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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수련생이 대법제자로 성장하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나는 청년 대법제자이다. 어린이 제자로 수련을 시작해 오늘에 이르렀으며 도중에 게으름도 있었다. 하지만 사존께서 줄곧 나를 점화해주시며 수련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부단히 이끌어주셨다. 지금 나는 두 아이의 엄마이다. 최근 밍후이왕에서 어린 제자를 잘 이끌며 어떻게 수련했는지에 관한 교류문장을 종종 봤다. 자신에게도 어떻게 어린 제자에서 대법제자로 성장했으며 또 어떻게 어린 수련생을 잘 이끌어 수련했는지의 과정을 써내 중생에게 대법 수련의 아름다움과 신기함을 보게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1. 몇 번 반복을 통해 마침내 진정으로 법을 얻다

나는 1998년 10월 대법수련을 시작했다. 당시는 중학교 2학년이었다. 어려서 나는 몸이 허약하고 병이 잦았기에 학업을 계속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어머니는 나의 신체 상태를 염려하고 걱정하셨다. 그해 가을 이모할머니가 외할머니댁에 오셔서 외할머니께 파룬궁을 배우라고 하시며 파룬궁은 병을 낫고 신체를 건강히 하며 좋은 사람이 되라고 가르친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외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아이와 함께 배우자고 하셔서 나는 어머니와 같이 법을 배우게 됐다.

시내로 돌아와 학교 다닐 때, 집에 돌아오면서 가져온 사부님의 설법 녹음테이프를 매일 들으며 공부했다. 매일 같이 이렇게 하며 일에 부딪히면 법에 따라 했고 남을 선하게 대하며 남을 위해 생각했다. 그때 나는 아직 연공을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한 달도 못 돼 나는 내 또래의 나이대에 있어야 할 원기를 회복했으며 어디 아픈 곳도 없었고 먹는 것도 식욕이 커졌으며 완전히 건강한 아이로 변했다. 머리는 맑았고 정력이 충만했다.

그때 이후로 주말이면 간혹 어머니와 단체 연공에 참가했다. 학교 성적도 올라 우수반에서 10등 안에 들었다. 당시 공부 잘하는 친구들은 남이 자기보다 잘할까 봐 두려워하며 시간 낭비를 꺼리고 공부에 몰두하며 친구의 문제 풀이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법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좋은 사람이 됐고 친구들이 어느 때 물어봐도 참을성 있게 답해줬다. 친구들은 내가 좋은 사람이며 이기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나와 이야기하고 싶어 했으며 나를 ‘짱’이라고 불렀다. 뜻은 내가 주변 한 무리의 조장이라는 것인데 그들이 내심으로 감명 받았음을 볼 수 있었다. 중학교를 졸업한 지 20년이 된 오늘날 친구들이 반 모임을 결성할 때 내가 보이지 않자 곳곳에서 나를 찾아 끌어들였다.

1999년 6월, 나는 고등학교 시험에 응시해 전체 현의 몇천 명 응시생 중 상위 30등 안에 들었고 고1 우수반에서는 10등 안에 들었다. 당시 어머니는 자주 나를 데리고 단체 법 학습팀에 갔다. 1999년 7월 20일 전 어느 주말, 어머니와 함께 단체 연공에 참가했는데 그날은 하늘이 우중충했고 연공하는 수련생도 몇 명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그날 수련생이 왜 그렇게 적은지 의아해했으며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몰랐다. 연공이 끝나고 집에 돌아오자 수련생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 집에 왔다. 그제야 우리는 파룬궁에 대한 왜곡 보도가 있었고, 수련생 모두가 사람과 사회에 대한 파룬궁 수련의 좋은 점과 이유 없이 사람을 체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정부를 향해 설명하러 갔음을 알았다.

당시 내가 대법을 수련한 지 1년도 못 됐는데 전면적인 박해가 시작됐다. 법을 배운 시간이 짧고 법리에 대한 이해도 그리 밝지 못했으며 다만 좋은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게다가 막 고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라 공부하기 바빠 나는 곧 태만해졌고 설법을 듣지 않은 지도 오래됐다. 천천히 나는 이기적으로 변했으며, 흉금도 좁아지고, 누구든지 나를 위해 일해야 했다. 신체도 점점 법을 배우기 전의 상태가 됐고 학교 성적도 자연히 좋지 않았는데 막 입학할 때 10등의 성적이 40등 밑으로 떨어졌다. 어머니가 계속 법을 배우라고 깨우쳐주셨지만, 학교 공부가 힘들고, 법을 배우는 시간도 짧고 적어졌다. 며칠에 한 번 겨우 법 공부를 했는데 이때 나는 여전히 대법에 대해 감성적 인식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사부님께서는 그래도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나에게 사상이 전변하는 과정을 주셨다. 상태가 다시 호전되고 성적도 올랐는데, 수능시험 이전에 상위 20등으로 올라갔으며 일류대학에 합격했다.

외지에 있는 대학에 갔는데 처음 집을 떠나 혼자 모든 것을 마주할 때는 겁을 먹고 어찌해야 할 줄 몰랐다. 내심으로 항상 고민하며 무슨 일에 부딪히면 특별히 긴장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러나 이때 자신의 학습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느슨히 했다. 대학 1년 기말시험을 통과하지 못했고 법도 그다지 배우지 않았다. 천천히 위에 병이 생겼다. 매일 위가 아팠으며 밥을 먹으면 더욱더 아팠다. 어떤 사람이, 위가 나쁜 사람은 면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러나 면을 먹어도 조금도 좋아지지 않았다. 어떤 때는 먹는 것이 먹지 않은 것보다 괴로웠다. 얼굴빛은 어두웠고 온종일 흐리멍덩했으며 학습도 중심을 잡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이러했기에 대학 2학년 방학이 다될 무렵 큰 외숙네 4촌 오빠가 나를 병원에 데려가 검사받게 했는데 위 두 곳에 출혈이 있다고 했다. 방학 때 집에 가자 어머니가 “너는 계속 법을 배워라. 이전에 몸이 아파 약도 적잖이 먹었지만 소용없었잖니!”하고 말씀하셨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대법을 막 수련할 때는 병도 없고 온몸이 가벼운 상태였다. 그땐 정말 좋았다. 그래서 나는 방학을 이용해 법 공부를 많이 하기로 했다.

