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明慧법회| 어려운 세월 속에서 만났던 좋은 사람들

글/ 중국 대법제자 다후이(大慧)

[밍후이왕] 1997년 나는 딸을 데리고 처음으로 사부님의 지난 설법 녹음을 들었다. 제1강을 들을 때 흰색 큰 선풍기가 정수리에서 도는 것을 보았다. 위에는 회오리바람 같은 기둥이 있었다. 무엇인지도 몰랐고 신경 쓰지 않았다. 9일 설법을 다 들은 후 나는 파룬궁(法輪功)은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라는 것만 기억했다. 마침 한 이웃이 파룬궁을 연마했다. 그녀는 내가 본 큰 선풍기는 파룬(法輪)이라며 내가 근기가 좋으니 잘 배우라고 말했다. 이렇게 7월에 나는 그녀를 따라 법공부 장소와 연공장에 가 정식으로 파룬따파(法輪大法) 수련에 들어섰다.

나는 당시 한 기업 중학교에서 글을 가르쳤다. 본교에서 글을 가르치는 이외에 시내 세 개 대학교에서 겸직까지 해서 무척 바빴다. 나는 진선인(眞·善·忍)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됐기에 동료와 학생들의 인정을 받았다.

새벽 연공할 때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었는데 신기하게 4시 10분이 되면 침대와 가까이에 있는 난방관이 온화하게 ‘당, 당, 당’ 울렸다. 그래도 일어나지 않으면 침실 문이 ‘쾅! 쾅! 쾅’하는 소리를 냈다. 마치 누가 문을 차는 것 같아 나는 놀라 얼른 일어나 녹음기를 들고 오는 보도원에게 전화했다. 그 후 떠돌아다닐 때도 새벽이면 매일 목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사부님께서 나를 깨워 일어나 연공하게 하신 것이다. 사부님께서는 시시각각 제자의 옆에 계신다!

법을 배운 지 두 달 됐을 때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의사는 내 머리 오른쪽을 네 바늘 꿰맸고 쇄골도 골절됐다. 한 달도 되지 않아 다 나아 일하는 데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

심한 류머티즘, 온몸의 근육 위축으로 움직일 수 없어 죽음의 변두리에서 헤매는 딸도 사부님 설법을 들은 후 살아났고 일부 행동 능력이 회복됐다.

1999년 ‘7.20’ 중공(중국공산당) 장쩌민의 사악한 집단이 파룬궁 및 억만 대법 수련자에 대한 박해를 시작했다. 그날 저녁 나는 성(省) 정부에 청원하러 갔다. 임대한 택시를 고속도로 입구에서 되돌려보내고 나는 공안국에 끌려갔다. 중공의 사부님과 대법에 대한 유언비어에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고 너무 슬프고 처량해 더 살 의의가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내 생명은 이미 대법에 깊이 용해된 것을 느꼈다. 이것은 내가 처음 납치됐을 때 느낌이다.

나는 여섯 차례나 납치됐고 여러 차례 집을 수색 당했으며 4년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도 안 하겠다는 ‘부(不)’자를 말하지 않았다. 어려운 세월 속에서 대법제자로서 나와 수련생들은 끊임없이 중생의 선심을 일깨워주었다. 붙잡으러 오거나 집을 수색하러 온 경찰을 대할 때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에게 대법의 아름다움을 알려줬다. 아울러 세인의 양심이 아직 남아 있는 일면을 보았다.

1. 진상을 알아들은 경찰과 군인

두 번째로 납치된 것은 2000년 1월 19일이다. 나와 수련생들은 베이징에 가 법을 실증하는 일을 토론 연구하다 18명이 납치됐다. 파출소에서 외모가 흉악한, 줄곧 사람을 욕하면서 우리에게 소위 ‘보증서’에 서명하라고 한 경찰이 서명을 거절한 두 수련생의 뺨을 때려 얼굴이 벌겋게 부었다. 나는 종이를 가져다 ‘나는 보증서를 쓰지 않겠다’라고 썼다.

