웨이싱옌 사건 그 후
글/ 충칭(重慶) 대법제자
[밍후이왕] 중공이 파룬궁(法輪功) 수련생을 박해한 지 이미 20년이 되었습니다. 파룬궁수련생들은 이 정과 사의 겨루기에서 걸어지나 왔습니다. 자비로운 사부님에 대한 감사한 마음을 안고, 이 역사의 긴 과정 속 순간의 경험을 적어내어, 사람들에게 사(邪)는 정(正)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천리(天理)임을 알려주고자 합니다.
세인에게 감동을 준 선(善)
2003년 추석날 밤,문을 마구 두드리고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려도 저는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반 시간 후 전기절단 칼로 문을 따고 십여 명이 들어와 시커멓게 서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냉정했고 ‘610’ 두목에게 증거 서류를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녀는 압수수색영장을 보여주었는데 위에 이름이 잘못 적혀있었습니다. 저는 즉시 말했습니다. “이것은 제 이름이 아닙니다.당신들의 현재 행위는 법률을 위반한 것입니다.” 그녀는 “아이고, 그럼 어떻게 하나요?”라고 말했습니다. “배상하세요. 불법으로 주택을 침입했습니다.”, “다시 만들어오겠습니다.”, “당신들은 현재 이미 법을 위반했습니다.” 저는 당황하지 않고 그들에게 앉으라고 하고 물과 과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표면의 사람은 구도 되어야 하고, 제거하는 것은 그들을 조종해 나쁜 일을 하는 사악한 요소와 생명입니다.
나중에 십 년 억울한 옥살이를 끝낸 후 알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에 가택수색을 한 ‘610’직원이 돌아가서 장모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파룬궁(제자)은 너무 선량합니다. 그날 우리가 집을 마구 뒤져놓았고 전기절단 칼로 문도 망가트렸는데, 우리를 선하게 대하며 물과 과일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평온했는데 파룬궁(제자)은 너무 선량합니다.” 나중에 그는 ‘610’을 떠나 교통경찰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 그들은 얻고자 한 것을 수색해 내지 못했으나, 제 핸드백에 있던 ‘전법륜(轉法輪)’ 축소판을 가져갔습니다. 새벽 1시경, 충칭(重慶)시 공안국 안보 경찰과 ‘610’경찰이 저를 집에서 강제로 데려갔습니다. 시부모님과 우리는 같은 아파트에 살아 두 분은 이 일체를 보았습니다. 제가 강제로 끌려갈 때 두 분은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어디로 데려가나요? 사람이 이렇게 좋고 아이도 어린데 우리 며느리를 어디로 데려가나요? 어디로 데려가나요?” 아파트 아래로 끌려 내려와서도 두 분의 목소리가 뒤에서 계속 들렸습니다.
저는 상칭쓰(上清寺)파출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저를 제가 앉은 의자에 수갑으로 채워놓고 한 사람이 저를 지켰습니다. 오전 5시경, 그 사람이 가고 당직대에 한 경찰이 당직을 서고 있었습니다. 천천히 손을 움직여보니 손이 수갑에서 나올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발정념 구결을 읽으며 손을 점차 수갑 안에서 꺼냈습니다. 당직 경찰이 잠든 것을 보고 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문을 나서 대문 쪽으로 달렸습니다. 당직 경찰이 깨어나서 저를 따라잡지 못하니 큰소리로 외쳤습니다. “선생님이 가시면 저는 어떡합니까?” 저는 발걸음을 멈췄습니다. 그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가면 그는 일자리를 잃을 수도 있고 저를 원망할 것입니다. 그가 제게 원한이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저는 다시 돌아가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날 오후, 저는 충칭시 ‘610’ 리모(某) 등 사람에게 위중(渝中)구 구치소로 끌려갔습니다. 그들은 제 몸을 수색하고 허리까지 오는 머리를 귀까지 맞추고 잘랐습니다. 그 사람은 머리를 깎으며 말했습니다. “얌전하게 생긴 사람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저는 아무(나쁜 일)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진실한 말을 한마디하고 진실한 사건을 하나 보도했을 뿐입니다.”
