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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업’을 말함

글/ 허베이 대법제자 찡신

[밍후이왕] 912기 ‘밍후이주간’에 몇 편 ‘병업’ 방면의 교류문장이 있는데 수련생의 인식이 아주 좋다고 생각한다. 나의 경험과 내가 본 주변 사례를 결합해 나의 개인 견해를 말해보려 한다. 만약 편파적이라면 수련생들이 지적해 주시기를 바란다.

병에 대한 개념을 제거하고 병이 생긴다는 두려운 마음을 제거

우리 집 본가에 한 여동생이 있는데 청각 언어 장애인이다. 어릴 때 그녀가 매번 우리 집에 올 때면 그녀가 만졌던 물건을 나는 만지기 싫어했고 그녀가 먹었던 것도 나는 먹기 싫어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나에게 장애를 옮겨줄까 봐 두려워했다. 어른이 된 후 한 번은 언니가 이 일을 언급해 나도 이런 마음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언니도 이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수련에 들어선 후 나는 이것이 관념인 것을 알았지만 이 관념을 두려워했다.

나는 전에 이 일로 매우 괴로워했고 어떻게 이 마음을 없애야 하는지 몰랐다. 얼굴에 주근깨가 난 사람을 보면 멀리 피하고 버스에서 백반증 피부병이 있는 사람이 있어도 멀리 피한다. 다른 사람이 나와 접촉할까 봐 두려워한다. 나는 이런 마음을 닦아 없애려 노력했지만, 어떻게 철저히 제거해야 할지 몰랐다. 끊임없이 법공부를 하는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마땅히 나의 관념을 바꾸고 병에 대한 개념을 제거해야 비로소 병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는 마음을 제거할 수 있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그가 이렇게 두려워하면 진정으로 번거로움을 가져올지도 모른다. 당신이 두려워하기만 하면 곧 공포심으로서 그것은 집착심이 아닌가? 당신의 집착심이 나오면 당신의 집착심을 제거해야 하지 않는가? 두려워할수록 더욱 병과 같이 되는데, 당신의 이 마음을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며, 당신에게 이번 교훈을 받아들이게 하여, 공포심을 버리고 제고해 올라오게 한다.”[1]

이 두려운 마음이 다시 나올 때 나는 자신에게 두려운 것이 자신이 아니고 관념이 두려워한다고 일깨워줬다. 대법을 수련하는 사람은 병이 없다. 몇 년 전 한 수련생과 외출할 때 작은 차 사고가 났다. 차 사고로 내 왼쪽 다리가 상처를 입었는데 마침 무릎 아래 뼈다. 당시 나는 마음이 파고들게 아팠고 많은 피를 흘렸다. 집에 돌아간 후 맑은 물로 씻은 후 어떤 약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상처는 얼마 후 아물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나은 것 같지만 늘 고름이 흘러나왔다.

사실 이 모든 것의 표상(表象)은 나의 두려움이 불러온 것이다. 감염될까 봐 두려워하고 안에서 농이 생길까 봐 두려워하고 안에서 썩을까 봐 두려워했다. 두려워하는 일념에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겉으로 보기에 아주 좋지만, 며칠 후 또 고름이 흘러나왔고 썩은 내가 났다. 한겨울에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다니고 상처를 드러내 놓고 감히 목욕도 하지 못하고 물도 대지 못하고 자신도 괴로웠다.

한번은 법공부 중에 나는 진정으로 그 상처를 상관하지 않고 상대하지 않고 보지도 않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깨달은 후 나는 걷어 올린 바지를 내리고 상처에 농이 생겼는지 보지 않고 해야 할 일만 했다. 그런 후 상처에 신경을 쓰지 않자 서서히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목욕도 하고 감염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후 상처는 신기하게 아물었다. 나중에 나는 두려운 마음은 변형적으로 구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연공인인 당신이 늘 그것을 병이라고 여긴다면 실제로 당신은 구한 것이다. 당신이 구하여 병을 얻었다면 그 병은 눌려 들어갈 수 있다. 한 연공인으로서 心性(씬씽)은 마땅히 높아야 한다. 당신은 늘 병이라고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병이라고 두려워하는 것도 집착심이며, 마찬가지로 당신에게 번거로움을 가져다줄 것이다. 수련 중에서 소업(消業)해야 하는데, 소업은 곧 고통이다. 어디 편안하고 편안하게 공이 자라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당신의 집착심을 어떻게 버리겠는가?”[1]

시련을 넘긴 후 나는 고름이 나는 것이 가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이것은 두려운 마음이 불러온 것이다. 고통은 생생세세 지은 업으로, 갚아야 하기에 좋은 일이다. 나에게 업력을 없애고 제고해 올라오게 한 것이다.