이튿날 저녁 파출소장은 또 한 번 나를 불렀다. 내가 문에 들어서자 그는 욕하기 시작했다. 나는 난생처음 이런 일을 겪어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말했다. “선생님은 우리 학교에 가 물어보세요. 제가 어떤 선생님인지. 제가 왜 파룬궁을 연마했는지 압니까? 제 딸이 대학에 다닐 때 집안 유전병에 걸렸습니다. 저는 모든 돈을 다 쓰고 중국의 명의란 명의는 다 찾아보았지만 낫지 않았습니다. 딸이 막 죽어가고 있을 때 한 사람이 우리에게 파룬궁을 소개했습니다. 그 후 파룬궁을 연마해 나았습니다.”

이때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결국 내가 말한 것을 그대로 기록했고 여전히 날 구치소에 보냈다. 길에서 나에게 수갑을 채우지 않았을 뿐이다.

구치소에 간 이튿날, 한 무리 경찰이 나를 취조하러 와서 소위 파룬궁을 연마하지 않겠다는 ‘보증서’를 쓰게 했다. 나는 말했다. “나는 누가 파룬궁을 연마하지 못하게 하든 장쩌민이 파룬궁을 뭐라고 하든 연마를 견지할 겁니다.” 경찰은 웃으면서 말했다. “보증서를 쓰지 않을 거면 심득 체험을 쓰세요.” 나는 내가 왜 파룬궁을 연마했고 대법의 초범성, 나와 딸이 혜택받은 일들을 썼다. 그는 보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파룬궁의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시네요!” 그는 내가 쓴 체험을 보고 웃으며 갔다.

두 달 후 나는 세 번째로 납치됐다. 그때는 A 현 경찰이 한 짓이었다. 당시 나는 겸직한 대학에서 졸업생들과 졸업 사진을 찍었다. 날 납치한 이유는 내가 그들 현의 한 수련생 집에 가서 5분간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들은 불법적으로 우리 집을 수색했다. 당시 집에는 중공 악당에게 쓴 만언서가 있었는데, 내용은 전부 대법이 어떻게 좋다는 진상이었다.

그들은 나에게 파룬따파를 수련한 신기한 일을 물었고 나는 만언서 내용을 말했다. 줄곧 새벽 4시까지 말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날 현지 구치소에 보냈다. 길에서 사건을 처리하던 경찰이 말했다. “이전에 대법이 좋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떻게 좋은지 몰랐습니다. 아주머니가 이렇게 말하니 파룬궁이 확실히 좋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구치소에 수감된 지 40여 일 지났지만 아무도 날 취조하지 않았다. 경찰이 불법적으로 집을 수색하던 날 집에 딸이 혼자 있었다. 나는 한 경찰에게 딸이 어떤지 물었다. 운전하던 그 어린 경찰이 손에 있던 물건을 책상에 힘껏 던지며 고통스러워하며 큰 소리로 말했다. “저에게 묻지 마세요!”

사건을 처리한 경찰이 나중에 나에게 말했다. “그날 아주머니 딸은 매우 슬프게 울었습니다. 저에게 ‘전법륜(轉法輪)’을 가져가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남겨두셨나요?”라고 물었더니 그는 “남겨뒀습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베이징에서 ‘양회(전국인민대표대회와 정치협상회의)’를 열었다. 우리는 정확하게 파룬궁 문제를 처리해달라고 요구하는 서명을 모아서 ‘양회’에 보낼 계획이었다. 서명 용지는 내가 제작했다. 나는 용지에 공백을 남겨둔 채 내 강의안 중간에 끼워 넣었다. 내가 돌아온 후 누군가가 이 용지를 강의안 위에 놓은 것을 발견했다. 그들이 집을 수색할 때 용지를 발견했지만 갖고 가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한다.

그 후 수련생을 구출하기 위해 나는 또 차를 몰았던 그 어린 경찰을 만났다. 나는 그를 한번 가볍게 치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는 즉시 깨닫고 말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구치소에 수감됐을 때 밥을 가져다준 사람이 날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작은 창문에서 날 발견하고 외쳤다. “○선생님, 선생님이시군요!” 그때부터 매 끼니는 두 가지의 볶음 요리와 많은 찐빵이었다. 이런 밥과 요리는 당연히 수련생과 나누어 먹었다. 나온 후 나는 옷을 사서 이 밥을 가져다준 사람에게 감사를 표했다.