저는 감방으로 끌려갔습니다. 방장이 제 옆에 앉아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파룬궁을 수련하는 사람이에요?”, “예”, “제가 처음에 감방에 들어왔을 때 파룬궁하는 사람을 만났는데,제게 시를 가르쳐 주었어요. 당신들 사부님이 쓴 것이라던데 정말 좋았어요.” 이렇게 저는 그녀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잠은 바닥에서 자는데 한 19살짜리 벙어리가 저와 같이 잤습니다. 그녀는 소매치기해 8개월을 선고받고 아직 2개월이 남았습니다. 그 애의 앳된 얼굴을 보며 저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애는 제게 수화를 했습니다. “사랑합니다.” 저는 그 애의 손을 가슴에 얹고 말했습니다. “나도 사랑합니다.” 그 애는 저의 뜻을 알아듣고 제 품에 안겨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튿날 저녁, 저는 방금 배운 수화로 그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 그 애도 따라서 “파룬따파하오” 수화를 하며 손으로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그 뜻은 “저는 기억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구치소에 들어간 4일째, 리모·왕모 등 ‘610’ 직원 4명이 와서 이른바 심문을 했습니다. “왜 우리가 당신을 여기로 데려왔는지 아십니까? 이 3일 동안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딸이 아직 어리고 아직 공부하는데 당신의 돌봄이 필요하지 않나요. 딸이 당신을 아주 좋아한다던데.. 음, 어때요?” 저는 말하지 않고 미소로 대신 답했습니다. 실직적인 심문이 이루어지지 않자 리모가 말했습니다. “우리는 대량의 증거가 있습니다. 오늘 잠시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3일이 지나 그들은 또 와서 제게 물건을 정리하고 그들을 따라 오라고 했습니다. 방안에 감금된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어, 저는 물건을 정리하며 그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만약 제가 보름 안에 아직 여기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제 이름을 기억하세요. 나간 후 제 가족과 사람들에게 저는 ‘610’ 직원이 구치소에서 데려갔다고 알려주세요. 감사합니다.” 제 옆에서 자던 여자애와 방장, 기타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저를 도와 함께 물건을 정리해주었습니다.
흔들지 못하는 정념
저는 충칭시 사핑바(沙坪壩)구 솽베이셴펑(雙碑先鋒)가 쑹바오(松堡)접대소, 전문 파룬궁수련생을 겨냥한 시급 ‘전향반’으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 들어가면 아파트, 거리에 대법을 모함하는 그림이 가득 붙여져 있습니다. 저는 지금부터 24시간 발정념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저를 어느 2층 방에 가두고 제게 물건을 옆방에 두라고 했는데, 작은 회의실이었습니다. 왕모는 제 맞은편 글 쓰는 책상 앞에 앉았고 리모와 다른 몇 사람은 책상 옆에 서 있었습니다. 왕모는 제 이름을 부르며 이야기를 시작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았습니다. 시간은 이렇게 1분 1초 지나갔습니다.
밤이 되니 리모가 말했습니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편하신가요?” 그리고 옆에 있는 젊은이에게 등받이가 없는 걸상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잠을 자지 못하게 하는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4일 밤낮을 그들은 제게 눈을 붙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잠시 후 저를 쪽방으로 데려가고 또 잠시 후 작은 회의실로 데려갔으나, 그들이 원하는 자백을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추석 저녁 집을 수색하러 온 ‘610’두목이 엄하게 말했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겁나지 않습니다. 천치(陳奇)는 자백을 한마디도 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에게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신의 증거는 이미 모두 수집해 놓았습니다. 당신이 성실한가 성실하지 않은가만 봅니다.” 몇 번이나 ‘610’직원이 주먹을 쥐고 저를 때리려 했지만 주먹이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저는 위대한 사부님께서 제자가 폭행당하지 않게 보호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6일째 그들은 말했습니다. “우리의 경비는 한계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루를 더 머물면 하루의 비용을 더 내야 합니다. 말하지 않아도 증거가 많으니 우리는 이제 가겠습니다.” 밤낮없이 이어지는 심문 기간에도 저는 매일 오전 4시가 되면 법을 외웠고 주위의 그 무엇도 저를 교란하지 못했습니다. 며칠을 자지 않아도 머리가 청성해, 저는 사부님께서 바로 제 곁에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주일 후,그들은 다시 저를 위중구 구치소로 보냈습니다. 감방에 들어가자마자 모두 제 주위로 몰려와 이것저것 물었고, 여자아이는 제 품에 와락 안겼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한 주 동안 겪은 것과 제가 잡힌 진실한 원인을 이야기했습니다.