내 몸에서 신기한 일이 다시 나타났다. 대법 책을 본 지 며칠 만에 위병이 나았고 무엇이나 먹을 수 있었으며 얼마를 먹어도 괴롭지 않았다. 무얼 먹어도 맛있었고 몸은 가뿐하고 정신 상태도 매우 좋았는데 오랜만에 병이 없고 온몸이 가벼운 상태가 다시 돌아왔다. 이때 나는 다시는 대법을 멀리해서는 안 된다고 깨달았다. 대법은 내게 건강한 신체를 주었으며 49kg이었던 체중도 아주 빠르게 54kg으로 늘었다.

방학 때 법 공부를 비교적 많이 했기에 내게는 한 달 만에 환골탈태의 변화가 발생했다. 사부님께서 지혜를 열어주셔서 성적은 수직으로 상승했다. 전에는 무슨 일이 있으면 미리 며칠을 긴장했지만, 이제는 긴장하지 않고 침착하고 냉정했으며 머릿속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방법이 생각났다. 개학하자 학우들은 나의 변화를 볼 수 있었다.

내가 학교 다니는 동안 법 공부하고 연공하는 환경이 있도록 하려고 어머니는 학교 주변에 셋방을 얻어 수련하시는 외조부모님과 함께 살도록 했다. 이렇게 되자 수업이 없으면 집에 가서 법 공부하고 연공할 수 있게 됐다. 방학 때 집에 돌아가서는 수련생들과 시골에 내려가 진상 자료를 배포했다. 이때 나는 대법을 떠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

2. 기술 분야 일을 하면서 대법의 신기함을 증명

외할머니는 평소 산책하러 가시면 사람들에게 진상을 알렸고 그러는 중에 아주머니 수련생 한 분을 알게 됐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지역 수련생을 많이 알게 됐다. 컴퓨터 기술을 아는 수련생은 특별히 적었는데 내가 대학생이라서 협조인 수련생이 나에게 컴퓨터 기술을 가진 수련생을 소개해 기술을 배우게 했다. 이렇게 수련생들의 컴퓨터 유지관리 문제 해결을 도울 수 있었다. 컴퓨터 기술은 대부분 영어로 돼 있고 시간이 오래되면 잊어버려 다시 봐도 모를 수 있으므로 나는 수련생이 한 단계 가르쳐주면 그것을 기록했다. 기술 수련생들은 바쁘기에 그들이 수련생에게 소프트웨어와 운용시스템을 설치할 때 나더러 조작하게 해 문제가 생기면 수련생을 도와 해결할 수 있도록 했다. 천천히 인터넷 접속, 다운로드, 인쇄 등의 조작에서 오피스 프로그램을 사용해 각기 다른 사양의 노트북과 데스크톱에 단일 시스템과 양방향 시스템을 설치했고 또 프린터의 분해와 유지보수에 이르기까지 아주 빨리 익힐 수 있었다. 하지만 데스크톱 컴퓨터마다 다 같지는 않았기에 많은 경우 스스로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필요했다.

당시 자료점이 곳곳에 생겨났는데 많은 수련생이 자기 집에 작은 자료점을 꽃피웠다. 그러므로 나는 자주 수련생 집에 가서 도움을 주며 컴퓨터 시스템 설치, 인터넷 접속, 다운로드, 인쇄 등을 가르쳤다. 일부 노년 수련생은 마우스를 만져본 적이 없었고 마우스를 거꾸로 쥐는 사람도 있었으며 어떻게 하는지 몰라 나를 찾아서 해결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인내심을 닦았고, 수련생의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을 보게 되었는데, 나는 책임지고 가르쳐 그들을 이해시켰다. 한 번에 안 되면 두 번을 했으며 대부분의 경우 여러 차례 해야 했다. 또 하고 하다가 문제가 생기면 수시로 가서 수련생을 도와 컴퓨터 문제를 해결해줬는데 당시 나의 심태는 정말 온통 법에 있었다.

대학 3학년 방학 때 고향 집에 갔는데 협조인 수련생이 우리 집에 와 컴퓨터 문제를 말했다. 원래의 젊은 기술 수련생이 박해당했기 때문에 문화 수준이 좀 높은 노년 수련생이 이 임무를 이어받았다. 이때는 컴퓨터에 새로운 운용시스템을 업데이트해야 했지만, 일부 브랜드의 컴퓨터는 설치할 수 없었고 새로 사 오게 되면 또 대법 자원을 낭비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하겠는가? 노년 수련생은 먼저 컴퓨터를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나는 반복적으로 몇 번이나 설치해봤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이때는 이미 한밤중이 됐기에 나는 수련생을 쉬도록 했다. 설치하는 과정 중에, 내가 조급해하지 않는 정황 하에서, 사부님께서는 내게 지혜를 주시며 설치 시스템과 관계되는 영문 조항을 선택하게 하셨다. 이렇게 아침 5시가 됐고 수련생이 깨어났을 때 나는 막 시스템 설치를 끝마쳤다.