네 번째로 납치된 것은 2000년 10월 1일 휴가 기간이다. 베이징의 수련생이 우리에게 집 두 채를 빌려주었다. 우리 현지에 많은 수련생이 왔다. 1일부터 천안문 광장에서 현수막을 펼쳤다. 나는 경찰과 마주 섰지만 나를 붙잡지 않았다. 저녁에 나는 나에게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잇따라 베이징에 올 수련생이 또 있기에 나는 각종 사항을 처리해야 했다. 전국 각지에서 온 수련생이 많아 차표, 항공권을 사지 못하면 큰 버스로 오거나 걸어서 왔다. 10월 6일 절정에 이르렀다.

천안문에는 곳곳에 현수막을 들고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 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외치는 수련생이 있었다. 80이 넘는 노인이 있었고 아기를 품에 안은 젊은 엄마도 있었다. 경찰과 사복 경찰은 동분서주하면서 힘들어 숨을 가쁘게 쉬었다. 10여 명의 경찰과 사복경찰까지 나를 트럭에 끌어 올렸다. 내가 타지 않자 그들은 당겨 넘어뜨리고 몽둥이로 때렸다. 머리는 맞아서 부어올라 커졌고 어깨와 엉덩이는 넓게 피멍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아프지는 않았다.

그들은 나를 천안문 파출소로 납치했다가 다시 차에 밀어 넣었다. 어디로 보낼지 몰랐다. 우리는 차 문을 열고 ‘파룬따파하오’ 현수막을 차창 밖으로 펼쳤다. 차 안의 무장 경찰이 우릴 제지하며 때렸다. 우리 몇 사람은 그의 두 손을 잡고 말했다. “이렇게 해서는 안 돼요. 파룬따파는 좋은 겁니다. 전국 1억에 달하는 사람이 연마하는데 중앙에서 연마하지 못하게 해서 우리는 평화적으로 청원한 겁니다. 잘못이 없어요. 헌법에는 신앙은 자유라고 규정했기에 우리는 합법적입니다. 이 점은 당신도 분명히 알잖아요? 우리 나이는 당신보다 많은데 우리에게 손을 대서는 안 돼요.” 우리말을 듣고 그 경찰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곳에 서 있었다. 마지막에 우리는 먼터우거우 공안 분국으로 끌려갔다.

이튿날 나는 무슨 일로 나가야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지만, 보초를 서던 군인이 말했다. “아주머니, 아주머니는 어디 사람인지 말하세요. 말하지 않으면 모두 아주 멀고도 먼 곳으로 끌고 갑니다.” 몇 년 후 악당이 파룬궁수련생 장기를 생체 적출한 사실을 알고 나는 먼터우거우 공안국의 보초를 섰던 그 군인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2. 좋은 상사와 좋은 동료들

우리 교장은 젊은 남성 교장이었다. 관례에 따라 매 학기 개학할 때면 전교 대회를 연다. 내가 세 번째로 납치된 후 돌아왔을 때 교장은 사전에 날 찾아 말했다. “○선생님의 그 일을(파룬궁 수련) 언급해야 합니다.” 대회가 끝날 때 그는 “○선생님은 파룬궁을 수련한 이유로 붙잡혔습니다”라고만 한마디하고 아무런 평가도 하지 않았다.

내가 세 번째로 납치됐을 때 교장은 경찰이 오기 전에 내 사무실 문을 비틀어 열고 ‘전법륜’을 가져갔다. 그 후 교장은 학교 몇몇 지도자를 거느리고 A 지역에 가서 날 석방하라고 요구하며 말했다. “우리 선생님은 매우 좋은 사람입니다. 학교 지도자와 선생님들은 모두 ○선생님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나는 오늘 선생님을 데리고 갈 겁니다.” 경찰은 대답하지 않았다. 교장은 말했다. “석방되는 날에 저에게 전화하세요. 제가 데리러 오겠습니다.” 그는 또 나에게 생활용품을 사라고 백 위안(약 17000원)의 돈을 주었다.

나는 A 지역에서 현지 구치소로 옮겨가 또 6개월 동안 수감됐다. 돌아와 출근한 후 교장은 ‘전법륜’을 나에게 돌려주고 나를 서기 사무실에 출근하게 했다. 나는 매일 출근해 바닥을 쓸고 더운물 한 주전자를 떠 왔다. 그런 다음 서기는 “하고 싶은 일 하러 가세요”라고 말했다. 서기와 교장은 여태껏 나를 난처하게 한 적이 없다.

