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대법제자 구술(수련생 정리)
나는 1996년에 법을 얻은 대법제자로, 올해 76세다. 수년간 수련하면서 겪은 일들을 사부님께 보고 드리고, 수련생들과 교류하고자 한다.
밤마다 아침에 일어나지 못할 것을 걱정하다
나는 40년대에 허베이의 한 현 소재지에서 태어났고, 우리 집은 현지에서 유명한 부잣집이었다. 어른들이 모두 아주 선량해 명절에 우리가 먹는 것을 머슴들도 그대로 먹었다. 할아버지는 마을 어귀에 파를 몇 마지기 심고, 갈고랑이를 놓아두어 주민들이 사용하게 했고, 현지 촌민들도 우리를 몹시 존경했다.
나중에 공산당이 오자 우리 가족들은 ‘부농’이 되어 단번에 가산이 몽땅 사라졌다. 어렸을 때의 기억은 모두 차별을 받은 일이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학교에 가는데, 나는 가지 못했고, 정확히 2년을 뒤 쳐진 다음에야 학교에 갈 수 있었다. 나중에 온 집안이 동북 지방으로 이사했지만, 그런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내가 취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화대혁명이 일어났고, 나는 아무리 잘해도 다른 사람보다 열등했다. 당시 내가 제일 걱정한 것은 서류를 작성하는 것이었는데, ‘성분’을 적을 때는 특히 다른 사람이 보고 모욕을 줄까 봐 걱정을 했다. 그래서 나는 커다란 열등감을 가졌고, 건강도 몹시 나빠졌다.
22세가 되던 해에 한번은 내가 보온병을 들고 있다가 갑자기 기절해 쓰러졌는데,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고, 1시간을 넘겨서야 천천히 깨어났다. 나중에는 갈수록 병이 많아져 신장 결석, 담석, 담낭염, 경추병, 심장병, 고혈압, 위장병 등에 결렸고, 아플 때는 정말 죽는 것만 못했다. 해마다 입원해 치료를 받아야 했고, 퇴원하면서는 또 약을 한 수레나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내 병은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병원에 가도 낫지 않았다.
나는 40세가 되자마자 병으로 퇴직했다. 당시에는 매일 잠들기 전, 남편에게 효과 빠른 구심환을 옆에 놓아두었다가 내가 발작하면 입안에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날마다 이야기를 했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나는 발병했을 때 내가 고함을 칠 수 있으면 나에게 약을 먹이게 할 수 있지만, 소리를 못 치면 죽을 것으로 생각했다. 나의 증상은 오늘 누우면 내일 살아 있을지를 알 수 없는 정도로 심각했다.
대법 수련해 만병 완치
내가 어렸을 때 할머니와 어머니가 모두 부처를 믿었으므로 나는 해탈을 찾는 마음을 품고 있었다. 40여 세에 나는 절에 귀의해 거사가 되었다. 하지만 문화혁명 후에 사원은 이미 난을 당했다. 나는 아주 경건하게 공양을 했다. 주지가 집에 와서 밥을 먹을 때 나는 부처 수련을 하는 사람이 마땅히 깨끗해야 한다고 생각해 모든 솥, 공기, 국자, 사발을 소금물로 꼼꼼히 닦고 또 닦은 다음에야 밥을 지었다. 그는 밥을 다 먹고 문을 나서면서 문 앞의 나무가 좋지 않다며 나에게 베어내라고 했다. 당시에는 나무를 베는 것도 살생이라는 것을 몰라서 승려가 하는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렇게 일만 없으면 절에 달려갔는데, 수많은 해가 지났지만, 몸은 호전되지 않았고, 수련의 뜻도 알 수 없었다.
