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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어진 사유 논리를 버리고 대법의 광범위한 함의를 깨닫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매번 수련에 관련된 문장을 쓸 때 무형의 압력을 느꼈다. 순수한 상태에서 쓰지 않으면 법에서 쓰지 못하기에 관념의 지배로 법에 대해 불경할 수 있고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최근 나는 수련 사유의 중대한 변화를 겪었다. 이런 변화는 대법 및 사존에 대한 나의 낡은 인식과 이해를 바꿔 장기간 형성된 수련이 정체되게 한, 일종 굳어진 사유를 완전하게 버리게 했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하늘에서는 사람의 사유 논리가 아니다.”[1] 평화 시기든 대법이 사악한 박해를 받는 각 단계든 나는 수련 중에 정진하는 것처럼 보이는 논리적 사고에 의해 교란을 받았다. 나는 장기간 법에 대한 국한된 인식 속에서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관념이 형성됐다. 나는 이런 관념의 지배하에 법을 인식했고 늘 내가 끊임없이 정진했다고 인식했다. 그러나 지금 보면 이런 것은 모두 잘못됐다.

대법을 수련하기 전에 나는 평생 세상의 모든 이치를 다 포괄할 방법을 찾아서, 이 낯설고 가없이 넓고 끝없는 세계를 인식하고 생명의 윤회를 해탈하는 도(道)를 발견하길 바랐다. 이 과정에서 나는 사람의 아주 강한 논리 사유 습관이 형성됐고 일부러 이런 습관을 연습했다. 수련에서 승화됨에 따라 이런 습관도 향상됐다. 심지어 보기에 점점 완전한 과학 체계가 형성됐다. 그것은 동시에 선(善)의 일면을 표현했다. 은연중에 대법을 인식하는 주요 사유 패턴이 됐다. 이런 진화된 논리 사유 패턴을 줄곧 대법 수련에 가져왔다. 거의 20년 동안 나는 의식하지 못했기에 어떻게 그것을 제거할 것인지는 더 언급할 수 없다. 그것은 극히 은밀하고 미시적인 방식으로 내 생명 깊은 곳에 숨어있었다. 대법에 대한 내 정념에 영향 주고 교란해 중대한 교란 작용을 했다. 겉으로는 수련에서 나는 법리에 대한 이해를 매우 중시했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이치적으로는 사존께서 말씀하신 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을 알지만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수동적으로 사람의 논리 사유로 대법을 가늠했다.

근본적으로 말하면 이런 끝없는 대법에 대한 굳어진 사유 패턴, 소위 논리 사유는 사람의 측면에서는 확실히 이성적으로 대법을 인식하도록 도와줬지만, 더 높고 깊은 대법 법리의 함의를 보는 것을 방해했다. 심지어 일정 수준에서 나에게 사람의 이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고비가 됐다. 이런 논리 사유의 이끌림을 받아 착실한 수련 중에 내가 무조건 대법에 동화하는 과정에서 점점 지지부진했다. 이리하여 일부 근본 집착은 억압되고 저장됐다. 스스로 그것을 제거하지 못했고 자발적으로 대법에 동화한 것이 아니다. 이 점에서 말하면 지금 보면 한 생명이 대법을 존경하지 않은 것이다. 수련에서 한 생명이 어찌 유한한 사유로 끝없는 대법을 가늠하고 상상할 수 있는가? 더욱이 사람의 유한한 인식으로 위대한 사존을 이해해서는 안 된다.

여러 방면에서 사존께서는 우리를 타이르셨다. “수련은 엄숙한 것이다.”[2] 그러나 나는 내가 같지 않은 층차의 수련 층차 중에서 자양하고 키운 논리 사유에 미혹되어 충분하게 중시하지 못했다. 이것은 대법 인식에서 큰 누락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사부님께서는 명시하셨다. “수련은 엄숙한 것으로서, 약간의 모호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각종 각양의 순정하지 못한 사상을 품은 채 그 법을 보고 그 책을 보면,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하고,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3]

사람의 논리 사유로 사람의 지식을 탐구하는 측면에서 말하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줄곧 이런 논리 사유 패턴으로 대법을 인식하면 수련인에게는 장애이고 극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그걸 의식하면서 문득 내가 이렇게 여러 해 동안 한 번도 수련해 본 적이 없는 것처럼 대법에 대한 인식과 사존에 대한 이해가 사람 측면에 머문 때가 많았다.

