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청두 대법제자
[밍후이왕] 내 주변에 몸에정상이 아닌 현상이나타난 노수련생들이 있다. 어떤 수련생은 몇 달 심지어 몇 년째 질질 끌고 있다. 이 수련생들은 세 가지 일을 끊임없이 하고 있지만 아주 고생스럽고 힘들게 수련하고 있다. 어떤 수련생은 수련하다가 길을 잃고 마치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 같고 어떻게 수련해야 할 줄 모르는 것 같다.
어떤 수련생은 법공부도 연공도 중시하고 무거운 몸을 끌고 나가 진상을 알리며 세 가지 일도 빠뜨리지 않는다.
어떤 수련생은 안으로 찾고 집착심도 한가득 찾아냈지만, 마지막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어떤 사람은 밍후이 문장 보는 것을 강화했고 아주 생생한 문장도 봤지만, 자신의 몸에서는 효과가 없었다.
어떤 수련생은 수련생에게 도와서 발정념 해달라고 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했다. 온갖 방법을 다 써봤어도 어찌할 방법이 없고 어떻게 수련해야 하는지 모르게 된 것처럼 그러하다.
어떤 수련생은 몸 상태가어떻든줄곧 신사신법하고 세 가지 일을 견지하고 있다. 이것은 비교적 좋은 것이다. 세 가지 일의 가장 기초적인 것은 법공부이고 법에 동화하는 것이다.
사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체ㆍ우주ㆍ생명ㆍ만사만물은 우주 대법이 개창(開創)한 것인바, 생명이 그에 어긋나면 곧 진정한 패괴(敗壞)이고, 세인이 그에 부합할 수 있으면 진정 좋은 사람이며 동시에 선보(善報)와 수복[福壽]이 따를 것이다. 수련인으로서 그에 동화하면 당신은 바로 득도자(得道者) — 신(神)이다.”[1]
진정으로 법에 동화하는 것을 해낸다면 어떻게 몸에 바르지 않은 상태가 있을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어떻게 법에 동화해야 하는지 모른다. 동화(同化), 문자 표면의 뜻으로는 비슷하지 않거나 서로 다른 사물이 점차 비슷해지거나 같아지는 것을 말한다. 수련인으로서 우리는 법을 마음에 닿게 배워야 하고 법으로 자신을 지도해야 하고 자신을 개변해야 한다. 법공부하면서 고집을 부리고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법에 동화하기 싫어하면 사실 진정으로 신사신법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대법을 이론으로 배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속인 이론을 배우는 것과 같지 않은가? 어떤 수련생도 법공부를 강화하지만, 머릿속으로 여전히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어 목적을 가지고 배우고 있다. 마치 구하기 위해 배우는 것과 같다.
사부님께서는 1995년에 일찍이 말씀하셨다.“대법(大法)을 배움에 주의해야 할 가장 두드러진 한 가지 문제는 바로 대법(大法)을 일반 속인 중에서 이론 저서를 학습하는 방법으로 배우는 것이다. 마치 알맞은 명인어록(名人語錄)을 선택해서 자신의 행동을 비춰보며 배우는 것과 같은데, 이는 수련자의 제고에 방해된다.”[2]
어떤 수련생은 밍후이왕의 교류문장이 아주 좋다고 한다. 어떤 수련생이 몸에 어떤 상황이 생겨 선해(善解)에 관한 법을 외우는 것을 보면 자신도 외운다. 어떤 수련생이 사부님 설법의 한 단락 법으로 구세력을 부정한 것을 보면 자기도 외운다.“우리는 구세력 자체의 출현과 그것들의 배치한 일체마저 모두 부정하는 것으로, 그것들의 존재마저 승인하지 않는다.”[3] 자기도 외우고 다른 수련생이 고비를 넘긴 방법을 배운다. 사실 사부님께서는 아주 많은 곳에서 구세력을 부정하는 법을 말씀하셨다. 이 한 단락만이 아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왜 내게는 효과가 없지? 속으로 의아했다. 첫 번째는 수련에는 편승이란 없다. 글을 쓴 수련생은 그 한 단락 법을 외웠고 그 법을 얻었고 법에 동화했다. 즉 자신을 개변하고 법에 동화했지만 스스로는 이 점에 대해 주의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자신에게 물었다. 법을 외우고 자신을 법에 동화했는가, 자신을 개변했는가, 법공부만 하고 자신을 개변하려고 했는가? 혹시 다소 개변했을지도 모른다. 사부님께서는‘시간과의 대화(和時間的對話)’경문에서 말씀하셨다.“그들은 늘 사람과 비교하며, 늘 그들 자신의 과거와 비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법의 각 층차의 요구로 자신을 가늠하지 못합니다.”[4]
한 조각가가 불상을 조각하려고 한다. 그는 두 개 석재를 선택했다. 선택받은 석재는 아주 기뻤다. 그것들은 자신이 장엄하고 신성한 불상으로 조각되고 보통 노반용 석재와는 그야말로 하나는 하늘이고 하나는 땅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석재는 조각가가 조각을 시작했을 때는 흥분된 상태라 몸이 칼에 깎이고 수정하는 아픔에 대해서도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되자 그중 하나가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조각가가 또 곰곰이 연구하기 때문이다. 불상을 조각하는 것이므로 요구수준이 높고 조금이라도 흐리멍덩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자기가 자기 변화를 볼 수 없으니 마음이 좀 변해서 조각되는 것이 싫고 스스로 너무 괴롭다고 생각하지만, 또 노반이 되는 것은 싫었다. 조각가가 끊임없이 조각하고 있으면 석재는 이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법공부를 통해 구세력, 구우주의 생명은 자기를 개변하지 않으려 하고, 우리도 구우주의 생명인데, 사부님께서 우리를 신우주의 생명으로 구도해주시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을 개변해 법에 동화하며 주동적으로 법에 동화하고 신우주의 요구에 순응하고 신우주의 특성‘진선인(眞善忍)’에 동화하는 수밖에 없다.
문득 깨달은 바인데 개인의 얕은 견해이다. 법에 부합되지 않은 곳은 부디 수련생의 자비로 지적해 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의 저작:‘정진요지-논어’
[2]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정진요지-법을 배우다(學法)’
[3]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각 지역 설법 4-2004년 시카고법회 설법’
[4] 리훙쯔 사부님의 저작:‘정진요지-시간과의 대화(和時間的對話)’
원문발표: 2019년 6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6/29/38932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