1996년 6월 초, 나는 53세가 되었고, 여동생이 대법을 얻어 나에게 파룬궁을 소개했다. 내가 말했다. “나는 이걸 안 믿어. 수련은 절에 가서 하는 건데, 기공으로 어떻게 수련할 수 있어?” 그러나 동생은 계속 이야기를 했다. 나는 동생이 정말 간곡하게 말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너희들 수련하는 곳이 너무 멀어. 내가 가려면 불편해서 갈 수가 없잖아.” 동생이 말했다. “이 공은 집에서도 연마할 수 있어.” 내가 말했다. “그럼 네가 그 몇 장 동작을 한번 해 줘.” 동생이 제1장 공법을 마쳤을 때 나는 이 공법이 대단히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하로 늘이는 동작이 아주 우아했고, 분명히 괜찮았다. 내가 말했다. “나도 이 공을 연마할게.”
이후 동생은 또 나에게 ‘전법륜(轉法輪)’을 가져다주었다. 내가 ‘전법륜’을 한 번 보니 대단히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때 이후로 아주 오랫동안 매일 아침 연공을 하면 양복을 입으신 사부님의 법신께서 내 주변을 왔다 갔다 하셨는데, 연공만 하면 보였고, 아주 또렷했다. 나는 이것이 진정한 불법임을 알았고, 그때부터 정말 경건하게 정성을 다했다. 원래는 길을 걷는 것도 힘들었던 내가 지금은 매일 아침 두 시간씩 연공을 해도 피로를 모르고, 무거운 것을 들어도 아주 가뿐하다.
우리 집에는 3백여 평짜리 건물이 하나 있는데, 절반을 사람들에게 법공부장으로 제공해 날마다 40~50명이 와서 법공부를 했다. 당시 새로 법을 얻은 사람이 아주 많았는데, 어떤 사람은 아무 데나 가래를 뱉었고, 위생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매일 사람들이 가고 나면 우리는 늘 정돈에 오랜 시간을 썼다. 당시에는 나의 사람 마음이 올라와 조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동생이 나에게 말했다. “언니는 아직 수련하지? 수련한다면 내려놓아야지.” 동생이 말을 마친 후, 나도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이건 더러움을 싫어하는 마음이 아닌가? 이후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고, 나는 그것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남편은 대단히 좋은 사람으로, 아주 선량하고 열정적인 사람이다. 동북 지방의 겨울은 비교적 춥고, 매일 법공부를 하는 사람은 아주 많다. 방 안에 공동 난방이 안 되어 그가 보일러 가동을 도왔다. 보일러를 돌리려면 많은 석탄이 필요했는데, 많은 수련생이 사람들에게서 돈을 거둬 석탄을 사자고 했다. 내가 말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이 여기에서 안심하고 법공부와 연공을 하지만, 오늘 제가 가진 이런 조건을 모두 사부님께서 주셨으니, 여러분의 돈은 한 푼도 안 받을 겁니다.”
1997년 새해를 맞자마자 나는 딸네 집으로 왔다. 딸이 사는 집은 3층이지만, 계단이 모두 실외에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내가 계단을 내려갔는데, 계단을 닦을 때 물을 많이 묻히고, 날이 추워 계단이 얇은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발이 미끄러졌는데, 2층에서 아래까지 미끄러져 땅바닥에 심하게 부딪혔고, 단번에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천천히 정신을 차린 후에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은 내가 부동산 회사를 찾아가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하면 청소부가 일자리를 잃는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딸이 구급차를 불렀고, 나는 전신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어 들것에 실려 올라갔다. 병원 검사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움직일 수 없었고, 전신이 해체된 것처럼 뱃가죽까지 아팠다. 사부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빚진 것은 갚아야 한다. 그러므로 수련의 길에서 일부 위험한 일들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유의 일들이 나타날 때 당신은 두렵지 않을 것이며, 또한 당신에게 진정한 위험이 나타나지 않게 할 것이다.”[1] 나는 내가 수련인이므로 틀림없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여 10여 일 동안 연공을 하자 완전히 나았다.
