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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에 대한 집착을 이성적으로 인식하다

글/ 말레이시아 거주 중국 수련생

[밍후이왕] 대법제자는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을 닦아버릴 것을 말하고 있으며 항목 조율에서도 ‘자아를 내려놓고 전체적으로 협력을 잘하자’라고 담론한다. ‘자아’는 수련 곳곳에 체현되며 수련의 최후에 ‘자아’는 마치 가장 넘기 어려운 걸림돌로 될 것 같다. 이 글에서 자신이 처한 경지의 인식으로 ‘자아’에 대해 연구, 토론하려 하며 부족한 곳은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롭게 지적해주시기 바란다.

‘자아’의 구성

여기서 말하는 ‘자아’는 후천적으로 형성된 관념과 집착, 업력으로 구성된 그 ‘아(我)’이며 후천적인 자아이다(혹은 ‘가짜 자아’이며 법에서 말하는 “진정한 자아”[1]가 아님). 다른 각도에서 말하면 ‘자아’(가짜 자아)는 바로 정(情)이라는 물질로 구성된 생명체다.

다수의 경우 사람은 바로 이 ‘자아’로 살고 있으며 ‘자아’에 이끌려가고 있다. 사부님 법에 비춰보면 ‘자아’는 “자신을 위하고, 화를 내며, 불공평하다고 한다.”[2]로서, ‘자아’는 바로 수련자에게 존재하는 마성으로 닦아버려야 한다. 갓 수련을 시작할 땐 그것은 매우 강대해, 만약 수련하지 않고 사부님께서 우리를 도와 대부분을 제거해주시지 않는다면 한 속인은 진정으로 ‘자아’를 철저히 이겨내기가 어렵다.

‘자아’의 성장

자아는 ‘정’에서 번식해 배양되고 커간다. 그것은 뒤엉켜있어 떨쳐낼 수 없거나 혹은 건드릴 수 없으며 강렬한 자아 보호와 타인이 침범을 용납하지 못하는 의식과 특징을 지닌다. ‘자아’는 이기적이고 ‘진선인(眞·善·忍)’에 부합하지 않으며 극복하기 가장 어렵다. ‘자아’는 타인을 관용할 수 없으며 그리고 ‘선(善)’하지 않아 결국에는 ‘진(眞)’이 아니다. 반드시 그것에 순응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폭발한다.

수련에서 조금만 유념하지 않아도 그것은 계속해 강화, 팽창하며 강렬한 자아 보호와 건드릴 수 없음으로 표현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소멸한다.

‘자아’가 안전하지 못함을 느끼고 타인으로부터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며 명리정(名·利·情)을 잃는 것을 두려워할 때, 그것이 붙어있는 사람에게도 그만큼의 두려운 마음이 만들어진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두려운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은, 수련자가 사람과 신으로 구별되는 증거(見證)이자 수련자와 속인의 구별이며 또한 수련자가 제거해야 할 최대의 사람 마음(人心)이다.”[3]

나의 깨달음으로 이 두려운 마음은 바로 ‘자아’에서 비롯되며 우리의 진정한 주원신(主元神) 혹은 수련된 일면이 아니다. 이 때문에 두려운 마음을 용납하지 않으면 곧 이 ‘자아’의 많은 부분이 제거된다. 이는 수련자가 힘을 들여 제거해야 할 가장 큰, 또한 가장 닦아버리기 쉽지 않은 사람의 마음이다.

속인 사회에서 능력이 있고 가정에서 자기주장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아가 더욱더 쉽게 강화된다. 가정에서 결정권이 있는 사람일수록 가장 쉽게 자아의 마음이 자라난다. 왜냐하면 성취감이 있을수록, 일마다 자신의 소원에 따라 이뤄질수록 전화(轉化)하는 업력이 많아지고, 정이라는 물질이 갈수록 강화된다. 한편 정의 본질은 위사위아(爲私爲我)다.

‘자아’는 원하는 것을 부정하거나 거역하는 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단 이러한 일이 발생하면 그것이 소멸하기에 그것이라는 생명이 건드려지면 그것은 자연히 저항해 자신을 보호하려 들며, 어떨 때 그 반항은 매우 격렬하다. 또 가슴이 조마조마해지며 격렬한 정도가 심지어는 육체적 생명이 희생된다 해도 아랑곳하지 않을 지경이 된다. ‘자아’가 건드려질 때 사람의 표면에서 말하면 이 사람은 단지 즐겁지 않은 것으로 표현되나 ‘자아’라는 물질에서는 생사존망에 직면한다. 매 하나의 사람 마음이 매번 만족할 때 ‘자아’는 강화되고, 날이 가고 해가 바뀌면서 그것은 안하무인격으로 강대해지거나, 혹은 사존께서 수련생이 그 마음을 제거하게 하실 때면 그것의 표현이 두드러지게 된다.