이후로 고향 수련생의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지만, 노년 수련생이 해결하지 못하면 나는 주말, 휴일이나 평소 수업이 없을 때 찾아갔다. 노년 수련생은 내가 학교 공부로 바쁜 줄 알기에 되도록 나의 시간을 절약해줬다. 내가 찾아가서 문제를 해결할 때마다 노년 수련생은 공책에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기록했는데 도면과 메모 등 쓸 수 있는 기록 방법을 다 사용했다. 수련생이 모두를 위해 컴퓨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은 곤란을 두려워하는 정서가 조금도 없었다. 내가 나이가 든다 해도 배우지 못할 것 같았다. 앞을 향해 똑바로 나아가는 용기는 가히 사람을 탄복하게 할 만했다. 당시 수련생의 집에서 자주 밤을 새워가며 한 대 한 대의 컴퓨터를 셋업(setup)했으며 설치하는 컴퓨터마다 고유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컴퓨터는 단지 한 대의 기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대법제자에게 와서 법을 위해 쓰이는 것인데 얼마나 행운인가! 하지만 어떤 컴퓨터는 설치하는 게 순조롭지 못한데 나는 모든 컴퓨터와 소통하며 그것이 대법에 동화돼 자신의 작용을 발휘하도록 했다. 그런 다음 설치하면 순조로이 시작할 수 있었으며 과정에서 장애가 나타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사부님께 점화를 요청했다. 사부님의 점화로 매번 설치를 완성할 수 있었다. 설치를 마친 컴퓨터는 다시 이 노년 수련생의 손을 통해 해당 수련생에게 보냈는데 나는 이렇게 수련생과 협력해 법을 실증하는 일을 했다. 당시 우리는 1대1로만 연락했기에 고향에서는 지금까지도 나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없다.

기술 방면의 일로 바빠서 학습할 시간이 적어졌고 성적이 떨어질 것 같았지만 사실 내 성적은 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올랐다. 법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사부님께서 지혜를 열어주셨는데 평소 수업 때 교수님의 말씀을 다 알아듣고 잘 기억했다. 대학 3학년 기말시험에는 누구나 인정하는 비교적 어려운 과목이 있었다. 나는 고향에서의 컴퓨터 일로 바빠 시험까지는 4일밖에 시간이 없었고 학교로 돌아온 후 복습하기 시작했다. 시험이 코앞이지만 의연히 매일 자습실에 가서 먼저 법 공부를 한 다음 복습했다. 헤아려보니 내가 복습한 시간은 단지 4일 반뿐이었다. 시험 결과가 나왔는데 나는 과에서 최고점인 98점을 받았다. 학우들도 매우 놀랐는데 나는 이 모든 것이 사부님께서 도와주시고 지혜를 열어주셨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나는 사부님께서 시시각각 대법제자의 일체를 주시하고 계신다는 것을 절절하게 감수했다. 우리의 마음이 항상 법에 있기만 하다면 당신은 사부님께서 신변에 계신다는 것을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련생들이여, 우리가 정진하지 않을 때 사부님께서 우리를 곁에서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우리가 일에 부딪혀 심성관을 넘지 못할 때 “때려도 맞받아치지 않고 욕해도 대꾸하지 않았다.”[1]라고 하신 사부님의 법을 생각해 보라. 왜 우리 자신이 왜 자기가 잘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지, 사부님께서 그렇게 우리가 잘 할 수 있다고 믿는지 생각해 보라.

많은 때 왜 자신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자신의 마음을 깊이 파보면 사실 우리가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부님을 믿지 못하고 법을 믿지 못하는 표현이다.

3. 정진실수하며 사람을 구하면 사부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신다

어느새 4학년 1학기가 돼 모두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고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는 한결같이 법 공부를 첫 자리에 놨으며 매일 자습실에 가서 먼저 법 공부를 한 다음 학과 공부를 했다. 당시에 보통은 오후엔 집에 가서 연공을 했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밤까지 계속 학과 공부를 했으며 침실에 와서도 11시경까지 공부했다. 다른 학우들은 자정을 넘겨 밤 2~3시가 되도록 공부했다. 나는 정상적으로 복습하는 자세였으며 대학원 시험 결과에 집착하지 않았다. 당시 나는 교실과 도서관에서 자주 자료를 배포했기 때문에 보통은 다른 학우와 함께 공부하지 않았다. 우연히 어떤 학우와 같이 가게 되면 나는 사부님께 그녀와 같이 가지 않게 해달라고 청했고 그러면 같이 가지 않게 됐다. 나 혼자 오가는 것이 모두에게 점점 익숙해졌고 내가 사람 구하는 일에 영향 주지 않게 됐다. 하지만 이것이 나와 학우와의 관계에 영향 주지 않았으며 우리는 여전히 서로 유쾌하게 지냈다.

‘9평 공산당’ 책이 나온 후 수련생 모두가 보고 있었고, 당시 집에 돌아가 있을 때여서 나 역시 봤다. 책을 보는 중에 수련생들의 신체에 기침 증세가 있었고 나도 오랫동안 기침했다. 나의 룸메이트는 내가 늘 기침하며 또 오랫동안 하자 무슨 병을 옮길까 두려워했다. 이런 모습을 보자 나는 그녀들에게 진상을 이미 알렸기 때문에 확고하게 말하기를 “괜찮다. 나는 법을 배우고 연공하니 곧 좋아질 것이다. 병을 옮기는 것이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라고 했다. 내가 병원에 가려는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자 곧 좋아졌다. 곧 시험이 닥쳤고 정치 분야의 그런 것들을 외워야 했지만 공산사령이 나를 방해했다. 시험 9일 전 두통 증상이 나타나 공부를 할 수가 없었다. 9일 동안 나는 (시험) 교과를 전혀 보지 못했고 수학과 외국어 같은 복습도 끝마치지 못했다. 정치 과목을 나는 아예 외우지 않고 시험장에 갔다. 첫째 날 시험에서 또 좀 머리가 아팠으나 둘째 날은 완전히 좋아졌다. 이렇게 시험을 치렀는데 만약 수련하지 않은 사람이 나 같이 이런 방식으로 공부했다면 분명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나는 우리 학교 대학원 시험에 합격했으며 그것도 국비 장학생이어서 학비 한 푼 쓰지 않게 됐다. 우리 과 전공 친구들은 대부분이 시험에 떨어졌다. 우리가 시시각각 법을 첫 자리에 놓는다면 사존께서는 우리에게 꼭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다.