2003년 5월 13일, 충칭대학 전기공정대학원 고압 송변전 석사연구생 웨이싱옌(魏星豔)은 다른 대법제자와 함께 풍선을 날리고 족자를 걸었습니다. 족자에는 ‘파룬따파하오’ 표어가 있었고 그 후에 웨이싱옌은 체포되었습니다. 사핑바구 바이허링(白鶴嶺)구치소에서 한 경찰이 두 여성 앞에서 그녀를 강간했습니다. 이 악성 사건은 국제사회에서 폭로된 후 충칭 공안·검찰·법률(이하 공검법)계통, ‘610’위에서 아래까지 은폐하며 파룬궁이 거짓말을 지어내 정부를 모함한다고 했습니다. 제가 체포된 원인은 바로 이 진실한 사건을 폭로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공검법 직원을 포함한 많은 사람이 웨이싱옌 사건이 진실하다는 것을 압니다. 그리하여 감옥에서 경찰이 각종 수단으로 저를 ‘전향’시켜도, 저는 웨이싱옌 사건을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잡아뗄 수 없는 하나의 진실한 대법제자를 박해한 사건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시 저를 심문하러 왔습니다. 왕모가 말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뭐 하러 온 줄 압니까?체포증에 서명을 받으러 왔습니다.” 리모가 말했습니다. “여전히 기회를 드리는 것입니다. 웨이싱옌 사건은 당신들 사부가 하라고 했다고 말하면, 당장 집으로 모셔드리고 절대 형사 책임을 추궁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그를 보며 평온하고 엄하게 말했습니다.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그는 화가 나 얼굴이 빨개지며 소리 질렀습니다. “좋아요, 어디 두고 봅시다.” 그리고 제 딸을 찾아가겠다며 학교로 찾아가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저는 책상을 탁 내리쳤습니다. “감히, 나는 당신들을 고소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는 단번에 조용해졌습니다. 좀 있더니 얼굴이 빨개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를 고소한답니다. 저를 고소한답니다.” 그리고 이어서 또 말했습니다. “됐습니다. 우리 이제 더는 저 사람과 말하지 맙시다. 저 사람은 법을 압니다.” 이리하여 이번 불법적인 심문은 끝이 났습니다.
나중에 제가 10년 불법 형기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아무도 딸을 찾아오지 않았고, 전화가 한번 왔었는데 시험 치러 가야 한다고 하니 상대방이 전화를 끊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또 사부님께서 딸을 보호해주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저는 체포된 후 딸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어머니, 어디에 계시나요? 정말 보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은데 어디에 계신가요?” 그 편지는 다른 가족이 제게 전해주었습니다. 딸은 제가 구치소에 있는 줄 모릅니다. 딸의 편지를 보고 저는 끊임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딸이 버텨낼 수 있을까? 마음속 강대한 정념이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있다.”
여자아이가 수어로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아주머니, 괴로워하지 마세요. 제가 곧 나가니 제가 가서 아이를 돌봐드리겠습니다.” 저는 눈물을 머금고 그녀의 앳된 얼굴을 바라보았습니다. 얼마나 잊을 수 없는 수어입니까, 얼마나 구도할 가치가 있는 중생입니까. 저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습니다. “아줌마가 고맙습니다.” 그녀는 우리 집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 순진한 소망은 마음에서 우러난 것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사부님의 시를 외웠습니다. “오로지 중생을 위해 한 번 출연하노라”[1]
수련인의 위엄
2004년 2월 16일 오전, 우리 4명은 충칭시 제1중급법원으로 끌려갔습니다. 법원 대문에 리모 등 ‘610’ 직원과 안보 경찰이 가득 서 있었습니다. 법원 경찰은 우리를 어느 방으로 데려갔습니다. 한 할아버지가 우리를 보러 들어오겠다고 했지만, 법원 경찰들이 막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할아버지는 발로 문을 쾅 열고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저는 들어가서 우리 가족을 봐야겠습니다.” 그는 온몸에 바른 기운을 내뿜으며 우리를 보고 있었습니다. 저는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오전 9시에 개정해 법정에 2~300명이 있었고, 밖에도 사람이 많이 있었습니다. 점심 식사 후 다시 개정했습니다. 심문 중에서 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고 중화민족은 더 사랑합니다. 저는 어떠한 법을 위반하는 일도 하지 않았고,법도 잘 지키는 국민입니다.” 법정 심문은 오후 2시경에 끝나 3시쯤에 우리를 구치소로 돌려보냈습니다.
