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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難)에 처한 수련생에게 처방만 내줘서는 안 된다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현재 병업(病業)에 처한 우리 지역 일부분 수련생 가운데 정념을 확고히 하고 생사고비를 넘은 사람도 있지만 적지 않는 수련생은 현재 상태가 낙관적이지 않습니다. 고비를 넘는 것이 유난히 어려워 어떤 사람은 어쩔 수 없다며 완전히 속인에 부합되거나 어떤 사람은 질질 끌다가 결국 육신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원인을 찾아보았고 제가 보고 알고 있는 것을 결합해 얕은 인식을 얘기하고자 합니다.

난에 처한 수련생들은 고비에 부딪히면 몹시 어렵다고 생각하며 처음에는 흔쾌히 수련생들과 교류하려 합니다. 다른 수련생들도 거의 모두 열정적으로 수련생의 각도에 서서 대책을 내놓습니다. 수련생 A는 찾아와 수련생에게 안으로 찾고 법 공부를 많이 하며 연공을 많이 하고 세 가지 일을 잘하라고 알려주었습니다. 또한, 자발적으로 수련생을 도와 안으로 찾아주었는데 예를 들면 이 일에서 수련생이 어떻게 명리에 대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고, 저 일에서 수련생이 아직도 자식 정에 집착한다는 등등입니다. 수련생 B는 밍후이왕에서 병업 가상을 넘은 문장을 다운받아 와 수련생에게 참고할 게 있는지 많이 들으라고 했습니다. 수련생 C는 찾아와 단번에 이러면 안 된다고 하며 수련생이 아무리 높게 깨달아도 수련생일 뿐 사부님의 법보다 더 높지 않기에 심성이 제고되면 고비를 넘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수련생 D는 와서 자신도 얼마 전에 생사 고비를 넘었고 이건 모두 구세력이 말썽을 부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사악에 좌우지 당하면 안 되고, 생사를 내려놓고 사부님의 배치를 따르면 고비를 넘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수련생 E는 아는 수련생이 많은데 외지에서 일부러 모 협조수련생을 청해 교류했고, 수련생 F, G 등도 왔습니다. 함께 법 공부하고 발정념을 하고 서로 교류하면서 하나의 정체를 형성한 것 같았습니다.

차츰 난 속의 수련생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지만, 열정이 가득 찬 수련생들은 주마등처럼 들락날락했습니다. 차츰 시일이 길어지자 수련생은 귀찮아하고 피곤해하면서 다시 수련생들이 찾아오면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도와주러 온 수련생들은 크게 의아해하면서 난에 처한 수련생을 더는 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기에 난에 처한 어떤 수련생은 수련생들의 수련에 영향을 주지 않으려고 아예 자신의 상태를 남에게 알리지 않고 혼자 집에서 고비를 넘고 있었습니다.

난에 처한 수련생도 수련하고 싶지만, 관념의 영향을 받아 사부님과 법에 대한 바른 믿음이 흔들렸을 뿐입니다. 수련생들이 한 말도 모두 법에 부합되지만,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부동(不同)한 층차(層次)에는 부동한 층차의 법이 있다”[1] 자신이 현재 층차에서 깨달은 이치로 난에 처한 수련생의 생각을 대체할 수 없으며, 오직 수련생이 깨닫고 행해야만 제고할 수 있습니다.

“사부님께서는 엄중한 병업 고비에 처한 수련생을 어떻게 도와줘야 합니까”라는 수련생의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법제자를 도와 마난 속에서 걸어 나오게 하는, 이것은 우리의 책임이고 마땅히 해야 하는 것으로, 잘못이 없다. 그러나 만약 이 사람 자신에게 변화가 발생하지 않고, 완전히 외적인 것에 의지한다면 절대로 안 된다. 그 자신이 당신들의 도움 하에서 갈수록 정념이 생기고, 거기에 당신들 외력의 작용이 더해지면 갈수록 더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그것은 이러한 관계이다.”[2] 수련생들은 대부분 집에 찾아가 설교하는 방식으로 도와주고 있는데 이러면 진정으로 수련생의 매듭을 알기 힘들고, 난에 처한 수련생의 사부님과 법에 대한 정념을 일깨워주기 힘들어 옷 입고 가려운 데 긁는 상황밖에 안 됩니다.