여름 방학 후 이 교장은 우리 기업 중학교에서 영광스럽게 한 중점 중학교에 전근해 교장을 맡았다.

후임 교장은 여성이었다. 내가 베이징 천안문에서 현수막을 펼치고 파룬따파가 좋다는 것은 실증해 납치됐다. 학교에서는 주임과 공장 공안처의 한 경찰을 파견해 함께 나를 데리러 왔다. 시 국보(국내안정보위국) 대대 부대장은 내 직장 동료에게 돈을 달라고 했다. 나를 데리러 갈 때 택시를 타 300위안(약 5만 원)을 썼다고 했다. 나는 주임에게 나는 택시를 타지 않고 지하철을 타고 돌아왔기에 누구의 돈도 한 푼 쓰지 않았으니, 그들에게 돈을 주지 말라고 했다. 주임은 말했다. “선생님, 그가 선생님을 석방했으니 그가 뭐든지 달라고 하면 뭐든지 줄 겁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벌써 그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베이징에 돌아오니 이미 저녁 8시가 넘었다. 그날은 매우 추웠는데 몇몇 동료가 출구에서 날 기다렸다. 그들이 날 다른 곳으로 데려가면 보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고 말했다. 먼저 직장에 가니 공안처 20명 경찰이 모두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공안처장은 나를 취조실에 데리고 가서 취조하는 경찰과 교대했다. “취조해서는 안 됩니다. ○선생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면 당신은 그렇게 기록하세요.” 나중에 바로 나를 구치소에 데리고 갔다.

취조실에서 아래층에 내려와 보니 우리 학교에 새로 전근 온 교장, 서기가 다 와있었다. 그들은 보위처 모든 사람에게 밥을 사주었다. 그때 대법제자를 데리러 온 모든 비용은 대법제자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우리 학교는 모든 비용을 부담했다. 내 차비마저 부담하고 나에게 출장을 간 셈 치겠다고 말했다.

나중에 시 국보 대장은 말했다. “선생님이 여기 도착하지도 않았는데 선생님 학교 교장이 전화를 걸어 선생님을 석방하라고 말했습니다. 매번 전화를 걸었고 선생님을 때리지 말라고 거듭 강조했습니다. 다른 직장에서는 직원이 베이징에 갔다는 말을 들으면 해고하는데 이상합니다. 선생님 직장에서는 매번 선생님을 보호하시네요.”

나중에 이 여성 교장은 공장 노사처 처장으로 승진했다. 당시 우리 전 공장에서 직급이 가장 높은 여성 지도자였다.

2005년 나는 직장에 가서 월급을 달라고 했다. 직장에서는 또 교장이 바뀌었는데 남자 교장이었다. 그는 내가 떠돌아다닌 39개월 월급을 모두 나에게 주었다. 학교 직속 상급 기관에서 학교에 나에게 월급을 조금만 주면 된다고 했는데 공장 서기, 조직부장, 학교 교장, 서기가 회의를 열고, 내 월급의 75%를 주기로 했다. 노사처 처장으로 승진한 그 여성 교장은 학교 서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의 월급을 전부 봉투에 넣었습니다. 기어이 그만한 돈을 적게 줘야겠습니까?” 서기는 말했다. “처장님이 결정하세요.” 당시 병가로 휴가를 내도 월급의 75%밖에 주지 않는데 내 월급은 한 푼도 차이 나지 않게 전부 받았다.

나중에 그 여성 교장은 나에게 우리 둘의 일을 언급했다. 오래전에 어떤 사람이 상하이에 가서 나에게 실크 셔츠를 사주었는데 내가 입으니 작았다. 그녀가 갓 졸업하고 우리 직장에 배정받았을 때다. 나는 그녀에게 되팔았다. 그녀가 한번 입은 후 빨았더니 작아졌다. 그때 실크 셔츠는 매우 비쌌다. 그녀는 갓 직장에 근무해 옷을 샀는데 입을 수 없으니 얼마나 속상했겠는가? 나는 그녀에게 가지고 오라고 하고 돈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나는 이 일을 잊었지만,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다. 선량함이 선량함을 일깨워준 것이다.

