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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제자의 믿음

글/ 중국 대법제자

[밍후이왕] 법 공부할 때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법리처럼여러분은글자 표면 뜻을 명백히 안다고 느끼지만, 실제 일에 부딪히면 표현은 같지 않다. 일부 수련생들은 법에 따라서 행할 수 있고 일부 수련생은 법에 따라 행하지 않는데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바로 믿거나 믿지 않음에 있다. 법에 대해 믿으면 법에 따라 행할 수 있고 법을 믿지 않으면 법에 따라 행할 수 없다.

사존께서 말씀하셨다. “무엇이 진정한 믿음인가? 당신은 단지 입으로만 믿는다고 말하고 실제 마음속으로는 결코 믿지 않는다. 무엇 때문인가? 왜냐하면, 진정으로 믿는다면 당신의 언행은 반드시 일치해야 하기 때문이다.”[1]

법 공부할 때 당신이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이 한마디 법을 믿었다면, 실제 일에 부딪혔을 때 당신은 이 한마디 법에 따라 행하고 당신은 일을 잘할 수 있다. 이 한마디는 당신의 실제 수련에 지도 작용을 일으켰고 이때 당신은 비로소 진정으로 이 한마디 법을 얻을 수 있다. 만약 당신이 단지 이 한마디 법의 내용을 알 뿐 실제로 관련된 일에 부딪혔을 때 당신이 이 한마디 법에 따라 행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이 한마디 법을 진정으로 믿지 않은 것이다. 비록 당신이 이 한마디 법의 내용을 알지만, 알지 못하는 것과도 같으며 당신에 대해 지도적 작용을 일으키지 못하고 당신은 이 한마디 법을 얻지 못한 것과 같다.

당신이 대법에 대해 얼마나 믿는지에 따라 이런 법이 당신의 수련 제고에 지도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데, 당신이 얼마나 얻었는가와 동등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전반 대법에 대해 단호하고 의심이 없다면, 당신은 대법 전체를 얻을 수 있고 당신은 어떤 일에 부딪혀도 잘할 수 있으며 당신은 신과 같아 원만해야 한다. 대법제자는 수련 중에서 가끔 왜 잘하지 못하는가? 바로 ‘믿음’에 차이가 있는데 신사신법(信師信法)을 해낼 수 없고, 법의 요구에 따라 행할 수 없으며, 사람 마음을 가지고 행하여 일을 잘할 수 없었다.

한 수련하는 사람이 일할 때 두 가지 선택이 있다. 한 가지 선택은 법(法)에 따라 행하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 선택은 속인 관념(觀念)에 따라 행하는 것이다.

여러분들은 수련 이전에 모두 속인이었고 일에 부딪혔을 때 긍정코 속인 관념에 따라 행했는데, 관념이 어떻게 잘하여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여기면 어떻게 행한다. 관념은 인간 세상에서 생긴 것이고 기점은 사적인 것을 위한 것으로, 개인 이익을 얻는 것이 바로 좋은 일이라고 여기고 개인 이익을 잃으면 바로 나쁜 일이라고 여기는데, 개인 이익은 바로 명리정(名利情)이다. 인간 세상은 바로 미혹의 공간이기 때문에 관념은 생명에 대한 인지가 협소한 것이고, 사람의 생명은 부모에게서 내원한 것으로 사람이 죽으면 소실한다고 여겨, 살아있는 이 몇십 년 동안 마땅히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고 여기고 향수를 누릴 수 있을 때 누리고 죽으면 누릴 기회가 없다고 여긴다.

여러분은 법 공부한 후 모두 알고 있다. 인생일세는 단지 생명의 긴 여정에서의 작은 한 단락이고 사람의 신체는 부모에게서 내원 되었지만, 생명은 부모에게서 내원 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을 때 각종 양식으로 성장한 육신이 죽고 생명은 죽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관념의 지도로 일생을 바삐 사는데, 올 때 빈손으로 오고 갈 때는 오로지 업이 몸을 따른다.

우리 일부 수련생들은 한 손으로 사람의 좋은 점을 잡고 놓지 않고, 다른 한 손으로 신의 좋은 점을 잡고 놓지 않는데 인간 세상의 일시적 향수를 나도 얻고 싶고 장래 천상에서의 영원한 행복과 아름다움도 얻고 싶다는데 실질적으로는 실현되기 어렵다. 왜냐하면 양자를 모두 얻을 수는 없는 것으로 반드시 선택해야 하고 사람의 것을 내려놓아야 비로소 신의 것을 얻을 수 있고 사람의 것을 내려놓지 못하면 신의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영화 ‘지저스 크라이스트(Jesus Christ)’에 한 장면이 있는데, 한번은 예수가 제자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는데 많은 제자가 배 한 척에 탄 다음 예수는 잠이 들었다. 제자가 노를 저을 때 아주 큰 파도가 왔고 배가 곧 뒤집힐 듯했다. 그 제자들은 예수가 빨리 깨어나기를 기다렸지만, 예수는 깨어나지 않았다. 나중에 그들은 너무나 무서워서 예수를 깨웠고 예수는 깨어난 후 뱃머리로 가서 그 바람과 바다를 질책했다. 그 바람이 조용해지자 파도도 곧바로 평온해졌다. 이때 제자들은 아주 흥분했고 예수는 몸을 돌려 아주 엄숙한 표정으로 제자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의 믿음은 어디로 갔는가?”