어떤 수련생은 수구(修口)하지 않아 난에 처한 수련생의 좋지 않은 표현을 다 말하고 다닙니다. 이러면 자기도 모르게 현지의 단체 수련에 부정적인 영향을 더 크게 하고 나쁜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집에 찾아온 수련생들은 난에 처한 수련생에게 ‘약 처방만 내주는데’ 다른 각도에서 볼 때 자신을 관계없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말속에 난에 처한 수련생이 여차여차해야만 고비를 넘을 수 있다는 뜻이 숨어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집에 찾아간 우리 역시 모두 수련하는 사람으로서 그에 대한 박해는 우리 정체(整體)에 대한 박해라는 걸 홀시했고, 수련생의 문제에서 자신이 무엇을 수련해야 하는지 잊지 않았습니까? 수련생에게 누락이 있고 집착이 있지만, 우리에게는 아무런 집착과 누락도 없습니까? 묵묵히 자신에게 물어보았습니까? 수련생의 상태를 보고 자신을 닦았습니까?

사부님께서는 법에서 명확히 말씀하셨습니다. “수련자는 영원히 자신을 닦는 것으로, 사람 마음의 자그마한 변화가 곧 제고이며, 뭇 신들이 다 볼 수 있다.”[3] 그럼 왜 난 속의 수련생을 보았을 때 수련생만 수련시키고 자신을 닦는 걸 잊어버렸습니까?

도와주러 집에 찾아간 수련생들은 난에 처한 수련생의 마음과 신체의 고통을 많이 헤아려주지 않았습니다. 아니면 왜 난에 처한 수련생이 우리에게 “서서 이야기하면서 허리 아픈 줄 모른다.”라고 하겠습니까? 사부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완전히 다른 사람을 위해, 티끌만큼도 자신의 목적과 인식이 없다면, 한 말은 상대방에게 눈물을 흘리게 할 수 있다.”[4] 우리가 전심으로 수련생을 도와주러 갔는데 왜 수련생이 배척할까요? 여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나요? 자비는 마땅히 우리의 평소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수련생에게 난이 있으면 다른 수련생들이 자신을 내려놓고 찾아가 도와주는 것은 정체의 일종 표현형식입니다. 제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대법제자는 일체이고, 모두 대법의 한 개 입자이기에 다들 안으로 찾고 정체 제고하고 승화한다면 이것 역시 정체의 형식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이렇게 한다면 현지의 수련환경이 개변된 주요 원인이 될 것입니다.

바삐 집에 찾아간 사람 중에는 제 모습도 있었고 이 문장에서 수련생을 나무랄 뜻은 전혀 없습니다. 단지 교류하려고 할 뿐이고, 일부 수련생이 매우 바쁜 상황에서 일체를 내려놓고 수련생을 돕는 것을 보면 참으로 존경스럽습니다. 사부님께서는 ‘2019년 뉴욕법회 설법’에서 난 속의 수련생을 돕는 “이것은 우리의 책임”[3]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집에 찾아간 수련생들이 다른 사람만 수련시키지 말고 모두 수련생을 통해 안으로 자신의 집착을 찾아내고, 그다음 자신이 안으로 찾은 수련심득을 난 속의 수련생과 교류해 공동 제고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불광이 널리 비치니, 예의가 원만하고도 밝도다(佛光普照, 禮義圓明).”[1] 우리 모든 수련생이 시시각각 일마다 안으로 찾고 이성적으로 승화하며 정체 제고하기를 바랍니다. 끝없는 자비의 빛이 사악의 어둠을 걷어내고 중생을 널리 비추며 천하를 빛내주길 바랍니다.

주:
[1] 리훙즈(李洪志) 사부님 저작: ‘전법륜’
[2] 리훙즈 사부님 경문: ‘2019년 뉴욕법회 설법’
[3] 리훙즈 사부님 경문: ‘유럽법회에 보내는 축사’
[4] 리훙즈 사부님 저작: ‘정진요지 – 청성(淸醒)’

 

원문발표: 2019년 8월 5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8/5/391038.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