4. 법 공부를 많이 한 이후의 심신 변화가 대법의 아름다움을 증명

대학원에 입학하니 교과목이 매우 적었다. 나는 많은 시간을 이용해 법을 배웠는데 당시 모든 대법 서적을 한 차례 공부했다. 바로 그 당시 나의 사상은 근본적인 변화가 있었는데 단지 대법은 좋은 것이고 병을 제거하고 몸을 건강하게 한다는 것만을 아는 그런 감성적 인식이 더는 아니었다. 대법의 많은 법리에 대해 한 걸음 더 깊이 인식하게 됐는데 당시 나는 변했고 더는 본래의 머리가 텅 빈 내가 아니었다. 마치 머릿속에 더 많은 지혜가 더해져 참을 수 있게 변하고 속인과 같이 다투지 않으며 개인의 이익도 담담하게 볼 수 있었다.

졸업 무렵 나는 본 지역 어느 대학의 강사가 됐다. 당시 과 주임은 나를 아주 마음에 들어 했고 비서를 맡겼다. 과 주임은 성격이 좋지 않았는데 그녀에게 원장이나 다른 과와 모순이 생기면 나는 매번 법에서 깨달은 이치로 그녀를 일깨워주며 권고했다. 2년을 일하는 동안 주임은 나를 지기로 여겼으며 항상 나를 칭찬했다. 당시 동료들은 두 파로 나뉘었지만 내가 일을 바르게 했기 때문에 두 파 모두 나를 좋은 사람으로 여겼다. 누가 내 강의안을 빌려달라고 하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줬는데 동료들은 나의 흉금과 인내력에 탄복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은 나를 매우 좋아했다. 내가 사직해야 함을 알았을 때 학생들은 매우 아쉬워했고 한 반의 전체 학생이 송가를 합창했으며 강단에서 나에게 정중히 인사하고는 여러 장의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직할 때 주임은 내게 노트북 한 대를 선물했는데 컴퓨터의 첫 화면에 “앞길에 친구가 없을까 봐 걱정하지 마라. 세상 누구라도 당신을 알게 될 것이다”라는 시 한 수를 써주었다. 나를 사심 없고, 관용하며, 인내하는 사람으로 변하게 한 것은 대법이다.

5. 어린 수련생의 도래가 대법의 신기함을 증명

2011년 나는 수련생과 결혼한 후 다른 도시로 와서 가정을 꾸리고, 일하게 됐으며 결혼한 지 반년 만에 임신했다. 당시는 대학에 출근한 지 반년 됐었고 임신 1개월 때는 때마침 겨울방학이어서 어머니 집으로 갔다. 동북의 겨울은 매우 춥지만 간혹 나는 어머니와 같이 나가서 1시간 남짓 진상자료를 배포했다. 내 머릿속에는 임신이 내가 일하는 데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생각이 아예 없었고 사부님을 확고히 믿기에 문제도 없었다. 개학 때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지만 매일 연달아 4교시 수업을 했으며 오후 내내 서 있었다. 하지만 힘들다고 느껴본 적이 없었고 매일 정력이 충만했다. 학생들은 “선생님, 앉아서 강의하세요.”하고 말했지만 나는 내가 앉으면 일부 학생이 강의를 진지하게 듣지 못할까 봐 걱정했기 때문에 서서 강의하기를 견지했다. 낮에도 낮잠을 잔 일이 없었는데 속인에게는 당연하게 있는 임신 상태가 내게는 없었다. 출산예정일도 나 스스로 계산하고 직장에 출산휴가 신청하는 것도 대략적인 날짜를 써서 제출했다.

요즘 사람들은 임신하면 병원에 가서 각종 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아이에게 무슨 병이 있을까 봐 걱정한다. 그러나 나는 예정일이 다 돼서야 시어머니댁으로 갔고 그곳의 병원에 가서 B형 초음파 검사를 받았다. 목적은 아이가 얼마나 있어야 태어날지 알고 싶어서였고 이 병원에서 출산하기로 맘먹었으며 마침 친척이 부인과 주임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의사는 많은 사람이 예정일에 아이를 낳는 것은 아니기에 출산일을 말해주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예정일을 계산했는데 바로 그날 아이를 낳았다. 임신 중에 내가 담대하고 위험을 무릅쓴 것은 아니다. 내 심중에는 법이 있으며 병원에서 말하는 각종 도움 되는 것들은 우리 수련인이 연마하는 공 속에 모두 들어 있는 것들이다. 나는 깨닫기를 수련인이 만약 가서 검사한다면 과학을 믿은 것이며 속인 층차의 병원을 신뢰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문제에서 당신은 속인이며 당신에게는 속인의 각종 상태가 나타날 것이고 검사하면 각종 병이 나타날 것이다.

20여 년 수련하는 동안 나는 약 한 알 주사 한 대도 맞지 않았고 병원에 가지도 않았으나 아이를 낳을 때는 부득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아이를 낳기 하루 전날 저녁, 시어머니와 나가서 한 시간 정도 버섯을 채취해 집에 돌아오자 반응이 있었다. 바로 병원으로 갔다. 병원에 가니 의사가 수면을 돕는다며 주사를 놓으려 하자 나는 잠을 아주 잘 자니 주사 맞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의사는 아주 엄숙하게 주사를 맞지 않으면 안 된다고 했고 나는 무슨 주사인지도 몰랐다. 맞고 나자 의식이 몽롱해지고 가족들이 허상으로 보였으며 잠을 청해도 나의 의식은 자서는 안 된다고 일깨워줬다. 나는 누워 자지 않으려고 억지로 버티며 약이 내게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게 했다. 이렇게 20분이 지나자 의식이 또렷해졌다. 나중에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그 주사를 맞고 나자 마치 내가 아닌 것 같았으며 말을 해도 허튼 말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정신이 또렷해진 이후에야 나는 누워 잠을 잤다. 이튿날 아침 8시가 좀 지났는데 의사는 내가 당일 출산하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과 함께 식사하러 나갔다. 10시 지나 돌아오자 산기가 있었고 나는 자연분만하기로 했다. 제왕절개를 하면 주사를 많이 맞고 수술해야 하는데 나는 이렇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분만실에 들어간 이후 낳기가 몹시 어려울 때 나는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다. 순간 그다지 괴롭지 않았으며 아이를 다 낳고도 낳은 것을 몰랐다. 간호사에게 아직 다 나오지 않았느냐고 물으며 옷을 더럽히지 말라고 부탁했다. 당시 간호사는 옷을 생각하다니 하며 웃었다. 그런 다음 4.2kg 되는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고 말했다. 몸은 보름 만에 다 회복됐다.

