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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구세력을 부정함에 대한 얕은 깨달음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최근 한차례 발정념을 하는 과정에서 두려움과 구세력을 부정함에 대해 약간의 인식이 있게 되어 수련생과 교류하려 한다. 만약 편파적인 곳이 있으면 수련생이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담이 작은 것은 역시 이 우주 중의 그런 요소가 존재하기 때문에 당신으로 하여금 두렵게 하는바 그것을 바로 두려움이라 한다. 당신이 두려워할수록 그것은 더 작용한다. 당신이 의지로써 극복해야 하는바 이것은 당신의 의지 문제이다. 또 수련 중에서 돌파해내야 한다.”[1]

사부님의 설법에서 나는 깨달았다. 두려움은 무섭지 않다. 오직 우리가 조금만 의지가 강하면 그것을 극복하고 이길 수 있다. 그것을 일종 단순한 집착심으로 간주하고 오직 우리가 심혈을 기울여 그것을 분별하고 제거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주의식을 강화해 그것을 자신으로 간주하지 않고 그것에 따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쉽게 제거하고 해체할 수 있다.

하지만 평소 우리는 무엇 때문에 두려움을 제거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가? 왜 늘 제거하지 못하는가? 왜 두려움은 늘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가? 끊임없이 법공부하고 발정념하면서 나는 인식했다. 우리는 늘 두려움과 구세력의 박해를 함께 연결한다. 두렵기만 하면 박해를 생각하고 박해를 생각하기만 하면 두렵다. 마치 두려움과 박해는 떼어놓을 수 없는 일체와 같다.

나는 두려움을 수련하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힘을 들여서야 점차 담담히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쩌다가 갑자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어떻게 해도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으며 두려움에 이끌렸다. 따라서 매번 사부님을 확고히 믿고 대법을 확고히 믿어야만 비로소 좋아지고 두려움이 약간 담담해진다. 하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변화가 없었으며 문제가 생기면 여전히 두려워했다.

끊임없이 법공부하고 제고하는 과정에서 나는 마침내 자신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바로 자신에게 두려움이 있는 것을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다. 또 이 두려움을 매우 무서워하며 두려움을 매우 중하게 본다. 왜냐하면 두렵기만 하면 박해가 발생할 것이라 인식하고 두려울 때는 늘 자신도 모르게 박해를 생각하고 그것을 함께 연결한다. 이 때문에 이 두려움은 스스로 넘지 못하는 생사관이 되어 스스로 그것을 돌파하고 그것을 이길 방법이 없게 된 것이다.

한번은 발정념으로 두려움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나는 자신에게 물었다. 너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명리가 손실되는 것이 두려운가? 아닌 것 같다. 죽는 것이 두려운가? 이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물었다. 마침내 나는 아주 똑똑히 발견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구세력의 박해다. 사악의 그런 악의 기세, 악한 행위, 악한 수단을 두려워한다. 자신이 붙잡히는 것이 두렵고, 자신이 감옥에 갈까 봐 두려우며, 자신이 생체장기 적출당할까 봐 두렵고, 시달림을 당해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할까 봐 두려웠다. 자신이 박해를 참지 못해 사부님을 욕보이고 대법을 욕보이는 것이 두려웠다. 마음속에는 모두 박해로 가득 찼다. 박해를 생각할수록 점점 두려웠다.

이 때문에 수년간 정법을 수련해도 나는 자발적으로 자신을 구도중생의 위치에 놓지 못하고 자신도 모르게 늘 박해당하는 위치에 놓았다. 비록 입으로 늘 중생을 구해야 하며 조사정법(助師正法)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마음은 매우 피동적이고 여전히 두려움과 박해로 가득해 어떻게 하여도 정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릿속에는 늘 어떻게 하면 두렵지 않고 어떻게 해야 박해당하지 않고, 어떻게 해야 두려움과 박해에서 철저히 벗어날 수 있을지 생각했다. 이 때문에 세 가지 일을 잘하는 것은 박해당하지 않기 위해서였고, 또 이 두려움을 수련하기 위해서였다. 거의 박해당하지 않는 것이 가장 큰 수련 목표 같았다.

문제의 근본을 알고 난 후 나는 끊임없이 법공부를 강화하고 신사신법(信師信法)의 정념을 강화하고 법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강화했다. 나는 이런 두려움에 자신의 집착, 관념의 요소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동시에 구세력이 강요하고 확대하는 작용을 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구세력이 내 집착심 중에 있으며 내 관념 중에서 작용을 발휘해 나를 망치고 중생을 파멸하려는 목적에 도달하려는 것을 똑똑히 인식했다.

구세력이 우리를 박해하는 존재 방식을 알았다. 바로 우리가 수련을 잘하지 못한 빈틈을 타는 것이다. 즉 그것이 생존하는 곳이 바로 우리의 집착심이다. 그러나 나에게 이런저런 집착, 관념이 있어서 구세력의 박해를 허용하거나 혹은 그것의 박해는 마땅하며 합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당연히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수련은 대법 수련이며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련방식은 구세력의 일체와 어떠한 관계가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어떤 문제, 어떤 상황이 있어도 모두 구세력과 어떤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반드시 확고히 믿어야 하며 이 한 점을 확고히 해야 비로소 구세력이 배치한 일체 박해를 지나갈 수 있다.

사부님께서 정법하고 우주를 바로잡고 계시는데 바르지 못한 일체가 또 어디로 도망가겠는가? 오직 우리가 사부님의 요구에 따라 하고 진지하게 법에서 수련하면 그것이 구세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두려움은 우주 중의 일종 요소며 집착심 중 한 가지이다. 내가 정념이 강하고 의지를 견고히 하고 진정으로 그것을 똑똑히 분간하면 매우 쉽게 그것을 닦을 수 있다. 그것은 일반적인 집착심과 같으며 조금도 두렵지 않다. 오직 우리가 심혈을 기울이면 그것을 반드시 벗어날 수 있다. 우리가 늘 두려움을 구세력의 요소에 첨가하기에 두려움이 매우 ‘강대’해지며 자신이 그것을 이기기 어렵다고 인식한다. 사실 우리가 심혈을 기울이면 그것을 가볍게 닦을 수 있으며 두려울 것이 없다.

비록 구세력이 신이고 그것 역시 일정한 능력이 있지만, 정법은 그것들을 인정하지 않으며 그것들은 제거와 도태의 대상이다. 그것들이 한 일체에 대해 우리는 법에서 확고히 부정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무슨 두려울 것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자 그것들 둘 사이에는 또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다. 다만 내가 그들 사이를 연결해 복잡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우리의 난, 내 가장 큰 생사관으로 발전하게 했다.

법공부가 끊임없이 깊어짐에 따라 나는 또 두려움과 기타 집착심 및 구세력의 박해에 대해, 우리는 서양 의학이 병을 치료하는 것처럼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치료하고 발이 아프면 발을 치료하는 것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것 역시 우리가 심성 방면에서 정체 제고하면 점차 작아지고 약해지고 담담해진다. 따라서 우리는 평소 작은 일, 각 방면에서도 심성을 제고하고 승화해야 한다. 이렇게 집착을 버려야만 실질적인 변화가 생기며 근본적으로 구세력을 부정하는 것이며, 그것의 존재와 발생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최근 두려움과 구세력을 부정하는 데 대한 나의 약간의 인식이다. 만약 법에 있지 않은 곳이 있으면 수련생 여러분께서 자비로 시정해 공동 교류하고 공동 정진하자!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스위스 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8월 1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8/19/3916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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