3일 후 충칭시 중급법원은 우리를 공개 심판했습니다. 저는 1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이튿날 한 사람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고등법원에 항소했습니다. 5월 13일, 저는 충칭시 고등법원에서 보낸 원심을 유지한다는 판결문을 받았습니다. 저는 상고서를 쓰기 시작해 마지막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저는 저의 합법적인 권리를 유지하며 정의 양지로 줄곧 상고할 것입니다.” 그때부터 저는 10년 동안 상고서를 썼습니다.
나중에 그들은 저를 위중구 구치소에서 충칭 여자 감옥으로 보냈는데, 몇 번이나 감옥에서 받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시 충칭시 사오관숴(少管所)로 보내졌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매일 법공부, 연공, 발정념을 견지하며 중단한 적이 없습니다. 한 경찰이 말했습니다. “전혀 자유를 잃은 사람 같지 않습니다. 혈색이 너무 좋습니다.” 저는 그녀에게 “마음에 진선인(眞善忍)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2004년 9월 29일, 위중구 구치소는 다시 한번 저를 충칭 융촨(永川)여자 감옥으로 보냈습니다. 사법국의 지시를 받았으니 반드시 저를 감옥에서 받아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강제로 여자감옥 4감구로 보내졌습니다.
4감구는 중형 감옥 구역이라 관리가 아주 엄했습니다. 그곳에 가니 감옥 구역장 리원(李文)이 저를 찾아와 이곳의 관리는 어떠하고 무엇에 주의해야 한다고 알려주었습니다. 마지막에 제게 무슨 할 말이 있냐고 물어 제가 말했습니다. “당신이 말한 이런 것은 듣기에는 관리가 잘 된 것 같지만, 제가 듣기로는 파룬궁수련생에게는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서요. 생리해도 생리대도 사지 못하게 하며, 기본 생존권마저 빼앗는다고요.”그녀가 물었습니다. “믿으십니까?”, “사실이 아니길 바랍니다. 이런 행위는 사람의 기본 권리를 빼앗고 침해하는 것입니다.” 저의 태도가 상대방에게 닿았는지 제게는 법과 규율에 따라 관리해, 누구에게도 폭행당한 적도 없고 욕을 먹은 적도 없습니다.
파룬궁을 계속 믿어 감옥에서는 제게 감형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전문적으로 파룬궁수련생을 ‘전향’하는 곳 모모 사무실이 있는데 바로 ‘610’사무실입니다. 한번은 ‘610’사무실 책임자가 제게 왜 파룬궁이 X교라 승인하지 않는지 물어 제가 대답했습니다. “바른 것과 그릇된 것은 어느 정부, 어느 국가, 혹은 어느 지도자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국, 타이완, 홍콩, 마카오는 원래 뿌리가 같지만, 세 지역에서 모두 파룬궁을 인정하고 파룬따파(法輪大法)가 정법이라고 여깁니다. 왜 중국만 파룬궁을 X교라고 단정 짓습니까? 이것은 깊이 생각할 가치가 있는 문제가 아닙니까?”, “파룬궁이 X교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감형을 받을 수 없습니다. 가족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이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자유는 사람에게 매우 소중합니다. 그러나 자유를 얻기 위해 흑백을 가리지 않고 선악을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저는 제 가족과 아이를 많이 사랑합니다. 그러나 만약 제가 사람의 기본 원칙을 버리고 그들 곁으로 돌아간다면, 저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해치는 것입니다.”, “그럼 10년 형기를 다 채우세요.”, “저는 옥살이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만약 제게 사람의 원칙을 버리고 자유를 바꾸라고 한다면 저는 차라리 10년을 채우겠습니다.” 이것은 영혼에 깊이 파고든 담화입니다. 이런 담화는 여러 번 있었습니다. 매번 저는 파룬따파가 바른 법이라 확정하고 조금도 얼버무리거나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한번은 어떤 감옥 경찰이 찾아와 이야기 나눌 때, 제게 왜 누구와 이야기를 나눠도 우리의 사부님을 사부님이라고 부르는지 물어보았습니다. 저는 “한번 스승이 되면 평생 아버지와 같이 존경하고 모셔야 합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과 아버님을 이야기할 때 존함을 직접 부릅니까?”라고 물어보니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왕리쥔(王立軍)주관 충칭시 공안국 기간에 보시라이(薄熙來), 왕리쥔은 충칭지역 파룬궁수련생들을 강제로 ‘전향’시키고, 충칭 여자 감옥에서 또 한 번의 확고한 대법제자에 대한 강제 세뇌 ‘전향’을 시작했습니다. 감옥 경찰은 감시자에게 제게 강제로 세뇌하고 잠을 자지 못하게 했습니다.