3. 도와주겠다고 한 학생들

네 번째로 베이징에 갔을 때 날 납치한 경찰은 나를 못 알아봤지만, 그의 동료 ○○는 그에게 내가 그의 선생님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러자 이 경찰은 말했다. “그럼 저도 선생님을 제 선생님으로 대하겠습니다.” 줄곧 나에게 매우 공손했다. 당시 한 수련생은 여성 기자였는데 임신한 지 3개월이었는데도 경찰이 찬물을 끼얹었다. 내가 그를 찾아가 이 일을 말했더니 그는 곧 사람을 찾아 이야기했고, 잠시 후 그 수련생을 석방했다.

나는 베이징에서 돌아온 후 구치소에 수감됐다. 시 국보 대대장은 나에게 세 가지 문제를 물었다. 첫째, 파룬궁을 계속 연마할 것인가? 둘째, 파룬궁은 반동 조직인가 아닌가? 셋째, 파룬궁이 ‘×교’인가 아닌가? 나는 대답했다. “첫째, 영원히 연마할 것이다. 둘째, 아니다. 셋째, 아니다.” 그는 말했다. “아주머니를 3년 징역형을 판결할 건데 내가 아주머니에게 1년을 감형해줄 겁니다.” 나는 말했다. “그건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감방에 돌아온 후 감방 반장이 말했다. “선생님 단식하세요!”

다섯 번째로 구치소에 불법 수감된 후 내 담당 감옥경찰, 감방 반장과 범죄 용의자에게 진상을 알렸다. 담당 감옥경찰에게 심장병이 있었는데 나중에 그는 나에게 ‘전법륜’을 보았다고 말했다. 감방 반장도 날 도와주었고 어떤 사람은 친구가 됐다. 출소한 후에도 날 찾아와 일 처리를 도와달라고 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단식한 후 이튿날 아침 피를 토했다. 검푸른 것을 많이 토했다. 감방 반장은 다급하게 외쳤다. “○선생님이 피를 토했습니다!” 감옥 의사, 소장, 감옥경찰 한 무리 사람이 감방에 들어왔다. 당시 천안문에서 맞은 머리 상처가 그대로 있어 날 공안 병원에 보냈다.

우연히 이 병원은 그때 우리 공장 내에 있었다. 후방 근무 주임, CT실 주임과 의사 등이 모두 내 학생이었다. 나를 보더니 모두 뛰어와 날 업으려 했다. 사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

내가 입원한 병실에 한 청년 남성이 내 침대 옆에 3~4일 서 있었다. 당시 사람이 많아 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는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 저를 아시겠습니까?” 그가 이름을 말해서야 나는 그가 내 학생이라는 것이 생각났다. 그는 학교 다닐 때 때리고 싸우길 좋아했는데 지금은 폭력조직 두목의 수행원이었다. 그 폭력조직 두목은 마약중독이 심해 공안병원에서 마약을 끊고 있었다. 그는 그 두목의 심부름을 하러 따라온 것이었다. 그는 말했다. “선생님, 며칠이 지났지만, 감히 선생님께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도와드릴 일이 있습니까?” 나는 만감이 교차되어 말했다. “선생님은 괜찮아. 고마워!” 나는 정말 내 학생이 좋은 것을 배우길 바랐다.

나중에 공안병원에 많은 대법제자가 왔는데 큰 방 하나에 집중적으로 있었고 병원 경비대가 지키고 있었다. 나는 경비대에 수업을 가르친 적이 있어 경비대 대장에서 보일러공까지 모든 사람이 다 내 학생이었다. 결국 입원한 모든 대법제자의 모든 행동이 다 자유로웠다. 보러 오는 사람, 물건을 가져다주는 사람, 더운물을 떠 주는 등 모두 도와주었다.

어느 날 오전 시의 ‘610’ 두목이 와서 뒷짐을 지고 온 얼굴에 흉악한 인상을 쓰고 악담을 했다. 그의 뒤에 한 남성 청년이 따라다녔는데 내가 보니 내가 대학에서 가르쳤던 학생이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는 머리를 돌려 얼른 다가와 날 보더니 말했다. “선생님이셨군요!” 나는 말했다. “날 어디로 보낼 거지?” 그는 말했다. “선생님 걱정 마세요. 제가 꼭 선생님을 내 보내드리겠습니다.”