사부님을 굳게 믿으면 사부님은 언제나 신변에 계시며 자비로 나를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을 절실하게 감수할 수 있었다.

6. 무의식적인 일념이 병업 가상을 초래했으나 신사신법으로 난관 돌파

작년 3월 나는 둘째를 임신했는데 우리 시에서 낳아야 했기 때문에 임신 5개월이 됐을 때 카드를 만들려고 지역 병원에 갔다. 가니 강제로 검사받게 했고 그렇지 않으면 카드를 만들 수 없었다. 나는 몇 가지만 검사했다. 임신 7개월 때 내 수첩(증명서)을 지역(병원)에서 출산 대기병원으로 갖다 줘야 했기에 이때야 카드를 받으러 지역(병원)에 갔다. 당시 지역병원에서 내 수첩 카드에 아무런 대형 검사도 하지 않은 것을 보고 말하기를 “당신은 아무 검사도 하지 않았네요. 저는 사실대로 기재할 수밖에 없어요.”라고 했고 나는 “좋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대기병원에 가서 수첩을 받으라고 하며 다음에 올 때는 수첩 카드를 가져오라고 했다. 그 후 나는 친구가 소개한 의사에게 가서 절차를 밟았으나 결국에는 이 의사도 각종 검사를 받으라고 하며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지금은 산간 마을 사람들이 검사받으러 온다고 했다. 내가 일체가 다 정상이라 검사가 필요 없다고 말하자 그녀는 “당신이 어떻게 정상인지 압니까?”라고 했다. 어머니가 검사받지 않으려면 받지 않을 수 있는 것 아니냐며 그녀에게 몇 마디 따져 물었다. 결국 그녀는 나와 어머니, 시어머니를 한바탕 질책했다. 이후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기왕 왔으니 좀 협조하자!”라고 해서 혈액, 뇨, 심전도, 초음파 등의 검사를 했고 결과는 일체가 정상이었다. 의사는 내게 반달 후에 다시 와서 다른 검사를 받으라고 했다. 집에 돌아왔으나 연이틀 상태가 특별히 좋지 않고 괴로웠다가 좋아졌는데 당시에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었다. 지역에 가서 수첩을 찾아 집에 놓고 내용은 보지도 않았다. 1개월 후에야 수첩을 가지고 병원에 갔다. 그녀는 또 몇 가지 검사를 해야 한다고 했고 나는 묵인했다. 나는 잘못임을 알았지만, 그녀의 말을 듣지 않을 수 없었고 하지 않으려면 안 해도 되느냐고 말해봤지만 이미 늦었다. 나중에 깨달은바, 만약 병업 가상이 있는 수련생이 가족에 의해 병원에 보내진 후 의사의 말을 따른다면, 그건 속인 층차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바로 정념으로 돌파하지 못한 것이다.

집에 돌아온 후 내게 병업 가상이 나타났다. 2~3일 열이 나고 3~4일 밥을 못 먹고 죽을 먹었더니 체중이 몇kg이나 빠졌다. 이때 나는 임신 9개월이었다. 만약 속인이라면 매우 놀랐을 것이다. 이어서 한쪽 귀가 울리는 증상이 나타났고, 눈앞이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럽고 때로는 길을 가면서도 흔들거렸다. 가족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이런 바르지 않은 상태는 줄곧 계속됐다. 갑자기 하루는 그 수첩에 어떻게 적혀 있는지 보고 싶었다. 그제야 지역병원 의사가 매우 무책임하게 나를 비정상이라고 적은 것을 발견하고 나 스스로 고쳤다. 출산이 임박한 날 밤 2시 40분에 갔던 병원은 그 의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의사가 나에게 나중에 와서 검사받으라고 했지만 나는 가지 않았는데 결국 그녀는 나를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고 (당시 그녀를 찾은 것은 검사를 적게 받으려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바라는 바와 반대로 됐다. 처음에 사람을 찾아 도움을 구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렇게 한 것은 바르지 못했다) 응급진료를 접수하라고 했다. 이어 각종 검사가 시작됐고 의사는 내가 고혈압, 심한 빈혈에다 간염이 있다고 말했다. 전에는 없던 것이 나타났는데 당시 나는 깜짝 놀랐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임신 7개월이던 그때 병원에 가기 이전에는 건강했는데 지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나는 이런 것들이 가상임을 알고 구세력이 나를 박해하려고 시도하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므로 의사가 어지럽지 않으냐고 물을 때 이런 가상이 1개월 남짓 계속됐지만 나는 의연하게 승인하지 않고 견정하게 없다고 말했다. 간염이 있냐고 물을 때도 나는 없다고 대답했고 고혈압도 없으며 나는 일체가 다 정상이라고 했다. 임신 후기 나는 인터넷에서 구세력이 수련생의 임신을 이용해 수련생을 박해했지만, 사부님에 대한 바른 믿음으로 지나온 내용의 문장을 몇 편 읽었었다. 당시 어떻게 수련생을 박해했는가 하는 부정적인 내용이 줄곧 나의 뇌리에서 떠올랐다. 인터넷에서 이런 문장을 봤는데 바로 부정한 생각이 마난을 초래한 것이다.