또 한 가지 일이 있다. 99년 여름, 나와 부모는 밥을 지었다. 죽 냄비를 들고 계단을 내려갈 때 조심하지 않아 발이 미끄러져 부글부글 끓고 있는 냄비 죽을 내 왼쪽에 다리에 쏟았다. 뜨거워 나는 ‘와’ 하고 울었다. 아버지 수련생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큰 업을 소업했는데 왜 울고 있니?” 당시 나는 울지 않았고 그리 아프지 않은 느낌이다. 차가운 물로 씻은 후 어떤 약도 바르지 않았다. 일주일 후 모두 나았다. 비록 과정에 많은 물집이 생겼지만, 그러나 어떤 흉터도 남지 않았다. 한여름에 뜨거운 죽 냄비에 다리를 데었는데 어떤 약물을 사용하지 않는 상황에서 처음처럼 아물었다. 수련 초기에 우리는 몸이 어떤 난에 부딪히던 모두 좋은 일로 보고 소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수련 후기에는 반대로 몸의 난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압력이 크다고 느끼는가?

말하면 신기하다. 내가 수련하기 시작한 후 거의 매번 왼쪽 다리에 소업이 비교적 심하다. 내 왼쪽 다리가 얼마나 많은 업을 지었는가? 나중에 꿈에서 나는 보았다. 그때 민국(民國) 초기 한 어수선한 전쟁터 그 시대에 나는 남자이고 윈난(雲南) 어느 정각에 있었다. 나는 정각 위층에 있었고 아래 몇 명은 나를 쫓으며 나를 때렸다. 나는 위층에 숨었다. 그들은 긴 죽대로 나를 때렸다. 그들은 나를 때려 나는 화가 나서 내려가 한 사람의 머리를 비틀고 내 왼쪽 무릎 아래에 끼고 거의 온몸의 힘으로 그 사람의 머리를 비틀어 죽였다. 깨어난 후 나는 내 왼쪽 다리를 왜 늘 다치게 되는지 알았다. 원래 그 세대에 왼쪽 다리로 사람을 죽인 업력이다. 그러나 대법을 수련한 후 사부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많은 업력을 갚게 하지 않으셨고, 사부님께서 우리를 위해 감당하셨고 단지 조금 남겨놓으셨으며 각 층차에 나누어 배치해 놓으셨으며 우리에게 조금의 난을 감당하게 하시고 심성을 제고해 올라오게 하셨다.

사부님께서 초기 법을 전하실 때 이런 이야기가 있다. 사부님께서 설법 강당에서 밖의 휴식 홀에 나가셨다. 모두 사존께서 휠체어를 타고 있는 환자에게 몸을 청리해 주시는 것을 보았다. 사부님께서 그를 향해 미소를 짓고 어디도 건드리지 않았다. 사부님께서 그를 향해 말씀하셨다. “나아졌어요. 당신은 일어날 수 있어요.” 그 사람은 당시 감히 일어나지 못했다. 사부님께서 재차 그를 격려해 주셨다. “괜찮아, 당신 일어나 보세요. 앞으로도 걸을 수도 있어요.” 그는 일어난 후 앞으로 몇 걸음 걸었다. 사부님께서 그에게 알려주셨다. “당신 앞으로 걸어요, 앞으로 좀 빨리 걸어요.” 그는 정말로 휠체어를 에워싸고 한 바퀴 걸었다(‘베이징 대법제자가 사존 설법 전수반에 참가한 경력을 회억’). 사부님께서 법을 전수하시는 초기, 대법이 나타난 신적은 헤아릴 수 없다. 그때 수련생은 모두 사부님과 잘 협력할 수 있었다. 물론 오늘까지 수련해 법이 우리에 대한 표준은 높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우리가 심성이 올라오면 사부님께서 무엇이나 우리를 도와 하게 하실 수 있다.

사부님께서 설법하셨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사부는 여전히 당초의 사부이며, 우주의 법은 영원히 변치 않을 것이다. (열렬한 박수) 단지 우리는 이번 박해 중에서, 이번의 이른바 고험 중에서 어떤 사람은 집착을 제거했고 어떤 사람은 집착을 제거하지 못했으며 어떤 사람은 오히려 집착을 증가시켰다. 이것이 바로 이번의 이른바 고험 중에서 표현해낸 상태이다. 당신들이 변하고 있는 것이고 대법제자가 변하고 있다. 바른 방면으로 변하지 않으면 그것은 바로 부면적인 방면으로 변하는데, 반드시 그렇다.”[2]

사부님의 법에 따라 자신을 바로잡고 병이 생긴다는 두려운 마음을 내려놓고 머릿속에 근본적으로 병의 개념이 없어야 하고 모든 시련, 모든 고통은 모두 좋은 일이고 병업 가상을 중요시하지 말고 고통 속에서 떠나려고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걸어지나 갈 수 있다.

