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중국 청년 대법제자 윈멍
[밍후이왕] 한번은 내가 진상 자료를 배포할 때 장시간 잠복한 사복 경찰에게 납치되었다. 이전과 달리 이것은 주요하게 색마에 대한 시련이었다. 그의 차에서 그는 나를 위협했다. 그는 머리가 많이 아프다면서 나에게 머리를 눌러달라고 했다. 그리고 나를 내보낼 것인지 아니면 공안국으로 보낼 건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묵묵히 말했다. ‘일체는 나의 사부님께서 결정하신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구속이나 옥살이는 수련인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니, 해서는 안 된다.’라고 마음을 정했다.
어쩌면 내가 시련에 고비를 넘긴 것일지도 모른다. 이 일은 놀라거나 위험이 없는 편이었다. 집에 돌아온 후 나는 도대체 무엇을 잘 하지 못했는지 되돌아보았다. 색심을 깨끗하게 제거하지 못해 틈을 타게 한 것이 한 방면이고 더 꼼꼼히 생각해 보면 사람을 구할 때 고르는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사부님께서 “사람을 구도한다는 것은 바로 사람을 구도하는 것이라 고르는 것은 자비가 아니다.”[1]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사부님의 이 한 단락 법에 대해 더 깊이 인식하고 자신의 부족함을 보게 되었다.
첫째, 구도 대상을 선택하여 골랐다. 연령층에서는 노인을, 성별에서는 여성을, 직업상에서는 낮은 직업 층에 치중했다. 그리고 건강상태에서는 건강한 사람에게 치중하고 용모에서는 관상에 상냥하고 화기애애한 사람에게 치중했다. 만약 이렇게 되면 진상을 기다리는 청년, 중년, 직위가 높은 사람, 중병을 앓는 사람(입원하지 않은 사람), 관상이 악한 사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을 구하는 대상을 고르는 이유는 사람을 구하는 수량과 두려움 때문이었다. 노인들의 다수는 은퇴한 것을 고려하면 여가가 많고 많은 기능이 퇴보하여 상대적으로 쉽고 안전하다. 청년이나 중년은 혈기왕성하고 지능을 갖춰 비디오나 사진 촬영이 더 보편적이어서 탈퇴를 권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고 안전하지 않다. 사실 이것은 다 자신에게 스스로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많은 이기심인가! 사부님께서는 “무사무아(無私無我), 선타후아(先他後我)의 정각(正覺)으로 수련 성취해야 한다.”[2]고 하셨다. 나는 이 요구와 얼마나 많이 차이가 나는가!
둘째, 인원을 고른다. 나는 보통 한두 명이면 진상을 말할 수 있지만 두 명이 넘으면 감히 진상을 말하지 못한다. 이것은 자신의 수련 경지와 관련 있다고 본다. 그러나 줄곧 돌파하지 못하고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 만약 자비로운 마음을 갖고 개인적인 생각을 하지 않고 시험 삼아 한 번 돌파해 보려고 한다면 가능하게 예상치 못한 수확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한번은 내가 정류소에서 친구를 마중 나오는 사람(아래에서 그녀를 A라고 부르겠다)에게 진상을 말해주었는데, A는 탈퇴하지 않고 진상 자료도 받지 않았다. 차가 도착하자, A의 친구와 다른 한 사람도 차에서 함께 내렸다. 나는 사람이 여러 명인 것을 보고 떠나려고 생각했는데 조금 있다가 한 사람이 다른 방향으로 가버렸다. 그래서 A와 그녀의 친구만 남게 되었다. 나는 A의 친구에게 진상 자료 한 부를 주었다. 그런데 A는 “이것은 파룬궁(法輪功)이야.”라고 말했다. 그녀의 친구가 말했다 “이것은 좋은 거야. 네가 받기 싫으면 내가 받을 거야.” A도 말했다. 나에게도 한 부 주세요, 나는 A의 친구에게 삼퇴를 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삼퇴를 했다고 답했다. 그리고 A에게 파룬궁은 모든 사람에게 관련되는 대사이고 사람들이 짐승의 표시를 지워야만 비로소 평안하다고 말하자 A는 듣자마자 유쾌한 심정으로 통쾌하게 삼퇴를 했다.
생각해 보면 아까 내린 다른 사람도 그녀들의 친구인데 진상을 듣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도 진상을 들었다면 그도 쉽게 삼퇴를 했을 것이다. 진상을 아는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돕고 있잖은가! 여기까지 쓰고 나서 사부님의 설법이 생각났다. “내가 친구에게 좋다고 말하는데 내가 친구를 속이지는 않을 것이고 내가 나의 가족에게 좋다고 말하는데 내가 가족을 속이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는 아주 믿을 만한 것이며 광고는 이런 효과가 없다.”[3] 내가 만난 인연이 있는 사람과 그것이 처한 환경을 소중히 여긴다면 또 어쩌면 또 다른 광경일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말하면 고르는 것은 온갖 집착에 가려진 자기 보호막이고 중생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나를 위하여 사적으로 행하는 표현이다. 사와 나를 없애야만 비로소 타인을 위하는 마음이 있고 진정한 자비를 표현할 수 있다. 매일 수십 명의 사람을 안정되게 구하는 대법제자는 마땅히 고르는 사심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정말 수련에서 제고하고 사람을 구하는 이것을 돌파하고 싶다면 고르는 사심부터 없애야 한다. 물론 말을 되돌려 보면 매사에 안전과 척도를 잘 파악해야 하고 심성이 제 위치에 도달하지 않으면 억지로 할 수는 없다.
개인의 견해이니, 부족한 점이 있으면 자비로운 지적 바랍니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각지 설법9-2009년 대뉴욕국제법회설법’
[2]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 ‘정진요지-불성무루’
[3]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경문 : ‘2019년 뉴욕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7월 1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7/1/38941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