초음파 촬영 때 의사가 말하기를 “당신은 양수가 녹색이라 아이가 출생해도 응급처치를 받을 수 있고 숨을 쉬지 못할 수도 있으니 제왕절개를 합시다.”라고 했다. 가족들은 모두 수련인이기에 우리는 괜찮을 것이고 순산할 것이라고 말했다. 의사가 남편에게 “그럼 서명하시고 일이 있으면 책임지세요. 아침 8시까지 낳지 못하면 강제로 임신을 중지해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사부님이 계시기에 어떤 일도 없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침 7시 35분 출산이 임박하자 분만실로 갔고 8시 10분 4.2kg의 정상적인 아이를 순산했다. 만약 당시 마음을 움직이고 두려워한 나머지 의사의 말에 따랐다면 아마 의사의 말대로 됐을 것이다. 왜냐하면 과학을 믿었기 때문이다. 수련인은 수련인의 이치로 사람과 일을 가늠해야 한다. 본래 하루 입원했다 집에 가려고 했는데 병원에서 퇴원하지 못하게 했다. 3일 후 퇴원할 때 의사는 매우 걱정하며 빈혈이 매우 엄중하니 다른 병원에 가보라고 하며 보혈제를 한 무더기 처방해줬다. 집에 온 후 한쪽에 놓고 복용하지 않다가 나중에 버렸는데 의사의 말대로 하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출산할 때 힘을 너무 많이 써 배가 늘어졌고 ‘펑’ 소리가 났다. 줄곧 옆으로만 누워야 했고 앉아 있지도 못했다. 일어서면 배가 아팠고 허리를 반쯤 구부리고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며 걸었는데 그렇게 괴로운 건 정말 처음 느껴봤다. 밍후이 라디오가 방송하는 수련생 교류문장을 들었는데 마침 한 수련생이 병업관을 넘을 때 10분간 서 있지도 못했지만 그녀는 의연하게 제1장 공법을 몇 차례로 나누어 끝마쳤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일어나야겠다. 수련생이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 책상에 기대 일어나자 전신에 땀이 나고 온몸이 떨려 곧장 눕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견지해 일어나야 한다고 자신에게 말하며 제1장 공법을 끝마쳤다. 매우 힘들었지만, 몸은 오히려 가벼운 느낌이었다. 이날은 출산한 지 5일째였고 이후 나는 매일 법을 배우고 연공하는 것을 견지했다.

아이를 낳고 대장이 굳어져 견디기 어려웠고 상처도 아프고 배도 아파 일어나려면 탁자를 붙잡아야 했다. 앉으려면 한참이 걸렸고 걸을 땐 허리를 굽히고 한 발 한 발씩 옮겼다. 밤에 잘 때는 옆으로 누워 잤으며 한쪽 다리는 계속 공중에 들듯이 해야 했는데 잠들면 다리가 내려와 상처를 누르는 바람에 아파서 깨어났다. 좀 견디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고 이런 고통을 견디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나는 식구에게 변을 나오게 하는 관장약을 사 오게 해 사용했다. 즉시 통했고 당시는 좀 편안했다. 관장약을 쓰면 밤에는 상처가 극히 아팠는데 그야말로 잠을 잘 수 없었다. 나는 관장약이 상처에 닿았다고 생각했다. 이틀 지나자 또 변이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는 상처를 막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저번처럼 상처가 극심하게 아팠다. 어머니가 말씀하시기를 “봐봐라. 너는 어디 수련인 같으냐?”라고 하셨다. 그랬다. 박해당해 사망한 수련생이 당한 고통은 나보다 크지 않았겠는가? 이때 자세히 생각해 보니 이 관장약도 약인데 속인의 방법으로 완화하려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서 당신은 속인 층차로 떨어졌는데 그럼 당신은 속인 상태의 고통을 감당해야 한다. 나는 수련인이다. 사부님께서 나의 그렇게 많은 업력을 없애주셨는데 요만한 고통도 감당할 수 없단 말인가! 나는 남은 관장약을 전부 버렸고 그 후로 잘 잘 수 있었다.

한밤에 일어나 화장실에 가는데 머릿속에서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머리가 떨어져도 몸은 여전히 가부좌하고 있을 것이다.”[2]라고 하신 말씀이 갑자기 번득였다. 사부님께서 내가 수련인으로서 자신을 가늠하는 것을 보시고 곧 나를 점화해 주셨다. 나의 요만한 고통이 다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어려움을 크게 보고 나를 작게 봤기 때문에 그렇게 견딜 수 없었다. 이튿날 일어나자 훨씬 좋아진 감각이 뚜렷했다. 내가 견지하며 연공하자 상처 부위에서 작은 바람이 휙휙 부는 느낌이 들었다. 사부님께서 상처가 빨리 아물게 도와주신다는 것을 알았다. 7일째 제1장 공법과 제3장 공법을 나누어 두 번 연마하자 나아졌고 나는 연공 시간을 늘렸다. 이렇게 제1, 3, 4장까지 이어서 연마할 수 있게 됐다. 대략 10일쯤 됐을 때 나는 제2장 공법을 한 차례 다 연마했고 11일째쯤 됐을 땐 동공을 이어서 끝까지 연마할 수 있었다. 15일째는 나는 완전히 좋아졌다. 배도 아프지 않았고 길을 걸을 때도 곧게 설 수 있었다.