사실 예수의 제자들은 모두 파도를 물리칠 능력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이런 믿음이 없었다. 그리하여 파도가 물러가도록 꾸짖지 못하고 반대로 두려운 마음이 생겼는데, 배가 뒤집혀서 바다에 빠질까 봐 두려웠고, 생명을 잃을까 봐 두려워서 예수를 깨웠다. 오늘날 정법 수련에서 대법제자들도 똑같이 신심 문제가 존재한다.

과거 옛사람들은 모두 인과응보를 믿었고 ‘머리 석 자 위에 신령이 있다.’를 믿었다. 비록 보지 못해도 신이 있고 부처님이 있고 보살이 있고 지옥이 있고 귀신이 있는 것을 믿었고, 다른 공간의 존재가 있다고 믿었다. 중공 사당이 정권을 빼앗은 후 각종 역대 운동으로 전통문화를 파괴했고 유물론, 진화론, 무신론을 펼쳤는데, 그들의 이유는 바로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였다. 사람 눈에 보여야 비로소 존재를 인정하고 사람 눈에 보이지 않으면 승인하지 않는다 이다. 중국 대법제자를 놓고 말하면 이러한 사회 환경 속에서 생존하면서 역시 ‘눈에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란 현대 관념이 형성되었다.

대법제자가 대법 수련에 걸어 들어온 후 적지 않은 사람들은 천목이 열렸고 대다수는 천목이 열리지 않았는데, 단지 사부님께서 대법제자는 신통이 광대하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고 자신은 직접 보지 못했다. 거기에 ‘눈으로 본 것이 사실이다.’란 관념의 영향으로 일부 대법제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에 대해 신심이 부족하게 했다. 박해가 발생했을 때 방대한 정권의 중공 사당을 마주하고 쉽게 두려운 마음이 생기고 실질상 이때 자신을 박해당하는 보통 속인으로 여긴 것과 같다. 이때 사당의 사람은 제멋대로 대법제자를 박해할 수 있다.

한 수련하는 사람을 놓고 말하면, 표면은 사람이지만 미시적인 곳은 신인데 사람과 일 앞에서 당신은 도대체 사람인가 신인가? 당신 자신의 일념에 의해 결정된다. 만약 당신이 신사신법하여 잘 수련된 일면이 자신을 주도하면 정념정행할 것이고 신의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만약 당신이 신사신법하지 못하면, 자신을 사람으로 여기고 자신을 일개 속인으로 여기고 대할 것인데, 그럼 당신은 신통이 있어도 신통이 없는 것과 같은데 당신이 표현하는 것이 바로 속인이기 때문이다.

한 속인이 어찌 구세력이 조종하는 중공사당의 박해를 마주할 수 있겠는가? 전혀 불가능하다. 중국 대법제자로서 말하면 이 몇 해 동안 잔혹한 박해로 손해를 보게 된 것은 바로 신사신법 하지 못하고 악인을 마주해 자신에 대한 신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의봉을 안고 매를 맞았으니 얼마나 억울한가! 수련생들이여, 인간 세상에서 법을 실증할 기회가 많지 않다. 피의 교훈은 우리를 마땅히 각성하게 하여 새롭게 법에 서서 자신을 대해야 한다. 눈앞에 부딪힌 일이 얼마나 복잡하고 간고하든지, 구세력이 배치한 마난이라도 대법제자로서 마찬가지로 법을 실증하고 위덕을 수립하는 기초로 만들자. 정법 수련의 후기에 곧 사라질 정법 수련의 기연을 소중히 여겨 신심 가득 정정당당하게 신이 되어 대법제자의 신성함과 휘황함을 충분히 펼쳐 보이자!

이상은 개인의 현 단계 수련에서의 얕은 깨달음이고, 적절치 못한 곳은 자비롭게 바로잡아주시기 바란다.

주:
[1] 리훙쯔(李洪志) 사부님 저작: ‘유럽법회 설법’

 

원문발표: 2019년 6월 29일
문장분류: 수련교류
원문위치: http://www.minghui.org/mh/articles/2019/6/29/38932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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