정념이 있어야 하고 정신이 무너지면 안 된다

이런 한 수련생이 있었는데 수련생 남편은 불법적으로 감금됐다. 집에 단지 아이와 그녀 둘밖에 없었다. 몸에 심각한 병업 가상이 나타났다. 그녀는 당시 몹시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마음속으로 시종 일념을 지켰다. 나는 떠나지 않고 사부님을 따라가겠다. 내가 가면 세인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준다. 나는 떠나면 안 되고 대법에 부정적 영향을 주면 안 된다. 수련생은 당시 깨달았다. 나의 신체는 사부님께서 이미 조정해 주셨다. 나의 몸은 건강하다. 관념을 바꾸고 사상을 바로잡고 행동으로 해냈다. 그녀는 고통을 따라가지 않고 반대로 행동했다. 그녀는 위가 너무 아팠는데 죽을 먹어도 아팠다. 딱딱한 것은 더 먹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먹으면 괴롭지 않은가? 그러나 그녀는 튀김도 먹고 찬물도 마시고 괴로워도 먹었다. 며칠이 지난 후 그녀는 나아졌고 정상으로 회복됐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련생은 자신이 수련에서 누락을 찾았고 자신을 바로잡았다. 자신이 몹시 고통스럽고 괴로울 때 마음속으로 사부님께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수련생에게 말했다. “사부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도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사부님께 청해야 합니다.” 이것은 수련생이 시련을 걸어온 과정이다. 물론 말하기는 쉬워도 해내기는 어렵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질과 정신은 일성이다”[1] 자신의 사상을 바로잡고 행동으로 해내야 비로소 진정한 제고이다.

912기 ‘밍후이주간’에 “수동에서 자발적으로, 구세력의 ‘병업 ’박해를 종결짓다”란 문장에서 이런 한 단락 말이 있다. “나는 말했다. ‘몸이 좋지 않은 것은 좋은 일이고 심성 제고의 기회이다. 이왕 좋은 일인데 두려울 것 뭐 있냐?’ 수련생은 말했다. ‘저는 두렵지 않아요.’ 나는 말했다. ‘두렵지 않으면 당신은 얼굴에 미소를 지어야 하고 태연하게 대면해야 해요.’ 수련생은 말했다. ‘저 지금 이런 모양인데 어찌 웃을 수 있는가요?’” 사실 이것은 모두 두려운 마음에서 온 것이다. 관념을 바꾸지 못해 이런 것이다.

수련생이 위의 대화를 보고 어떤 생각인지? 개인적으로 수련생이 미소로 대하고 불편한 것을 좋은 일로 보면 피동적인 것이 주동적으로 변한 것이다. 물론 관념을 바꾸는 과정에 병업에서 수련생은 겉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법에서 깨닫는 것이고 해내야만 진정으로 바꾼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당신은 단지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고 실제 마음속으로는 결코 믿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진정으로 믿는다면 당신의 언행은 반드시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3] 수련자가 언행이 일치하면 신사신법을 해낸 것이며 시련은 자연히 물러선다. 정말로 피동적에서 주동적으로 된다면 ‘병업’ 가상은 존재할 수 없다.

한 애니메이션에서 이런 장면이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 샤오메이(小梅)와 언니 샤오웨(小月), 아버지는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던 빈집에 이사 갔다. 방안에 많은 벌레가 있었다. 샤오메이와 언니가 두려워할 때 벌레는 그들 자매를 놀렸다. 그들이 두려움이 없고 유쾌하게 웃고 벌레를 비웃을 때 벌레는 소리 없이 도망갔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진정으로 병을 얻는 것은 정신이 7할이고 병이 3할이다. 흔히 사람의 정신이 먼저 무너져서, 먼저 안 되고, 부담이 아주 중하여 병세를 급격히 변화하게 하는데, 흔히 모두 이러하다.”[1] 언제든지 정신은 무너지면 안 되고 사부님과 법에 대한 바른 믿음과 정념을 버리면 안 되고 신사신법을 해내야 비로소 정념으로 시련을 넘길 수 있다.

맺음말

수련생을 돕는 과정도 우리 자신을 내려놓고 제고하는 과정이다. 병업 중에 있는 수련생은 이미 고통스럽다, 우리는 수련생에게 격려를 더 해주고 사부님의 법으로 수련생 마음의 매듭을 풀어줘야 하고 수련생이 법에서 바로잡게 해야 한다. 수련생에게 함부로 정의를 내리지 말아야 하며 수련생의 몸이 이런 모양으로 변했는데 보기에 넘기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런 마음이 있으면 안 되고 이런 부정적 사유는 바른 작용을 하지 못한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다. “제자가 정념이 족하면 사부는 회천력(回天力)이 있노라.”[4] 수련생이 정념이 나오면 사부님께서 제자를 위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

바르지 않은 점은 수련생들이 자비로 바로잡아 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전법륜’
[2] 리훙쯔 사부님의 경문: ‘2014년 샌프란시스코법회 설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 ‘유럽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시사: ‘홍음-사도은’

 

원문발표: 2019년 8월 8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8/8/39114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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