우리 수련인은 굳어진 사유 관념을 형성해서는 안 되는 것을 안다. 심지어 천백 년 동안 뼛속에 녹아들어 간 사람의 이치와 결렬해야 한다. 대법에서 수련하지 않았고 사존의 자비가 아니라면 내 사유의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대법을 인식하는 논리 사유, 이런 관념을 나는 절대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관념에 이끌려 일상생활 중에서 점점 속인 중의 철학자처럼 변했고 겉으로 보기에 일반 사람들 속의 신중한 전문 학자 같았을 것이다. 이것은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대법이 중국공산당에게 박해를 받기 시작해서부터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정법 3가지 일에 참여했든, 박해 중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속인의 기교와 잔꾀를 사용했든, 확실히 즉각적인 효과가 나타났다. 하지만 이런 사유 습관은 착실한 수련 중에 쉽게 자신의 집착을 덮어 감추며 발견하기 쉽지 않은 숨어 있는 미시적인 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박해 초기에 나는 20여 명의 수련생과 함께 박해받았다. 구치소에서 경찰이 번갈아 가며 쉴 새 없이 위협하고 육체를 고문할 때 나는 경찰이 장악한 ‘단서’에 근거해 그들의 논리 사유를 반박하며 ‘사건 경위’를 이용해 경찰의 조사를 얼버무려 넘겨 다른 수련생을 팔지 않았다. 경찰은 나에게서 가치 있는 소위 ‘단서’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충분한 이유로 경찰을 엄하게 반박하거나 취조 중에 침묵을 지킨 수련생과 비하면, 내가 본 것은 많은 나의 사람 마음이었다. 신중한 논리 사유는 나에 대한 박해를 경감했지만 두려운 마음의 지배로 어쩔 수 없이 한 행동이었다. 당시 내가 이런 박해 중에 이런 부족함을 인식하고 직접 근본적으로 두려운 마음을 제거했다면 그것이야말로 내심에서 진정하게 대법의 위력을 인식하고 시시각각 법에 있는 상태다.

대법을 인식하는 과정 중에 형성된 이런 사람의 논리 사유 관념을 제거한 후, 나는 대법의 내포에 새로운 깨달음이 생겼고 인간 세상에는 사존의 그 위대한 무궁무진한 자비를 형용할 언어가 없다는 것을 더 절실하게 느꼈다. 생명의 본원에서 나오는 대법과 사존에 대한 무한한 존경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내 전체 수련 이면에 있는 제도될 수 있고 성취될 수 있는 모든 생명에게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대법과 사존에 대한 가장 숭고한 감사와 참배뿐이다. 그 이외에 다른 무엇이든 다 중요하지 않다. 이런 진심 어린 존경은 지금 중국에서 아직 끝나지 않은 박해 압력에서 수련의 정념을 더 단단하게 했고, 대재난이 오기 전의 시간의 소중함을 더 체험했다. 사존께서 박해가 끝나는 시간을 연장하신 것은 다른 일종의 중생에 대한 크나큰 자비의 장엄한 표현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나는 매일의 수련과 지속적인 정법 참여와 사존을 무한히 존경하는 성실함이 있으면 끝없는 대법의 함의에서 나온 가지(加持)를 완전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신성한 느낌은 인간 세상의 모든 장애를 초월한 용기와 견정한 신념(信念)을 생기게 한다. 자기에게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는 지혜와 능력을 부여해줄 수 있고 자신 있게 인간 세상에서 법을 실증할 수 있는 대법의 기적을 창조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사람의 논리적 방법으로 분석하고 추론하며 실증해 나타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인류가 세간에서의 대법의 표현에 대해 마땅히 있어야 할 경건과 존중을 체현할 수 있으면, 사람과 민족 혹은 국가에 행복 또는 영예를 가져다줄 것이다.”[4] 나는 사람의 논리 사유 관념을 제거한 후 확실히 수련 태도에서 대법과 사존에 대한 지고무상의 존경와 경건함으로 완전히 변했다. 대법을 새롭게 인식하는 중에 다시 한번 근본적으로 자기를 변화시키고 바로잡았으며 자신의 조사정법(助師正法), 구도중생(救度眾生)의 사명 중에서 생명의 상태를 갱신했다.