한번은 ‘전향’을 책임지는 감옥 경찰이 저를 찾아와 이야기를 나누어 제가 그녀에게 알려주었습니다. “당신들이 사람을 잠자지 못하게 하는데 24시간 어느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장기의 운행은 규율이 있습니다. 강제로 이런 장기의 운행 규칙을 개변하는 것은 일종의 잔인한 행위입니다. 그 외, 당신들은 전향하지 않은 대법제자를 자지 못하게 하고, 당직 기록에는 매일 저녁 10시에 저를 감옥으로 돌려보내 자게 했다고 적습니다. 이것은 뭐 하는 행위입니까?” 그녀는 깜짝 놀라더니 얼른 감시자에게 “방에 데려가 자게 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부터 더는 강제로 저를 자지 못하게 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사부님의 자비, 대법의 위력
감옥에서 경찰은 감시자에게 제 보온병, 물컵과 밥 안에 알지 못할 약물을 넣게 하려 했으나 목적에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다시 한번 보호해 주셨습니다.
한번은 감옥에서 피를 뽑으려 계획했는데 저도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절대로 저의 피를 뽑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제자의 몸을 즉시 맥이 없고 혈이 없는 상태가 되게 해주십시오.” 제 차례가 되니 감시자 서너 명이 지키며 감옥 의사가 소독수를 제 오른쪽 팔에 발랐습니다. 당시 또 손에 혈관이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소독수로 닦아내고 의사는 주사를 들었는데 어떻게 해도 혈관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제 손등을 때렸는데 어떻게 때려도 혈관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놀라서 말했습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똑똑히 보이던 혈관이 어떻게 지금은 보이지 않나요?” 저는 마음속에서 말했습니다. ‘사부님, 당신은 제자를 정말 많이 아끼십니다.’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 아래 10년 억울한 옥살이 동안 그들은 한 번도 저의 피를 뽑지 못했습니다.
10년 억울한 옥살이를 걸어지나 왔습니다. 경찰과 한 차례 한 차례 교전 중에서 사부님의 자비로운 보호와 가지 아래서 저는 매번 자비와 대법의 위엄으로 경찰들의 박해를 제거했습니다. 이 과정 중에서 저는 한 번도 선량함을 잃지 않았고 선량함의 힘은 거대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10년 형기가 곧 끝날 무렵 한 경찰이 제게 “사실 우리 경찰은 모두 선생님을 존중합니다”라고 말하고 다른 한 경찰은 “선생님이 이렇게 견지하는 것을 보고 저도 ‘전법륜(轉法輪)’을 빌려서 보았습니다”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또한 경찰이 말했습니다. “선생님의 이런 표현을 보고 저도 진선인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사부님의 자비와 대법의 위력이며, 하나하나의 중생이 저의 선한 표현 중에서 구도를 받게 한 것입니다.
수련인이 무의식중에 드러내는 본질
감옥 안의 생활은 고생스러운데, 한 사람에게 하루에 따뜻한 물 한 병밖에 없습니다. 1년 내내 그렇습니다. 만약 감시자가 샤워하면 저는 저의 따뜻한 물을 그녀들에게 쓰라고 주었습니다. 10년간, 겨울이든 여름이든 생리가 오든 저는 찬물에 샤워했습니다. 저는 제가 마실 것만 조금 남기고 남은 따뜻한 물은 감시자나 다른 죄수들에게 주었습니다. 오전은 매주 찐빵을 한번 먹는데, 생활이 어려워 찐빵이 모자랍니다. 매번 찐빵을 먹는 날이면 저는 찐빵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죽만 한 그릇 먹었습니다. 표현해낸 약간의 선은 수련인이 자연스럽게 나타낸 본질입니다.