56일 후 아무 ‘보증’도 쓰지 않고 나는 집에 돌아왔다. 나중에 이 학생이 나쁜 일을 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

4. 개과천선한 공안국장

다섯 번째로 납치됐을 때 나는 12일 단식하고 집에 돌아왔다. 여섯 번째로 납치됐을 때 나는 진상 삽입 방송 사건에 연루되어 2년 넘게 떠돌이 생활하다가 2003년 말에 베이징에서 납치돼 돌아왔다. 당시 국가안전국 차가 우리 집 아래에서 반년 동안 감시했었다. 경찰은 우리 집 맞은편 집에 들어가 살았고 우리 집에 도청기를 설치했다. 듣자 하니 5만 위안(약 84만 원)현상금을 걸고 날 붙잡으려 했고 딸(수련생)과 수련하지 않는 남편을 붙잡아 갔으며, 대학을 다니는 아들을 집에 강제로 돌려보냈다.

베이징에 가서 날 납치해 돌아온 경찰 두목 Q는 사부님께서 부대에 계실 때 동료였다. Q는 이전에 한 공안 분국 부국장이었다. 그는 적극적으로 박해에 가담해 대법을 박해해 승진하려 했다. 투표 결과 8개 분국 국장의 승진 기회에 그는 다 낙선됐다. 그는 승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시 국보대대에 보내져 부대 대장이 됐다.

나는 사부님께 빌었다. “사부님, Q가 사부님과 인연이 있으면 사부님께서 Q에게 좋은 일을 하게 하세요.” 베이징 파출소에서 나를 심문할 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Q에게 물었다. “내 일을 어디에서 해결할 겁니까?” 그는 말했다. “당연히 집에서 해결해야지요.” Q는 차표를 꺼내며 말했다. “표를 사놓았습니다. 차 시간에 늦지 말아야 합니다.” 베이징 파출소는 우리를 가게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아르바이트를 한 곳은 임대 오피스텔이었다. 오피스텔 경리가 차를 몰고 우리를 기차역에 데려다주고 끊임없이 말했다. “이 누님은 정말 좋은 사람입니다!” 나는 평소 법의 표준에 따라 처세하고 일했기 때문이다. 돌아온 후 사건 처리 경찰도 말했다. “베이징 사람들이 다 선생님을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Q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전우가 선생님이 한 일을 압니까?” 그는 안다면서 당신들 파룬궁 사람이 글을 썼다고 말했다. 나는 말했다. “선생님은 우물에 빠진 사람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아닙니까? 전우와 만났을 때 선생님은 전우를 볼 낯이 있겠습니까?” 그는 한숨을 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내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는 문화대혁명 이전인 1964~66년에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이다. 문화대혁명 때 나는 15살이었다. 우리 학교에 ‘관민’이라고 부르는 선생님이 적발되어 비판을 받았다. 무대에서 고깔모자를 쓰고 허리를 굽히고 있는 선생님이 비판받는 것을 나는 차마 보지 못하겠는데 한 남자 동급생은 무대에 올라가 선생님의 머리를 누르고 돌아와 “관민이 온 얼굴에 식은땀을 흘렸다”고 말했다. 나는 즉시 이 남학생에게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라고 꾸짖었고 관 선생님이 그때 날 보셨다.