지금 보면 이전의 나의 경사경법(敬師敬法)은 아주 부족하다. 이전에 나는 마음으로는 사부님을 존경했지만, 형식상에서 상대적으로 그다지 중히 여기지 않았다. 수시로 집에 오는 경찰에 대응하기 위해 나는 장기간 사존의 법상을 집에 모시지 않았다. 안전 방면을 고려한 조치라고 여겼다. 하지만 나는 지금 거실에 사존의 법상을 모시고 수련하지 않는 가족에게도 경건하게 향을 올리라고 요구하면서 그들에게 시시각각 사존께 경의를 표현하도록 인도했다. 딸이 여러 번 고열이 나자 어머니는 걱정하시면서 병원에 가야 한다고 하셨다. 나는 어머니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드리고 사존께 향을 올려 기도하라고 했다. 몇 번 기적이 나타났다. 약을 먹지 않고 주사를 맞지 않았는데 딸은 이튿날 다 나아 학교 갈 수 있었다. 조카도 늘 열이 나 열만 나면 병원에 갔다. 그는 이 일을 들은 후 감탄했다. “이것은 정말 기적입니다!”

나는 뼈저리게 느꼈다. 정법 시기에는 대법과 사존에 대한 태도가 제1위다. 사존께서는 말씀하셨다. “일체를 정법(正法)과 비교하면 모두 보잘것없고 모두 다 견줄 수 없으며, 개인 수련 중의 상황도 정법(正法)과 서로 비교할 수 없다. 구세력의 층차(層次)가 아무리 높아도 이 관계를 바로잡지 못하면 위험한 것으로서, 우주 정법 중에서 도태된다. 그러므로 떨어져 내려온 무수한 생명들이 모두 매우 높은 층차의 것들이다.”[5] 속인과 각계 생명의 대법에 대한 태도가 좋고 나쁨이 이런 생명의 떠나고 남음을 결정한다. 수련인으로서 나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층차가 얼마나 높고 오성이 얼마나 좋던 경사경법의 마음을 제1위에 놓아야 조사정법의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그러나 적지 않은 수련생은 이 방면의 인식에서 이전의 나와 같다. 미시적인 곳에 숨어 있는 변이된 관념에 대해 인식이 똑똑하지 않다. 내 주위에 적지 않은 수련생이 세 가지 일에 참여하는 과정에서 표면상 대법과 사존을 제1위에 놓은 것 같지만 법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실질적인 표면은 흔히 자기를 제1위에 놓는다. 한 수련생이 심득 체험을 말할 때 한 번은 그가 고양이가 매우 불쌍한 것을 보았다고 했다. 얼굴과 몸에 병이 나서 썩은 악취가 나 소원을 품고 말했다. “내가 널 구해줄게, 네 몸의 업력을 내가 감당할게!” 과연 이튿날 그의 얼굴과 몸에 고양이 몸에 난 피부 궤양과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그는 그가 고양이를 대신해 업력을 감당해 고양이를 구했다고 말했다. 표면적으로 보면 이 수련생은 수련 중에 자비심이 생겼다고 말한 것 같지만 나는 듣고 씁쓸했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하나의 문제가 있다. 만약 당신들이 사부를 존경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주의 이치에 따라 말한다면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 구세력은 이를 빌미로 틈을 타 당신들을 훼멸하려고 할 것이다. 그것들이 당신들을 훼멸할 수 있는 최대의 약점을 잡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내가 당신들을 제도하는 과정 전반을 보았기 때문이다.”[6]

사존께서 우리를 대신해 대부분 업력을 감당하시고 우리를 지옥에서 건져내고 깨끗하게 씻기지 않으셨다면 우리, 나아가 우주 중의 모든 중생은 벌써 역사의 해체에 따라 없어졌을 것이다. 우리에게 무슨 덕이 있고 능력이 있어 다른 생명을 대신해 업력을 감당하고 다른 생명을 구할 수 있겠는가? 정말 생명을 구원하는 표현은 반드시 사존께서 이 업력을 감당하시는 것이다.

수련은 매우 엄숙하다. 내가 이 예를 든 것은 위에서 언급한 수련생이 말하는 가운데 사존을 제1위에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아직 이 문제를 의식하지 못했을 수 있지만 나는 이런 부족한 점은 구세력이 틈을 타 불필요한 번거로움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상은 나의 개인 수련 체험으로 부족한 점이 있을 것이니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바로잡아주기 바란다! 허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3-대뉴욕지역 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명시’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9-2009년 대뉴욕 국제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논어’
[5]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각 지역 설법 2-2002년 미국 필라델피아 법회 설법’
[6]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2003년 정월대보름 설법’

 

원문발표: 2019년 10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10/8/394238.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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