같은 감방의 한 죄수 레이위샤(雷雨霞)는 살인죄로 사형 집행유예(중화인민공화국에만 있는 독특한 제도.사형을 판결함과 동시에 사형의 집행을 2년간 유예하고 강제 노동에 의한 노동 개조를 실시하여 그 태도를 평가한 뒤 무기 징역으로 감형함. ‘判处死刑、缓期二年执行’의 준말) 2년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제 맞은편 침대에서 자는데, 매일 자기 전에 무기력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나중에 그녀는 제게 알려주었습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인데 지금은 공부하기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그녀의 흉기에 찔려 죽었기 때문에, 어린아이의 마음에 아물지 못할 상처를 남겨, 집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도 아이를 통제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매번 집에 전화하면 가족은 그녀에게 아이가 어떠어떠하게 말을 듣지 않는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녀는 제게 편지를 써서 아이를 타일러 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당연히 된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렇게 저는 한 어머니의 말투로 아이와 3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나중에 우리는 헤어졌습니다. 10년 형기가 곧 만기가 될 때 저는 또 레이위샤와 한 감옥 지역에서 만났습니다. 그녀는 제게“바로 선생님의 그 편지가 우리 아이를 변화시켰습니다. 현재 아이는 이미 직업 고등학교를 졸업해 일자리를 찾았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아이에게 그 편지들은 한 아주머니가 대신 써준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 아주머니에게 제게 편지를 써주어 감사하다고 전해주십시오. 제게 사람의 도리를 알게 하고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알게 했으며, 어떻게 생활 중의 불행과 어려움을 마주해야 하는지 알게 하고, 저를 올바른 길로 오르게 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저도 자신이 현재 어떻게 변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매년 봄과 가을이면 죄수들은 모두 유행성 감기에 걸립니다. 그때면 거의 모든 감옥 안의 사람들이 다 걸리는데 매번 저는 영향을 받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들어가서 나올 때까지 저와 같은 방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제가 유행성 감기에 걸리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감옥 사람이 다 걸렸는데 저만 멀쩡했습니다. 제 신체의 뛰어난 상태는 주변의 죄수들이 모두 대법의 뛰어남을 알게 했습니다. 그녀들은 매일 마음속에서 ‘파룬따파하오(法輪大法好-파룬따파는 좋습니다)’를 읽었습니다.
사악의 박해를 승인하지 않다
2013년 9월 11일 저는 10년 동안의 불법적인 형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13일 한 지역사회 일꾼이 ‘형기만료석방자 조교배치책임서’(이하 책임서)를 가지고 와서 제게 보라고 해,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감옥은 저를 지역사회에 넘겨 조교를 3년 동안이나 붙여주었습니다. 이른바 규정은 1년, 2년, 가장 긴 것은 3년이었습니다. 저는 평화롭게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렇게 합니까?”, “감옥에서 당신이 파룬궁을 X교라고 승인하지 않아 죄를 인정하지 않고 전향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어느 법률 규정이 파룬궁을 X교라고 승인하지 않으면 계속 당신들이 마음대로 제정한 규정의 제재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까?”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책임서’는 3부였는데 지역사회 한 부,법제사무실 한 부, 저 한 부였습니다. 저는 집으로 들고 가 아버지께 보였습니다. 아버지는 두 손을 떨며 끊임없이 말했습니다. “너무 사악하다.너무 사악하다. 바른 법을 수련하는 사람을 강제로 감옥에 보내다니. 자신의 신앙을 개변하지 않으면 10년 옥살이를 하고도 집에 가서 3년 ‘조교 배치’를 받다니, 정말 너무 사악하다.”
이 이른바 ‘책임서’를 저는 인정한 적이 없고 지역사회에 간 적도 없습니다. 지역 사회의 이른바 조교 지도소조 직원은 우리 집에 한 번도 온 적이 없습니다.
맺음말
‘웨이싱옌(魏星豔)사건’은 이미 16년이 지났습니다. 이것은 단지 중공이 잔혹하게 수많은 대법제자를 박해한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사(邪)는 정(正)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입니다. 대법제자가 대법을 수호하는 발걸음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무슨 환경이든, 몸이 어디에 있든, 언제든 모두 대법 중에서 수련해낸 지혜와 각종 환경 중에서 마련(魔煉)해낸 의지로 대법을 실증하고 중생을 구도합니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대법제자가 걷는 길은 바로 한 부의 휘황한 역사로서, 이 한 부의 역사는 반드시 자신이 증오(證悟)하여 개창한 것이어야 한다.”[2]
자비롭고 위대한 사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주:
[1]리훙쯔(李洪志)사부님 시사: ‘홍음2 -인간세상으로 내려오다’
[2]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2 -길(路)’
원문발표: 2019년 7월 2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7/20/386073.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