1997년 여름, 나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이 비교적 컸기 때문에 우리 시(市) 전체와 이웃 현(縣) 두 구역에서 필요한 책을 모두 여기에 보관했다. 한번은 책 상자 무더기 세 개가 운반되어 왔는데, 하나에 1톤씩이었다. 작업자가 책을 내려놓을 때 밖에 비가 왔으므로 나는 실내를 밟아 더럽히면 대법 책에 대해 불경한 행동이 될까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여기에 놓으세요. 제가 옮길게요.” 복도에서 책을 두는 방까지는 족히 6~7m나 되었고, 당시 나는 또 소업을 하고 있었지만,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혼자서 방으로 옮겼다. 여동생이 퇴근 후에 물었다. “이걸 누가 옮겼어?” 내가 말했다. “내가 옮긴 거야.” 동생은 몹시 놀라워했다. 책 상자 세 무더기 속의 작은 상자가 모두 30kg이 넘었는데, 쌓은 것이 높고도 가지런해 나도 어떻게 옮겼는지를 몰랐다. 원래 나는 손으로 물건을 드는 것도 어려운 사람이었으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사부님의 가지였다.
수련을 통해 내 몸의 모든 병이 나았지만, 신장 결석 증상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한번은 고향 집에 볼일이 있어 가게 됐는데, 가기 전날 신장 결석이 다시 발작을 일으켰고, 아파서 난관에 봉착했다. 남편이 물었다. “가요 안 가요?” 나는 사부님의 말씀을 생각해냈다. “좋고 나쁨은 사람의 일념(一念)에서 나오며….”[1] 내가 말했다. “가요!” 신기하게도 기차를 타고 가는 열몇 시간 동안 아프지 않았다. 도중에 갈아탈 때 한 친구의 집에 갔는데, 극심하게 아프기 시작했다. 그 친구는 의사였는데, 그녀가 말했다. “이건 전형적인 신장 결석이야. 기차를 열 몇 시간 더 타는 건 안 되고, 너무 위험해.” 내가 말했다. “나는 그래도 가야 해.” 기차를 타자마자 조금도 아프지 않았고, 집에 도착해 눕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대략 4~5시간 동안 아프다가 수수 알 만한 결석 하나와 좁쌀만 한 결석 두 개가 자동으로 배출됐다. 그때 이후로 신장 결석은 다시 생기지 않았다.
1997년 겨울, 내가 딸네 집에 아이를 보러 갔는데, 딸이 사는 구역에 연공장이 없어 매일 아침 30분 동안 버스를 타고 시내의 연공장으로 갔다. 나중에 우리 구역에 수련생 한 명이 있다는 말을 들었고, 우리는 우리 지역에 연공장을 세웠다. 처음에는 세 명밖에 없었지만, 1999년 박해 전까지 30명이 넘는 사람이 날마다 연공을 했다.
베이징에서 법을 실증하다
1999년 초, 나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5월 즈음에 사당이 연공장의 모든 사람에 대해 등록과 조사를 시작했다.
7월 20일, 경찰이 각 연공장에서 미친 듯이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소식을 듣고 베이징에 가서 집권자에게 사실 진상을 알리는 청원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베이징으로 가는 도로가 모두 봉쇄됐고, 7월 21일, 나는 수련하는 여동생과 몇몇 수련생과 함께 차를 몰고 이웃 현으로 간 다음, 버스를 타고 톈진으로 가서 차를 갈아타고 베이징으로 갔다. 우리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75세였던 노모가 직접 전화를 걸어 말했다. “경찰이 집을 모두 약탈하고, 계속 너희들을 찾고 있어.” 그래서 나는 베이징에 남았다.
당시 어떻게 하면 이번 박해를 빨리 저지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는데, 마침 유엔 사무총장 아난이 베이징을 방문하게 되어 나는 몇몇 수련생과 함께 아난에게 일부 자료를 전달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당시 각국 정부가 모두 거짓말에 호도되어 아주 큰 공을 들였지만, 전할 수가 없었다.
외국 정부가 안 되니 우리는 중국 정부를 찾았다. 2000년 1월, 나는 수련생 3명과 함께 민원실에 가서 청원했다. 민원실에서는 파룬궁을 수련한다는 말을 듣더니 개인 정보표 한 장씩을 작성하게 했다. 우리는 작성을 마치고 접대할 사람을 기다렸는데, 뜻밖에도 우리를 공안국으로 데려갔다. 동행한 외지 수련생 한 사람은 큰 나무를 안고 수갑이 채워졌다. 우리가 간수소로 압송되기 전에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언니, 또 만나요.” 그때 이후로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고, 그녀가 귀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박해로 사망했다는 말을 들었다.
