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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맹정진하여 전력을 다해 사람을 구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구세력의 대법제자에 대한 박해 방식은 주로 세 가지이다. 하나는 납치 박해, 다른 하나는 소란을 피우는 박해, 그리고 병업 박해가 있다. 앞의 두 가지 박해는 사악한 공산당에 속한 근무자를 통해 실시되고 있으며 마지막 한 가지 박해는 구세력이 다른 공간에서 직접 손을 뻗어 박해한다.

병업 박해가 조성되는 원인은 다방면이나 하나만은 확실하다. 사부님께서 명시하셨다. “완전히 법에 있는 사람은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데”[1] 신사신법에서 문제가 발생한 게 분명하며 사부님의 말씀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사람 마음에 이끌려 조성된 것이다. 박해당한 수련생을 살펴보면 대부분 수련생은 수련에서 느슨해지고 안일함을 추구하여 조성되며, 구체적 표현은 세 가지 일하는 데서 자발적이고 적극적이지 않고 전력을 다하지 않으며 정진하지 않고 에너지를 주로 속인 생활을 잘 보내는 데 모두 사용한다.

한 대법제자가 전면적으로 세 가지 일을 잘할 수 없을 때면 이미 사부님께서 배치하신 길에서 이탈하여 구세력이 배치한 길로 나간 것이다. 느슨함이 일정한 정도에 이르러 구세력이 손을 뻗칠 수 있는 구실이 되면 곧 다른 공간에서 직접 손을 뻗쳐 박해하여 병업 박해가 발생한다.

정법시기 대법제자에게 있어서 우주 정법시기의 수련은 조사정법(助師正法), 중생구도의 중대한 사명을 짊어져야 있다. 만약 우리가 전력을 다해 법을 실증할 수 없고 느슨해져 안일함을 추구한다면 이렇게 중대한 책임을 전혀 감당할 수 없다. 바꿔 말하면 느슨하여 안일함을 추구하는 것은 책임을 지지 않는 것이며 이로써 조성되는 결과는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아래 몇 개 방면에서 체현된다.

첫째, 정진하지 않으면 진심으로 조사정법하는 게 아니다.

사부님께서는 대법제자마다 자비로 대하시며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셨고 지옥에서 이름을 제거하신 후 우리의 신체를 깨끗이 씻어 우리가 역사상에서 지은 무수한 죄업을 감당하셨으며 우리의 신체를 병 없이 가벼운 상태에 도달하게 하셨다. 그다음 파룬, 수련의 기제를 넣어주셨고 우리에게 공, 신통과 각종 생명체를 연화해주셨으며 수련 과정에서 우리를 보호해주시는데 이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외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많은 것이 있는데 사부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렇게 많은 것을 하셨다. 그럼 우리는 마땅히 어떻게 사부님을 대해야 할까? 만약 우리가 느슨해져 안일함을 추구하고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바로 진심으로 조사정법하는 것이 아닌데 어찌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제도에 떳떳해질 수 있겠는가?

둘째, 정진하지 않으면 자신의 중생을 구도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수련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수련된 그 부분의 신체에 대응되는 중생은 이미 동화하여 구도됐고, 아직 수련되지 못한 신체에 대응하는 중생은 구도되지 못했다. 이 부분의 중생은 당신을 간절하게 바라보고 있으며 당신이 잘 수련해 자신들을 구도해주길 바란다. 하지만 잘 수련하지 않고 느슨해져 안일함을 추구한다면 자신에게 속하는 중생의 생명을 아이들 장난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당신은 그 중생의 주인 자격이 있겠는가?

셋째, 정진하지 않으면 책임지지 않는 것이다.

우주 정법시기에 대법제자가 된 것은 중생구도의 책임이 어깨에 놓인 것이다. 대법제자의 숫자가 이 정도이며 전 인류는 모두 대법제자에 의해 구도돼야 한다. 대법제자마다 그중 일부분의 중생을 구도할 책임을 감당하고 있는데 마땅히 구도해야 할 사람을 당신이 구도하지 못한다면 그 중생은 구도될 기회를 잃으며 당신의 무책임으로 그 중생이 도태에 이른다.

일부 수련생이 느슨해지고 안일함을 추구하는 심태가 조성되는 원인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고생을 겪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 속에는 일부 전에 비교적 정진하던 수련생이 포함되며 그들은 전에 확실히 법을 실증하는 일을 적잖게 했고 많은 노고가 있었다. 그리하여 스스로 대법을 실증하는데 적잖은 것을 감당했고 고생도 적잖게 겪었으며 그만하면 될 것 같다고 여겨 좀 숨 돌릴 때가 됐다며 더는 그렇게 많은 고생을 겪으려 하지 않는다. 이런 사상의 지배하에 점차 느슨해지고 안일함을 추구하는 데로 나아간다. 사실 이상의 이런 생각은 모두 그의 진정한 자신, 주왠선(主元神)의 생각이 아니며 모두 사람 마음의 생각으로 즉 그가 사람 마음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역사적으로 대법제자는 사부님을 따라 정법의 기초를 다졌고 오천 년 중화 문명을 개창했으며 그 속에서 여러 가지 배역을 담당했고 생생세세 고생을 겪고 대가를 치렀다.