관 선생님은 좋은 선생님이시다. 내가 학교에 갈 때 관 선생님이랑 같은 길로 다녔다. 봄에 산에서 빙설이 녹아내려 길이 강이 되어 우리가 지나가지 못하면 관 선생님은 자전거를 길에 눕혀놓고 우리가 그의 자전거를 밟고 지나가게 했다. 나는 18살에 졸업하고 공작조(工作組)에 참가했는데 마침 관 선생님의 고향이었다. 당시 관 선생님은 집에서 요양하고 계셨다. 그날 저녁 나는 선생님을 찾아가 선생님을 위로했다. 선생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무대에 올라가 선생님의 머리를 눌렀던 그 남성 동급생은 40살도 되지 않아 뇌경색에 걸려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 후 나는 글을 가르치게 됐는데 또 관 선생님의 소재지에 배정됐다. 나중에 관 선생님은 억울한 누명을 벗었고 선생님이 되지 않고 교육위원회 주임이 됐다. 그 후 나는 결혼했는데 남편은 현재 사는 도시의 군인이었다. 우리는 두 곳에서 따로 살았다. 관 선생님은 그 사실을 알고 내 남편의 주둔지를 물었다. 그의 이전의 고등학교 동창이 이 도시에서 시장을 맡고 있고 교육을 주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된 동창에게 편지를 쓰고 그의 도장을 찍은 후 나에게 부치라고 했다. 한 달 후 나는 이 도시로 전근됐다. 농촌 교사로서 도시에 전근하기란 74년 당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선생님에게는 자녀가 여덟 명 있었는데 모두 상관하지 않았고, 게다가 한 자녀는 병이 있었는데도 그는 아무 일도 해주지 않으셨다. 내가 15살 당시 선생님을 위해 한 공정한 말 덕분에 이런 보답을 받은 것이다.

Q는 충격을 받고 깊이 사색하더니 말했다. “나에게 100점의 힘이 있으면 나는 반드시 120점으로 선생님을 돕겠습니다.” 나중에 Q는 다시는 파룬궁 제자 박해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었다. 게다가 그를 찾기만 하면 그는 다 도와서 해결해주었다. 나중에 Q는 병을 구실로 출근하지 않았다.

그날 우리는 기차역에서 내렸는데 경찰은 대단한 적수를 만난 것 같았다. 베이징에서 파룬궁 ‘큰 두목’을 붙잡았다며 백 명이 나를 맞이했다. 나는 대범하게 국장과 악수하고 국보대장 앞에 가 악수했다. 그들은 날 시 공안국 취조실에 수감했다. 한 무리 사람이 나를 나흘 취조하고 마지막에 기록을 남겼다. 사람들은 나를 포함해 다 웃었다. 한 건도 그들에게 쓸모 있는 것이 없었고 그들은 날 구치소에 수감했다.

구치소에서 나는 여자 감옥에 수감됐고 남편은 남자 감옥에 수감됐으며 딸은 파출소 철창에 갇혔다. 나는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제자는 잘못하지 않았습니다. 한 것은 모두 대법제자가 해야 할 일을 했습니다. 저는 이런 박해를 감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 마음이 평온해졌고 홀가분해졌다.

보름 후 Q가 날 데리러 왔다. 내가 소재한 지역 경찰국은 날 징역형에 판결하려 했는데 그들 차가 도착했을 때 나는 마침 차를 타고 떠났다. 아들도 별일 없이 학교에 공부하러 갔고 딸은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만 여전히 구치소에 있었다. 국보는 날 불법적으로 징역형에 판결하려 했다. 소위 ‘싼장후이(三長會: 공안국장, 법원장, 검찰총장으로 구성된 합동회의)’에서 국보 대장은 내 남편 이름을 말했다. 한 사람이 벽 구석에 앉아서 “이 사람은 징역형을 판결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내 남편 자료를 꺼냈다.

남편은 구치소에서 불법적으로 40여 일 수감된 후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 아무도 파룬궁을 위해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시 국보대장이 나에게 어떤 인맥을 찾았느냐고 물었다. “이 사람은 검찰원 사람 같은데 이전에 그를 본 적도 없고, 나중에도 보지 못했습니다. 나는 일부러 그 사람을 찾았는데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나는 어떤 인맥도 없었다.

불법(佛法)이 끝이 없다고 말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2004년 우리 가족은 다른 곳으로 이사를 했다. 경찰이든 무슨 사람이든 나는 그들을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어려운 세월 속에서 만난 그런 좋은 사람들, 어떤 사람은 내 진상을 듣고 구원을 받았고 어떤 사람은 그들에게 진상 알릴 기회가 없었다. 이 문장을 써 고향 수련생들이 기회가 있으면 그들에게 대법 진상을 알려 대법의 구원을 받게 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사부님의 시로 수련생들과 서로 격려하고자 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민족 출신이지만 신은 우리를 대법자제(大法子弟)라 부른다네 중생구도는 우리 생명의 목적”[1]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시: ‘홍음5-전하다’

(밍후이왕 제16회 중국 대법제자 수련심득 교류회)

 

원문발표: 2019년 11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1/5/39539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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