간수소의 환경은 몹시 열악했고, 잠자는 사람이 커다란 침상에 빽빽하게 누워있어 화장실에 갔다 오면 잘 곳이 없었다. 화장실은 바로 방 안의 커다란 구멍 하나였고, 대단히 더러웠다. 나는 어려서부터 깨끗한 것을 특별히 좋아해 대법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이런 곤란을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간수소의 감방에는 17명이 있었는데, 14명이 대법제자였다. 대법제자가 연공만 하면 감방장이 때렸다. 내가 그것을 보고 큰소리로 그녀에게 말했다. “멈춰요. 사람을 때릴 수는 없어요!” 감방장은 곧바로 멈추었다. 나중에 내가 연공할 때 그녀가 말했다. “할머니, 이 감방에서 할머니만 연공할 수 있어. 나는 할머니를 사람으로 보지만, 다른 사람은 안돼.” 내가 말했다. “그건 안 돼요. 연공을 하려면 모두 해야지. 나 혼자 할 게 뭐예요?” 모두 함께 연공을 하자 그녀는 상관하지 않았다. 머지않아 감옥 경찰에게 발견됐고, 감옥 경찰은 모든 사람에게 수갑을 채운 다음 청소를 하면서 우리를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반대편은 바로 남자 감방이었다. 그들은 소식을 듣고 모두 작은 창에 엎드려 우리를 칭찬했다. 나는 수갑을 찬 양손을 높이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파룬궁! 우리는 파룬궁이에요!”
우리는 꼬박 이틀 동안 수갑을 찼고, 잠을 자고 밥을 먹어도 계속 수갑을 찼다. 마침 한 수련생이 심문을 받으러 가면서 수갑을 벗었는데, 돌아온 후에는 돌아가며 사람들에게 밥을 먹이고, 화장실 볼일을 도왔다.
검은 소굴에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로 법이었지만, 입감할 때 옷을 모두 벗고 받는 조사가 대단히 엄격했다. 나는 포켓형 ‘홍음’을 몸에 지니고 있었는데, 재빨리 옷을 모두 벗어야 했을 때 한 경찰이 갑자기 말했다. “됐어. 입어요. 이렇게 나이가 많으니 가세요.” 나는 ‘홍음’을 순조롭게 가지고 들어왔고, 안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법을 공부하고 외웠다. 한 달 후에 나는 검은 소굴을 뛰쳐나왔다.
2001년 1월, 내가 감시를 받는 한 수련생의 집에 갔다가 다시 간수소로 납치를 당했는데, 수많은 수련생이 잇달아 납치되어 그 감방으로 들어왔다. 감방장은 나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추었다. 감방의 규칙에 따라 새로 들어오는 사람에게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냉수 한 통을 끼얹어 군기를 잡았지만, 나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한 대법제자가 들어왔을 때 나는 감방장에게 말했다. “대법제자한테는 물을 끼얹으면 안 돼요.” 그녀가 말했다. “네, 할머니, 말씀을 들을게요.” 이후부터 들어오는 수련생은 물세례를 받지 않았다.