내가 매일 법을 배우자 신체도 빠르게 회복됐다. 동시에 자신을 찾아봤는데 도대체 나의 어디가 잘못된 것인가? 왜 이런 가상이 나타나는가? 안으로 자신을 찾아보니 나에게는 원한심, 질투심, 쟁투심, 남을 거슬려하는 마음,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마음, 말하면서 폭발하는 마음, 반항심, 교활함 등의 좋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니 갑자기 눈앞이 어지럽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나 가족이 다가오자 어지럽게 하는 물질이 다시 몸에 달라붙는 것 같은 느낌이었고 또 어지럽기 시작했다. 바로 자신을 찾아보니 원래 나를 줄곧 어지럽게 하는 물질을 스스로 느끼고 있었으며 머릿속에 항상 의사가 말한 가상이 떠올랐다. 나는 왜 의사의 말을 곧이들으며, 왜 이와 같은 인과를 연상하는가? 어지럼증은 빈혈 때문인데 나는 병원의 검사 결과를 승인하지 않았잖은가! 나는 어지럽지도 않으며 빈혈도 없다. 병원 검사 일체는 결과가 좋든 나쁘든 수련인이라면 그것이 자신의 신체 상태를 판단하게 해서는 안 된다. 검사 결과가 좋게 나올수록 당신이 과학을 더욱 믿게끔 한다. 그런 다음 재검사해서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면 당신더러 이런 것이라고 인정하게 하며 유인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당신의 바른 믿음을 동요하게 한다. 우리 수련인은 언제나 일체를 법리로 가늠해야 하며 속인 층차의 이치로 당신에게 좋다 나쁘다 하고 말하더라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구세력이 틈을 파고들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약 1주일 후 갑자기 좋아졌음을 발견했다. 두 달여의 병업 가상이 철저히 없어진 것이다. 정신 상태도 좋았는데 나는 모든 가상이 철저히 없어졌음을 알았다. 지금 나는 매일 두 아이를 돌보며 집안일은 할 수 있는 일은 되도록 스스로 한다. 시부모에게 시간을 많이 드려 법을 배우고 연공하게 하며 할 일을 한 부분만 맡게 한다. 부정기적으로 나가 자료를 배포하고 사람을 구하며 아이들이 잘 때 연공하고 법을 배운다. 현재 매일 5시간 자며 중간에 세 차례 일어나 젖을 먹이지만 나는 여전히 정력이 충만하다. 속인이 말하는 산후 기억력이 나빠진다는 그런 상태도 내게는 없었다.

임신 3개월이 됐을 때 등에 피부색과 같은 혹이 생긴 것을 발견했는데 좀 딱딱했으며 돌출하지는 않았으나 서서히 새끼손가락 손톱만큼 커졌다. 당시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임신 9개월 때 연공하는데 혹이 생긴 곳에 바람 부는 것처럼 휘휘 도는 것을 느꼈다. 나는 파룬이 돌고 있으며 사부님께서 신체를 청리해주심을 깨달았다. 아이 낳고 두 달 후 하루는 갑자기 혹이 자란 곳이 불편함이 느껴져 손으로 짜내자 새끼손가락 손톱 크기의 작은 종기 같은 백색의 혹 덩어리가 나왔다. 이전에 연공할 때는 혹이 자란 곳에 휘휘 도는 느낌이 있었는데 그것은 사부님께서 혹을 처리해주시는 것이었다. 며칠 후 피부는 평평해졌고 일체가 정상이었다.

수련인은 바로 초상적인 사람이다. 이러한 과정을 수련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이해할 방법이 없으며 감수하지 못할 것이다. 수련인이 일념을 바르게 깨닫기만 하면 사부님께서는 당신을 책임지고 결정하실 것이다.

7. 사부님께서 어린 제자를 도와 신체를 정화해주시다

따바오(大寶)는 올해 7살로 1학년이 됐다. 이 7년 동안 사부님의 자비하신 보호하에 건강하게 자랐다. 지금 몇 가지 예를 들겠다.

아이가 줄곧 법광에 푹 젖어 있었고 태어나서부터 사존의 설법을 듣고 봤다. 션윈만회(복사가 허락될 때), 션윈음악회를 봤고, 인생 이야기, 대법의 신기한 이야기, 우리에게 미래를 말하라 하네, 풍우천지행, 진상 영화 등의 각종 CD, 어린이 제자 이야기, 수련교류, 밍후이 만화, 유유자적, 삼자경 등등을 보고 들었다. 아이는 이런 내용을 몇십 번이나 봤지만 아직도 보고 있다.

때때로 아이는 나와 외할머니, 할머니와 밖에 나가 자료를 배포하며 사람을 구한다. 아이가 접촉하는 주된 것이 대법과 관계되는 내용이기 때문에 사부님께서 그녀에게 지혜를 열어주셨다. 그래서 그녀(아이)는 또래보다 글을 많이 알았고 3세 때 이미 많은 글자를 알았으며 다른 아이에 비해 순진하고 밝았다. 5세 때는 벌써 ‘전법륜(轉法輪)’을 완전히 읽을 수 있었고 홍음 일부도 외울 수 있었다. 현재 우리 둘은 매일 학교가 끝나면 먼저 전법륜을 배우고 연공한 다음 학습을 한다. 일에 부딪히면 나는 그녀에게 수련인은 응당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일깨워줬고 병업 반응을 보일 때도 나는 지금까지 동요해본 적 없이 바로 설법을 듣게 했다. 물론 평소에 ‘파룬따파하오, 쩐싼런하오(法輪大法好, 真善忍好)’도 외웠다. 속인의 방법을 채용한 적이 없었는데 모두 좋았고 아주 빨랐다. 사부님께서 어린 제자를 나 여기로 이끌어주신 것인 만큼 나에게 그녀를 잘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도 간혹 속인의 만화를 보기 좋아하는데 매번 보고 나면 얼굴이 검어지고 눈언저리도 검게 변했다. 한번은 한쪽 눈이 오랫동안 빨개지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마성이 아주 커지기에 나는 되도록 그녀가 이런 것을 접촉하지 못하게 하며 속인 만화를 보는 것의 해로움을 알려주고 법과 관련한 내용을 많이 보게 한다. 그녀가 법을 배우는 데 정진하면 사부님께서 그녀에게 선녀 꿈을 꾸도록 해 점화해주셨다. 그녀는 화를 내면 넘어지기도 했다.

아이가 태어나서부터 나는 매일 MP3로 사부님의 설법을 아이에게 틀어주고, 언제나 대법제자의 음악을 듣게 하며, 대법과 관련한 동영상을 보게 했다. 그녀는 출생한 지 5일째에 옆으로 몸을 뒤집을 수 있었고 1개월이 됐을 때 몸을 뒤집고 고개를 들 수 있었다. 1개월 남짓 됐을 때 어머니 집에서 밤 12시 40분경 아이가 혼자 깨어났고 나는 깊이 잠이 들었었다. 당시 꿈을 꿨는데 침대 모서리에 도복을 입은 한 분이 서 계셨고 (신체의 절반만 봤을 뿐 얼굴은 보지 못함) 나더러 일어나 아이를 보라고 해 순간 나는 깨어났다. 당시 나는 아이에겐 돌봐주시는 사부님이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2달이 됐을 때 ‘대법 홍전’ 동영상을 보는데 아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나는 법을 위해 온 아이라는 것을 더욱 굳게 믿게 됐다.