‘자아’는 어떨 때는 매우 교활하며, 그것은 하나의 집착으로 또 다른 집착을 덮을 수 있다. 큰 집착이 발견됐을 때 작은 집착을 내세워 총알받이로 사용하거나 희생양으로 만드는데, 소위 ‘꼬리를 잘라 살길을 찾는 것’처럼 작은 업력을 희생해 큰 집착(자아)의 목숨과 뒤바꾼다.

수련에서 표현된 ‘자아’

‘자아’는 또 여러 면의 집착심으로 표현되며 이런 마음의 표현을 통해 끊임없이 그 자체를 커지게 한다. 예를 들면 과시심, 환희심, 질투심, 쟁투심 등등이다. 이런 마음마다 끊임없이 그것에게 에너지를 줘 그것이 일정한 정도로 커지도록 한다. 주왠선(主元神)의 바른 기운이 그것을 제어할 수 없으면 그것은 곧 폭로돼 통제에서 벗어나 더욱더 빠르게 자신을 커지게 하며 팽창한다. 이때 수련자는 갈등을 겪거나 고난에 봉착한다. 만약 이 고난 중에서 수련자가 그것을 인식하고 극복할 수 있다면 그것을 소멸할 수 있다.

‘자아’에 내포한 업력, 사상업력과 병업 등을 포함해 업력은 마치 독약과 같아 언젠가는 뛰쳐나와 사람을 해치며, 또한 사존께서 의도적으로 그것이 표현되게 하신다. 하지만 그것이 일단 뛰쳐나왔을 때 곧 소멸해야 하는 것으로 수련자는 철저하고도 깨끗이 그것을 제거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당신이 병원에 가서 치료하게 해 대부분의 병업을 뒤로 미루게 하며, 그것이 철저히 소멸하지 않게 한다. 또 그것은 각종 마음이 표현되게 해 당신이 병원에 가거나 혹은 기타 속인의 방법으로 치료하게 한다. 그것은 수련인의 방식으로 그것을 대하지 못하게 하며 소멸하지 않게 한다. 이렇게 반복해 당신을 닳게 하여 우리가 법에 대한 바른 믿음을 소모한다.

‘자아’는 죽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러나 진정한 왠선(元神)은 죽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직 업력으로 구성된 당신(그 ‘자아’, ‘가짜 자아’)이 두려워한다. 이 ‘자아’는 허위적인 것에서, 내용이 없는 동감에서 강화된다. 겉으로 잘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려 하는 것이지, 진정으로 마음에서 그 경지에 도달한 것이 아니다. 타인의 칭찬을 얻으려는 것뿐으로 명예와 이익만 도모한다. 이렇게 타인이 ‘자아’를 추켜 세워주는 중에서 매우 큰 만족을 얻으며 이 ‘자아’가 더욱 강화된다.

동시에 어떤 조직형식에서 능력이 있는 사람일수록 ‘자아’가 쉽게 번식한다. 이 방면에서 많은 협조인이 밍후이왕에서 여러 차례 교류했기에 여기서 더는 언급하지 않겠다.

수련 중에서 ‘자아’는 또 작은 울타리를 형성하기 좋아한다. ‘자아’는 작은 울타리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각 울타리는 서로 헐뜯고 업신여기며 당신은 좋고 그는 좋지 않다면서, 작은 울타리를 통해 자신의 매우 깊이 은폐한 사람 마음을 수호한다. 작은 울타리 내에서의 사람 마음을 고수하면서 대법제자 사이에, 서로 다른 울타리 사이에 간격을 조성한다.

최후 임박해 ‘자아’에 또 안일함을 추구하는 마음이 내포해 무의식적으로 고난을 회피한다. 하지만 우주의 법리는 사람 이 층에 대한 요구에서 고생을 겪어 업을 갚는 것으로, 이것이 바른 법리(法理)다. ‘자아’는 그것을 등지려 한다. 안일함을 추구하는 마음은 발견하기 쉽지 않다. 그것은 이미 자연스러움으로 형성됐고 수련에서 만성 독약이며 부지불식간에 점차 의지를 갉아먹고 소모하며, 끊임없이 업력을 쌓아 그것을 강화한다.

‘자아’는 우리의 표면도 ‘선(善)’이 부족하게 변화시킨다. 대법 수련은 매우 빠르기에 다 수련된 부분은 즉시 격리돼 표면에서 많은 선함이 표현돼 나오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자아’가 약할수록 우리는 더욱 선하게 표현되며, 반대로 ‘자아’가 강할수록 우리의 표면은 선하지 않다.

현재 해외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수련생 사이에 교류가 매우 적고 법공부 후에도 교류가 매우 적다. 일부는 자신의 프라이버시가 폭로될까 걱정하고 일부는 남의 지적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건드릴 수 없는 존재로 됐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 법공부만 하고 교류하지 않는 현상이 조성됐고 법공부가 끝나면 집에 돌아가고, 혹은 교류가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피상적이며 표면과 형식에 그쳐 서로의 제고를 촉진하는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오래갈수록 교류하는 사람이 없고, 또 하나의 정체(整體)를 형성하기 어렵게 됐다.