수련생의 이런 글을 본 기억이 난다. 글에서 그는 역사상에 전생했던 경과를 이야기했다. 환관 위충현은 매우 나쁜 사람이며 역사상, 이 배역에 대한 배치가 있었다. 그 당시 누구도 이 배역을 하려 하지 않았는데 위충현이라는 이 배역 역할은 그렇게 힘들지 않고 인간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나쁜 일을 저지르던지 모두 어렵지 않았으나 힘든 것은 나쁜 일을 다 한 후 감당할 죄업이 두려워 누구도 위충현이라는 배역을 감당하려 하지 않았다. 나중에 이 수련생이 정법의 기초를 다져야 하기에 이 배역을 하겠다고 의연하게 나섰다. 위충현의 일생이 결속된 후 수련생은 다른 공간에서 살아있는 몸으로 백 년 동안 얼음 속에 얼렸다. 인간 세상에서 시간으로 따지면 25년이었다. 겨울에 문밖에 나서면 손발이 시리나 잠깐 참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얼음 세상에서 연속 25년 얼렸으나 죽지 않는 고통을 겪으며 죄를 감당해야 했는데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혹형이다! 수련생이 그 공간에서 죄업을 다 갚은 후 계속 윤회전생하며 여전히 고생을 겪고 업을 갚아야 했다. 이렇게 한 걸음씩 금생까지 걸어왔다. 이는 그가 걸어온 길이며 다른 수련생 역시 마찬가지로 인간 세상에서 상상하기 힘들고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어서야 오늘까지 걸어올 수 있었던 게 아니겠는가?

다시 말하면 기나긴 역사 세월 속에서 우리 대법제자는 무수한 고통을 겪으면서 겨우 정법의 시작을 맞이했으나 해야 할 일을 아직 잘하지 못하고 구도해야 할 많은 사람을 아직 구도하지 못했는데 더는 고생을 겪기 싫어 느슨해지고 안일함을 추구한다면 이는 우리 자신의 진실한 생각일 수 있겠는가? 단연코 아니다!

생각해보라, 오늘의 일을 잘하기 위해 역사상에 수천 년의 고생을 겪어서 해야 할 일을 해내야 하는 기회를 맞이했는데 전력을 다해서 해야 할 일을 잘하지 않아서 되겠는가, 현재 이 수십 년의 고통을 더 겪는 게 무슨 대수겠는가?

일부 수련생이 안일의 추구를 조성하는 다른 하나의 원인은 속인의 아름다운 생활을 누리고 추구하기 때문이다.

사실은 사람 이 환경은 정법의 필요로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며 사람이 수련하게 내려준 것이다. 수련의 환경은 반드시 두 가지 요구를 충족해야 한다. 하나는 미혹, 다른 하나는 고통이다.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반드시 미혹 속에서 정념을 깨달아야 하고 고통 속에서 확고한 정념을 지켜낼 수 있어야 합격이다. 이런 미혹과 고통의 환경에서 소위 행복한 생활을 추구하는 것이 어찌 실현될 수 있겠는가?

당신에게 죄를 내리지 않는다면인간 세상에서이미 행복을 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천상의 그런 행복한 생활은 사람이라면 하루도 누려본 적이 없다. 사람이 여기에서 전신이 가볍고 자유자재라고 하나 당신이 아무리 몸이 가볍다 해도 무게가 있고 당신이 움직이려면 힘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나 신의 신체는 무게가 없고 그 가벼움과 자유자재야말로 진정한 가벼움과 자유자재이고 영원히 이렇게 행복하고 아름답다. 사람 이 환경은 하나의 똥 무덤으로, 황토는 천인의 변인데 우리는 바로 진흙과 똥 무덤에서 생활하고 있다. 똥 무덤을 안락한 보금자리로 여겨 이렇게 더럽고 미혹과 고통의 환경에서 소위 행복한 생활을 추구하는데 신의 측면에서 볼 때 매우 무지하고 가소로운 것이다!

사실 이것 또한 미혹 속에서 우주의 진상을 볼 수 없어서 조성된 것이다. 하지만 대법제자에게 있어서 사부님께서 이미 우주의 진상을 우리에게 말씀하셨기에 여전히 사람과 같이 미혹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사람과 마찬가지로 소위 인간 세상의 아름다움과 행복한 생활을 추구한다면 그건 적절하지 않다.

