 옳고, 내가 당신을 돕고 있으며, 나는 능력이 있다’는 등등이 숨겨져 있었다. 이 ‘나’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때는 매우 기분이 좋고 득의양양해 하나, 인정받지 못할 때는 기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마음은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한다’가 덮고 있었다.

“사실 당신의 모든 재주도 대법을 수련하여 비로소 당신에게 준 것이 아닌가? 수련생에게 과시하지 말고, 또한 득의양양해하지 말며, 자신이 무슨 재주가 있다고 여기지 마라. 당신의 고만한 재주로 뭘 할 수 있겠는가.”[2]

“당신의 공능이든 당신의 개공이든 당신은 대법(大法) 수련 중에서 얻은 것이다. 만약 당신이 대법(大法)을 부차적인 위치에 놓고 당신의 신통을 중요한 위치에 놓거나 또는 개오한 사람이 당신 자신의 이런 인식 저런 인식이 옳다고 여기며, 심지어 당신 자신이 대단하여 대법(大法)을 능가한다고 여긴다면, 당신은 이미 아래로 떨어지기 시작했고, 곧 위험하며, 갈수록 더 잘못된다고 나는 말한다.”[3] “잘못하면 떨어져 내려가서 수련이 헛되고 만다.”[3]

이번에 나는 명백해졌고, 마침내 바로잡았다.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하지 않아 불쾌할 때는 바로 그 ‘자아’가 자신도 모르게 분출되어 나온 것으로서, 자신이 명백하게 알게 된 이런 법리는 대법이 준 것이고 대법이 점화해 준 것이지만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길 바라는 것은 ‘나’였지 대법이 아니었다. 이것은 대법을 부차적인 위치에 놓고 자신을 중요한 위치에 놓은 것은 아닌가? 이것이 바로 자신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지 대법을 실증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이 단락 법을 본 것은 ‘과시심리’ 중에서인데, 알고 보니 그것이 바로 과시심이었다. 이 마음을 제거하지 않으면 위험한 것이 아닌가? 헛되이 수련한 것이 아닌가? 와, 이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니다. 진정으로 자아가 없을 때는 당연히 말할 때 항상 평온할 것인데, 법리가 펼쳐지면 다른 사람에 대한 요구가 없고,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 강요하고자 하기만 하면 그것은 바로 ‘자아’가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또 생각났다. 정법시기 대법제자가 사람을 구함에 있어서 정말로 제각기 자기 능력을 나타내고 있다. 어떤 이는 컴퓨터 기술에 정통하고, 어떤 이는 기계 수리, 설치에 능통하며, 어떤 이는 진상자료 배포를 잘하며, 어떤 이는 말로 진상하는 것을 잘하며, 어떤 이는 문장을 쓰고 어떤 이는 그림을 그리며 어떤 이는 무용 혹은 노래를 잘하며, 어떤 이는 관악기 연주를 잘하고 어떤 이는 운전을 잘하며 어떤 이는 강한 조직능력이 있으며, 어떤 이는 외교에 정통한 등등이다. 이 모든 능력은 자비롭고 위대하신 사부님께서 정법의 필요에 근거해 여러분에게 부여하신 것이다. 우리에게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당신이 보라’라는 염두가 있기만 하면, 바로 이 ‘자아’가 나온 것으로서, ‘과시심’이며 자신을 중요한 위치에 놓고 대법을 부차적인 위치에 놓은 것이다. 이것은 위험하고 수련을 헛되이 만들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이 존재하게 해서는 안 된다.

사부님게서 우리에게 “그러나 과시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당신들은 법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지 자신을 실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1]라고 당부하셨다. 이 마음이 은폐되었든 번쩍이든, 다른 사람을 위해 마음을 움직인 것이든, 아니면 나는 대단하다, 나는 뛰어나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자신을 실증하는 과시심으로서 절대 남겨서는 안 된다.

현 층차에서 약간의 인식으로서 바르지 않은 곳이 있다면 동수들이 자비롭게 바로잡아 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6-아태지역 수련생회의 설법’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각 지역 설법 5-2004년 미국서부법회 설법’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원문발표: 2019년 11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1/7/3955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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