아이가 한 번은 1시 반경 계속 열이 나고 토하며 연속 이틀이나 좋아지지 않았다. 그때는 설 하루 전이었는데 할아버지, 할머니는 좀 걱정하시며 다시 열이 나고 내려가지 않으면 병원에 가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를 안고 사부님 법상 앞에 가서 아이와 함께 “도와주세요. 우리는 병원에 갈 수 없습니다.”라고 사부님께 청했다. 나는 아이를 안은 채 “사부님, 저를 도와주세요. 저는 너무 괴롭습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 후 아이를 안고 침실로 돌아오자 신기한 일이 발생했다. 10분도 안 돼 열이 내려가고 토하지도 않았으며 일체가 다 정상이 됐다. 당시 사부님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

아이가 3살 무렵에도 열이 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계속해서 사부님 설법 녹음을 듣게 하고 ‘파룬따파하오’를 외우게 하며, 션윈 CD를 보게 했다. 이튿날 아침에 보니 열이 그다지 심하지 않아 학교에 갔다. 그러나 오후 1시경 또 열이 좀 났다. 할머니는 안쓰러워하며 아이에게 술로 손을 비비고, 머리와 신체를 문지르게 했으나 열은 내리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심해졌다. 아이는 계속 울었고 입술이 붉게 변했다. 저녁에 돌아와서 나는 아이에게 사부님의 설법을 계속 듣게 하고 ‘따파하오’를 외우게 했다. 결과 밤에는 열이 내렸고 잠도 잘 잤으며 이튿날은 다 정상이었다.

이 같은 소업 현상이 일정 기간 간격으로 나타났는데 아이는 계속 사부님의 설법을 듣고 ‘따파 하오’를 외웠다. 어린이 속인 친구들은 1주일 이상을 입원해야 낫지만 아이는 보통 길어야 3일이면 완전히 좋아졌다. 때로 어린이 모두가 병이 나도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

아이가 4살 무렵에는 많은 어린이 친구들이 기침했는데 아이도 기침하다 그치기를 반년이나 계속했다. 아이가 비교적 활발해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는 뛰고 다녀서 그런 것이라고 여기고 아이를 달리거나 뛰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여전히 기침했다. 나도 좀 걱정하며 항상 아이가 언제 좋아질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구하는 심태 하에서 법을 배우니 아이에게도 호전이 없었다. 나중에 나는 이런 구하는 마음을 당연히 내려놓아야 하며, 신사신법하면 어떤 문제도 없을 것을 인식하게 됐다. 그날부터 시작해 나는 매일 아이와 함께 한 세트의 동공을 연마하고 법을 한 부분 배우자 부지불식간에 아이가 기침하지 않게 됐고 갑자기 좋아졌다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아이에 대한 정과 구하는 마음을 내려놓았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철저히 좋아졌다.

아이가 좀 자라자 나는 그녀가 어렸을 때 소업하던 일을 자주 말했고 속인 어린이 친구가 병이 난 것과의 차이를 말했다. 이렇게 하자 소업할 때면 그녀는 사부님께 청하려는 생각을 할 수 있게 됐고 설법을 들으려 하고 ‘파룬따파하오’를 외우려고 했다. 신기한 일들이 그녀에게서 한번 또 한번 나타났는데 그녀는 사존의 자비하신 보호를 절실하게 감수했다. 이렇게 그녀는 자란 후에도 법에서 이탈하지 않을 수 있었다. 며칠 전 그녀의 다리에 많은 붉은 반점이 생기자 나는 사부님께서 네 신체를 정화해주시는 것이라고 알려줬다. 우리 둘이서 3장 공법을 연마하자 이튿날 붉은 반점이 완전히 옅게 변했으며 3일째는 자국만 남았다. 그녀는 기뻐하며 말하길 “정말 빨리 좋아졌어요.”라고 했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자 붉은 반점이 또 전체로 퍼졌다. 그녀는 어제 나에게 “어머니, 나는 연공하는 데도 왜 또 붉은 반점이 생길까요?”하고 말했다. 바로 이틀 전 그녀는 ‘당신을 위해 왔습니다.’ 영화를 봤다. 영화 속의 밍후아(明華)는 위암에 걸려 무엇을 먹으면 위가 아팠지만 ‘전법륜(轉法輪)’ 2페이지를 본 후 많은 피를 토했다. 그런 다음 밍후아는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위도 아프지 않았다.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밍후아가 전법륜(轉法輪)’을 보고 나서 왜 피를 토했을까? 그녀는 생각하며 말하길 “신체를 정화하고 있기 때문이에요.”라고 했다. 나는 “맞다. 붉은 반점이 더 많이 나타날 때는 물극필반(사물이 극에 달하면 반대로 된다)이라 네가 좋아진다는 것을 설명하며 좋지 않은 것을 전부 쏟아 내는 것이다.”하고 말했다. 아이를 어리다고만 보지 말라. 온 층차가 낮은 것은 아니다. 이따금 일을 만나면 나는 법리상에서 그녀보다 오성이 못하며 그녀가 항상 나에게 수련인에 대한 요구에 따라 하라고 일깨워준다. 지금 그녀가 소업할 때면 스스로 법을 공부하고 연공하고 발정념을 할 줄 안다.

교류 문장을 쓰는 목적은 중생들이 대법 수련의 신기함을 볼 수 있게 하여 대법의 아름다움을 실증하려는 것이다. 동시에 병업 중의 수련생은 반드시 법을 많이 배우기 바란다. 당신은 사존께서 시시각각 우리 신변에 계시며 자비롭게 우리를 점화해주시고 계신다는 것을 감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만 정념으로 관을 넘을 수 있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시드니법회 설법’
[2] 리훙쯔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대폭로’

 

원문발표: 2019년 8월 30일
문장분류: 수련교류>정법수련 마당>수련체험>심성제고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8/30/39152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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