‘쏜 화살은 돌아오지 않는다.’ 정법은 오늘에 이르렀고 더는 되돌릴 기회가 없다. 대법제자는 기본적으로 이 사람들이며 다른 사람으로 바꿀 수 없다. 자신이 대법제자의 책임을 감당할 수 없다며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을 대법제자로 교체하려 해도 이미 그 기회가 없다. 애초에 하늘에서 당신이 서약을 맺었고 현재 당신이 서약에 따라 하지 않으며 사람을 구도하는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다면 세상 사람은 곧 도태되고 당신은 곧 심하게 약속을 어기는 것이다. 그 때문에 개인이 정진하는지 아니면 느슨해지는지는 중생의 생사존망과 관련된다. 당신이 정진하여 사람을 구도하지 않는다면 우주 중생의 생명을 애들 장난으로 여기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당신을 어떻게 하지 않으려 해도 온 천하의 신들이 인정하지 않는다. 구세력도 이로써 박해의 구실을 잡은 것으로 그것은 곧 악에 대하여 악의 방법으로 다스리려 하는데 당신이 느슨해지고 안일함을 추구하지 않았냐고 할 것이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당신을 괴롭게 만들 것이라며 다른 공간에서 직접 손을 뻗쳐 병업의 박해를 배치해 병의 고통으로 당신이 시달리게 하여 그래도 당신이 안일함을 구하는지 여부를 본다.

실질은 여전히 선을 닦는 문제이다.

사람과 신의 본질적인 구별은 바로 사람은 이기적이나 신은 사심(私心)이 없다. 사람이 신으로 수련 성취하려면 반드시 죽음의 관문인 자아를 내려놓은 것을 건너가야 한다. 만약 사람이 일에 봉착했을 때 능히 자신을 내려놓을 수 있고 자신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을 위해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기적인 마음이 없어 능히 완전히 타인을 위해 생각할 수 있으며 선을 해낼 수 있다. 무아(無我)여야 무사(無私)를 해낼 수 있으며 무사여야 구함이 없고 두려움이 없는 것을 해낼 수 있고 안일함을 추구하지 않고 고생을 겪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가장 내려놓기 힘들어하는 것이 바로 자아이며 만약 누군가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해낼 수 있다면 그럼 모든 것을 능히 내려놓을 수 있고 어떠한 집착도 모두 없어지며 그는 인(忍)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다. 이때 그도 진심으로 타인을 위해 생각할 수 있으며 진(眞)과 선(善)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최종적으로 진선인(眞善忍)의 표준에 도달할 수 있고 즉 대법에 동화(同化)한 것이다.

자신에 대한 집착은 일체 집착의 뿌리이며 과시심, 질투심, 고생 겪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안일함을 추구하는 마음, 이런 표면의 집착을 닦아버려야 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 집착 역시 닦아버려야 하며 뿌리에서 끝부분까지 모두 닦아버려야 한다. 만약 당신이 단지 표면의 집착만 닦아버리고 자신에게 집착하는 마음을 닦아버리지 못하고 뿌리를 버리지 못하면 당신은 수련해 올라올 수 없고 사람으로부터 신으로의 근본적 전변(轉變)을 실현할 수 없다.

자아를 내려놓지 못하면 자신을 위해 생각하는 사심이 생기며 당신은 곧 사람이다. 자아를 내려놓으면 자신을 위해 생각하는 사심이 생길 수 없으며 당신은 곧 신이다. 사심을 지니고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하면 사람이 하는 것이며, 사심을 지니지 않고 대법을 실증하는 일을 한다면 곧 신이 하는 것이다. 조사정법 중에서 만약 당신이 능히 자아를 내려놓고 자신을 고려하지 않으며 한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법을 실증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지를 생각한다면 잘하지 못할 일이 없다. 이때라면 구세력이 감히 교란하지 못하며 사부님께서 또 당신을 돕기에 법을 실증하는 길이 긍정코 막힘없이 원활할 것이다.

홍진(紅塵)에 당신의 두 눈이 미혹되게 하지 말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선명하게 보지 못해서는 안 된다. 인간 세상의 요만한 안일함을 위해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지체해서는 안 되며 정법이 결속하는 그날에 남들이 모두 원만비승(圓滿飛升)하여 자신의 천국 정원으로 회귀할 때 자신은 지상에 남겨져 집에 돌아갈 수 없다면 그때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사부님의 자비로우신 제도를 소중히 여기고 우주 중생의 생명을 소중히 하며, 자신의 천국에 속하는 중생의 생명을 소중히 여기고 자신이 법 실증에서 걸어온 길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과 자신 중생의 미래를 소중히 여기고 예전에 없었던 정법 수련의 기연(機緣)을 소중히 여기자. 정진(精進)하라, 이는 당신에게 있어서 유일한 불변(不變)의 선택이다!

이상은 자신의 현 단계 수련에서의 옅은 깨달음으로 적절하지 못한 곳은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2005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10월 24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0/24/39496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