두 차례 납치됐을 때 모두 감방에서 새해를 맞았다. 새해를 맞을 때 수련생의 가족들이 과일을 보내왔는데, 우리는 은폐된 곳을 찾아 사부님께 공손하게 바쳤다.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고 사부님께 새해 인사를 올렸는데, 한 속인이 보고는 자신도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진상을 알렸을 뿐 아니라 시간이 남으면 수련생과 함께 법공부와 연공을 했다. 사부님의 가지로 끊임없이 신경문을 받을 수 있었다. 1개월 후, 나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두려움 극복하고 자료를 배포하다
2003년, 내가 딸이 사는 도시에서 약 2백 평 되는 집을 샀는데, 내부 공사에 석 달이 필요했다. 나는 산둥에서 온 작업자들에게 일을 시켰는데, 그들을 노동자로 여기지 않고, 힘들게 일하는 것을 동정해 일주일마다 적어도 두 번씩 갈비를 사주었다. 내가 가기만 하면 작업자들이 몰려와 나를 둘러쌌고, 대단히 감동했다. 그들이 말했다. “저희가 밖에서 일하려면 냉수마저도 직접 갖다 먹어야 하는데, 날마다 이렇게 고기를 주는 사람을 어디에 가서 보겠습니까?” 한 십장은 돈을 너무 많이 써서 새해에 집에 갈 돈이 없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즉시 3천 위안(한화 약 50만 원)을 그에게 주었다. 그들과 나는 관계가 대단히 좋았다. 나중에 삼퇴가 시작된 후, 내가 그들을 불러 탈퇴를 권하자 그들이 말했다. “아주머니가 이렇게 좋으시니, 무슨 말씀을 하시든 모두 믿습니다.” 그리고는 모두 탈퇴했다.
한 번은 수련생이 나에게 진상 자료 7부를 가져와 배포하게 했다. 나는 저녁에 두 시간 동안 밖에서 돌아다녔지만, 한 부도 나눠주지 못했다. 어디를 가든 누군가가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다리가 덜덜 떨렸고, 입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튿날 법공부를 하고 나니 그래도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에 또 나가서 세 시간 동안 돌아다녔는데, 역시 한 부도 나눠주지 못했다. 돌아와 다시 법공부를 했다. 다른 사람은 할 수 있는데, 나는 왜 안 될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도 나가겠다고 생각했다. 셋째 날은 문을 나서자마자 문 앞에 경찰차 한 대가 정차해 있는 것이 보였고, 놀라서 다시 돌아왔다. 그제야 나는 법공부가 적고, 씬씽이 못 미쳐서 일을 하는 것이 몹시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이후 어느 날, 내가 ‘정진요지’를 읽고 읽는데, 책이 단번에 밝아지면서 매 하나의 글자에서 금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는 사부님께서 나를 격려하시니 사부님의 정법 노정을 따르고, 두려움을 극복해 버려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당시 나는 외지에 있었는데, 곧바로 그곳의 대법제자를 찾아 그들에게 자료 인쇄를 도와달라고 부탁해 자료 발행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전히 정말 두려웠고, 나가기 전날만 되면 마음이 불안했다. 그러나 끊임없이 사부님께 보호와 가지를 청했고, 문을 나서기만 하면 두렵지 않았다. 이후 매번 자료를 찍고 배포하는 전 과정에서 스스로 정념을 충만하게 하여 인연 있는 사람이 진상을 알게 했다. 그렇게 시작하면 비교적 순조로웠고, 신기한 일이 아주 많았다.
당시 자료는 소가죽 주머니에 넣었다. 한번은 모두 배포하니 하늘이 음침해 솥 바닥 같았다. 나는 지금 나가서 진상 자료를 가져오기에는 이미 여유가 없고, 비에 젖으면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 사부님께 비를 내리지 않게 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결국 다른 곳에는 모두 큰비가 내렸지만, 내가 배포하는 작은 지역에만 비가 내리지 않았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가지에 감사드립니다!
한번은 내가 밤 11시까지 자료를 배포하다가 꽤 먼 곳에서 길을 잃었다. 나는 지닌 돈이 한 푼도 없어 조급해졌고, 곧 사부님께 말씀드렸다. “사부님, 저는 집을 못 찾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십시오.” 다시 걸으면서 머리를 들자 우리 집 대문이었다.
또 한번은 내가 우람한 체구의 보안원에게 미행을 당했다. 나는 곧 일념을 냈다. ‘당신은 나를 뒤쫓을 수 없다.’ 다시 보니 그는 내 뒤에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면서 나를 뒤쫓지 않았다.
(계속)
주:
[1] 리훙쯔 사부님의 저서: ‘전법륜’
원문발표: 2019년 11월 7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마당>밍후이대륙법회>제16회(2019년)
원문위치: http://big5.minghui.org/mh/articles/2019/11/7/39549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