많게는 모두 이 ‘자아’가 강렬하게 자아를 보호하는 마음의 작용으로 수련생 사이에 간격을 조성했다. 물론 수련생이 여러 나라와 지역에서 모여온 요소, 서로를 잘 모르는 요소 및 구세력이 첩자를 사주해 의도적으로 방해하고 파괴하는 등 요소도 존재한다.

어쨌든 일단 수련생 사이에 간격이 형성되면 단체 법공부와 연공에 적은 사람이 참가하며, 전체적인 수련환경도 갈수록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마땅히 과도한 자아보호 마음과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고 정념정행(正念正行)으로 수련의 정체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

‘자아’는 만족을 얻지 못할 때 좌절하고 의기소침해진다. 예를 들면 정법 시간에 대한 집착으로 의기소침해지며, 책임자가 거슬려 보여도 의기소침해지고, 자신의 의견이 인정받지 못해도 의기소침해지며, 진상 알리기에서 타인보다 효과가 작아도 의기소침해지는 등등이다. 각종 사람 마음이 만족을 얻지 못할 때 신심을 잃고 동력을 잃는 것을 느낄 수 있는데, 이는 바로 ‘자아’가 너무 강렬하고 또 만족을 얻지 못했을 때의 표현이다.

‘자아’가 건드려질 때 표현형식은 충동이며 이성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수련과 법 실증 과정에서 많은 굽은 길을 걷고 불필요한 대가를 많이 치른다. 사존께서는 우리에게 법에 대한 인식에서 감성적 인식에서 이성적 인식으로 승화하라고 요구하셨으며 최종적으로 이성적으로 일을 하라고 하셨다. 개인적인 이해로 ‘이성적으로 일하는’ 것은 바로 최소의 대가로 일을 가장 좋게 하는 것이다(일을 성공적으로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잘해야 하며 아울러 대가는 가장 적어야 함). ‘자아’가 매우 강할 때 수련자의 정념은 부족하며 이성적이지 못하고 구세력이 손쉽게 틈탈 수 있어서 법을 실증하는 일이 큰 손실을 보게 된다.

수련의 최후에 이르러 작은 일일수록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일사일념(一思一念)의 집착마저 다잡아서 닦아버려야 한다. 이런 ‘작은 일’에서 반영된 건 아마 커다란 사람 마음일 것이다.

더 언급할 필요가 있는 건 현재 일부 수련생은 모든 사람 마음을 당(黨)문화의 표현이라고 말하는데 사실 해외 수련생도 유사한 집착심이 있으나 모두 당문화로 조성된 게 아니다.

‘자아’의 제거

자아를 내려놓으려면 자신의 명리정에서 시작해 자신에게 아직 깊이 매장된 어떠한 마음이 있는지 분석해야 하고, 갈등에 부딪혔을 때 상대방 처지에서 문제를 고민해야 한다.

익숙한 지인의 앞일수록 ‘자아’는 더욱 강렬하다. 따라서 친한 사람에 대해서도 ‘손님을 대하듯 존경하며’ 친구처럼 대해야 한다. 친한 사람을 쉽게 용서할 수 있을 때도 많지만, 반대로 강렬한 불가침의 자아를 드러내며 가혹한 요구를 할 때도 많다. 직장에서 아랫사람을 대할 때도 마땅히 이러해야 하는데 하급에 대해 요구가 엄격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 친구처럼 그들의 잘못을 관용해야 한다.

‘자아’를 내려놓음이란 자신을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놓아야 하는데 그 낮음이 더 내려갈 수 없는 가장 낮은 곳까지 내려가야 한다. 오직 가장 낮은 곳이어야 가장 튼실하며 마치 두 발로 대지를 밟은 듯 튼튼하다. 오직 가장 낮은 곳이야말로 가장 안전하다. 하지만 우리는 안전감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을 가장 낮은 곳으로 놓지 않는다.

가장 낮은 곳은 가장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가장 비천한 것이 아니다. 그건 가장 확고하고 가장 의지가 굳은 것으로 만물을 가장 포용할 수 있는 생명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타인을 보면 모두 빛나는 점이 있으나, 높은 곳에서 타인을 볼 때는 모두 어두운 면만 보인다. 층층의 천체에서 원래부터 신 위에 신이 있고 생명마다 그가 처한 경지에서 즐거워하고 있다. 생명은 경지가 같지 않으나 각자마다 가진 행복감과 만족감이 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시드니 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경지(境界)’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 3-법 공부를 잘하면 사람 마음을 제거하기 어렵지 않다’

 

원문발표: 2019년 9월 2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교류>이성인식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9/28/393890.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